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ㅣ 환상문학전집 11
필립 K. 딕 지음, 이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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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책을 읽기 전에는 이 제목, 우리말로 번역하면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가,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이 되고 싶어 하나?' 쯤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전기양이란, 인간이 생사여탈권(전기스위치)를 쥐고 있기에 조용히 인간의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는 존재이므로, 대답은 당연히 "No!"인 질문으로. 

이런 생각은 걸출한 영화 <블레이드 러너> 때문이었다. 그 영화는 내게 '생존의 한계를 거부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고 조물주를 찾아나선 네 명의 레플리컨트(넥서스6 모델의 휴머노이드 로봇)의 대장정과 실패'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설을 읽고 나니, 영화를 너무 머릿속에 넣고 읽기 시작했다는 아쉬움이 든다. 영화는 소설에서 그야말로 설정만 빌려왔을 뿐, 전혀 다른 이야기로 기억하는 것이 나을 듯하기 때문이다.

<블레이드 러너>가 내 인생의 영화 리스트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의 DVD를 Director's Cut이라고 한 번 사고, 'Five-Disc Ultimate Collector's Edition'이라고 또 살 만큼은 좋아하는(사실 이런 말랑한 느낌의 단어가 이 영화와 어울리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렇다고 '두려워하는'이라고 할 수도 없고, '마음에 품고 있는'도 어색하긴 매한가지다) 영화이긴 하다. (얼티미트 콜렉터스 이디션에는 1982년 미국극장개봉판, 전세계극장개봉판, 1992년에 발표된 감독판, 그리고 2007년에 그 DVD를 내면서 실은 파이널컷까지 네 개의 영화가 실려있는데 그걸 다 보고 뭐가 어디는 있는데 어디는 빠졌구나 하는 것까지 비교하지는 못했다.)

영화의 줄거리는 너무 유명하니까 여기서까지 다시 주절거릴 필요는 없겠고, 핵심 기둥(물론 내가 생각하기에)은 1)릭 데커드라는 '블레이드 러너(원래 소속된 곳에서 도망쳐 나온 레플리컨트들을 수색해서 잡는 경찰의 일종)'가 식민 행성에서 탈출한 네 명(개?)의 전투용 휴머노이드 로봇-안드로이드-레플리컨트를 추격하면서 한 명씩 물리치는 이야기, 2)릭 데커드와 레플리컨트 제조기업 총수의 미모의 조카 레이첼 사이의 이야기와, 이식된 기억을 가지고 자신이 인간이라고 믿었던 레이첼이 릭 데커드의 테스트를 통해 레플리컨트임이 드러나고 그것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이야기, 3)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 위에서도 언급하였던 것 같이, 네 명의 안드로이드들이 자신들의 수명을 연장해 달라고 탄원(?)하기 위해 조물주인 타이렐사의 총수를 만나려고 하는 이야기이다.

영화에서는 로이 배티를 대장으로 네명의 레플리컨트가 그들 중에서도 특히 수명이 거의 다한 레플리컨트인 프리스의 수명을 연장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자신들의 조물주인 타이렐을 만나려고 하는 것이 모든 사건의 출발점이 된다(영화상에서는 거의 끝부분에 드러난다). 레플리컨트가 자기 존재의 한계 때문에 고민하다가 뛰쳐나와서 직접 조물주와 대화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그런데 잠깐, 이건 너무나도 익숙한 장면 아닌가. 지극히 인간적인, 역사가 생긴 이래 모든 (인간) 존재의 고민이자 꿈이 자신의 약함이나 세상의 일그러진 모습에 대해, 이 모든 것을 '직접 만드신 이'를 만나서 따져도 보고, 설명도 듣고, 가능하면 고침 받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소망을 품고 타이렐 앞에 선 레플리컨트 로이 배티를 보면, 신 앞의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에 대한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레플리컨트의 4년이라는 수명은, 영화 속에서는 과학 기술의 한계가 문제라기보다,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과 육체를 지닌 넥서스6 모델의 안드로이드에 대해 안전핀으로 도입된 것이었다. 즉 조물주가 자신의 힘을 완전히 넘어서는 것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레플리컨트에게 '일부러' 이식한 한계였던 것이다. 피조물인 로이 배티는 조물주를 직접 만나서, 조물주가 홀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쓰다듬는 것에 잠시 동안 감격하다가, 그가 자신에게 이식한 한계의 이유와 당장은 그것을 고칠 수 없음을 알게 되자, 이 조물주의 머리를 두 손에 쥐어짜서 으스러뜨린다. 그 때 그의 표정은, 아마도 '신이 죽었다는 걸 사람들은 아직도 모른단 말인가?' 라고 물었던 니체의 표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사실 이렇게 니체를 오용하면 안되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니체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그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주워 들은 것밖엔 없으니까 말이다)?

레이첼이라는 인물도 생각할 거리를 무수히 준다. 그녀의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은 (이식된 줄 몰랐던) 어렸을 때의 몇 가지 기억과, 엄마가 자신의 머리를 빗겨주는 한 장의 흑백 사진 뿐이다. 뒤집어서 보면, 누군가에게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주는데 필요한 것은 결국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나다'라는 정체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기억이란, (현재의 과학 기술로는) 이식될 수는 없는 것이라 쳐도, 자신에 의해서든 남에 의해서든, 특히 자신에 의해서라면 얼마든지 조작된 채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정말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란 말인가'.

이렇게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으로 기억하고 있는 영화의 원작이라고 알려진 이 소설은, 그러나 영화의 중요한 전제들-로이 배티 일당이 식민 행성을 탈출하여 지구로 온 이유, 그리고 그들이 필사적으로 타이렐이라는 조물주를 만나려고 한다는 것-은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의 중심은 확실히 릭 데커드라는 현상금 사낭꾼인 인간이다. 그가 현상금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웃들은 진짜 양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전기양인 애완동물 대신에 '진짜 살아있는 동물'을 사기 위해서이다(그것이 그 시대의 최고의 사치이기 때문이며, 결국은 그의 물욕이다). 로이 배티 일당이 화성을 탈출한 이유는 모호하며(단지 화성이란 살 곳이 못되는 아주 척박한 땅이라는 것 뿐), 그들의 4년짜리 수명은 과학기술의 한계이고, 거기다가 이들은 조물주를 만나려고 하지도 않는다. 대신 방사선 낙진으로 두뇌가 망가져 '닭대가리'가 되어 인간들에게 소외당한 채 외롭게 살아가는 이지도어와, 인간 이상으로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오페라 가수(혹은 오페라 가수 행세를 하는)인 안드로이드 루바 루프트가 중요하게 부각되면서, 누가 인간이고 누가 안드로이드인지, 인간을 '기계 안드로이드'로부터 구분되게 하는 '인간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하게 한다.

인간과 비인간-기계 안드로이드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는 보이그트-캄프 감정이입 테스트라는 일종의 심리테스트인데, 이 테스트의 가정은 '기계-안드로이드는 감정이입에 서툴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이외의 생명이 거의 사라진 지구에서 생명체가 고통받는 상황에 대한 묘사-곰가죽, 사슴머리, 낙태, 등등-를 들려준 후의 동공 반응 같은 것이 얼마나 빨리 나타나는지를 체크하는 것이다. 이 테스트의 해석에는 물론 자의적인 요소가 없지 않지만, 경험이 많은 관찰자라면 거의 실수하지 않으며, 릭 데커드는 바로 이 테스트 전문가이다.

그런데 사건이 진행되면서 릭 데커드는 바로 이 테스트 때문에 혼란에 빠진다. 죽이는 것을 즐기고, 감정이입의 능력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금 사냥꾼 필 레시는 자신이 진짜 다람쥐를 보살피고 키우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주장하는데 실제로 그는 인간이었고, 그는 루바 루프트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 상황에 감정이입을 하는, 그러니까 기계에 감정이입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또한 이 감정이입 테스트라는 것에도 구멍은 있다. 이 테스트는 정말 공감하는지 여부를 측정한다기보다는 공감의 결과라고 생각되는 빠른 신경 반응을 체크하는 것이다. 그래서 안드로이드 생산회사인 로젠(소설에는 타이렐이란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은 이 테스트를 통과할 만큼 빠른 신경반응을 보이는 '향상된' 모델을 만드려고 하고 있고, 레이첼은 어느 정도 그 테스트를 통과하기까지 한다(물론 릭 데커드의 눈을 속이지는 못했지만). 하긴, '공감'을 어떻게 측정한단 말인가.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로봇'이라는 주제는 이 소설이 씌여진 1968년에는 참신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사실 이 소설에는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로봇'보다는 '로봇보다 더 로봇같은 인간'의 존재가 더 두드러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소설을 읽기 전에도 이런 주제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접했었다(그 이야기들이 다 필립 K 딕이나 아이작 아시모프에게 최초의 상상력을 빚지고 있겠지).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으로는 <터미네이터>와 <A.I.>가 있구나. 그런 걸 볼 때마다 나는, 신은 자신의 형상을 본따 인간을 만드셨다고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에게 과연 그 자신의 형상을 본딴 무엇을 만들 만한 능력 또는 자격이 있을까에 대해 생각했었다. 자신을 닮은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만들어진 피조물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지겠다는 약속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부모가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많지 않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자식이야 언젠가는 나와는 독립된 인간으로 떼어낼 수밖에 없으니 어느 정도의 기간만 책임지면 된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인간은 자식을 자신의 필요 때문에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로봇, 안드로이드라면? 인간이 로봇을 만드는 이유는 자신의 필요에 복종시키기 위해서이다. 그것을 더욱 인간과 비슷한 모양으로 만드려고 노력한다면, 인간이 알기에 인간의 일을 인간만큼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인간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필요해서 복종시키려고 만든 로봇을 또 다른 독립적인 존재, 인간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인간의 이성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은 그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이든 감정이든과 상관없이, 안드로이드가 충분히 인간과 가깝게 만들어졌다면, 그는 조물주 인간이 모르는 생각, 즉 자유의지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독립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안드로이드는 인간에게 반기를 들고..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이 올 수도 있겠지. 사실 그 기계는 인간처럼 생각하고 인간처럼 반응하는, 어떤 면에서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인데 말이다.

이 지점에서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은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원하는가?', 즉 '안드로이드는 (인간처럼) 전기양을 가지길 원하는가?', "안드로이드는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가?'의 뜻으로 받아들이는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글쎄. 안드로이드가 굳이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원하는 건 아닐 것이다. 안드로이드가 원하는 것은 인간이 누리는 것과 같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이냐 인간이 아니냐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면 어떻고 안드로이드면 어떤가. 자기만의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라면,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라면, '언젠가는 죽는다'를 뺀 다른 운명에 대해 선택권을 갖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인간성에 관한 질문, 인간과 로봇-안드로이드와의 관계에 관한 질문에 대한 고민 외에도 이 소설은 미래 사회의 디스토피아적 묘사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쓸만한 인간은 모두 우주 식민 행성으로 떠나 버리고, 방사선 낙진 예보나 들으면서 별 희망도 없는 닭대가리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 늙은이들(릭 데커드는 둘다 아니지만, 현상금 사냥꾼으로서의 자신의 일 때문에 떠나지 못한다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한다)이 키플 더미와 함께 살아가는 지구. 인간 이외의 생명이 거의 모두 멸종하여 살아있는 동물을 애완동물로 키우는 것이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죽을까봐 두려워서 옆에 가지도 못하는 사람도 있고, 자연스러운 기분도 느끼거나 표현하지 못해 기분전환기에 의존하며, 고독은 감정이입기에 접속해서 '머서'라는 인물과 융합하는 것으로 해소하는 인간들(이 '감정이입기'라는 것을 가만히 보면,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접속한 온라인과 비슷한 것으로 느껴지면서 오싹함이 몰려온다). 이런 묘사가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는 끊임없이 비가 내리고 도심 외에 대부분의 건물은 폐허와 다름없이 텅 비었으며, 광고판은 '지구를 떠나라'는 메시지만 반복하는 어둡고 숨막힌 도시로 표현된다. 리들리 스콧의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이 책의 디스토피아를 내 머릿속은 어떻게 그려냈을지 모르겠다.

하여튼 이 책을 읽고 마지막까지 한 생각은, 복제 인간 따위는 제발 만들지 말자. 우린 아직 안드로이드를 감당할 만큼 감정적으로 성숙하지 않았다. 그런 날은 오지도 않을 것이야. 좀 생뚱맞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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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의 진실 - 의사들은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쳤는가?
데이비드 우튼 지음, 윤미경 옮김 / 마티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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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사에 관한 책을 세 권째 연달아 읽었다. 평소에는 한 분야에 대한 책을 묶어서 읽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런 식의 독서가 바로 수많은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독서법이긴 하지만, 세상에 읽어야 할 책이 얼마나 많은데 같은 주제에 대한 책을 여러 권씩 그것도 붙여서 읽느냔 말이다. 그랬는데도, 직업에 관련된 일이다 보니 이렇게도 하는구나. 이렇게 읽고 나니 뭔가 아는게 많아진 듯한 느낌이 든다. 음.
사실 이 책도 읽지 않은 채로 책장에 꽂힌 지가 2년은 넘은 것 같은데 어떤 계기로 알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제목보다는 부제, '의사들은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쳤는가?'에 혹했을 것이다.   

 

<의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의학'사상'의 역사가 당대의 정치경제적 상황의 역사와 맞닿아 있음을 횡설수설 논한 책이라면, 이 책은 의학'기술'의 역사가 문화적, 심리적, 제도적 걸림돌 때문에 갈짓자를 그리면서 나아왔다는 것, 즉 대부분은 실패한 역사라는 것을, 시종일관 진지하고 격앙된 어조로 빽빽하게 전달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첫번째로 자신의 이러한 '실패한 의학의 역사'를 기술하려는 태도가 기존의 의학사의 관점 및 서술과 아주 다르다는 것부터 강조하고 있다. 의학도 잘 모르고, 역사도 잘 모르는 내가 이런 식의 역사 서술의 의미를  제대로 평가할 수는 없겠다. 오히려, 이것이 내가 읽은 의학사에 관한 책 중 거의 첫번째이니, 앞으로 의학사 책을 더 읽는다고 하면 이 책의 논점이 기준이 될 수도 있겠지. 이런 것이 아마 폭이 좁은 독서의 단점이겠다.   

 

두번째로, 이 책이 서술하고 있는 '의학'의 역사는, 의학이 한번도 순수한 자연과학인 적이 없었고, 또한 그럴 수도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오직 의학의 '기술'적인 측면의 역사이다. 거의 2천 년 동안 서양의 의학은 질병이 아닌 '사람'을 치료했고, 따라서 치료 방법도 사혈, 사하제, 구토제로 충분했다. 이런 '의학'이 2천 년을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효과는 '치료' 때문이 아니었다. 무얼 해도 낫지 않는 병이 있는가 하면, 아무 거나 해도 나을 수 있는 병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자연치유력(요즘의 과학으로는 그 질환에 대한 인체의 면역의 재구축 쯤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을 기반으로 다양한 위약 효과(의사에 대한 신뢰, 환자의 의지를 모두 포함한)였다. 요즘 같으면 같은 원인의 질환을 가진 환자 백 명을 같은 방법으로 치료했을 때 적어도 서른 명에게는 효과가 있어야 그 치료법의 효용을 인정해 주겠지만, 옛날에는 그런 통계적 사고나 지식이 없었으니, 단 한 명만 나아도 그 치료법은 계속 행해질 수 있었다. 더 고약한(?) 것은 나머지 99명 중 심지어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때보다 더 나빠졌거나 생명을 잃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사례에서도 의사는 쉽게 책임을 벗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환자가 의사를 완전히 믿지 못했다거나, 지시를 '완벽하게' 따르지 못했다고 몰아붙이는 것이 간단했으니까 말이다. 이 정도면 정말 종교 수준이다.

과학이 임상에 적용되는 과정의 지연을 논하는 것은 오직 '서양'의학에서만 가능하다. 왜냐면 동양 의학은 과학이 아니라 '생각의 틀', 곧 우주관이며 철학이기 때문에 어차피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사실 이 책에서는 '동양 의학'이란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의사의 해악'을 논할 때, '의사'에 '한의사'는 포함되지 않는다. 이 책이 굳이 논의를 의학 '기술'에 집중하고 있는 이유는 의학의 효과, 즉 질병을 치료하거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실제로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의학도 질병을 치료하거나 생명을 연장하는 '효과'를 위해 존재하므로, 이 의학이 실제로 '효과'가 있었는지 아니면 '해악'을 끼쳐왔는지를 물어볼 수 있겠다. 그런데 한의학이 과학이 아니라면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인가? 서양 의학의 발달 과정을 논하는 글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은 이런 질문들로 바빴다. 이런 생각 또한 '자연과학의 분과'로서의 의학 교육만 받아와서 사고의 패턴이 이미 그 쪽으로 자리잡았기에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대답할 수 있는 문제일까.

세번째로, 저자가 특히 관심을 가지고 강조하는 것은 현대에 과학이 실험실에 발견한 것이 얼마나 빨리 임상에 적용되는지를 볼 때, 16세기부터 19세기 전반까지 자연과학의 발달이 의학기술에 적용되는데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가에 대한 고찰이다. 그리고 결론은 당대의 문화적, 심리적, 제도적 요소들의 저항, 즉 자연과학 이외의 요소들 때문이라고 내린다.   

 

 

현대 의학의 연구 결과라고 해서 일반 의사들이나 환자들이 느끼기에 그렇게 빨리 진료실로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연구 결과가 발표될 때마다 그것이 임상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제안은 거의 보편화되어 있다 (사실 요즘의 연구는 임상과 관련이 높은, 임상 적응의 가능성이 많은 주제에 집중되는 경향까지 있다). 단지 그 제안이 실제로 성과물로 나오기까지는, 신약을 예로 든다면, 피할 수 없는 생체 실험(동물 실험)의 엄정함이 더욱 요구되고, 환자에게 직접 적용하는 임상 시험도 세 단계에 걸쳐서 충분한 기간과 환자에게 시행하도록 되어 있어서,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18세기 중반 이전(정확하게는 리스터의 방부 외과 수술이 시행된 1865년)에는 생물학 연구와 생체 실험을 하는 사람들이 그 실험의 결과로 인체를 더 잘 이해하게 됨으로써 더 나은 치료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연구는 오직 지식 추구를 위한 것이었고, 의학은 결코 과학이 아니라 갈레노스의 '철학'을 인간에게 적용시키는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의학 기술을 발달시키려고 하면, 지금까지 해온 것이 뭔가 잘못이나 부족함이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그런데 1865년 전의 의사들에게는 '전통'이라는 것이 부족하고 심지어는 잘못되었다는 자각이 없었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했던 대로, 인간의 자연치유력과 위약 효과 때문에 나은 사람들을 자신의 공이라고 쉽게 생각했고,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질병'을 치료한다는 통계적 개념의 부재로 인해, 한 명이라도 나았으면 그 치료의 효과는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대 의학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패의 세균설'이 확립되고 그것을 임상에 적용한 방부 외과 수술이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이 17세기 전반 현미경의 발명보다 무려 150년이나 늦어졌던 것이고, 그 사이에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이 병원에서 의사의 손에 병을 얻어 사망하였던 것이다.

효과의 평가만 문제였던 것이 아니다. 문화적이면서 심리적인 문제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의사가 되기 위해 배워야 하는 지식의 (내용은 달라도) 양과 비용이 굉장히 높았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애써 얻은 지식을 어느 날 잘못되었다고 바로 버리기에는 심리적 저항이 매우 강했다(예를 들면, 마취제가 발견된 후 바로 수술장에 적용되기 까지 5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던 것은, 당시 외과의사는 마취 없이 수술을 할때 환자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번개같은 속도'로 절단이나 절개를 하도록 배웠는데, 마취를 하면 그런 '번개같은 속도'를 보여줄 수가 없으므로 반의도적으로 무시했다고 한다). 사실 이건 어떤 전문가 집단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며, 현재진행형의 문제이기도 하다. 생뚱맞은 비유일지도 모르지만, 시어머니에게 심하게 괴롭힘을 당한 며느리가 나중에 자기 며느리를 심하게 괴롭히는 시어머니가 되는 이치이기도 하고.

현대의 의학은 결코 '나쁜 의학'이 아니다. 저자도 1865년부터 의학 기술은 환자에게 적용되었을 때 실제로 도움이 되는 기술로 발달해왔다고 인정하고 있다. 또한 '의원성(iatrogenic)' 질병에 대한 개념도 잡혀 있어서, 환자의 상태가 나빠진다면 어떤 것이 치료와 관련된 것이고, 어떤 것이 질병 자체과 관련된 것인지를 구분하여 판단하고, 아무리 그 질병을 없애는 데 효과가 있는 치료법이라고 하더라도 그 치료 때문에 수반되는 합병증이나 후유증이 매우 크다면 과감히 그 치료법은 폐기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학은 결코 완전히 '과학과 기술'만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치유력과 위약 효과라는 것이 그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영혼'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을 과학이 뉴런의 복잡한 상호작용으로 완전히 설명할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결국은 카오스(초기 조건의 아주 작은 변화 때문에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일 것이기 때문에, 의학이라는 것이 의사라는 인간이 환자라는 인간을 대하는 만나는 순간의 태도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좋은 의학'이란 환자에게 진정으로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의사의 마음으로부터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낼 것이기 때문에, 의학의 전통은 '어떤 경우든지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는 선서를 명문화한 히포크라테스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어가는 환자의 곁에서 환자의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소생시킬 방법이 없노라 인정하고, 동정의 마음을 다해 손을 잡아주는 것도 결국은 의학이기에.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진보 또는 변화의 속도는 미래의 결과를 내다보는 (혹은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너무 늦고, 현재의 좋은 점에 안주하려는 (혹은 현재의 장점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너무 빠르다는. 어떻게 해서든 변화가 이루어져 새로운 세상에서 살게 된 이들이 이전 세상을 돌아보면, 참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한 사건들을 많이 집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굳이 그런 불합리한 사건들을 끄집어 내어 파헤쳐 보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같은 불합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게 바로 역사로부터 배운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패러다임의 급격한 전환기에 처한 개인이 아날로그적 일상을 이어가면서 실제로 그런 변혁의 조짐을 읽고 따라가는 것은, 아니 '지금 변혁이 일어나고 있구나'하는 것을 읽어내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다. 뭔가 달라지는 조짐이 있을라치면 온갖 방법으로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요소'를 끌어내어 일단 안심하고자 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로운, 또는 나쁜(지금까지 잘못 해왔다는) 소식에 첫 번째로 보이는 태도가 아니던가. 저자는 결국 '의학사'를 예로 들어 어떤 분야에서든 진정한 진보를 가로막는 평범한 인간들의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덧)

1. 교정되지 않은 오자가 많다. 열 개 정도 되는 것 같다.
2. 의학사에 영원히 이름을 새긴 훌륭한 분들의 (지금의 가치관에 의하면) 말도 안되는 바보 같은 생각과 행동에 대해 뒷담화를 듣듯 여러가지를 알게 되었다. 한가지 예를 들면 갈레노스는 '거친 바다를 본 꿈은 창자에 질병이 생겼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효과적인 사하를 위해 가볍고 부드러운 사하제를 사용해야 한다'고 썼다고 한다. 이거야 원. 걸리버 여행기의 라퓨타성의 상류계급 사람들이 대변의 모양을 보고 그 사람의 생각을 유추한다(누군가를 암살해야 한다고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본 대변은 좀더 푸르스름하다나 어쨌다나)는 행태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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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현대에 (서양)의학은 자연과학, 생명과학의 한 분과이고, 의사는 과학자이다. 과학자로서 의사는 엄격하게 '과학적인 근거', 즉 많은 관찰과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세운 '가설'이 실험을 통해 재현하는 것이 관찰과 경험에 일치할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실험을 통과한 '가설'은 이제 '과학적 사실'이 된다. 물리학이나 화학의 연구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의학(의료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은 또한 기술이기도 하다. 다른 과학 분야에서 과학자가 밝힌 사실에 근거에 기술자가 기계를 만들고 운용하듯 의사도 생명과학-의학에서 밝혀진 사실을 토대로 치료법을 고안, 개발하고 인체에 적용하게 된다. 복잡한 기계를 맨구석의 가장 작은 나사 하나부터 이해하듯, 일단 '정상' 인체의 구조와 기능, 작동 원리를 낱낱히 이해하고, 오작동하는 기계를 손볼 때 기계의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는지 찾아서 그 부분을 손보듯, 인체가 '이상'을 보일 때 어느 부분, 어느 장기의 이상인지 찾아서 그 장기의 기능을 가능한 한 정상에 가깝게 돌려놓는 것이 의사가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 과학자와 기술자가 하는 일이 어느 정도 독립적이라면, 의학에서는 기초의학 연구에 더 집중하는 의사와 임상 치료에 더 집중하는 의사로 나눌 수는 있어도, 기본적으로 한 사람의 의사가 과학자의 생각과 기술자의 일을 같이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계적인 것에 적용되는 과학/기술과 의학은 결정적으로 두 가지 점에서 다르다고 생각한다. 첫째, 기계의 '정상'상태는 고정된 한 가지이고 비교적 환경과 독립적인 반면, 인체의 '정상' 상태는 사람마다 다르고, 한 사람안에서도 환경과 끊임없이 뭔가를 주고 받고 있기 때문에 더욱 복잡하고 넓은 '정상 범위'가 있을 뿐이다. 둘째, 기계는 그 기계의 제작을 가능하게 할 과학과 기술의 발달 전에는 아예 존재할 수 없고, 일단 만들어진 기계는 완전히 인간의 손에 있는 '매뉴얼' 대로이지만, 인체는 그렇지 않다. 인체와 질병은 과학과 기술의 발달 전에도 있었고, 병에 걸리면 그 실체를 완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일단 개입해야만 한다. '현대 의학'이라는 것이 인체의 세부적인 구조와 기능과 작동원리를 하나씩 과학적 사실로 파헤쳐 가는 동안에도 아직 과학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며, 그런 부분에서 발생하는 질병에도 불빛 하나 없는 깜깜한 방으로 더듬거리며 들어가듯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만들거나 적용해 놓고 나중에 그 원리를 찾아 매뉴얼을 만든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예를 들면 수혈 같은 것이 있다. 심한 출혈을 보이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피를 넣어주었을 때 소생하는 것을 경험했다고 하자. 그러나 수혈이 모든 과출혈 환자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수혈을 시작하자마자 거의 즉각적으로 사망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인간이 혈액형에 대해 완전히 알게 되기 전까지는 누구의 피를 어떤 사람에게 주어야 살거나 죽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운에 맡기는 수밖에. 하지만 살아날 가능성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수혈을 무조건 금지할 수 있었을까?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면역계의 많은 것들이 연구가 진행될수록 새로운 사실들, 일부는 이전에 예측했던 것과 정반대의 사실들이 드러나고 있는 와중에, 골수 이식같은 치료는 어떤 사람은 완전히 회복시키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이식편대숙주반응을 심하게 일으켜서 원질병이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비참한 상태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면역계의 모든 것을 인간이 완벽하게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골수 이식 치료를 하지 말자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의과대학에서는 자연과학으로서의 의학이 성립된 이후의 지식과 기술만으로도 엄청난 양을 거의 주입식으로 학습해야 한다. 당장 임상이라는 전장에 나가기 위해 총 다루는 법 익히는 것도 빠듯한 것이다. 그래서 의학의 '자연과학' 이외의 측면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도 못하고 졸업하게 된다. 그렇게 교육받은 의사가 자연과학의 관점과 방법론에 입각하여 인간을 '인체'라는 '기계'로 보고 의학 지식과 기술을 적용하고 평가하는 틀을 벗어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런데 현대의 의학이 '자연과학 - 생명과학'의 한 분과로서 자신의 위치를 정하고, 진단과 치료 행위 일체를 '과학적'으로 하려고 하지만, 위에서 얘기한 대로 '인간/인체'를 다루는 의학이라는 학문은 '자연과학' 속에 통합될 수 없는 아주 넓은 부분이 존재한다. 그리고 매일의 진료에서 의사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당연히 의학의 이런 비-자연과학적 측면이다.

저자 서문의 일부이다.  

   
  이 책에는 서양과 동양의 의학사상이 전개되어온 흥미진진한 과정이 담겨 있다.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당대의 사회경제적 조건과 의학 사상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이 양 문명 속에서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놀랍게도 서로 다른 두 문화 사이에는 2천 년에 걸친 전통의 유사성이 폭넓게 존재한다. 유럽문화에 바탕을 둔 '서양의학'이 19세기와 20세기에 중국에서 그토록 열광적으로 환영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의학'은 역동적이고 독립적인 형태의 대안요법으로서 앞으로 중국과 서구에서 장기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을까? 의학사상의 전개를 방향짓거나 규제하는 일은 과연 가능할까? 의료정책으로 모든 사람에게 한 가지 의학이론체계만을 지정해 주어도 좋은 것일까? 세계화는 의학사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까? 이 책의 내용은 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교육의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자연과학으로서의 의학이 아닌 의학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한의학은 분명 관찰-가설-실험-증명의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는 자연과학이 아니다. 다만 음양과 오행이라는 선험적 틀이 있고 인체의 어떤 현상이든 그 틀에 맞추어 설명할 수 있다. 틀은 하나이지만 적용하는 방식은 제각각일 수 있다. 게다가 그렇게 제각각 적용하면 다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는데도 다 옳다! (한의학을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한의학은 '과학'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 '의학'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고, 효과를 보인다(이중맹검 시험을 하면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과학이 아니니 이런 시험이 필요하지도 않겠지만). 그래서 동서양 의학의 역사를 비교한다는 이 책을 읽으면 이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실제 책의 내용은..? 아주 꽝이다. 
'의학'의 '역사'를 말할 때, '의학'은 현재의 좁은 의미의 의학, 서양의 자연과학의 전통 위에 과학적 방법론을 표방하고 발전하고 있는 의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내가 아는 의학이 그 좁은 의미의 의학 밖에 없어서 더 당황하고 짜증났다 (그래서 저자는 '의학'의 역사라기보다 '치유'의 역사라고 부제를 달았는데 그걸 빨리 알아채지는 못했다). 하지만 겨우 '의학'이란 개념에 적응한 후에도 이 책이 꽝이란 건 변하지 않는다.
첫째, 중언부언. '누가 "의학 사상"이라고 할 만한 것을, 어떤 계기와 어떤 추동력으로 고안해냈나?'라는 질문을 던지고, 3천년전의 역사로부터 그 대답을 찾는 논의부터 시작하는데, '자료가 부족하다, 그렇기에 이런 정도를 추측해볼 수 있다, 하지만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 질문은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 정도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자료가 부족하다, 따라서 확실한 것은 없다', 이런 식으로 거의 200 페이지 가까운 중언부언이다.

(그나마 근대에 관한 서술에서는 좀 낫다. 자료의 양이 좀 나아져서 그런 건가?) 

둘째, 논지를 전개하는 방식도 지지부진하다. 마치 1차 자료를 정리하면서 자료의 여백에 자기 느낌을 써놓은 것을 정리하지 못하고 그대로 묶어서 책으로 펴낸 것 같다. 반어적 의문문("왜 하필 '그 사람'이 '그 시대'에 '바로 그 생각'을 했을까")에 하나마나한 대답이 수도 없고, 강조의 느낌표 남발에, 어색한 비유(창살 하나를 바꾸는 것은 쉬웠다!)들. 그냥 설명을 하지 비유가 더 어렵다.

셋째, 번역도 엉망이다. 원저는 독일어인데 영어로부터 중역한 책이라고 한다. 원저가 이렇게 딱딱 끊어지는 문장으로 되어 있어서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해서 어쩔 수 없는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독해집이라니. 주어 서술어도 제대로 맞추지도 않고, 대명사도 도대체 얘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건지도 애매한 문장이 한둘이 아니고. 문장은 그렇다 쳐도, 한 문단을 여러번 되풀이해서 읽어도 중심어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번역이다. 내가 지식이 짧아서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만큼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룬 것이 분명히 아니다. 왜 독일어 전문번역자가 번역을 하고 한의사에게 감수받는 형식으로 하지 않고, 한의사가 영어로부터 중역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간단하다. 

첫째, '의학사상', 즉 인체와 질병을 바라보는 관점과 틀은 동양은 동양대로, 서양은 서양대로 당대의 정치경제적 조건에 따라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경향은 놀랍게도 최근까지 -그러니까 자연과학의 분과로서의 의학이 확립된 현재까지-도 이어진다는 것이다.

둘째, 중의학은 기능 간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면서 발전해온 반면, 서양의학은 (형태학적) 세부구조를 규명하는데 관심을 가져왔다.

셋째, 에너지 위기나 환경오염, 점차 비인간화 되어가는 기술 중심 의학 등 여러 가지 도전 속에서 현대인들은 (과학 중심의 서양) 의학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데, 음양오행과 순환적 세계관의 '타당성'을 지닌 중의학이 그 대안으로서, 비유기체적인 것을 지양하고 생명체적인 기에 집중하며, 따뜻함과 공감, 그리고 조화로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의학은 (특히 치유의 측면에서) 한번도 순수과학인 적이 없었으며 늘 '현실'과 '타당성'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세번째까지는 그렇다는 것이니 그렇다고 치고. 네번째 결론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이 책에서는 동서양의 각각의 의학사상의 변화 발전을 논의하면서 '현실'과 '타당성'을 계속 대비시키고 있다. 여기서 현실과 타당성 각각에 해당하는 원문 단어를 모르겠는데, 읽어가면서 보면 '현실'이란 '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현실'의 깊이는 자연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면서 더 깊어진다. '오염된 물 때문에 콜레라가 발생한다'는 '현실'은 콜레라균이 입증됨으로써 '오염된 물의 콜레라균 때문에 콜레라가 발생한다'는 더 자세하고 세부적인 '현실'이 된다. 이에 비해 '타당성'이란 '말이 되는 것', 즉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만한 설명 쯤의 뜻인 것 같다. 따라서 '타당성'이란 '현실'이 아닐 수도, 또는 아직 발견되거나 증명되지 않은 현실일 수도 있다.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반드시 자연과학적 증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한의학과 음양오행설은 확실히 자연과학이 아니라 생각의 틀, 철학 체계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현대의 의학에서 이미 자연과학적으로 그 원인과 경과가 규명되어서 그것을 응용한 치료법까지 나와 있는 질병을 치료할 때도 이런 한의학과 음양오행설을 신뢰할 수 있을까? 하긴. 생각해보니 그런 질병은 원인균이 증명된 세균에 의한 질환밖에 없구나. 지금 인류를 가장 괴롭히는 병인 암과 기타 만성질환(에이즈도 아직 골칫거리지만 그 병은 원인 바이러스가 규명되었으니 더 나은 치료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니 빼고)은 그 복잡한 기전이 아직 완전히 규명되지는 않았으니 '타당성'의 영역에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결론적으로, 다 읽어내는데 두달이나 걸렸고, 몇번이나 시간 아까와서 집어치우려고 했지만 그래도 끝부분에 서문에서의 질문에 대한 무슨 답이 있을까 싶어 끝까지 참고 읽었지만, 다 읽고 나서, 저자가 서문에서 내건 질문에 대한 온전한 대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한마디로 이렇게 지지부진하고 다 읽은 후에 아무런 성취감도 느끼지 못한 책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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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발론 연대기 1 - 마법사 멀린
장 마르칼 지음, 김정란 옮김 / 북스피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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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비소설보다는 소설을(소설은 기본적으로 있을 '법한', '꾸며낸' 이야기이므로 내 맘에 들지 않으면 무로 돌려버릴 수 있지만 비소설은 그럴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단편보다 장편, 장편만큼 '연대기'를 좋아한다. 왜냐면 연대기에는 '그후로도 오랫동안 그들은 행복하게(말하자면 그렇다는 이야기) 살았습니다'를 할 수 있는 한 자세히 설명해주기 때문에, 이야기를 더욱 삶에 갖다 붙게 만든다. 그리고 물론 역사 대하 소설보다는(이건 아무래도 진짜 역사에 터를 대고 있어서 맘에 안든다고 취소해 버리는 일이 간단하지 않기 때문에) 판타지나 신화의 연대기를 좋아한다. <아발론 연대기>는 이런 나의 취향에 잘 맞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날 알라딘을 하릴없이 클릭하며 돌아다니다가 이 책을 발견했을 때, 처음부터 오홍!하고 잡아챘던 것은 아니다. 왜냐면 어렸을 때 분명 꽤 두꺼운 (그 당시에는 문고판 시집도 두껍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들' 이야기를 읽었고, 원탁의 기사들의 이름도 좀 기억이 났으며 (랜슬럿, 퍼시벌 같은 유명한 이름은 물론이고, 가아웨인, 갤러헤드?, 유우웨인? 같은 좀 덜 유명한(?) 이름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보니 1권의 소제목이 <마법사 멀린>이었다. 음. 생각해보니 멀린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구나. 그리고 다시 보니 어랏, 반값이네! 이래서 집으로 데려오게 된 것이다. 결정적으로 반값이 아니었다면 매끈한 표지로 책값을 올렸다고 분개하곤 그냥 지나쳤겠지.

그런데 시작하고 보니, 내가 꽤 만만찮은 이야기 속에 발을 담그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멀린. 그 출생부터 충격적이다. 몽마, 인큐버스라니. 그리스도 탄생의 사악한 거울상이었다니. 
그리고 모르간. 이 여자에 대해서도 거의 아무 것도 몰랐었다. 모르간에게 아예 할당된 한 권이 있으니 이후에 더 충격을 먹겠구나. 
그리고 저자와 역자 후기에서 알게된 '역사적' 인물 아서의 진상. 어쩐지. 왜 영국 왕의 이름이 찰스 아니면 에드워드 아니면 존 아니면 헨리는 계속 되풀이되는데 그 유명한, 언젠가 영국 땅에 와서 다시 왕이 될 것이라는 아서의 아서 2세, 아서 3세는 없는 것인지 이제서야 알았다. 
그리고 아서왕 이전의 켈트왕의 역사. 이건 중국의 요 임금, 순 임금,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 등과 다를 것도 없어 보인다.
하여튼 세상은 넓고 오래된 것이었고, 그 넓고 오래된 세상의 땅들은 땅마다 민족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야기들을 끝도 없이 품고 있는 것이었다.

아직 '켈트' 신화라는 것이 그리스 로마 신화나 고대 중국처럼 어렴풋하게라도 잡히는 건 아니지만. 특히 '드루이드교'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이야기로서 충분히 매력적이고 따라갈 만하다. 게다가 이 켈트 신화라는 것이 기독교가 유럽을 덮기 전에는 문자화되지 않았고, 문자화되면서는 기독교 전승에 교묘하게 맞춰짐으로서 그 원래 의미를 더 따라잡기 어렵다는 것도 읽는 재미의 일부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남의 나라 역사 신화를 읽다 보니, 내가 또 우리 나라 역사와 신화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구나 새삼 느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연대기에 비할 책이라면 삼국유사가 될까? 그렇다면 이 책을 다 읽고 삼국유사나, 이미 데려다 놓은 이이화의 한국사 책을 읽어야겠군..

한가지 짜증난다면, 저자 주는 양이 많지 않으니 그렇다쳐도, 역자 김정란의 주석은 너무 과하다. 특히 '~을 유념할 것.' 식의 주는, 먼저 책을 읽은 누군가가 여백에 자신의 생각을 메모한 식이고 강의하고 자기의 생각을 강요하는 느낌이어서 매번 인상을 찌푸리게 되었다. 켈트 신화의 해석에 대한 책을 쓸 거라면서 뭐하러 그런 주를 달아놨는지 모르겠다. 이야기를 읽는 이의 자유에 완전히 맡기려면, 아무리 아는 만큼 보게 되니 많이 알고 보시라는 노파심이라고는 해도, 그런 식의 주는 좀 자제해 주었으면 좋겠다.

하여튼, 일단 발을 들여놓았으니 앞으로 며칠 간은 다음엔 무슨 책을 읽을까 고민없이 이 연대기를 따라가면 되겠다. 무려 여덟권이다. 기대 만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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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징조들 ㅣ 그리폰 북스 2
테리 프래쳇.닐 게이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책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은 항상 저자 소개, 그 다음으로 역자 소개 (역자가 있다면), 그 다음으로 출판 기록 (원서는 언제 초판, 번역본은 언제 초판, 내 손에 들어온 책은 몇 쇄인지)이다. 그러니까 나는 표지부터 한장씩 넘겨가면서 속표지도 몽땅 읽고, 차례도 읽고 본문으로 들어간다.

따라서 이 책 <멋진 징조들>의 두꺼운 겉표지 바로 안에 들어 있는 저자 소개를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그러니까 언젠가 저자 소개를 꼼꼼히 읽는 이들을 위한 상(!)이 있을 줄 알았다. 네이버 글감 불러오기에 오류가 있어서 저자가 닐 게이먼 한 사람밖에 안 떴지만, 사실 이 책은 테리 프레쳇과 닐 게이먼의 공저이고, 앞표지 안쪽에 테리 프레쳇의 약력이, 뒷표지 안쪽에 닐 게이먼의 약력이 들어있다. 둘다 시도해봐야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바나나 다이커리에 대한 애정을 (사실 닐 게이면은 바나나 다이커리보다는 그걸 사 먹으라고 팬들이 부쳐주는 돈에 더 관심이 있어하는 것 같지만) 언급하고 있다. 테리 프래쳇 씨, 그리고 닐 게이먼 씨! 혹시나 만나게 된다면 정말 바나나 다이커리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를 한 잔씩 꼭 사드리지요! ^^ 

 

아무튼 저자 소개부터 범상치 않게(!) 시작하는 이 책은, 묵시록의 그 전쟁, 아마겟돈이 벌어지기 전 일주일간의 긴박한(!) 상황에 대한 장황한 농담이다. 

이제 인간 세상에 아마겟돈을 내릴 만한 시기가 적당히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마왕 (또는 하나님? 아무튼 그 모든 것은 하나님 외에는 결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놀랍고 원대한 계획의 일부이니까 말이다)이 적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는데, 수다스러운 악마 숭배 수녀들의 헛짓으로 아기가 바뀌어, 진짜 적그리스도는 천사든 악마든 누구의 눈길도 닿지 않는 조용한 인간 시골 마을에서 평범한 아이로 키워지고, 그 부부의 진짜 아이는 천사와 악마 모두에게 적그리스도로 오인되어 어렸을 때부터 천사와 악마가 각각 보낸 가정교사나 정원사의 교육을 받으면서 자란다. 그리고 11년 후, 아마겟돈의 D데이 1주일전,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닥쳐온 아마겟돈에 대해 지옥의 네 명의 기수(죽음, 전쟁, 기아, 그리고 돌림병의 뒤를 이은 오염)들이 모두 소환된 가운데, 천사는 천사대로, 악마는 악마대로, 이 모든 것을 300년 전에 예언한 <근사하고 정확한 예언집>을 남긴 마녀 아그네스 너터의 자손인 마녀 아나테마 디바이스는 그녀대로, 마녀사냥꾼 섀드웰은 그 나름대로, 얼떨결에 마녀 사냥꾼의 조수가 된 줄 알았지만 사실은 300년전의 가업을 이은 뉴튼 펄시퍼는 또 그 나름대로 이에 대처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작가는 각주의 형식으로 어떻게 해서든 끼어들려고 하고, 진짜 적그리스도인 아담 영은 마침내 그날,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선택을 한다!

번역된 책의 분량이 무려 580여 페이지에 이르지만 다루고 있는 시간은 일주일. 아마겟돈의 그날을 향해 달려가는 여러 인물들을 마치 영화에서 짧은 컷들을 이어붙인 듯 경쾌하고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면서 달려가고 있지만, 글쎄. 너무 길었다. 다음에 무슨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으로 초반부터 잔뜩 긴장하게 하는데, 너무 오래 긴장하고 있다보니 오금이 저리고 차라리 지겨워졌다고나 할까. 뭔가 굉장한 일이 일어날 듯한 너무나 긴 긴장감. 그리고 어쩌면 당연한(!) 결말. 결국은 소설 전체의 즐거움이 저자 소개의 즐거움과 엇비슷했다.. 사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읽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한 꼭지 한 꼭지가 재치있고 재미있고 즐거운데, 이런 것을 계속 이어붙여서 몇시간이나 되는 긴 <개그콘서트>에 던져진 것처럼. 웃는 것에도 피로해지는 느낌.

소설 속에서 인간 세상에 내려와 살고 있는 천사와 악마는 인간을 좋아하고 심지어는 부러워한다. 천사는 항상 옳은 일만을, 악마는 항상 나쁜 일만을 해야하지만, 인간은 때로 천사 이상의 선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악마조차 상상하지 못한 잔인한 일을 저지르곤 한다. 왜냐하면 그건 인간이 자유의지를 지녔기 때문이다. 자각한 적그리스도 아담 영의 지적대로, 천사나 악마가 끼어들지 않아도 인간의 삶은 충분히 복잡하며, 차라리 그들이 인간을 가만히 냅두는 편이 인간에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애초에 천사나 악마가 왜 지상에 내려왔겠는가. 그 역시 인간이 불러낸 것 아닌가? 무시무시한 자연 현상들에 맞서 두려움을 느낀 인간이 신을 부르고, 신이 그에 응답하셔서 천사와 악마를 인간 세상에 내려보내신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인간이 스스로를 믿었다면, 신의 도움의 손길에 "감사합니다만, 저희끼리 해결해 보겠습니다. 안되면 말구요"라고 대답했다면, 신이 개입되지 않은 인간의 삶은 좀더 단순해졌을까. 

그러나 만약 창조주가 있어서 이 세상을 그의 뜻대로 만들어다면, 모든 것이 그의 '거대하고, 형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계획'의 일부일 것이다. 신을 부르든, 부르지 않든. 자유 의지란 것도 진짜로는 허울 뿐인. 

그래서 세상이, 진짜 의미를 가지려면 사실은 창조주가 없는 쪽이 나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뭐 지금의 나는 사실 있든 없는 결정적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상관없고 따라서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지만. <악마의 시>에 이어서 읽어서 더 그런 생각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ps1) 닐 게이먼의 책 중 세번째로 읽는 것이다. <베오울프>, <신들의 전쟁> 다음. 어쩌다 보니 쓴 것과는 정반대 순서네. <신들의 전쟁>과 <멋진징조들>은 같은 뿌리의 형제이다. 결국은 인간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ps2) 역자 후기에 테리 길리엄 감독으로 영화화될 거란 이야기가 있어서 imdb를 검색해 보았는데, 나오는 게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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