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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팬 ㅣ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리커버북 시리즈 6
제임스 매튜 배리 지음, 정지현 옮김, 김민지 그림 / 인디고(글담) / 2018년 8월
평점 :
희미한 기억을 되짚어 보면 자그마한 키에 동글동글한 눈과 얼굴, 초록색 나뭇잎 옷을 입고 통통 튀어다니는 한 소년의 모습이 떠오른다. 창문을 타고 들어와 새침한 숙녀처럼 구는 귀여운 소녀에게 손을 내밀고, 맞닿은 온기를 꼭 쥐고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아 환상의 세계 네버랜드로 떠나는 뒷모습까지, 점차 또렷해지는 기억 속에 정체 모를 그리움이 가슴을 울렁이게 만든다. 찰나의 꿈이었는지 아니면 흘러가는 시간 속에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던 기억인지 모를 소년과의 추억.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난 <피터 팬>은 기억 속 그 모습 그대로였지만, 어딘가 낯설고 섬뜩한 느낌이었다.
기억 속의 소년은 늘 당당하고 늠름하면서, 장난끼 넘치고 재치있는 모습이었다. 꿈과 희망의 세계인 네버랜드에서 제멋대로이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요정과, 길 잃은 아이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넘치는 매력으로 끌어당기고 포용하는, 희망의 수호신 같은 소년. 호시탐탐 아이의 자유를 억압하려 드는 해적들을 상대로 멋진 꾀를 부려 승리하고, 아이들의 바람을 위해 집까지 인도해주는 꼬마신사같은 모습.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희미해져가던 기억이 강렬하게 떠오르는 탓에 기대감으로 잔뜩 부풀어 오른 가슴을 안고 책을 펼쳐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착각이라는 것을, 추억이란 미화되기 마련이라는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년은 소년이었지만, 소년이 아니었다.
다시 만난 피터 팬은 제멋대로에 단순하고 얄미우면서 자기밖에 모르는 아이였다.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 나아갈 줄 모르고, 다른 친구들 역시 그 안에 가둬놓으려고 하는 그런 아이. 그 어떤 현실도 마주하려 하지 않은채 상상 속으로 도망치고, 끝끝내 영원한 아이로 남아 "걔는 나한테 뭔가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대. 그런데 내 엄마가 되고 싶지는 않대."라고 말하는 모습이 미화된 기억을 산산이 부서뜨렸다. '이 아이의 불행은 어른이 되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어쩌면 내가 어른이 되어서 그런걸지도 몰라' 라는 생각이 동시에 떠오르며 처음에 느꼈던 재회의 기쁨을 혼란으로 바꿔버렸다.
게다가 피터 팬과 그와 함께한 아이들이 쥐고 있는 것은 기억 속 나무로 만든 뭉툭한 목검이 아닌, 날이 잔뜩선 진짜 칼의 칼자루였다. 아이들은 무서운 해적들 앞에서 지지 않고 칼자루를 휘두르며 그들을 베어넘겼다. 아이들과 해적과 인디언이 서로 죽고 죽이는 그 장면은 예쁘게 포장되었던 기억을 북북 찢어버렸다. 그야말로 하얀 도화지 위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아이들이 칼자루를 휘두른 것은 해적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부모의 무한한 애정 앞에서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칼자루를 휘두르며 가슴에 생채기를 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 같았던 아이들과의 재회에 기뻐 어쩔줄 모르는 웬디와 존과 마이클의 부모를 보면서도 결코 제 부모를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은 그들이 쥔 칼자루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줬다.
표지 속 피터 팬의 묘한 표정이 후크선장을 죽이러 가며 "이번에는 후크와 나, 둘 중 한 명은 죽는다."고 맹세하는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난 피터 팬은 그만큼 섬뜩하고 무서웠다. 해적들을 찔러 죽이고, 웬디네 가족과 함께 살며 어른이 되는 아이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이 아이들은 어떤 어른이 되었을지, 감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오랜만의 만남이 반갑고 즐거웠지만,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나의 피터 팬은 이러지 않았어, 라며 누구에게든 따지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이게 진짜 이야기였고, 나는 내가 어른이 되었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다시는 어린 내 눈에 보였던 피터를 만날 수 없겠지. 책을 덮으며 든 생각에, 조금 씁쓸해지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