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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깐 설웁다 ㅣ 문학동네 시인선 90
허은실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월
평점 :
2012년 봄에 아이팟을 구입하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듣고 있는 팟캐스트가 <이동진의 빨간 책방>이다. 오프닝에서 흐르는 시 같은 산문을 몇 번이나 들으면서 마음속으로 되새겼고 허은실 작가의 오프닝을 모은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 나온 후에는 본업인 시집도 내길 바랬는데 드디어 결실을 본다.
물이 올 때 - 허은실
풀벌레들 바람에 숨을 참는다
물이 부푼다
달이 큰 숨을 부려놓는다
눈썹까지 차오르는 웅얼거림
물은 홀릴 듯 고요하다
울렁이는 물금 따라 고둥들이 기어오를 때
새들은 저녁으로 가나
남겨진 날개를 따라가는 구름 지워지고
물은 나를 데려 어디로 가려는가
물이 물을 들이는 저녁의 멀미
저 물이 나를 삼킨다
자다 깬 아이가 운다
이런 종류의 멀미를 기억한다
지상의 소리들 먼 곳으로 가고
나무들 제 속의 어둠을 마당에 홀릴 때
불리운 듯 마루에 나와 앉아 울던
물금이 처음 생긴 저녁
물금을 새로 그으며
어린 고둥을 기르는 것은
자신의 수위를 견디는 일
숭어가 솟는 저녁이다
골목에서 사람들은 제 이름을 살다 가고
꼬리를 늘어뜨린 짐승들은 서성인다
하현을 닮은 둥근 발꿈치
맨발이 시리다
물이 온다.
「더듬다 」라는 시에서 “우리는 타인이라는 빈 곳들 더듬다가 지문이 다 닳는다”라고 마무리 한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우리의 세계를 확장하는 것이 시의 역할이 아닐까, 돌아보게 해주는 시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