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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모자 울음을 터뜨리다 - 독일 올덴부르크 청소년 문학상 수상작 ㅣ 십대를 위한 눈높이 문학 10
베아테 테레자 하니케 지음, 유혜자 옮김 / 대교출판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2007년 독일 올덴부르크 청소년 문학상을 받은 <빨간 모자 울음을 터뜨리다>를 받아 들었을 땐, 솔직히 가족의 성폭력을 소재로 한 책이라 읽기가 꺼려졌다. 더구나 예민한 사춘기의 중3 막내에게 읽어보라고 권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책을 펼쳐 들고 읽기 시작하자 빨간 모자 읽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너무나 안타까워 결과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 사회 곳곳에서도 가족내 성폭력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지만, 침묵을 강요받기 때문에 일반적인 성폭력 사건보다 노출되지 않는다. 가장 안전해야 할 가정조차도 성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돼 온실 속에서 자녀를 키울 수 없는 환경이라면, 성폭력 예방과 문제 발생시 대처방법을 알려주기 위해서도 꼭 읽혀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할아버지를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수 있는 폐단도 있지만... 성추행이나 성폭행범을 누구로 설정해도 가능한 현실이다.
열네 살 말비나는 중학교 2학년, 키가 175센티나 되는 빼빼 마른 사춘기 소녀로, 리지라는 절친과 어울려 남자 아이들도 놀려대며 그 나이에 걸맞게 잘 지낸다. 가끔 혼자가 된 할아버지 댁에 도시락 심부름을 가야 하는 걸 제외하곤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도시락 심부름이라는 설정이 '빨간 모자' 동화를 연상시키며, 말비나를 잡아 먹은 늑대는 과연 누구였는지 생각케 한다. 열네 살 '말비나'가 이름에 걸맞게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용기를 낼 수 있을지... 결말이 어떻게 될지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말비나의 일기형식으로 진술한 작가는, 성폭력은 말비나의 잘못이 아니고, 슬픔에도 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열여섯 중 3 막내는 1시간만에 후딱 읽고는 눈물을 훔치며 나와 짧은 한 줄 서평을 남겼다.
"가슴이 먹먹했다. 믿기 어려운 얘기였으나 실제로도 있는 일들이었다. 제발 참지도 말고, 방관하며 모른 척 덮어두지도 말자.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용기를 내야 한다. 바구니를 들고 할아버지를 찾아가던 빨간모자가 마침내 용기를 내고 진실을 밝혀 다행이다."
성추행을 노골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면서 그 폐해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부모와 청소년이 꼭 봐야 할 성장(사회)소설이다. 성추행하는 인간을 할아버지로 제한하지 않고 가족이나 친척 누구로 대체해도 가능한 이야기다. 가족에 의해 저질러지는 성폭력의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비겁함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끔찍한 비밀, 하지만 누군가 내편이 되어 준다면 '말비나'처럼 용기를 낼 수 있다. 가족의 성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그 두려움에 저항하고 스스로를 지키려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부당한 성폭력의 진실을 외면하는 당신의 비겁한 침묵에 아이들은 절망한다. 아이에게 몹쓸 짓을 한 할아버지도 용서할 수 없지만, 침묵으로 동조하고 암으로 세상을 뜨면서까지 진실을 밝히기보다는 무덤까지 암묵하도록 종용한 할머니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가족과 사랑이란 이름으로 아이를 옭아매고, 네 말을 믿어줄 사람이 하나도 없을 거라고 겁주는 비열한 할아버지는 천벌을 받으라!
성폭력은 진정 피해자의 잘못인가? 할아버지가 진한 애정 표현을 할 때, 말비나는 갑자기 돌이 된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졸지에 당하는 성추행에 몸이 굳어 거부의사를 표시할 수 없었다는 증언을 우리는 들어왔다. 말비나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거품 목욕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채면서 그런 자리를 만들지 않으려고 친구 리지를 데려간다. 어렴풋이 자각하면서 스스로 벗어나려고 했던 말비나,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어린아이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
말비나 곁에는 불편한 진실을 밝히려는 이웃이 있었다. 할아버지 댁 이웃에 사는 폴란드인 비첵 부인, 그녀는 엄마를 잃고 아버지에게 시달려야 했던 친구의 불편한 진실을 외면했던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그 친구는 어린 동생을 아버지로부터 보호할 수 없었기에 자매는 산 꼭대기 바위에서 뛰어내렸고... 비첵 부인은 그때 비겁하게 침묵했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같은 잘못을 하지 않으려는 부인은 말비나에게도 진실을 말해야 된다고 조언한다. 할아버지는 선과 악을 알면서도 악을 선택했다고... 말비나의 친구 리지와 폼쟁이, 리지의 엄마도 말비나가 용기를 잃지 않도록 끝까지 지켜주었다.
불편한 진실에 용기 있게 나서도록 힘을 북돋아 주는 가족인가? 이미 자녀를 온실 속에서 키울 수 없이 불안한 현실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가족내 성폭력을 비롯해 학교와 학원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성폭력이 만연한 사회에서 사랑하는 자녀에게 예방책과 더불어 불행한 일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런 책을 통해 알려주면 좋을 것 같다. 말비나에게 가족의 도움이 필요했을 때, 오히려 덮어두고 외면하려는 가족들의 비겁함에 가슴이 떨렸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어야 할 가족이 불편한 진실 앞에서 비겁하게 도망치는 일은 현실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래도 말비나를 응원해주는 이웃과 친구가 있었고 언니가 있었으니 다행이다.
내 이름은 말비나다. 난 열다섯 살이다. 나는 권리를 지킨다는 의미의 말비나고, 바닥이 보이지 않아도 펄쩍 뛰어낼 만큼 용감한 말비나다. 내가 펄쩍 뛰었을 때 밑에는 리지, 폼쟁이 비첵 부인, 리지 엄마와 안네 언니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도망갔다. 예를 들어 울 오빠, 엄마와 아빠가 그랬다. 그들은 내게 일어난 일에 대해 부끄러워 했다. 난 내가 부끄러워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안다. 리지와 폼쟁이는 그 부끄러워하지 않는 법을 나에게 날마다 반복해서 알려 주고 있다. 그들이 나를 단 1초도 혼자 있게 두지 않는다. (2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