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야 엄마가 초콜릿 줬다.
엄마도 초콜릿 받고 싶다. 화이트데이에....... "
지난 3월 1일 안산합동분향소 초콜릿 상자에 붙어 있던 포스트잇 메모다.
‘아~ *수 엄마는 이제 영원히 아들에게 초콜릿을 받을 수 없구나! '
하는 생각에 울컥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누가 *수 엄마의 소박한 소원을 앗아 갔나....
2월 19일 설날, 손주에게 세뱃돈을 주고 싶은 할아버지는 또박또박 글자를 박아 '할아버지 세뱃돈' 봉투를 올려놓으셨고, 함께 떡국을 나누지 못한 엄마는 "아들, 떡국은 먹었지?" 소식을 묻는 편지도 있었다. 엄마의 마음, 부모의 마음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아지는 것....
막내와 눈이 벌게지도록 울며 분향소를 돌아보고 나오는 길, 오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다 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갔는데 멀리서 택시 한대가 유턴을 했다. 혹시나 싶어 손을 들었는데 뒤에 탔던 손님이 앞자리로 옮겨 앉고 우리 모녀를 태워줬다. 택시기사님은
"이 손님을 잠간 분향소에 내려드리고 가야 된다."
며 양해를 구하기에, 우리도 분향소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더니
"이 분도 유가족이랍니다." 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어디서 왔느냐?" 고 물었다.
"광주에서 왔어요." 답했더니, 앞에 앉은 분이 돌아보시며
"광주에서 안산까지 와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데 서로 얼굴을 마주하니 낯이 익었다.
지난 2월 9일 광산구청 앞에서 가족들을 맞이하고 송정역까지 함께 했다고 했더니, 그분도 나를 본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그때 유독 어떤 어머니가
"광산구민 최고에요!"
엄지를 치켜세우며 고맙다고 인사해서 특별히 기억한 얼굴이 있었는데 바로 그분이었다.
죄송하지만 누구 엄마인지 여쭈었더니
"*혁이 엄마에요."
답하면서 나랑 여러번 눈이 마주쳤던 게 생각나는지 서로 손을 맞잡았다.
광주와 안산에서 이렇게 두번이나 얼굴을 보게 된 우리 인연이 놀라웠고,
막내는 엄마랑 그 아줌마랑 서로 알아보고 악수하는데 소름이 돋았다고 말했다.
내가 *혁이 엄마를 보게 된 건,
세월호 가족대책위와 일반시민이 1월 26일 오전 안산 합동분향소에서 세월호 선체인양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19박 20일 동안 걸어서 팽목항까지 이어지는 릴레이 도보행진을 시작했다. 2월 9일 우리 지역을 지나게 되었고, 2월 2일부터 구청에 근무하게 된 나는 직원들과 함께 유족들을 응원하는 글이 적힌 노란 종이를 들고 구청 앞 도로에서 기다렸었다. 가족들은 우리 앞을 지나며 고개 숙여 인사를 전했고, 우리는 눈으로 응원을 건넸다. 광주송정역까지 그들의 뒤를 따라 걸으며, 구호를 외치지는 않았어도 조용히 뒤를 따르는 것으로 지지하고 응원하는 사람들 마음은 하나였다.
광주송정역에 도착하니 광산구공익활동지원센터 식구들이 나와서 뜨거운 차와 음식을 나누고 있었다. 행진한 가족들은 뜨거운 차로 언 몸을 녹이고 화장실도 다녀오는 등 잠시 휴식을 취하고, 나주로 떠나는 길을 배웅하고 돌아왔었다. 국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온몸으로 호소해야 하는 현실이 참으로 기가 막혔다.
잘못된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잘못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우린 정말 아이들을 볼 면목이 없다.
잘못을 바로잡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간 그 아이들에게 정말정말 미안해서라도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
행동하는 양심, 실천하는 시민의 힘을 보태어 진실을 밝혀야 한다.
어린시절 기억 속에 또렷이 각인된 사진집이 있다.
표지도 떨어져 너덜거렸지만 김주열의 주검이 실린 사진책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항거한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의 참혹한 시신은 4.19 의거의 도화선이 됐고, 민주국가의 근간을 흔든 부정선거와 국가폭력은 어린 나에게도 분노를 갖게 했다. 어쩌면 어릴 때 각인된 그 사진책이 내게 역사의식과 반골기질을 심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88년 결혼하고 제주로 신혼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들렀던 망월동 5월묘지에서 본 참혹한 사진들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어린날에 본 4.19 사진집에 이어 국가폭력으로 각인된 두번째 사진이고 사건이었다. 80년 5월 광주의 진실이 가려졌던 시간만큼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견뎌야했던 세월을 국가는 보상이라는 이름으로 대체시키고 책임자를 처벌하지 않았다. 지금도 살아서 떵떵거리는 그 인간을 봐야하는 고통을 겪는 건 유족이고 국민들이다.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1주기가 되는데 아직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들이 수중에 있고, 국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진상을 밝히지 않는 저 무능하고 오만한 무리들을 어찌할 것인가....
왜, 우리는 역사를 바로세우지 못할까?
친일파 청산부터 80년 5월 광주와 세월호 참사에 이르기까지,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잘못을 되풀이하는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89년부터 광주에 와서 살면서 5월 진실을 알기 위해 수많은 5월 문학을 만나고 답사를 다녔다. 이제는 눈감고도 머리 속에 당시의 모습이 그려진다. 또 다시 우리 아이들에게 세월호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두 눈 부릅뜨고 책을 읽으며 현실을 직시하고 행동해야 하리라. 일단 참여하는 것부터...
4월 16일 세월호 1주기 우리지역 추모 모임에 유가족 *혁이 엄마가 온다.
*혁이 엄마와는 이제 세번째 만날 인연인가 보다.
3월 1일 안산합동분향소로 가는 길에 택시 기사님께 부탁해 단원고 앞으로 돌아서 갔었다.
교문에 걸린 입학을 환영하는 현수막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모두 앞가림하는 힘을 기르는 교육, 함께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우는 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