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여, 바다여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5
아이리스 머독 지음, 최옥영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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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지금까지 110여 권의 책을 읽었다.

그 중에 스릴러/범죄/추리 소설이 아닌 책은 손에 꼽을 정도인데... 거기에 조카에게 주면 좋을 것 같아 고른 책을 먼저 읽고 목록에 올린 것도 열 몇권 되니까(어린이책이라고 '책 이하'로 얕잡아 보지 않았다 - 또는 얕잡아 보지 마세요. 특히 뉴베리아너 수상작이라고 해서 고른 '죽은나무숲의 죽다 만 여우'를 읽고는 막 울고 조카에게 주기 아까워서(!) 한참을 더 들고 있었다. 사실 다른 어린이/청소년 독자 대상 책들도 거의 다 어른으로서 읽고 즐기기에 손색이 없었다) 읽은 책의 권수가 대단한 건 아니지만-한 권 읽는데 시간이 많이 필요한 건 아니었으니-, 그래도 조금 뿌듯해하는 건, 괜찮지.

예전에는 책을 읽으면 바로 글을 썼었었는데, 2년은 그랬나? 어느 순간부터 미루게 되더니 요즘은 다 읽은 날짜에 책 제목만 기록하는 것도 종종 까먹는다. 나는 게으른 주제에 완벽주의자이기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 다시 읽고 뭔가 추가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나름 복잡한 감상을 첫줄부터 자세히 풀어서 또 나름의 두서도 보이게 쓰려고 하므로 쓰다가 지쳐 맺지 못하고, 그런 일을 반복하다 보니 아예 시작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쓰느니 더 읽자, 라는 자기합리화도 잘 작동했고.



아이리스 머독의 <바다여, 바다여>를 드디어 읽었다. 책장에 꽂혀만 있던 게-알아보면 정확한 날수를 알 수도 있지만 그러지는 말자, 슬퍼질 것 같으니까- 강산이 한 번 변할 세월을 넘어선다(벌써 슬퍼짐). 왜 갑자기 읽었느냐 하면, 교보문고 핫트랙스에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전용 북커버를 발견했고, '엄마집' 현관문을 열면 맨 먼저 눈에 들어오게 -결혼 전에 내가- 꽂아놓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책들 중에 이 책이 갑자기 눈에 훅 들어왔기 때문이다. 딴소린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은 왜 판형을 '그딴식'으로 만들어서 보통의 북커버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아우 지금 쓸 수 있는 시간이 30분밖에 안 남았는데 아직 본론은 시작도 못 했어!) 아무튼 엄마는 내가 이 책을 빼 드는 걸 보고 엄청나게 재미없다고 하셨지만, 엄마의 취향과 나의 취향은 판타지-스릴러-범죄-추리 소설 외에는 다르기도 하니까. '재미'를 기대하고 읽을 만한 책은 아닐 거라고 생각도 했고. 그랬단 말이다...



그런데 그만 '재미'가 있었다!

시작은 취향이나 의견이나 여러가지 면에서 까탈스러워 보이는, 셰익스피어극 전문 연출가로 어느 정도 명성도 있는 찰스 애로비가 은퇴를 해서 옛 애인-첫사랑은 아니지만 첫 연인이며 그를 연극계로 이끌고 자리잡게 해준 19살 연상의 여자이고 이미 사망- 때문에 알게 된 바닷가의 어느 마을에 고딕적으로 고립된 저택을 사서 은퇴한 후 회고록/자서전을 쓸 작정으로 기록하는 1인칭 시점의 일기이다. '역사 이전'이라고 표제가 붙은 초반 장에서 어린 시절과 유일한 사촌 형제, 연극계의 지인들과 과거의 연인들이 언급된다. 그러다가 갑자기 마을에서 젊은 시절 진짜 첫사랑의 여인을 발견하면서 '역사'가 시작된다. 4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이다. 처음에는 먼발치에서 본 그녀를 수염난 '노파'라고 지칭하며 그냥 지나친다(그에 비해 자신은 파도가 있는 바다에서 맨몸 수영을 즐길 정도로 건강하고 외모도 나쁘지 않은 것으로 -스스로를- 묘사한다). 그러나 일단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자, 그 늙은 얼굴에서 자기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게 사랑했-다고 생각했-던 얼굴을 발견하고, 나름의 조사(?)를 통해 그녀가 남편에게 학대받는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 후, 그녀를 남편에게서 구출함으로써 구원하고 함께 순수한 사랑을 완성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이렇게저렇게 계획을 세우고, 결국 그녀를 납치(!)해서 고립된 자신의 바닷가 집에 가두는데, 이 때부터는 빅토리아 시대 고딕소설 분위기가 되었다가, 곧 '역사 이전'의 장에서 언급된 연극계의 지인들, 과거의 연인들, 그리고 사촌까지 바닷가의 집으로 은퇴한 그를 찾아오면서 약간 블랙코미디처럼 사람들과 사건들이 얽히다가... 한 번의 파국... 또 파국... 그러고는 해체, 해체, 그리고 잔해. 이런 사건들이 '역사'라는 몇 장이 된다.



사랑의 본질, 결혼의 의미, 사람 사이의 관계의 의미와 비대칭성, 선의善意의 의미와 주관성, 주인공의 사촌인 제임스를 통해 언급되는 티벳 불교의 일종의 신비주의적 영성, 등 읽는 내내 많은 생각이 치밀었다 가라앉다 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보다 내가 이 소설을 거의 개인적으로 받아들일 만큼 집중해서 읽게 했던 것은 이 소설이 '일인칭'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소설의 시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화자가 '나'이면 1인칭, '그'이면 3인칭. '나'가 주인공이면 1인칭 주인공 시점, 아니면 1인칭 관찰자 시점, 기타 등등, 끝이었다. 이 소설은 철두철미하게 '나'의 시점으로 서술된다. '나'가 보는 것, '나'에게 보이는 것, '나'가 생각하는 것, '나'가 느끼는 것, '나'가 한 일,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나'가 기록한 것이다. 보통의 일인칭 시점의 글은 읽는 사람이 쓴 사람에게 생각과 감정을 어느 샌가 이입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가 서술하는 사실이-그것이 서술자 '나름의' 진실이라고 해도- 진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이 찰스 애로비라는 '나'는, 너무나도 자기중심적이고 끊임없이 자신을 합리적이라고 '강변'하면서 사실에 자기나름의 의미를 '진실'이라고 주장하기에 오히려 사실조차 정말 모호하게 만든다. 그는 이미 모든 답을, 그것도 정답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지지하는 사실들만 의미있다고 채택하고 그렇지 않는 사실들은 '합리적'인 이유를 붙여 내친다. 연극에서 연출가로 무대의 모든 것을 컨트롤했던 것처럼 삶에서도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모든 깊은 생각과 의도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줄을 당겨 그들의 행동과 삶을 컨트롤하려고 한다. '역사 이전'의 은퇴해서 조용한 삶 속에서 회고록을 집필하려고 한다는 -까탈스럽지만- 현명할 것도 같은 노인은 '역사' 속에서 이기적으로 끊임없이 자기합리화를 하며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려는 나쁜 본모습을 드러낸다. 혐오스러울 지경이었다.그리고 '역사 이후',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물론 이 수다스러운 일기는 외관에 불과하다. 질투, 양심의 가책, 공포,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도덕적 실패 등 내부의 파괴를 숨기는, 매일 미소 짓는 얼굴과 같은 문학의 등가물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면이 위로가 될 뿐 아니라 약간의 용기도 생산할 수 있다.

<바다여, 바다여 2> pp. 399-400

그렇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 그의 일기에 가까운 것이다. 일기란 -기본 전제로- 누구에게 읽히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다. 상정할 수 있는 독자가 있다면 그것은 미래의 자신일 뿐이다. 찰스 애로비도 -특히 '역사'가 끝난 후이니만큼- 자기 일기를 다시 읽는다면 이기적인 휘어짐과 자기합리화에 조금은 냉소했을까. 그는 "앞에서 내가 얼마나 이기주의자로 보였을까?"(<바다여, 바다여 2> p. 397)라고 썼다. 그러나 곧 이어서 "그러나 내가 그렇게 특이한가? 우리는 이성보다 더 훌륭하고 비밀스럽고 생명력 넘치는 분주한 내적 본질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자기만족이라는 빛에 의하여 살아가야 한다"라고 썼다. '자기만족'이란 빛을 위해 살아가는 이기주의자. 그걸 덮기 위한 가면으로서의 일기. 나에게는 이런 종류의 위악을 가장한 위선이 정말 혐오스럽다. 왜냐면 그게 바로 내가 나쁜 일이 있었던 날 자괴감을 쏟으며 자조하는 일기을 쓰면서 느끼는 뒤틀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찰스 애로비에게서 그만 '나'를 본 것이다.

우리는 비밀이 매우 많은 사람들이야. 그 내적인 깊이가 가장 놀라운 점인데, 우리의 이성보다 더 놀라운 것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러나 우리는 그냥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주위를 살필 수는 없어. 우리 마음에 대하여 우리가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거의 다 가짜 지식이야. 우리는 모두 충격적일 만큼 잘난 척하는 사람들이야. 우리가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중요성을 과장하는 데 뛰어난 재주가 있지. 스테시코로스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이 헬레네의 유령을 위하여 싸웠다고 말해. 유령 상품을 위한 헛된 전쟁.

<바다여, 바다여 1>, pp. 292.

찰스 애로비의 사촌인 제임스가 -위의 인용에서- 말한 대로, '역사 이후'에서 그는 '역사'에서 자기가 만들고 치른 사건들이 '유령 상품을 위한 헛된 전쟁'이었다고 말한다. 내 생각에 그것은 자기 마음에 대해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가짜라고 인정하지 못해서, 혹은 자기만족의 빛이 너무 강해서 알아챌 수가 없어서였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만큼 다른 사람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런 어리석음으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일부라도- 조종하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나도 종종 일기를 쓴다. 어렸을 때는 힘들고 나쁜 일이 있는 날에 일기를 더 많이 썼다. 위에서 썼던 대로 자괴감에 사로잡혀 자조하는 글을 썼다. 그런 날들의 일기를 어쩌다 읽어보면 솔직히 토할 것 같을 때가 많다.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라는 독자의 반응으로서는 결코 기대하지 않았겠지. 이제는 아무런 사건이 없었던 날 또는 즐거웠던 날 일기를 쓰려고 노력한다. '과거는 과거를 파묻으며 침묵으로 끝나도록'<바다여, 바다여 2>, p427), 그러나 아무 사건이 없어서 평온했던 날 또는 즐거웠던 날의 기억으로부터는 위로를 얻을 수 있도록, 과거를, 기억을, 나 자신을 조작한다. 실수로 다른 독자가 생기지 않도록 죽기 전에 꼭 다 없애고 죽을 그런 일기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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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숨겨진 건 죽음
앤서니 호로위츠 지음, 이은선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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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디음 권을 내놓아라 열린책들과 번역가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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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2019-1-26
<고도를 기다리며>가 연상되었다. 찾아보니 <고도를 기다리며>가 5년 먼저 출간되었네. 대령의 기다림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기다림보다 덜 무의미해 보이긴 하다. ‘무無의미’, 즉 ‘없음’의 상태에서 ‘덜’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데...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기다림의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오래되어 제대로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래, 기다리기라도 하지 않으먄 얘네들이 무엇을 하겠어...’ 했던 것 같다. 대령의 기다림은 다르다. 그의 기다림은 자존심을 넘어서 자기 존엄을 주장하는 행동이다. 수탉은 그 행위의 작은 깃발이고. 그야말로 ‘똥’을 먹더라도, 버릴 수 없는 자기의 가치. 인간이란 무엇을 먹느냐로 정의되는 존재가 아니기에.

*)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은 괴상한 책크기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게다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이 소설은 짧은 중편 분량인데 소설 뒤에 거의 소설 분량만큼의 역자 해설과 작가의 자세한 연보를 붙여서 156면의 책으로 만들어냈다. 애쓴다... 더 문제는 역자 해설이 너무나 졸문이라는 것이다. 내용보다 문장 자체가. 쓰기 싫어 억지로 쥐어짜낸 글 같다.

2026/5/17

어떤 서평을 보고 -집에 종이책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사놓고 읽지 않은 채 쌓여있는 책들 중에 있지 않다는 확신이 없어서- 굳이 전자책으로 다시 구매해서 읽다가 7년 전 메모를 찾아봤다. 있었다. 그런데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소설 자체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이번에 읽으면서는 <고도를 기다리며>는 거의 생각나지 않았다. 7년 전 고도를 떠올렸던 건 아마 고도를 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른다. 대신 <노인과 바다>가 생각났다. <노인과 바다>를 읽은 것은 아주 오래된 일인데도. 대령의 ‘기다림‘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일이라기보다 노인이 청새치와 싸워 잡아서 배에 묶은 후 상어들에게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고기를 버리지 않고 항구로 귀환하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7년 전에는 분명 대령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에 약간의 비웃음이 있었고, 대령의 아내에게 공감했는데 지금은 대령의 옆에 서있고 싶다. 글쎄. 대령의 기다림은 삶 자체이고 그 의미를 긍정하는 행동이다. 삶의 결국은 무의미로 수렴하겠지만 결국으로 가는 과정은 그럴 수 없다.

덧) 역자 해설도 이번에는 읽을 만한데? 7년 전에는 왜 그렇게 짜증을 냈을까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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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사랑의 힘
박서련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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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지게(사랑을 하게?) 되면 특별한 능력을 갖도록 만드는 세균(Mycoplasma라니 바이러스 아님. 작가가 이런 건 알고 썼을 거라 생각하고 싶다. 이 세균이 몸속에서 활약하는 걸 보면 바이러스가 더 어울릴 것 같지만)이라니. 이런 게 창궐하는, 아니 각국 정부가 수돗물에 풀어 의도적으로 퍼뜨려진 세상에서 사랑이라니. 이걸 상상해낸 작가가 대단하고 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괜찮은 소설을 써낸 것도 대단하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다른 일을 하느라 책을 손에서 놓고 있을 동안에도, 내 머릿속에서는 '로로마'라는 단어로 꽉 차 있었다. 아마 며칠은 그럴 것 같다. 이 로로마란 놈이 그렇게 깜찍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하게(사랑에 빠지게?) 되었을 때의 호르몬 상태에서 활성화되는 로로마는 그 사람에게 이전에는 없었던-혹은 별볼일 없었던- 능력을 갖게 한다. 그것은 원래 인간이라면 할 수 없었던 일, 그러니까 초능력은 아니다. 사랑을 한다고 해서 새처럼 하늘을 난다거나, 눈 한 번 깜빡하면 이곳에서 저곳으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소설에서 보여준 사례는 뛰어난 점프력(점프란 팔다리가 멀쩡한 사람이면 누구나 최소한 폴짝 수준으로는 할 수 있는 것), 수학을 갑자기 잘 하게 되는 것(입시에 매우 큰 도움), 과거의 일에 대한 선명한 회상(과거를 되돌아보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됨), 알지 못했던 언어를 갑자기 알아듣고 말할 수 있게 됨(이게 가장 탐났던 능력), 술을 엄청나게 마셔도 다음 날 아무 문제 없이 가뿐하게 일어난다거나(이건 체질적으로 술이 센 사람에게는 안 생기겠지), 후각이 예민해진다거나, 뛰어난 청각, 심지어 진짜 예뻐지기도 한다. 그럼 이런 능력들은 내가 평소에 갖기를 원했던 것이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강화되는 능력은 철저히 랜덤이다. 그러니까 아 외국어 공부는 하기 싫은데 모든 나라의 말을 다 알아듣고 자유자재로 말하고 싶다, 그러니 사랑을 해야겠다, 로로마, 도와 줘!, 이런 건 안된다는 거다. 게다가 이 능력은 사랑에서 빠져나오면 사라진다. 그러니까 에를 들면, 수학을 잘 하게 되어 대입에 큰 도움을 받은 친구가 수학과로 진학했다면 졸업할 때까지 전심으로 그 사랑을 지켜야겠지. 전혀 모르는 언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다가 로로마의 도움으로 말문이 트인 사람이라면, 그곳을 빠져나가기 전까지는 사랑을 지켜야 한다. 또 사랑은 스펙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처럼 교육의 모든 과정이 '좋은 대학 좋은 과'를 목표로 경쟁적으로 달리는 곳에서는 내가 못하는 과목을 잘하는 능력이 생길 때까지 사랑에 빠지고 벗어나기를 반복할 수 있도록 매칭플랫폼 같은 것이 반드시 생기고 번창할 것이다.


로로마가 디폴트인 곳에서, 사랑이란 무엇일까? 나의 감정은 이게 사랑이라고 말하는데 나한테 뚜렷한 능력이 생긴 게 없다면 그건 사랑이 아닌 걸까? 로로마 때문에 내가 바느질을 엄청 잘 하게 되었는데 바느질을 할 일이라곤 없어서 그런 능력이 생겼는지 모를 수도 있지 않을까? 내 사랑이 아니라 상대방이 변해서 헤어지게 되면 로로마로 강화된 능력이 유지된다. 그렇다면 나의 연인이 이전 연애에서 얻었던 능력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면 아직도 전여친을 잊지 못하다니 그럼 나는 뭐냐, 이렇게 되는 걸까? 새롭게 연애를 할 때마다 이전의 연애를 완전히 잊지 못한 사람은 절정기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로로마로 강화된 능력을 어느 정도는 유지하고 있을 수 있다. 다재다능을 위해 사랑을 이용할 사람도 있지 않을까? 사랑을 이용하지 말라는 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왠지 사랑은 이해관계 바깥에 있어야만 할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 자체 이외의 것을 원하는 것도 사랑의 일부일까?


로로마가 없는 세상에서도 사랑은 특별한 능력, 이전에는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을 감행하게 하는 능력을 부여한다. 샤워나 온천욕장이 아니면 물에 발 담그는 것도 꺼렸던 사람이 수영을 배우고, 계단으로 3층까지 올라가는 것도 헉헉대던 사람이 징징거릴지언정 산에 오른다. 네. 제 얘기입니다. 로로마가 없는 세상에서 사랑은 스펙이 될 수 없다. 스펙 쌓자면 사랑은 '따위'로 밀어넣고 열공 열일을 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로로마가 없는 편이 낫겠구나. 급 허무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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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게이트우드 할머니의 발자국 - 숲으로 걸어간 할머니, 엠마 게이트우드의 놀라운 여정
벤 몽고메리 지음, 우진하 옮김 / 수오서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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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떻게 알게 된 책인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보자마자 집었고 다운로드 받자마자 읽기 시작해서 끝까지 거의 한눈 팔지 않고 읽었다.

엠마 게이트우드가 대단한 건 그 나이-요즘이야 67세면 그다지
많은 나이라고 여겨지지 않지만 1950년대에는 그야말로 ‘노인’이었을-에 3500km나 되는 애팔래치안 트레일-그냥 평지3500km라고 해도 입이 딱 벌어질 텐데 수십 개의, 최고봉은 1900미터나 된다는 산까지 오르내리게 되는 그런 트레일-을 6개월 가까이 걸어서 한 번에 완주한 ‘업적‘ 때문이 아니라, 그걸 ’그냥 해보고 싶어서’ 걸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연과 가까이 하는 삶’같은 미사여구를 위해서, 그런 걸 다른 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할 수 있으니 한다는 것. 그런 태도는 결혼한지 3개월이 지나면서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대공황과 -미국 본토에서 벌어졌더누건 아니지만 아들 둘이 참전한- 전쟁을 거치며 11명의 자녀를 키우고 농장을 건사하며 살아온 그녀의 삶 전체의 태도이기도 하다.

스케이트를 신고 얼음판 위에서 제대로 설 수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김연아를 보며 같은 한국인이라는 게 어쩐지 으쓱한 것처럼, 등산은 내가 싫어하는 것들 목록에서 아주 상위에 있지만서도, 읽는 내내 엠마 게이트우드 할머니와 같은 종-호모 사피엔스-이라는 것이 기뻤다.

좀 다른 얘긴데, 트레일 위에서 노숙도 마다하지 않는 그녀를 보며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담고 있는 경구, ‘굶기를 각오하라 그리하면 자유로워질 것이다’를 떠올렸다.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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