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이 넘게 책장에서 이리저리 자리만 옮겨가며 꽂혀 있던 책이 어느날 눈을 자꾸만 잡아끌었다. <렉시콘>이란 단어를 말할 때 어감이 맘에 들었다. 영단어 lexicon을 내가 발음하면 아마 영어가 모어인 사람들은 대부분 한 번에 알아듣지는 못할 것이다. 한국어는 영어의 L과 R을 거의 같은 ㄹ로 발음하니까 Rexicon이라고 말했는지 Lexicon이라고 말했는지 헷갈려하겠지. 아니 Rexicon이라는 단어는 없으니가 Rexicon이라고 들었어도 Lexicon이라고 이해해줄까? -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사람을 설득하는 것은 말이고, 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어이다. 정말로 적절한 단어는 설득을 넘어 거부할 수 없이 몸이 움직이게 하는 명령이 될 수 있다. 단어를 가장 잘 다루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고, 그래서 이 소설에는 ‘시인’(진짜 시를 쓰는 건 아니고 상징적으로 부르는 말이지만)들이 사람들을 죽이며 돌아다닌다(직접 몸에 손을 대기보다는 자살이나 살인을 하도록 만든다)! 사람을 설득하려면 먼저 그 사람을 이해해야 한다. 시인들은 짧은 시간에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구조화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조합해서 그 사람이 (아마도 이미 정립된) 몇백 개의 범주 중 어떤 범주에 속하는지를 알아낸다. 그리고 그 범주의 사람의 머리뚜껑(내 표현)을 열게 하는 단어를 그 사람에게 시킬 행동과 붙여서 던지면, 뙇! 상대방은 정확히 시인이 원하는 행동을 한다. 누우라면 눕고 달라면 주고 잊으라면 잊고 죽이라면 죽이고 죽으라면 죽고. 참 쉽좋잉? 싶지만 물론 지난한 훈련이 필요하고 (일단, 미묘한 차이만 있을 뿐인 몇백 개의 범주와 그 범주 각각에 대응하는 단어의 목록을 외운다는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그게 정말 가능하다는 학문적 배경-심리언어학, 기타 등등-부터 배워야한다) 무엇보다 시인 자신은 이런 단어의 조작에 쉽게 설득당하지-’구부러지지’- 않아야 한다. 대략 넓게는 광고 좁게는 한 사람을 타겟으로 하는 가스라이팅에 대한 느슨한 은유이다. 설득-말이 뇌에서 일으키는 화학작용 같은 것, 신경언어학과 같은 개념을 설명하고 있으니 SF라고 분류할 수 있으나. 세계관의 내적 논리가 아주 잘 맞아들어가지는 않는다. 발화되는 단어를 ’듣는‘ 청각이 일련의 뇌활동의 시작이 되는 것처럼 죽 나가다가(예를 들면 상대의 모어가 아닌 언어로 상대를 구부리기는 쉽지 않다), 모든 단어의 끝판왕, 모든 범주의 사람을 한꺼번에 구부릴 수 있는 ’날단어’에 이르면 갑자기 보기만 해도 구부러지는 것으로 설정이 바뀐다? 마치 단어 자체가 실재하는 물리적인 힘을 가진 것처럼(뇌파를 바꾸는 광선이 마구 뿜어져 나오는 건가…?). 그래서 별점을 높게 주지 않음. 번역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판타지/SF에서 특히 열린책들이 출간한 책에서 자주 보는 번역가이고 늘 괜찮았는데 이 소설은 영 꽝이다. 지나친 직역이네 싶게 대화들이 매우매우 어색하고 대명사들이 무엇을 지시하는지 몇 번을 읽어도 애매한 부분들이 많다. 초벌 번역 받아서 그대로 둔 게 아닌가 싶을 정도.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정말 내 생각인 건지. 여러가지 말들에 영향을 받은 것 이상으로 내가 구부러진 것이라면 나는 나를 구부러뜨린 말과 그 말을 처음 발화한 사람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 건가. 스스로 생각한다는 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그러라고 나를 구부러뜨리는?- 책이다. 또 하나. 시인들이 상대를 이해/파악하기 위해 던지는 중요한 질문이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왜 그것을 했습니까?‘이다. 대답하려고 열심히 생각해봤는데… 진심 모르겠다… 고로 시인들은 나를 파악할 수 없고… 나는 구부러지지 않는다… 가 아니라 나는 도대체가 나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구나…
대체로 재밌게 읽었다고 할 수 있지만… 너무 길다. 눈 앞에서 보는 듯 묘사해 내는 작가의 능력이 정말 대단하다…지만 너무 길다. 웹소설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거라는데 웹소설이란 걸 처음 읽어본다. 드라마 몰아보기한 거랑 비슷한 것 같은데… 암튼 너무 길다.읽는 내내 윤뚱의 마음을 먹어버린 카마의 모습이 궁금했다. 어떤 마구니에 붙들려 있을까? 맘 속애 키우는 카마 때문에 이 모든 짓을 저질렀다고 해도 윤뚱의 죄가 줄어드는 건 아니지민. 왜캬면 카마는 결국 자기자신이기 때문에.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무얼 보든 기승전윤수괴네. 에휴 탄핵심판이라도 빨리 끝나야지. #사바삼사라서
알라딘에서 올해의 책을 뽑혔다고 해서 읽었다. 딱 소설의 시간 -크리스마스 직전의 며칠-에 읽어서 읽는 동안 소설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추위, 고단함, 불안한 안심, 쓸쓸함, 그런 것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떠올렸다.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약한 사람들은 서로 돕지만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끌어안고 지키느라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줄 손이나 마음이 없는 거다. 그런 사람들의 삶에는 무슨 의미가 있나. 남의 삶의 의미를 생각하기 전에 내 거나 어땋게 해 보자.
은영전에 네 번째 도전 중. 무려 10년 전 첫 번째 도전에서는 3권까지, 두 번째는 2권까지, 2년 전 세 번째 도전에서는 겨우 1권 덮고 중단. 네 번째 도전에서는 1권은 패스하고 2권부터 읽고 있다. 기억보다는 ’흠좀읽을만한데!‘ 기분이라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은영전이 읽기 힘든 이유는 너무나 장르소설다운 클리셰들 때문이다. 특히 능력은 물론 외모 면에서도 먼치킨스런, 이름조차 요란한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금발에 장신에 조각같다는 외모에 대한 묘사는 이 인간이 등장할 때마다 빠지지 않아서 매번 으웩하게 되는데. 다음으로는 거대한 숫자. 전쟁에 동원되는 병의 수는 천만이 기본이다. 포로가 2백만씩 생긴다. 작가가 뭔가 과대망상적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뭐 우주는 무한히 크니까 그 속에 인간 몇 천만이라고 뭐 대단할 게 있겠냐마는…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을 너무나 하찮게 보는 것이라 거부감이 든다. 그런데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꾸역꾸역 읽는 이유는 첫째는 스페이스 오페라의 그야말로 전설적인 작품이라는 것이 허영심을 자극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위에 붙인 것과 같은 작가의 생각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 우리나라에서 또는 미국에서 민주주의란 게 돌아가는 꼴을 보면…
국가란 인간의 광기를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국가가 주체가 되면 아무리 추악하고 비열하고 잔학한 행위라 해도 사람들은 이를 쉽게 용납한다. 침략, 학살, 생체 실험과 같은 악업이 ‘국가를 위해’라는 변명 한마디에 때로는 칭송마저 받는다. 이를 비판하는 자가 오히려 조국을 모독한다고 공격을 받기도 한다.국가라는 것에 환상을 품는 사람들은, 우수한 능력을 가지고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위대한 인물이 국가를 통치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리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다. 국가권력 중추에 위치한 인간이 일반 시민보다도 사고력이 유치하고 판단력이 불건전하며 도덕 수준이 열악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물론 일반 시민보다 확실히 뛰어난 것이 있다. 권력을 추구하는 열정이다. 그것이 플러스 방향으로 작용할 경우 정치와 사회를 개혁하고 새로운 시대의 질서와 번영을 이룩하는 원동력이 되지만, 이런 사례는 전체의 1할에도 미치지 못한다. 한 왕조의 역사를 보았을 때, 그것은 대부분 당대에 이룩한 것을 10여 세대에 걸쳐 좀먹는 과정일 뿐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왕조와 국가는 매우 끈덕지고 강인한 생명체여서, 몇 세대에 한 사람 꼴로 위인이 나타난다면 세기 단위로 수명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은하제국처럼, 골덴바움 왕조처럼 부패하고 쇠약해져서는 이제 돌이킬 수가 없다. 100년 전 만프레트 2세의 개혁이 실현되었더라면 몇 세기를 더 기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자유행성동맹은 제국과 똑같이 생각할 수도 없다. 수십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위인에게 변혁을 맡기는 것 자체가 민주정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웅이나 위인이 존재할 필요성을 없애기 위한 제도가 민주 공화정이지만, 과연 이상은 언제쯤 되어야 현실에 대한 승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1권을 다 읽긴 했다. 결론은 ’아 내가 그동안 괜찮은 판타지를 꽤 읽긴 했구나.’ 그러니까 이 책은 영 아닌 판타지. <부서진 대지>의 작가도 첫 책은 어쩔 수가 없었군 (즉 난데없는 천재는 아니었군). 세계는 진부한데 자잘한 설명과 제약이 너무 많다. 인물들은 너무 도식적이다 (장르소설적으로는 규칙을 잘 따르고 있는 건가 모르겠다만).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건 순정만화적 감성! 아니 그보다는 좀더 높은 연령대를 겨냥하고 있으니 할리퀸적 감성이랄까. 읽는 내내 (그림이라면 선 하나도 제대로 그을 줄 모르지만) 순정만화 그림체의 장면이 저절로 눈 앞에 떠올랐다. 달리 보면 그만큼 묘사가 생생했다는 건가?!우리 세대의 전설적인 순정만화로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이란 작품이 있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처럼 사랑하고 싸우고 질투하고 배신하고 여하간 인간과 다름없이 온갖 희노애락을 느끼는 신들의 세계와 인간들의 세계가 얽히는 와중에, 인간 대표라 할 수 있는 넷째 딸 레 샤르휘나(“샤리”)와 신 대표라 할 수 있을 전쟁의 신이자 샤리의 ’운명의 상대(!)’인 에일레스가 주인공인데…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이 책의 두 주인공 예이네와 나하도스와 아주아주 비슷하다. <아르미안>이 30년 먼저 나옴.한편으로는 <트와잇라잇>류의 영어덜트 로맨스 판타지이기도 하다. (남들이 보기엔) 굳센 의지 외에 별것 없는 여주인공과 엄청난 힘과 그만큼 커다란 제약을 가진 어두운 남자 주인공이 서로를 구원하는…(으… 이제는 생각만 해도 으웨엑스러운…)난 왜 이런 책을 욕하면서 읽고, 읽고 나서 욕하는 글까지 쓰느라 정성을 버리는 걸까. 이게 다 <부서진 대지>가 너무나 훌륭했기 때문이다. 그 작가를 차마 이렇게 버릴 수는 없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