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영전에 네 번째 도전 중. 무려 10년 전 첫 번째 도전에서는 3권까지, 두 번째는 2권까지, 2년 전 세 번째 도전에서는 겨우 1권 덮고 중단. 네 번째 도전에서는 1권은 패스하고 2권부터 읽고 있다. 기억보다는 ’흠좀읽을만한데!‘ 기분이라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은영전이 읽기 힘든 이유는 너무나 장르소설다운 클리셰들 때문이다. 특히 능력은 물론 외모 면에서도 먼치킨스런, 이름조차 요란한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금발에 장신에 조각같다는 외모에 대한 묘사는 이 인간이 등장할 때마다 빠지지 않아서 매번 으웩하게 되는데. 다음으로는 거대한 숫자. 전쟁에 동원되는 병의 수는 천만이 기본이다. 포로가 2백만씩 생긴다. 작가가 뭔가 과대망상적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뭐 우주는 무한히 크니까 그 속에 인간 몇 천만이라고 뭐 대단할 게 있겠냐마는…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을 너무나 하찮게 보는 것이라 거부감이 든다.

그런데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꾸역꾸역 읽는 이유는 첫째는 스페이스 오페라의 그야말로 전설적인 작품이라는 것이 허영심을 자극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위에 붙인 것과 같은 작가의 생각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 우리나라에서 또는 미국에서 민주주의란 게 돌아가는 꼴을 보면…

국가란 인간의 광기를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국가가 주체가 되면 아무리 추악하고 비열하고 잔학한 행위라 해도 사람들은 이를 쉽게 용납한다. 침략, 학살, 생체 실험과 같은 악업이 ‘국가를 위해’라는 변명 한마디에 때로는 칭송마저 받는다. 이를 비판하는 자가 오히려 조국을 모독한다고 공격을 받기도 한다.
국가라는 것에 환상을 품는 사람들은, 우수한 능력을 가지고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위대한 인물이 국가를 통치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리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다. 국가권력 중추에 위치한 인간이 일반 시민보다도 사고력이 유치하고 판단력이 불건전하며 도덕 수준이 열악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물론 일반 시민보다 확실히 뛰어난 것이 있다. 권력을 추구하는 열정이다. 그것이 플러스 방향으로 작용할 경우 정치와 사회를 개혁하고 새로운 시대의 질서와 번영을 이룩하는 원동력이 되지만, 이런 사례는 전체의 1할에도 미치지 못한다. 한 왕조의 역사를 보았을 때, 그것은 대부분 당대에 이룩한 것을 10여 세대에 걸쳐 좀먹는 과정일 뿐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왕조와 국가는 매우 끈덕지고 강인한 생명체여서, 몇 세대에 한 사람 꼴로 위인이 나타난다면 세기 단위로 수명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은하제국처럼, 골덴바움 왕조처럼 부패하고 쇠약해져서는 이제 돌이킬 수가 없다. 100년 전 만프레트 2세의 개혁이 실현되었더라면 몇 세기를 더 기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자유행성동맹은 제국과 똑같이 생각할 수도 없다. 수십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위인에게 변혁을 맡기는 것 자체가 민주정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웅이나 위인이 존재할 필요성을 없애기 위한 제도가 민주 공화정이지만, 과연 이상은 언제쯤 되어야 현실에 대한 승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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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십만왕국 유산 시리즈 1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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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권을 다 읽긴 했다. 결론은 ’아 내가 그동안 괜찮은 판타지를 꽤 읽긴 했구나.’ 그러니까 이 책은 영 아닌 판타지. <부서진 대지>의 작가도 첫 책은 어쩔 수가 없었군 (즉 난데없는 천재는 아니었군).

세계는 진부한데 자잘한 설명과 제약이 너무 많다. 인물들은 너무 도식적이다 (장르소설적으로는 규칙을 잘 따르고 있는 건가 모르겠다만).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건 순정만화적 감성! 아니 그보다는 좀더 높은 연령대를 겨냥하고 있으니 할리퀸적 감성이랄까. 읽는 내내 (그림이라면 선 하나도 제대로 그을 줄 모르지만) 순정만화 그림체의 장면이 저절로 눈 앞에 떠올랐다. 달리 보면 그만큼 묘사가 생생했다는 건가?!

우리 세대의 전설적인 순정만화로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이란 작품이 있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처럼 사랑하고 싸우고 질투하고 배신하고 여하간 인간과 다름없이 온갖 희노애락을 느끼는 신들의 세계와 인간들의 세계가 얽히는 와중에, 인간 대표라 할 수 있는 넷째 딸 레 샤르휘나(“샤리”)와 신 대표라 할 수 있을 전쟁의 신이자 샤리의 ’운명의 상대(!)’인 에일레스가 주인공인데…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이 책의 두 주인공 예이네와 나하도스와 아주아주 비슷하다. <아르미안>이 30년 먼저 나옴.

한편으로는 <트와잇라잇>류의 영어덜트 로맨스 판타지이기도 하다. (남들이 보기엔) 굳센 의지 외에 별것 없는 여주인공과 엄청난 힘과 그만큼 커다란 제약을 가진 어두운 남자 주인공이 서로를 구원하는…(으… 이제는 생각만 해도 으웨엑스러운…)

난 왜 이런 책을 욕하면서 읽고, 읽고 나서 욕하는 글까지 쓰느라 정성을 버리는 걸까. 이게 다 <부서진 대지>가 너무나 훌륭했기 때문이다. 그 작가를 차마 이렇게 버릴 수는 없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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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세트] 유산 시리즈 (총4권)
N. K. 제미신 / 황금가지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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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의 절반 좀 안 되게 읽었는데… 이게 <부서진 대지> 작가의 책이란 게 믿기지 않는다.

여러 신화의 짬뽕 같은 세계에다가 하이틴 로맨스의 도입부 같은 남녀(?) 주인공(?)의 만남과 대화와 분위기… 여고시절 신일숙의 순정만화 <아르미안의 네 딸들>은 여고생이니까 정신없이 빠져서 읽을 수 있었지만 지금의 나는, 특히 <부서진 대지>의 작가에게서, 한 겹 벗길 것도 없이 그래서 게으르게 말랑한 이런 이야기를 기대한 것이 절대 아니란 말이다. 머리가 아프려고 하는데… 일단 1권은 다 읽을 거다. 1권 끝까지 살릴 만한 이유를
찾지 못하면… 으. 이래서 내가 데뷔작은 잘 읽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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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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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 노벨문학상을 탄 김에, 종이책을 사다 놓은 걸 잊고 전자책까지 내려받은 것도 오래 된 이 책을 드디어 읽었다…

역시 한강의 문장은 아름답다. 한 땀 한 땀 단어들을 골라 끈질기게도 아름다운 산문을 썼다. 눈 속에서 헤메게 되는 1부는 아름다운 데다가 스릴러처럼 책장을 넘기며 읽었다. 그러나 2부부터는… 그 증언이 우리나라의, 나의 역사이기 때문에 절대 소설 작품으로서만, 호오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어떤 도의적(!)인 마음의 걸림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지만… 화자와 시점이 일종의 마술적 공간에서 바뀌고 겹치고 하는 것 외에 증언들-그 증언들이 아무리 날것으로 생생한 것을 그대로 갖다가 썼다고 해도-의 나열을 넘어서는 뭔가가 보이지 않았다. 똑바로 바라보지조차 못했던 것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의미라면 그렇구나 할 정도. 역시 한강은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아니었다. <소년이 온다>는 아직 읽지 않았는데 창비가 전자책 낼 때까지 미적거릴 수도 있겠다 (종이책은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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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맥파이 살인 사건
앤서니 호로비츠 지음, 이은선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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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무느무 재밌다. ‘재미’만으로 별 다섯 개가 아깝지 않다. 액자 안의 추리소설도 재미있지만 그 소설 뿐이었다면 재미 외엔 남는 게 없다 그러니 별 넷, 했겠지만, 액자 바깥의 ’되고 싶은 나‘와 ’되어 버린 나‘ -셜록 홈즈를 라우헨바흐에서 밀어버린 코난 도일 경 같은- 의 이야기가 붙어 아주 새로운 소설을 만난 기분이다. 이 작가의 <셜록 홈즈: 모리어티의 죽음>은 그냥 추리소설일 뿐이었는데. 내친 김에 다른 책들-<죽요한 건 살인>과 <숨겨진 건 죽음>-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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