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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발론 연대기 1 - 마법사 멀린
장 마르칼 지음, 김정란 옮김 / 북스피어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나는 비소설보다는 소설을(소설은 기본적으로 있을 '법한', '꾸며낸' 이야기이므로 내 맘에 들지 않으면 무로 돌려버릴 수 있지만 비소설은 그럴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단편보다 장편, 장편만큼 '연대기'를 좋아한다. 왜냐면 연대기에는 '그후로도 오랫동안 그들은 행복하게(말하자면 그렇다는 이야기) 살았습니다'를 할 수 있는 한 자세히 설명해주기 때문에, 이야기를 더욱 삶에 갖다 붙게 만든다. 그리고 물론 역사 대하 소설보다는(이건 아무래도 진짜 역사에 터를 대고 있어서 맘에 안든다고 취소해 버리는 일이 간단하지 않기 때문에) 판타지나 신화의 연대기를 좋아한다. <아발론 연대기>는 이런 나의 취향에 잘 맞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날 알라딘을 하릴없이 클릭하며 돌아다니다가 이 책을 발견했을 때, 처음부터 오홍!하고 잡아챘던 것은 아니다. 왜냐면 어렸을 때 분명 꽤 두꺼운 (그 당시에는 문고판 시집도 두껍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들' 이야기를 읽었고, 원탁의 기사들의 이름도 좀 기억이 났으며 (랜슬럿, 퍼시벌 같은 유명한 이름은 물론이고, 가아웨인, 갤러헤드?, 유우웨인? 같은 좀 덜 유명한(?) 이름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보니 1권의 소제목이 <마법사 멀린>이었다. 음. 생각해보니 멀린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구나. 그리고 다시 보니 어랏, 반값이네! 이래서 집으로 데려오게 된 것이다. 결정적으로 반값이 아니었다면 매끈한 표지로 책값을 올렸다고 분개하곤 그냥 지나쳤겠지.
그런데 시작하고 보니, 내가 꽤 만만찮은 이야기 속에 발을 담그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멀린. 그 출생부터 충격적이다. 몽마, 인큐버스라니. 그리스도 탄생의 사악한 거울상이었다니.
그리고 모르간. 이 여자에 대해서도 거의 아무 것도 몰랐었다. 모르간에게 아예 할당된 한 권이 있으니 이후에 더 충격을 먹겠구나.
그리고 저자와 역자 후기에서 알게된 '역사적' 인물 아서의 진상. 어쩐지. 왜 영국 왕의 이름이 찰스 아니면 에드워드 아니면 존 아니면 헨리는 계속 되풀이되는데 그 유명한, 언젠가 영국 땅에 와서 다시 왕이 될 것이라는 아서의 아서 2세, 아서 3세는 없는 것인지 이제서야 알았다.
그리고 아서왕 이전의 켈트왕의 역사. 이건 중국의 요 임금, 순 임금,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 등과 다를 것도 없어 보인다.
하여튼 세상은 넓고 오래된 것이었고, 그 넓고 오래된 세상의 땅들은 땅마다 민족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야기들을 끝도 없이 품고 있는 것이었다.
아직 '켈트' 신화라는 것이 그리스 로마 신화나 고대 중국처럼 어렴풋하게라도 잡히는 건 아니지만. 특히 '드루이드교'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이야기로서 충분히 매력적이고 따라갈 만하다. 게다가 이 켈트 신화라는 것이 기독교가 유럽을 덮기 전에는 문자화되지 않았고, 문자화되면서는 기독교 전승에 교묘하게 맞춰짐으로서 그 원래 의미를 더 따라잡기 어렵다는 것도 읽는 재미의 일부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남의 나라 역사 신화를 읽다 보니, 내가 또 우리 나라 역사와 신화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구나 새삼 느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연대기에 비할 책이라면 삼국유사가 될까? 그렇다면 이 책을 다 읽고 삼국유사나, 이미 데려다 놓은 이이화의 한국사 책을 읽어야겠군..
한가지 짜증난다면, 저자 주는 양이 많지 않으니 그렇다쳐도, 역자 김정란의 주석은 너무 과하다. 특히 '~을 유념할 것.' 식의 주는, 먼저 책을 읽은 누군가가 여백에 자신의 생각을 메모한 식이고 강의하고 자기의 생각을 강요하는 느낌이어서 매번 인상을 찌푸리게 되었다. 켈트 신화의 해석에 대한 책을 쓸 거라면서 뭐하러 그런 주를 달아놨는지 모르겠다. 이야기를 읽는 이의 자유에 완전히 맡기려면, 아무리 아는 만큼 보게 되니 많이 알고 보시라는 노파심이라고는 해도, 그런 식의 주는 좀 자제해 주었으면 좋겠다.
하여튼, 일단 발을 들여놓았으니 앞으로 며칠 간은 다음엔 무슨 책을 읽을까 고민없이 이 연대기를 따라가면 되겠다. 무려 여덟권이다. 기대 만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