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환상문학전집 11
필립 K. 딕 지음, 이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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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책을 읽기 전에는 이 제목, 우리말로 번역하면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가,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이 되고 싶어 하나?' 쯤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전기양이란, 인간이 생사여탈권(전기스위치)를 쥐고 있기에 조용히 인간의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는 존재이므로, 대답은 당연히 "No!"인 질문으로. 

이런 생각은 걸출한 영화 <블레이드 러너> 때문이었다. 그 영화는 내게 '생존의 한계를 거부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고 조물주를 찾아나선 네 명의 레플리컨트(넥서스6 모델의 휴머노이드 로봇)의 대장정과 실패'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설을 읽고 나니, 영화를 너무 머릿속에 넣고 읽기 시작했다는 아쉬움이 든다. 영화는 소설에서 그야말로 설정만 빌려왔을 뿐, 전혀 다른 이야기로 기억하는 것이 나을 듯하기 때문이다.

<블레이드 러너>가 내 인생의 영화 리스트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의 DVD를 Director's Cut이라고 한 번 사고, 'Five-Disc Ultimate Collector's Edition'이라고 또 살 만큼은 좋아하는(사실 이런 말랑한 느낌의 단어가 이 영화와 어울리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렇다고 '두려워하는'이라고 할 수도 없고, '마음에 품고 있는'도 어색하긴 매한가지다) 영화이긴 하다. (얼티미트 콜렉터스 이디션에는 1982년 미국극장개봉판, 전세계극장개봉판, 1992년에 발표된 감독판, 그리고 2007년에 그 DVD를 내면서 실은 파이널컷까지 네 개의 영화가 실려있는데 그걸 다 보고 뭐가 어디는 있는데 어디는 빠졌구나 하는 것까지 비교하지는 못했다.)

영화의 줄거리는 너무 유명하니까 여기서까지 다시 주절거릴 필요는 없겠고, 핵심 기둥(물론 내가 생각하기에)은 1)릭 데커드라는 '블레이드 러너(원래 소속된 곳에서 도망쳐 나온 레플리컨트들을 수색해서 잡는 경찰의 일종)'가 식민 행성에서 탈출한 네 명(개?)의 전투용 휴머노이드 로봇-안드로이드-레플리컨트를 추격하면서 한 명씩 물리치는 이야기, 2)릭 데커드와 레플리컨트 제조기업 총수의 미모의 조카 레이첼 사이의 이야기와, 이식된 기억을 가지고 자신이 인간이라고 믿었던 레이첼이 릭 데커드의 테스트를 통해 레플리컨트임이 드러나고 그것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이야기, 3)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 위에서도 언급하였던 것 같이, 네 명의 안드로이드들이 자신들의 수명을 연장해 달라고 탄원(?)하기 위해 조물주인 타이렐사의 총수를 만나려고 하는 이야기이다.

영화에서는 로이 배티를 대장으로 네명의 레플리컨트가 그들 중에서도 특히 수명이 거의 다한 레플리컨트인 프리스의 수명을 연장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자신들의 조물주인 타이렐을 만나려고 하는 것이 모든 사건의 출발점이 된다(영화상에서는 거의 끝부분에 드러난다). 레플리컨트가 자기 존재의 한계 때문에 고민하다가 뛰쳐나와서 직접 조물주와 대화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그런데 잠깐, 이건 너무나도 익숙한 장면 아닌가. 지극히 인간적인, 역사가 생긴 이래 모든 (인간) 존재의 고민이자 꿈이 자신의 약함이나 세상의 일그러진 모습에 대해, 이 모든 것을 '직접 만드신 이'를 만나서 따져도 보고, 설명도 듣고, 가능하면 고침 받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소망을 품고 타이렐 앞에 선 레플리컨트 로이 배티를 보면, 신 앞의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에 대한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레플리컨트의 4년이라는 수명은, 영화 속에서는 과학 기술의 한계가 문제라기보다,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과 육체를 지닌 넥서스6 모델의 안드로이드에 대해 안전핀으로 도입된 것이었다. 즉 조물주가 자신의 힘을 완전히 넘어서는 것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레플리컨트에게 '일부러' 이식한 한계였던 것이다. 피조물인 로이 배티는 조물주를 직접 만나서, 조물주가 홀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쓰다듬는 것에 잠시 동안 감격하다가, 그가 자신에게 이식한 한계의 이유와 당장은 그것을 고칠 수 없음을 알게 되자, 이 조물주의 머리를 두 손에 쥐어짜서 으스러뜨린다. 그 때 그의 표정은, 아마도 '신이 죽었다는 걸 사람들은 아직도 모른단 말인가?' 라고 물었던 니체의 표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사실 이렇게 니체를 오용하면 안되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니체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그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주워 들은 것밖엔 없으니까 말이다)?

레이첼이라는 인물도 생각할 거리를 무수히 준다. 그녀의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은 (이식된 줄 몰랐던) 어렸을 때의 몇 가지 기억과, 엄마가 자신의 머리를 빗겨주는 한 장의 흑백 사진 뿐이다. 뒤집어서 보면, 누군가에게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주는데 필요한 것은 결국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나다'라는 정체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기억이란, (현재의 과학 기술로는) 이식될 수는 없는 것이라 쳐도, 자신에 의해서든 남에 의해서든, 특히 자신에 의해서라면 얼마든지 조작된 채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정말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란 말인가'.

이렇게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으로 기억하고 있는 영화의 원작이라고 알려진 이 소설은, 그러나 영화의 중요한 전제들-로이 배티 일당이 식민 행성을 탈출하여 지구로 온 이유, 그리고 그들이 필사적으로 타이렐이라는 조물주를 만나려고 한다는 것-은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의 중심은 확실히 릭 데커드라는 현상금 사낭꾼인 인간이다. 그가 현상금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웃들은 진짜 양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전기양인 애완동물 대신에 '진짜 살아있는 동물'을 사기 위해서이다(그것이 그 시대의 최고의 사치이기 때문이며, 결국은 그의 물욕이다). 로이 배티 일당이 화성을 탈출한 이유는 모호하며(단지 화성이란 살 곳이 못되는 아주 척박한 땅이라는 것 뿐), 그들의 4년짜리 수명은 과학기술의 한계이고, 거기다가 이들은 조물주를 만나려고 하지도 않는다. 대신 방사선 낙진으로 두뇌가 망가져 '닭대가리'가 되어 인간들에게 소외당한 채 외롭게 살아가는 이지도어와, 인간 이상으로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오페라 가수(혹은 오페라 가수 행세를 하는)인 안드로이드 루바 루프트가 중요하게 부각되면서, 누가 인간이고 누가 안드로이드인지, 인간을 '기계 안드로이드'로부터 구분되게 하는 '인간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하게 한다.

인간과 비인간-기계 안드로이드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는 보이그트-캄프 감정이입 테스트라는 일종의 심리테스트인데, 이 테스트의 가정은 '기계-안드로이드는 감정이입에 서툴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이외의 생명이 거의 사라진 지구에서 생명체가 고통받는 상황에 대한 묘사-곰가죽, 사슴머리, 낙태, 등등-를 들려준 후의 동공 반응 같은 것이 얼마나 빨리 나타나는지를 체크하는 것이다. 이 테스트의 해석에는 물론 자의적인 요소가 없지 않지만, 경험이 많은 관찰자라면 거의 실수하지 않으며, 릭 데커드는 바로 이 테스트 전문가이다.

그런데 사건이 진행되면서 릭 데커드는 바로 이 테스트 때문에 혼란에 빠진다. 죽이는 것을 즐기고, 감정이입의 능력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금 사냥꾼 필 레시는 자신이 진짜 다람쥐를 보살피고 키우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주장하는데 실제로 그는 인간이었고, 그는 루바 루프트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 상황에 감정이입을 하는, 그러니까 기계에 감정이입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또한 이 감정이입 테스트라는 것에도 구멍은 있다. 이 테스트는 정말 공감하는지 여부를 측정한다기보다는 공감의 결과라고 생각되는 빠른 신경 반응을 체크하는 것이다. 그래서 안드로이드 생산회사인 로젠(소설에는 타이렐이란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은 이 테스트를 통과할 만큼 빠른 신경반응을 보이는 '향상된' 모델을 만드려고 하고 있고, 레이첼은 어느 정도 그 테스트를 통과하기까지 한다(물론 릭 데커드의 눈을 속이지는 못했지만). 하긴, '공감'을 어떻게 측정한단 말인가.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로봇'이라는 주제는 이 소설이 씌여진 1968년에는 참신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사실 이 소설에는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로봇'보다는 '로봇보다 더 로봇같은 인간'의 존재가 더 두드러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소설을 읽기 전에도 이런 주제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접했었다(그 이야기들이 다 필립 K 딕이나 아이작 아시모프에게 최초의 상상력을 빚지고 있겠지).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으로는 <터미네이터>와 <A.I.>가 있구나. 그런 걸 볼 때마다 나는, 신은 자신의 형상을 본따 인간을 만드셨다고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에게 과연 그 자신의 형상을 본딴 무엇을 만들 만한 능력 또는 자격이 있을까에 대해 생각했었다. 자신을 닮은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만들어진 피조물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지겠다는 약속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부모가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많지 않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자식이야 언젠가는 나와는 독립된 인간으로 떼어낼 수밖에 없으니 어느 정도의 기간만 책임지면 된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인간은 자식을 자신의 필요 때문에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로봇, 안드로이드라면? 인간이 로봇을 만드는 이유는 자신의 필요에 복종시키기 위해서이다. 그것을 더욱 인간과 비슷한 모양으로 만드려고 노력한다면, 인간이 알기에 인간의 일을 인간만큼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인간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필요해서 복종시키려고 만든 로봇을 또 다른 독립적인 존재, 인간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인간의 이성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은 그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이든 감정이든과 상관없이, 안드로이드가 충분히 인간과 가깝게 만들어졌다면, 그는 조물주 인간이 모르는 생각, 즉 자유의지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독립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안드로이드는 인간에게 반기를 들고..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이 올 수도 있겠지. 사실 그 기계는 인간처럼 생각하고 인간처럼 반응하는, 어떤 면에서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인데 말이다.

이 지점에서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은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원하는가?', 즉 '안드로이드는 (인간처럼) 전기양을 가지길 원하는가?', "안드로이드는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가?'의 뜻으로 받아들이는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글쎄. 안드로이드가 굳이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원하는 건 아닐 것이다. 안드로이드가 원하는 것은 인간이 누리는 것과 같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이냐 인간이 아니냐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면 어떻고 안드로이드면 어떤가. 자기만의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라면,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라면, '언젠가는 죽는다'를 뺀 다른 운명에 대해 선택권을 갖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인간성에 관한 질문, 인간과 로봇-안드로이드와의 관계에 관한 질문에 대한 고민 외에도 이 소설은 미래 사회의 디스토피아적 묘사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쓸만한 인간은 모두 우주 식민 행성으로 떠나 버리고, 방사선 낙진 예보나 들으면서 별 희망도 없는 닭대가리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 늙은이들(릭 데커드는 둘다 아니지만, 현상금 사냥꾼으로서의 자신의 일 때문에 떠나지 못한다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한다)이 키플 더미와 함께 살아가는 지구. 인간 이외의 생명이 거의 모두 멸종하여 살아있는 동물을 애완동물로 키우는 것이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죽을까봐 두려워서 옆에 가지도 못하는 사람도 있고, 자연스러운 기분도 느끼거나 표현하지 못해 기분전환기에 의존하며, 고독은 감정이입기에 접속해서 '머서'라는 인물과 융합하는 것으로 해소하는 인간들(이 '감정이입기'라는 것을 가만히 보면,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접속한 온라인과 비슷한 것으로 느껴지면서 오싹함이 몰려온다). 이런 묘사가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는 끊임없이 비가 내리고 도심 외에 대부분의 건물은 폐허와 다름없이 텅 비었으며, 광고판은 '지구를 떠나라'는 메시지만 반복하는 어둡고 숨막힌 도시로 표현된다. 리들리 스콧의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이 책의 디스토피아를 내 머릿속은 어떻게 그려냈을지 모르겠다.

하여튼 이 책을 읽고 마지막까지 한 생각은, 복제 인간 따위는 제발 만들지 말자. 우린 아직 안드로이드를 감당할 만큼 감정적으로 성숙하지 않았다. 그런 날은 오지도 않을 것이야. 좀 생뚱맞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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