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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 지다 - 하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2월
평점 :
壬生義士傳
Asada Jiro 浅田次郎 (2000) / 양윤옥 역 / 북하우스 (2004)
상권 2016-7-28 ~ 2016-8-1
하권 2016-8-2 ~ 2016-8-3
읽은 지 꽤 된 책이다.
<낙하산 타고 온 그들 때문에 엄마는 셋째를 낳을 수 없다>라는 특이한(!) 제목의 칼럼에 이 소설의 일화가 인용되어 있어 알게 되었는데 (˝“아버지, 어머니를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그리고 어머니, 셋째를 꼭 낳아주세요. 저는 전혀 배고프지 않습니다. 저는 먹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울다 지쳐 잠든 동생을 업은 채 아홉 살의 장남은 그렇게 외쳤다. 수년간의 기근을 견디다 못해 먹는 입 하나 줄일 요량으로 뱃속의 아기와 연못에 뛰어들었다 겨우 살아난 어미였다. 세찬 북풍이 부는 연못가에서 아비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아홉 살 짜리에게 저런 대사를 주는 작가는 누구냐 궁금해서 검색했다가 집안이 몰락한 후 야쿠자 생활을 하다가(지금 뉴스 검색해 보니 본인은 부인) 40세에 데뷔했다는 이력에 동하여 읽게 되었다.
원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막부 말기의 혼란기를 배경으로 한 북방(아마도 자연환경조차 살기에 유리하지 않은 지역인 듯) 출신의 의로운 선비(일본이니까 사무라이) 요시무라 간이치로의 일대기이다.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일본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척박한 땅인 난부 번의 말단 무사이다. 노력 끝에 학문과 검술에 모두 달인의 경지에 올랐지만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그런 능력은 생활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해서 결국 위에 소개한 일화와 같은 사건을 겪은 뒤, 탈번(이것은 주군을 저버리는 엄청난 죄이다)을 감행하고 에도로 가서 돈을 많이 준다는 이유로 신센구미(막부 말기 교토의 치안유지를 위해 창설되었지만 결국은 마지막까지 막부를 지키는 결사대가 된, 하지만 떠돌이 무사-낭인浪人-들이 대부분이라 정통 사무라이들에게는 사실 경시되었던)에 입단, 훌륭한 인품과 뛰어난 검술 실력으로 여차여차하여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전쟁에서 활약을 하다가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의義를 지켜냈다.
`이래도 감동받지 않을 거야?, 이래도 울지 않을 거야?`라는 식으로 씌여진 소설이라 책장도 빨리 넘어가고, 어느 대목에서는 -지금은 어느 대목이었는지 까먹었는데- 눈물도 찔끔 흘렸지만, 그보다는 읽는 내내 답답하고 딱하고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시무라는 `개인`이 뭔지 몰랐던 봉건시대의 인물이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로, 어느 신분의 부모에게서 출생하느냐에 따라 신체와 정신의 운명까지 결정되어 버리는 봉건시대. 그 시대의 끝자락에서 난부 번 말단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역시 말단 무사가 된 요시무라가 어떤 판단을 내릴 때 그 준거는 오직 `주군主君의 뜻`이다. 그는 가족들을 모두 굶겨 죽일 지경에 이르게 되어 정말 눈물을 머금고 난부 번을 이탈함으로써 자신의 직접 주군이자 깊은 우정을 나눈 번주 오노 지로에를 배신한 셈이 되었지만, 진정한 주군이라 할 수 있는 천황에 대한 충忠과 성誠은 끝까지 지켜서 결국 의사義사士로서 생을 마감한다. 죽음을 눈앞에 둔 독백에서 요시무라는 자신의 주군은 난부 나리님이나 조상님이 아니라 아내와 자식들이었다고 고백하지만, 정말 요시무라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는 -탈번을 결심할 때와 마찬가지로- (개)죽음의 강요에 굴복하면 안 되었고, 그렇게 죽음의 자리에서 뛰쳐나왔다면 아마도 `의사義士`로 기억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것이 봉건 시대의 한계이고, 그 시대에 충실하였던 요시무라의 한계이다.
이런 봉건적 인물이, 인간이 각자 독립된 인격체로서 그에 상응하는 사회에 대한 책임을 갖고, 리더를 따를지언정 자신의 운명을 쥔 주군을 인정하지 않는, 즉 `시민으로서의 개인`이 발견된 근대 이후 현대의 우리들에게 주는 메시지란 게,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요시무라는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아내와 자식을 끔찍이 사랑했으며, 또한 사랑과 존경을 받는 남편이자 아비였고, 동지들에게 신의를 지킨 진정한 친구였다. 그렇지만 그가 죽음에 이르러 `의義`랍시고 선택한 것을 긍정할 수는 없으며, 그것을 현대에 이르러 무슨 귀감으로 내보인다는 것은, `이래도 감동받지 않을 거야?`라는 식으로 현대의 독자들에게 들이민다는 것은, 그저 `그 시대를 기억하는 노인들의 향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요시무라와 신센구미의 시대는 막부 말기, 일본이 봉건 시대를 벗어나려고 하는 매우 극심한 혼란기였다(이후 일본에서 진짜 봉건 시대를 벗어나 근대적 인간이 확립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따라서 시야를 넓게 가지고 자기 나름의 세상 보는 눈으로 미래의 비전을 찾으려고 한 인물도 당연히 있었다. 아마 (잘은 모르지만) 사카모토 료마와 같은 인물이 그랬을 것이다. 사카모토 료마도 요시무라처럼 어느 번(도사 번)의 말단 무사였다. 탈번도 했다. 그리고 서양 세력의 도전에 맞서, 막부와 번을 넘어 새로운 일본에 대한 비전을 세우고 그를 위해 뛰었다. 탈번했지만 난부 무사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끝까지 탈번을 괴로워하며, 두 번의 배신은 하지 않겠다고 죽음을 받아들인 요시무라와는 아주 다른 인물이었다. 현대 사회에도 매력적인, 따라서 불러올 만한 인물은 당연히 의사義士 요시무라 간이치로가 아니라 풍운아風雲兒 사카모토 료마라고 생각한다.
쓰다 보니 길어졌는데, 읽고 나서 두 달 동안 기억 속에 처박아 두었던 것을 새삼 꺼내서 생각하게 된 것은 집권 여당 대표인 이정현 의원의 단식 때문이다. 오늘-날 지났으니까 6일째 단식에 그만 몸져 누워 버린 분을 비웃기는 민망하지만, 정말 딱하기 이를 데가 없다. 이분을 보면 공주마마를 주군으로 모시는 가장 충성스러운 사무라이-내시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가 이럴까 싶다. 주체적 개인으로서의 생각과 비전은 없고, 오직 주군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봉건 시대의 사무라이. 사심私心은 없다. 사람으로 보면 소탈하고(선거 운동 기간 내내 점퍼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 혼자서 지역구를 돌며 유권자들과 소통하였다니) 정도 깊고 우직해 보인다. 그러면 뭐 하나. 자기 생각과 비전이 없는데. 주군이 훌륭한 사람이면 그에 편승해서 세상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주군이 악당이면 그저 악당 하수인으로 세상에 비참함만 더하는 것을. 공주마마의 진정한 목표는 자기 주변을 이런 얼빠진 가신 사무라이들로 채워서 시대를 돌려 봉건제로 돌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이 다소 잘못되더라도 그 사무라이들이 할복으로 자기는 지켜줄 테지. 우리는 어째서 지난 선거에서 이 봉건 시대의 가치관을 가진 일당들의 주군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나라꼴이 화나고 우습고 이제는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