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징조들 그리폰 북스 2
테리 프래쳇.닐 게이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책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은 항상 저자 소개, 그 다음으로 역자 소개 (역자가 있다면), 그 다음으로 출판 기록 (원서는 언제 초판, 번역본은 언제 초판, 내 손에 들어온 책은 몇 쇄인지)이다. 그러니까 나는 표지부터 한장씩 넘겨가면서 속표지도 몽땅 읽고, 차례도 읽고 본문으로 들어간다.

따라서 이 책 <멋진 징조들>의 두꺼운 겉표지 바로 안에 들어 있는 저자 소개를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그러니까 언젠가 저자 소개를 꼼꼼히 읽는 이들을 위한 상(!)이 있을 줄 알았다. 네이버 글감 불러오기에 오류가 있어서 저자가 닐 게이먼 한 사람밖에 안 떴지만, 사실 이 책은 테리 프레쳇과 닐 게이먼의 공저이고, 앞표지 안쪽에 테리 프레쳇의 약력이, 뒷표지 안쪽에 닐 게이먼의 약력이 들어있다. 둘다 시도해봐야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바나나 다이커리에 대한 애정을 (사실 닐 게이면은 바나나 다이커리보다는 그걸 사 먹으라고 팬들이 부쳐주는 돈에 더 관심이 있어하는 것 같지만) 언급하고 있다. 테리 프래쳇 씨, 그리고 닐 게이먼 씨! 혹시나 만나게 된다면 정말 바나나 다이커리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를 한 잔씩 꼭 사드리지요! ^^ 

 

아무튼 저자 소개부터 범상치 않게(!) 시작하는 이 책은, 묵시록의 그 전쟁, 아마겟돈이 벌어지기 전 일주일간의 긴박한(!) 상황에 대한 장황한 농담이다. 

이제 인간 세상에 아마겟돈을 내릴 만한 시기가 적당히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마왕 (또는 하나님? 아무튼 그 모든 것은 하나님 외에는 결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놀랍고 원대한 계획의 일부이니까 말이다)이 적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는데, 수다스러운 악마 숭배 수녀들의 헛짓으로 아기가 바뀌어, 진짜 적그리스도는 천사든 악마든 누구의 눈길도 닿지 않는 조용한 인간 시골 마을에서 평범한 아이로 키워지고, 그 부부의 진짜 아이는 천사와 악마 모두에게 적그리스도로 오인되어 어렸을 때부터 천사와 악마가 각각 보낸 가정교사나 정원사의 교육을 받으면서 자란다. 그리고 11년 후, 아마겟돈의 D데이 1주일전,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닥쳐온 아마겟돈에 대해 지옥의 네 명의 기수(죽음, 전쟁, 기아, 그리고 돌림병의 뒤를 이은 오염)들이 모두 소환된 가운데, 천사는 천사대로, 악마는 악마대로, 이 모든 것을 300년 전에 예언한 <근사하고 정확한 예언집>을 남긴 마녀 아그네스 너터의 자손인 마녀 아나테마 디바이스는 그녀대로, 마녀사냥꾼 섀드웰은 그 나름대로, 얼떨결에 마녀 사냥꾼의 조수가 된 줄 알았지만 사실은 300년전의 가업을 이은 뉴튼 펄시퍼는 또 그 나름대로 이에 대처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작가는 각주의 형식으로 어떻게 해서든 끼어들려고 하고, 진짜 적그리스도인 아담 영은 마침내 그날,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선택을 한다!

번역된 책의 분량이 무려 580여 페이지에 이르지만 다루고 있는 시간은 일주일. 아마겟돈의 그날을 향해 달려가는 여러 인물들을 마치 영화에서 짧은 컷들을 이어붙인 듯 경쾌하고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면서 달려가고 있지만, 글쎄. 너무 길었다. 다음에 무슨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으로 초반부터 잔뜩 긴장하게 하는데, 너무 오래 긴장하고 있다보니 오금이 저리고 차라리 지겨워졌다고나 할까. 뭔가 굉장한 일이 일어날 듯한 너무나 긴 긴장감. 그리고 어쩌면 당연한(!) 결말. 결국은 소설 전체의 즐거움이 저자 소개의 즐거움과 엇비슷했다.. 사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읽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한 꼭지 한 꼭지가 재치있고 재미있고 즐거운데, 이런 것을 계속 이어붙여서 몇시간이나 되는 긴 <개그콘서트>에 던져진 것처럼. 웃는 것에도 피로해지는 느낌.

소설 속에서 인간 세상에 내려와 살고 있는 천사와 악마는 인간을 좋아하고 심지어는 부러워한다. 천사는 항상 옳은 일만을, 악마는 항상 나쁜 일만을 해야하지만, 인간은 때로 천사 이상의 선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악마조차 상상하지 못한 잔인한 일을 저지르곤 한다. 왜냐하면 그건 인간이 자유의지를 지녔기 때문이다. 자각한 적그리스도 아담 영의 지적대로, 천사나 악마가 끼어들지 않아도 인간의 삶은 충분히 복잡하며, 차라리 그들이 인간을 가만히 냅두는 편이 인간에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애초에 천사나 악마가 왜 지상에 내려왔겠는가. 그 역시 인간이 불러낸 것 아닌가? 무시무시한 자연 현상들에 맞서 두려움을 느낀 인간이 신을 부르고, 신이 그에 응답하셔서 천사와 악마를 인간 세상에 내려보내신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인간이 스스로를 믿었다면, 신의 도움의 손길에 "감사합니다만, 저희끼리 해결해 보겠습니다. 안되면 말구요"라고 대답했다면, 신이 개입되지 않은 인간의 삶은 좀더 단순해졌을까. 

그러나 만약 창조주가 있어서 이 세상을 그의 뜻대로 만들어다면, 모든 것이 그의 '거대하고, 형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계획'의 일부일 것이다. 신을 부르든, 부르지 않든. 자유 의지란 것도 진짜로는 허울 뿐인. 

그래서 세상이, 진짜 의미를 가지려면 사실은 창조주가 없는 쪽이 나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뭐 지금의 나는 사실 있든 없는 결정적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상관없고 따라서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지만. <악마의 시>에 이어서 읽어서 더 그런 생각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ps1) 닐 게이먼의 책 중 세번째로 읽는 것이다. <베오울프>, <신들의 전쟁> 다음. 어쩌다 보니 쓴 것과는 정반대 순서네. <신들의 전쟁>과 <멋진징조들>은 같은 뿌리의 형제이다. 결국은 인간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ps2) 역자 후기에 테리 길리엄 감독으로 영화화될 거란 이야기가 있어서 imdb를 검색해 보았는데, 나오는 게 없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