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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는 변명합니다. 이게 제가 책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스피노자는 "모든 한정은 부정이다"라고 했지요. 사랑하기 위한 조건을 줄줄이 내걸고 나서야 사랑할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생활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책을 정말 사랑한다면 문자의 형태로 책에 박혀 있는 지식이나 서사뿐만이 아니라, 책에 관련된 모든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책에 담긴 이야기, 책에 서린 정신, 책에서 나는 냄새, 책을 어루만질 때의 감촉, 책을 파는 공간, 책을 읽는 시간 등이 모두 모이고 모여 책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이루어낸다는 것이지요. 


제게 좋은 책이란 너무나 흥미로워 한번 손에 들면 단숨에 끝까지 독파해버릴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글자들을 읽어 내려가는 일보다 문단과 문단,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여백을 발견하는 일이 어쩌면 더 중요한 일일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독서라는 행위는 읽고 있는 순간들의 총합이 아닌 셈입니다. 독서는 바깥세상의 흐름에서 벗어나 책 속에 구현된 세계 속으로 뛰어들 때 시작되지만, 책 속의 세계에서 언뜻 일렁이는 어떤 그림자의 의미를 다시금 이 세상에 되비쳐 볼 때 비로소 완성되기도 합니다. 책읽기란 결국 철조망이 촘촘하게 쳐진 뻘밭 같은 세월 속을 헤쳐 나가는 우리의 서툰 포복술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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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사원 갈등을 취재해 단편 영화를 만들었던 경북대 학생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사원에 대해 듣고 싶어 왔다는 그에게 어쩌다 관심을 갖게 됐냐고 묻자 해 준 이야기다. 경북대 편입생인 그는 어느 날 자취하는 골목에 걸린 혐오표현 현수막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처음에는 어떻게 저런 게 버젓이 걸려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 이틀, 며칠이 지나자 그 현수막 앞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다니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자 카메라를 들었다. 혐오가 나쁜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문제는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내 일이 아닐 때는 쉽게 참아 넘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배타적이고 위계적인 집 만들기, 텃세 부리기도 어느 순간 어쩔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혐오가 집이 되어 버리기 전에 상호 공존과 이해의 집을 만들어 가는, 우리 안 국경을 허무는 실천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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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어가 머리의 일만이 아닌 경험과 감각이 필요한 시간의 일이라는 사실은, 노력해도 당장 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점에서 위로가 되지만, 한편으로 절망이기도 하다. 끝이 어디인지 모른 채 오랜 시간 지속해서 끊임없이 반복하는 일은, 말이 쉽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그러니 우리는 알면서도 자꾸 욕심을 내는 것이다. 그래도 조금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목표에 다다를 방법이 있을 거라고 믿고 싶어서.

그러고 보면 외국어 공부란, 신화 속 형벌 같다. 바위가 다시 그 무게의 속도로 굴러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온 힘을 다해 바위를 산꼭대기에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 같은 것. 외국어를 배우는 일에 완성이 어디 있는가. 나는 프랑스어의 세계에서 20여 년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완성됐다고 말할 수 없고, 그런 날은 절대로 오지 않으리란 걸 안다. 외국어란 산 정상 위에 머무르지 않는 바위와 같이 완전한 단계가 없다. 그러니 외국어 공부의 진짜 고통은 그 끝없음의 허무와 싸우는데 있다.
알베르 카뮈는 에세이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에서 바위를 밀어 올리는 형벌을 인간 삶의 부조리에 빗대며, 우리 삶이 헛되고 의미 없는 것이라도 그것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받아들이면서 그 과정을 즐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문장으로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자체가 우리의 마음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고 썼다.
여기에 빗대어 본다면, 외국어 공부도 매 과정에서 희열을 느껴야만 의미가 생기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다를 수 없을지라도 그 자체로 마음을 충족시켜야 하는 일. 언젠가 소멸할 것을 알면서도 일상의 무게를 지고 살아가는 우리 삶이 다 그렇듯이 말이다.
― 곽미성, 『외국어를 배워요, 영어는 아니고요』, 어떤책2023, 100~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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