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의 진실 - 의사들은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쳤는가?
데이비드 우튼 지음, 윤미경 옮김 / 마티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의학사에 관한 책을 세 권째 연달아 읽었다. 평소에는 한 분야에 대한 책을 묶어서 읽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런 식의 독서가 바로 수많은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독서법이긴 하지만, 세상에 읽어야 할 책이 얼마나 많은데 같은 주제에 대한 책을 여러 권씩 그것도 붙여서 읽느냔 말이다. 그랬는데도, 직업에 관련된 일이다 보니 이렇게도 하는구나. 이렇게 읽고 나니 뭔가 아는게 많아진 듯한 느낌이 든다. 음.
사실 이 책도 읽지 않은 채로 책장에 꽂힌 지가 2년은 넘은 것 같은데 어떤 계기로 알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제목보다는 부제, '의사들은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쳤는가?'에 혹했을 것이다.   

 

<의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의학'사상'의 역사가 당대의 정치경제적 상황의 역사와 맞닿아 있음을 횡설수설 논한 책이라면, 이 책은 의학'기술'의 역사가 문화적, 심리적, 제도적 걸림돌 때문에 갈짓자를 그리면서 나아왔다는 것, 즉 대부분은 실패한 역사라는 것을, 시종일관 진지하고 격앙된 어조로 빽빽하게 전달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첫번째로 자신의 이러한 '실패한 의학의 역사'를 기술하려는 태도가 기존의 의학사의 관점 및 서술과 아주 다르다는 것부터 강조하고 있다. 의학도 잘 모르고, 역사도 잘 모르는 내가 이런 식의 역사 서술의 의미를  제대로 평가할 수는 없겠다. 오히려, 이것이 내가 읽은 의학사에 관한 책 중 거의 첫번째이니, 앞으로 의학사 책을 더 읽는다고 하면 이 책의 논점이 기준이 될 수도 있겠지. 이런 것이 아마 폭이 좁은 독서의 단점이겠다.   

 

두번째로, 이 책이 서술하고 있는 '의학'의 역사는, 의학이 한번도 순수한 자연과학인 적이 없었고, 또한 그럴 수도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오직 의학의 '기술'적인 측면의 역사이다. 거의 2천 년 동안 서양의 의학은 질병이 아닌 '사람'을 치료했고, 따라서 치료 방법도 사혈, 사하제, 구토제로 충분했다. 이런 '의학'이 2천 년을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효과는 '치료' 때문이 아니었다. 무얼 해도 낫지 않는 병이 있는가 하면, 아무 거나 해도 나을 수 있는 병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자연치유력(요즘의 과학으로는 그 질환에 대한 인체의 면역의 재구축 쯤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을 기반으로 다양한 위약 효과(의사에 대한 신뢰, 환자의 의지를 모두 포함한)였다. 요즘 같으면 같은 원인의 질환을 가진 환자 백 명을 같은 방법으로 치료했을 때 적어도 서른 명에게는 효과가 있어야 그 치료법의 효용을 인정해 주겠지만, 옛날에는 그런 통계적 사고나 지식이 없었으니, 단 한 명만 나아도 그 치료법은 계속 행해질 수 있었다. 더 고약한(?) 것은 나머지 99명 중 심지어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때보다 더 나빠졌거나 생명을 잃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사례에서도 의사는 쉽게 책임을 벗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환자가 의사를 완전히 믿지 못했다거나, 지시를 '완벽하게' 따르지 못했다고 몰아붙이는 것이 간단했으니까 말이다. 이 정도면 정말 종교 수준이다.

과학이 임상에 적용되는 과정의 지연을 논하는 것은 오직 '서양'의학에서만 가능하다. 왜냐면 동양 의학은 과학이 아니라 '생각의 틀', 곧 우주관이며 철학이기 때문에 어차피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사실 이 책에서는 '동양 의학'이란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의사의 해악'을 논할 때, '의사'에 '한의사'는 포함되지 않는다. 이 책이 굳이 논의를 의학 '기술'에 집중하고 있는 이유는 의학의 효과, 즉 질병을 치료하거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실제로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의학도 질병을 치료하거나 생명을 연장하는 '효과'를 위해 존재하므로, 이 의학이 실제로 '효과'가 있었는지 아니면 '해악'을 끼쳐왔는지를 물어볼 수 있겠다. 그런데 한의학이 과학이 아니라면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인가? 서양 의학의 발달 과정을 논하는 글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은 이런 질문들로 바빴다. 이런 생각 또한 '자연과학의 분과'로서의 의학 교육만 받아와서 사고의 패턴이 이미 그 쪽으로 자리잡았기에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대답할 수 있는 문제일까.

세번째로, 저자가 특히 관심을 가지고 강조하는 것은 현대에 과학이 실험실에 발견한 것이 얼마나 빨리 임상에 적용되는지를 볼 때, 16세기부터 19세기 전반까지 자연과학의 발달이 의학기술에 적용되는데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가에 대한 고찰이다. 그리고 결론은 당대의 문화적, 심리적, 제도적 요소들의 저항, 즉 자연과학 이외의 요소들 때문이라고 내린다.   

 

 

현대 의학의 연구 결과라고 해서 일반 의사들이나 환자들이 느끼기에 그렇게 빨리 진료실로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연구 결과가 발표될 때마다 그것이 임상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제안은 거의 보편화되어 있다 (사실 요즘의 연구는 임상과 관련이 높은, 임상 적응의 가능성이 많은 주제에 집중되는 경향까지 있다). 단지 그 제안이 실제로 성과물로 나오기까지는, 신약을 예로 든다면, 피할 수 없는 생체 실험(동물 실험)의 엄정함이 더욱 요구되고, 환자에게 직접 적용하는 임상 시험도 세 단계에 걸쳐서 충분한 기간과 환자에게 시행하도록 되어 있어서,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18세기 중반 이전(정확하게는 리스터의 방부 외과 수술이 시행된 1865년)에는 생물학 연구와 생체 실험을 하는 사람들이 그 실험의 결과로 인체를 더 잘 이해하게 됨으로써 더 나은 치료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연구는 오직 지식 추구를 위한 것이었고, 의학은 결코 과학이 아니라 갈레노스의 '철학'을 인간에게 적용시키는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의학 기술을 발달시키려고 하면, 지금까지 해온 것이 뭔가 잘못이나 부족함이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그런데 1865년 전의 의사들에게는 '전통'이라는 것이 부족하고 심지어는 잘못되었다는 자각이 없었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했던 대로, 인간의 자연치유력과 위약 효과 때문에 나은 사람들을 자신의 공이라고 쉽게 생각했고,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질병'을 치료한다는 통계적 개념의 부재로 인해, 한 명이라도 나았으면 그 치료의 효과는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대 의학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패의 세균설'이 확립되고 그것을 임상에 적용한 방부 외과 수술이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이 17세기 전반 현미경의 발명보다 무려 150년이나 늦어졌던 것이고, 그 사이에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이 병원에서 의사의 손에 병을 얻어 사망하였던 것이다.

효과의 평가만 문제였던 것이 아니다. 문화적이면서 심리적인 문제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의사가 되기 위해 배워야 하는 지식의 (내용은 달라도) 양과 비용이 굉장히 높았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애써 얻은 지식을 어느 날 잘못되었다고 바로 버리기에는 심리적 저항이 매우 강했다(예를 들면, 마취제가 발견된 후 바로 수술장에 적용되기 까지 5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던 것은, 당시 외과의사는 마취 없이 수술을 할때 환자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번개같은 속도'로 절단이나 절개를 하도록 배웠는데, 마취를 하면 그런 '번개같은 속도'를 보여줄 수가 없으므로 반의도적으로 무시했다고 한다). 사실 이건 어떤 전문가 집단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며, 현재진행형의 문제이기도 하다. 생뚱맞은 비유일지도 모르지만, 시어머니에게 심하게 괴롭힘을 당한 며느리가 나중에 자기 며느리를 심하게 괴롭히는 시어머니가 되는 이치이기도 하고.

현대의 의학은 결코 '나쁜 의학'이 아니다. 저자도 1865년부터 의학 기술은 환자에게 적용되었을 때 실제로 도움이 되는 기술로 발달해왔다고 인정하고 있다. 또한 '의원성(iatrogenic)' 질병에 대한 개념도 잡혀 있어서, 환자의 상태가 나빠진다면 어떤 것이 치료와 관련된 것이고, 어떤 것이 질병 자체과 관련된 것인지를 구분하여 판단하고, 아무리 그 질병을 없애는 데 효과가 있는 치료법이라고 하더라도 그 치료 때문에 수반되는 합병증이나 후유증이 매우 크다면 과감히 그 치료법은 폐기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학은 결코 완전히 '과학과 기술'만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치유력과 위약 효과라는 것이 그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영혼'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을 과학이 뉴런의 복잡한 상호작용으로 완전히 설명할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결국은 카오스(초기 조건의 아주 작은 변화 때문에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일 것이기 때문에, 의학이라는 것이 의사라는 인간이 환자라는 인간을 대하는 만나는 순간의 태도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좋은 의학'이란 환자에게 진정으로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의사의 마음으로부터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낼 것이기 때문에, 의학의 전통은 '어떤 경우든지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는 선서를 명문화한 히포크라테스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어가는 환자의 곁에서 환자의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소생시킬 방법이 없노라 인정하고, 동정의 마음을 다해 손을 잡아주는 것도 결국은 의학이기에.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진보 또는 변화의 속도는 미래의 결과를 내다보는 (혹은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너무 늦고, 현재의 좋은 점에 안주하려는 (혹은 현재의 장점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너무 빠르다는. 어떻게 해서든 변화가 이루어져 새로운 세상에서 살게 된 이들이 이전 세상을 돌아보면, 참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한 사건들을 많이 집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굳이 그런 불합리한 사건들을 끄집어 내어 파헤쳐 보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같은 불합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게 바로 역사로부터 배운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패러다임의 급격한 전환기에 처한 개인이 아날로그적 일상을 이어가면서 실제로 그런 변혁의 조짐을 읽고 따라가는 것은, 아니 '지금 변혁이 일어나고 있구나'하는 것을 읽어내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다. 뭔가 달라지는 조짐이 있을라치면 온갖 방법으로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요소'를 끌어내어 일단 안심하고자 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로운, 또는 나쁜(지금까지 잘못 해왔다는) 소식에 첫 번째로 보이는 태도가 아니던가. 저자는 결국 '의학사'를 예로 들어 어떤 분야에서든 진정한 진보를 가로막는 평범한 인간들의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덧)

1. 교정되지 않은 오자가 많다. 열 개 정도 되는 것 같다.
2. 의학사에 영원히 이름을 새긴 훌륭한 분들의 (지금의 가치관에 의하면) 말도 안되는 바보 같은 생각과 행동에 대해 뒷담화를 듣듯 여러가지를 알게 되었다. 한가지 예를 들면 갈레노스는 '거친 바다를 본 꿈은 창자에 질병이 생겼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효과적인 사하를 위해 가볍고 부드러운 사하제를 사용해야 한다'고 썼다고 한다. 이거야 원. 걸리버 여행기의 라퓨타성의 상류계급 사람들이 대변의 모양을 보고 그 사람의 생각을 유추한다(누군가를 암살해야 한다고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본 대변은 좀더 푸르스름하다나 어쨌다나)는 행태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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