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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두의 악마 1 ㅣ 학생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10년 6월
평점 :
작품의 화자로 등장하는 마리아의 성격 변화가 처음에는 좀 당혹스러웠습니다. 월광 게임, 외딴섬 퍼즐에서 능동적이고 밝은 여성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여기서는 소극적이고 우유부단하고 수동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거든요.(전작을 읽은 지 오래됐고 기억력도 예전같지 않기 때문에 잘못 기억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쌍두의 악마에서는 소극적이고 우유부단하게 그려집니다.)
왜 캐릭터가 변했을까? 아니, 왜 변해야 했을까?
작품을 읽은 후 결론을 내렸습니다.쌍두의 악마는 트릭을 즐겨 사용하는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집필한 신본격 미스터리입니다. 그의 장기를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럴듯한 무대가 갖춰져야 합니다. 월광 게임의 화산폭발로 고립된 산, 외딴섬 퍼즐의 절해고도처럼 외부와 고립된 환경이 필요했던 겁니다.
마리아가 전처럼 능동적이고 밝았다면 그곳으로 들어가지도 않았을 거고, 설사 들어갔다 하더라도 밖으로 나오기가 싫어서 몇 개월 동안 죽치고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가족과 친구가 걱정하는 걸 뻔히 알면서 말이죠. 그렇다면 살인사건에 휘말릴 일도 그녀를 찾아나선 추리소설 동호회가 사건에 휘말릴 일도 없었겠죠. 무대를 마련하기 위해서 그녀는 성격이 변해야만 했던 겁니다.(그녀 입장에서 본다면 외딴섬 퍼즐의 사건이 충격적일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부모, 형제, 애인이 죽은 건 아닙니다. 그렇게 오래 방황할 일은 아니죠.)
이런 면을 지적하며 일본의 신본격을 비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트릭을 위해서 사건을 몰아간다, 설정이 너무 작위적이다. 뭐 이렇게요.^^
스포일러가 나오기 전에 간단히 총평하자면 재밌게 읽었습니다. 위에는 불만이 있는 것처럼 적었지만(마리아의 성격 변화가 아쉬워서 주절거리다가 글이 길어진 것일 뿐) 저런 식의 설정에 대해서 관대하게 바라보는 편입니다. 작가의 설정을 받아들이면 즐거운 독서를 할 수 있는데 꼬치꼬치 따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인사이트 밀 같은 작품도 그래서 재밌게 읽었구요.
쌍두의 악마를 읽을 때 포르투갈의 월드컵 예선 경기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축구를 좋아하는 편이 아닙니다. 평소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다가 월드컵 때만 반짝 관심을 가지는, 대다수의 한국 국민들과 성향이 비슷합니다.(대다수라는 글자에 반감을 가질 분도 있을 것 같은데 국내 프로리그의 텅 빈 관중석과 거의 중계를 해주지 않는 방송국의 푸대접을 감안했을 때 그다지 무리한 표현이라는 생각은 안 드네요.).
호날두라는 유명한 축구선수가 나온다기에 포르투갈 경기를 보려고 했는데 책에 빠져서 끝까지 읽었습니다. 그렇게 새벽 2시까지 읽을 정도로 글의 흡입력이 좋습니다. 그렇다고 걸작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는 아닙니다.(축구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쪽을 빗대 설명하자면 한국 경기를 포기하고 읽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는 여행을 통해서 상처입은 마음을 달래다가 세상과 단절된 채 창작에만 몰두하는 예술가들의 마을에 대해서 듣게 됩니다. 흥미가 동한 그녀는 기사라 마을을 찾아가고 그곳에서 지내게 됩니다. 마을에 들어간 딸이 좀체 귀가하지 않자 걱정이 된 부모는 그녀가 속한 추리 소설 동호회를 찾아가서 기사라 마을에 칩거 중인 딸을 설득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래서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탐정 에가미 지로를 필두로 네 명의 회원이 마을을 방문하게 됩니다. 이로써 사건의 무대가 갖춰집니다.
주의-스포일러 나옵니다.
기사라 마을에 대한 묘사가 나왔을 때 느꼈습니다. 아, 외부와 마을을 연결하는 저 다리 끊어지겠구나. 예상대로 다리는 끊어지고 고립된 공간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합니다. 폐쇄된 환경, 한정된 용의자, 경찰의 치안력이 미치지 않는 가운데 범인 찾기가 시작됩니다.
그러고 보면 일본은 저런 설정을 만드는데 용이한 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라 자체가 바다로 격리되어 있습니다. 외딴섬 퍼즐처럼 바다 한가운데 섬을 배경으로 삼으면 훌륭한 클로즈드 써클이 만들어집니다. 지진이나 화산활동도 비교적 활발해서 월광 게임처럼 설정할 수도 있습니다. 여름에는 장마가 있습니다. 집중호우로 전력과 통신을 끊고 도로를 유실해버리면 그럴싸한 배경이 만들어집니다.(요즘은 휴대폰 때문에 통신을 끊기는 좀 어렵겠군요. 산골짜기 구석구석까지 중계기가 들어가 있는 시절이라. 현대 기술의 발달이 추리소설의 설정에 영향을 미치는 걸 보면 흥미롭습니다.) 좀 더 박력을 넣고 싶다면 태풍을 동원하면 됩니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리니 폭설로 고립시켜 버려도 좋구요.
어쨌든 기사라 마을과 아리스 일행이 묵는 나쓰모리 마을을 연결하는 다리가 끊어지면서 각 마을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됩니다. 양 마을의 사람들은 다른 마을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했는지 모르고 따라서 상의를 할 수 없습니다. 추리에 장벽이 생긴 셈입니다.
쌍두의 악마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의 태반은 이런 분리에서 발생합니다. 개인적으로 나쓰모리 쪽 사건이 더 흥미로웠습니다. 기사라 쪽은 에가미 지로라는 유능한 탐정이 있어서 어련히 잘 알아서 할 거야, 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만 나쓰모리 쪽 멤버는 추리력이 떨어지는 편이라 어떻게 해결하나 걱정이 되었거든요. 그들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는 모습이 재밌습니다.
작가는 일본의 엘러리 퀸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독자에게 도전을 합니다. 그것도 무려 세 번씩이나. 추리 소설을 읽을 때 범인을 맞추려고 머리를 굴리는 편은 아닌데 직접적으로 도발을 하니까 추리를 해보게 되네요. 첫 번째 문제는 실패했습니다만 작가가 단서를 공정하게 흘려줘서 두 번째 도전은 겨우 맞출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