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걔가 뉴스 나오고 그러고 설치는 거 솔직히 속이 나쁘다."

"나는 싫다."
도담은 그런 정미를 쏘아보기만 할 뿐 입을 다물었다. 두사람은 고개를 돌려 각자 창밖을 바라봤다.

네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어?
열여덟 살짜리 아이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는지. 그때 해솔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조아리고 있었다.

해솔이 물었다.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말하겠냐는 듯 도담해솔을 바라봤다. 둘 사이에 쉽게 건널 수 없는 세월의 강물이 펼쳐져 있었다. - P221

해솔이 도담의 눈을 똑바로 보며 덧붙였다.
"인연이라는 건 정말 존재하나 봐."

"도담 씨, 그런 얘기 들어 본 적 없어? 7년인가 지나면 사람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세포가 교체된대. 10년이면 도담씨 온몸의 세포가 교체된 거야. 그러면 이제 도담 씨도 그 사람도 그때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지 않을까?"

"겨우 스물두 살이었어. 그때 정말 너무 어렸어."
도담이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의 입으로 그 시절을 그렇게정리하는 게 신기했다. 분명 어렸다. 그렇지만 그때는 지금보다 더 죽음을 가깝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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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솔아"
도담이 어둠 속에서 소리 내어 이름을 불러봤다.
"이해솔." - P91

"할머니, 그런 소리 하지 마. 할머니 없으면 난 어떡하라고."
시간이 아주 느리게 갔으면 좋겠어... 해솔은 할머니를많이 주무르고 살을 부비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할머니가 없었다면 정말 자신은 어떻게 됐을지도 몰랐다. - P99

"네 어두운 그늘까지 사랑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 P102

도담에게 사랑은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려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다. 더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왜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걸까. 물에 빠지다. 늪에 빠지다. 함정에 빠지다. 절망에 빠지다. 빠진다는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 P104

"실제 삶에서 우리는 존재 이유를 찾기 어렵지만 극 중 등장인물은 존재 이유가 명확하잖아. 그래서 나는 이야기가 좋아." - P113

두 사람은 며칠 동안 밖에 나가지도 않고 서로를 안기만했다. 배고파지면 방 안에 있는 것을 먹었고 그 외에는 안는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듯 다시 안았다. 방 안이 서로의 체취로 가득했다. 헤어져 있던 시간을 채우려는 듯 오래서로를 안고 있었다. 박탈당했던 행복을 되찾은 것처럼, 품에안고 손에 쥐고 있지 않으면 다시 잃어버릴 것처럼. - P127

"이제 그 얘기는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그 일이 없었던 것처럼 살고 싶어." - P129

도담과 해솔 사이에는 잘못 디디면 휩쓸리는 소용돌이가도사리고 있었다. 좋을 때 두 사람은 세상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았지만 나쁠 땐 한없이 나빴다. - P146

그 무렵 해솔은 이민 간 사람들의 블로그를 열심히 검색해보곤 했다. 도담과 함께 행복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무더운 여름이 없는 나라, 비가 적게 오는 나라를 찾아봤지만 그런 곳은 드물었다. 그러나 도담은 기가 차다는 듯반문했다. - P161

"너도 그렇지 않아? 나한테 잘하는 게 미안해서인지, 사랑해서인지." - P169

"네가 사랑해라고 하는 말이 이젠 미안해라고 들려."
도담의 말에 해솔은 충격받은 채 서 있었다. 도담이 해솔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나는 보통 사람들처럼 살고 싶어" - P170

"베스트 프렌드 같은 거 나도 없어요."
"이상하다. 왜 내가 친구 없다고 하면 다들 자기도 친구 없다고 하지." - P194

의아한 얼굴로 승주가 물었다. 쉽게 답할 수 없었다. 해솔과 자신을 과연 무슨 사이라고 설명해야 할까. 은인? 친구?
연인?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다.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잊으려애썼지만, 사실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이름이었다. 어디선가수면을 요란하게 때리는 장대비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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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세계가 희미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과거에 향수를 느끼는 것 역시 순리다. 우리는 과거의 소멸은 어렵지않게 위로할 수 있다.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것은 미래의 소멸이다. 내가 그 부재로 인해 슬퍼하고 집착하는 나라는 어린 시절의내가 알던 나라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꿈꾸어 왔지만 결코 빛을보지 못한 나라다. "251 - P168

"반대파의 삶을 살며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물살을 따르지도 거스르지도 않으면서 홀로 있는 것(...), 그것을 할 수 있는 이는 그 누구도 없다."258 - P170

이름 모를 이는 말한다. 어떤 자리가 우리에게 꼭 맞다면, 우리는 거기서 아무것도 배울 수 없을 거라고. - P173

우리가 늘 두려워해 왔던 자리가 가장 가치 있는 자리라면 어떨까? 우리의 실존을 근본적으로 결정하는 자리, 실존이 진정으로시작되거나 다시 시작되는 자리가 바로 우리가 추락한 그 장소라면? 이 장소는 우리 삶의 일부가 무너지고 모든 것이 드러나는 곳,
모든 가장이 사라지는 곳이다. 이 폐허 위에서 자신의 가장 진실한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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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놔둬라." 내가 말한다.
히로코가 말한다. "저자들은 왜 저렇게 지저분한 걸까요? 유럽인들 말이에요. 저 수염 좀 보세요. 이랑 손톱도요. 스스로의 명예를 더럽힌다니까." - P99

지금도 그렇다. 저기 도랑 가장자리에 서 있는 그 애는숲의 신령처럼 빛이 날 것만 같다. 거적에 덮인 시신이 불러일으킨 흥분과 호기심이 아이의 두 눈 속에서 커져가는게 보인다. - P95

"권투는 가끔씩은 그냥 비즈니스예요." 니콜라이가 말했다.
"그럼 그다음 시합은요?" - P81

적어도 그들은 그 젊은 남자를 데려갔고, 우리를 위해최대한 빨리 길을 정리했다. - P93

"유미." 내가 말했다. "미안하다." - P105

어쨌든 이런 생각을 하는 지금, 나는 앞으로 몇 년 동안유미에게 어떤 운명이 닥칠지 궁금해진다. 그 애는 누구를만나게 될까. 그 애의 조선 이름은 무엇이 될까. 그 애가결국 하게 될 결혼에는 사랑이, 그러니까 내가 이해한다고믿는 방식의 사랑이 개입되어 있을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그 결혼을 좌우하게 될까.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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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와 근정은 학원에 가지 않는 날이면 몰래 야간자율학습을 빠지고 곧잘 놀러 다녔다. PC방에 가기도 했고 만화책을 잔뜩 빌려 뚜비네에 가기도 했다. - P260

"아와모리. 오키나와 소주예요." - P263

문주는 몹시 난처했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를 근정은진작에 이해하고 있었다. 그 무언가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곤경에 빠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 P264

"친구가 그러더라. 징그럽다고. 나는 오히려 묻고 싶었어. 도대체 징그럽지 않은 사랑이 있기나 한 거냐고 있다면그건 어째서 징그럽지 않은 건데?" - P270

"꼭 하고 싶었던 거야?"
"글쎄, 그렇다기보다 맹세라는 거, 그런 걸 하면 내가좀 더 행복하게 오래 살 것 같아서." - P271

"진심을 진심으로 대하겠습니다."
"늘 곁에 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자주 놀러 가겠습니다." - P280

해가 완전히 저문 뒤의 작은 뜰은 고요했다. 제때깎지 않아 무성한 잔디 사이로 시큼한 냄새가 풍겨왔다. 그것은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단단했을 무언가가 서서히 무르고야 마는 냄새였다. - P283

내가 살고 있는 곳이 토성인 것만 같은 기묘한 착각에빠져들 때가 있다. 연결은 차고 넘치는 데 세계의 밀도는낮아지고, 주고받는 말과 정보는 많지만 오가는 온기는 떨어지니 소외는 일상의 감각이 된다. 예소연은 이렇듯 성긴세계에서 사람들 사이에 미묘하게 발생하는 감정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너의 나쁜 무리>는 ‘토성화‘된 지구의 이야기이자 그 성긴 세계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닿는 방식을 탐색하는 소설이다. 개인의 내면을 파고드는 대신 사람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관계의 감각을 포착하는 와중, 이책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성긴 시대의 풍경을 다단한 관계 속에서 차분히 드러낸다. - P286

어느 순간부터 나라는 사람에게서 멀어진다는 생각이들었습니다. 살면 살수록 더 희미해지고 미약해지는데 사라지는 나를 붙들어주는 건 늘 내 곁에 있는 함께 희미한존재들이었습니다. 어느덧 나를 정체화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 또한 그럴 것이라는생각이 들자 삶에 대한 의지가 생겼습니다. 생활을 만들어주는 건 다름 아닌 만남들이었고 만남들 속에 대화가 있었으며 대화 속에 나의 작은 말이 비로소 떠돌았습니다. - P292

저는 단지 어떤 개인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사람과 사람이 등장하는 일일수록 소설 속 세계는 걷잡을수 없이 커졌습니다. 꼭 타이쿤 게임을 하는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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