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창비시선 313
이정록 지음 / 창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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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홍성이 고향인 이정록의 시집이다. 오랜만에 내 고향 말로 된 시를 읽으며 깔깔 웃었다. 아버지 어머니의 말씀이 그대로 한 편의 시가 되었다. 시인은 아버지의 위트와 어머니의 관조와 품격을 물려받았다는 한창훈의 발문에 끄덕여진다.  

1부의 금강산기행의 시편은 뭉클하고, 2부 가족과 사람들의 짠한 인생사를 유머로 풀줄 아는 인생의 관조를 보여준다. 3부와 4부에서 보여지는 자신과 이웃들의 얘기도 감동스럽다. 보통은 한 편의 시집에서 내 마음에 콕 와닿는 시가 많지 않은데,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한편도 버릴 것없이 가슴에 와 닿았다.  

엄니의 남자 

엄니와 밤늦게 뽕짝을 듣는다
얼마나 감돌았는지 끊일 듯 에일 듯 신파연명조다
마른 젖 보채듯 엄니 일으켜 블루스라는 걸 춘다
허리께에 닿는 삼베 뭉치 머리칼, 선산에 짜다 만 수의라도 있는가
엄니의 궁둥이와 산도가 선산 쪽으로 쏠린다
이태 전만 해도 젖가슴이 착 붙어서
이게 모자(母子)다 싶었는데 가오리연만한 허공이 생긴다
어색할 땐 호통이 제일이라, 아버지한테 배운 대로 헛기침 놓는다
"엄니, 저한티 남자를 느껴유? 워째 자꾸 엉치를 뺀대유?"
"미친놈, 남정네는 무슨? 허리가 꼬부라져서 그런 겨"
자개농 쪽으로 팔베개 당겼다 놓았다 썰물 키질소리
"가상키는 하다만, 큰애 니가 암만 힘써도
아버지 자리는 어림도 읎어야"
신파연명조로 온통 풀벌레 운다
 

 
어머니와 아들이 같이 늙어가며 블루스를 춘다는 거, 정겨운 풍경 아닌가! 늙으신 엄니 춤상대를 해줄 순 있지만 아버지 자리 대신할 애인은 못 돼주는구나.ㅋㅋㅋ 이 모자의 대화 뿐 아니라 충청도 사투리의 진수는 말의 게미가 있다.^^  

잘 나간다는 말 

  요즘 잘 나간다매? / 잡지 나부랭이에 글 좀 쓰는 게, 뭐 잘나가는 거래유? / 그게 아니고, 요새 툭 하면 집 나간다매? / 지가 외출하는 건 성님이 물꼬 보러 가는 거랑 같은거유 / 물꼬를 둘러보는 건 소출하고 관계가 깊은디, 아우 가출도 살림이 되나? / 좋은 글 쓰려고 노력허고 있슈 / 요샌 우리도 물꼬 안 봐 / 알았슈 이제부터 사금파리 한 쪽이라도 물고 들어올께유 / 입에 피칠하고 들어와서 식구들 실신시킬라고 그러나? 웬만하면 나가덜 말어 / 알겄슈 / 글이랑 게 문리를 깨치면 눈감고도 삼천리 아닌감 옆 동네 이문구 선생 같은 양반도, 글쟁이들은 골방에서 문장이나 지으라고 그랬다잖여 / 방에만 있으면 글이 되간디유? / 어허, 싸댕기며 이삭 모가지 뽑는다고 나락이 익간디? 집에 들앉아서 제수씨 물꼬나 잘 보란 말이여 / 성님이나 잘 허셔유 / 얘가 귓구녕이 멀었나? / 인제 물꼬 안 본다니께 / 근데 형수님은 어디 갔데유? / 니 형수 요새 잘 나가야 몇 달 됐어 차례 지내려먼 이제 그만 자야지 않겄어 / 얼라, 언변이 윗마실도 아닌디 어디 가셨대유? / 씨부럴, 요즘 담배는 워째 이리 젖불 쬐는 것 같댜? 


세실님은 오리지널 충청도 사투리 다 알아들을 것이고, 메피님은 요런게 충청도 사투리의 맛이라는 걸 아실려나?ㅋㅋㅋ  그래도 압권은 뭐니뭐니 해도 '홍어'였다.

홍어  

욕쟁이 목포홍어집
마흔 넘은 큰아들
골수암 나이만도 십사년이다
양쪽 다리 세 번 톱질했다
새우눈으로 웃는다 

개업한 지 십팔년하고 십년
막걸리는 끓어오르고 홍어는 삭는다
부글부글,을 벌써 배웅한
저 늙은네는 곰삭은 젓갈이다 

겨우 세 번 갔을 뿐인데
단골 내 남자 왔다고 홍어좆을 내온다
남세스럽게 잠자리에 이만한 게 없다며
꽃잎 한 점 넣어준다 

서른여섯 뜨건 젖가슴에
동사한 신랑 묻은 뒤로는
밤늦도록 홍어좆만 주물럭거렸다고
만만한 게 홍어좆밖에 없었다고
얼음 막걸리를 젓는다 

얼어죽은 남편과 아픈 큰애와
박복한 이년을 합치면
그게 바로 내 인생의 삼합이라고 

우리집 큰놈은 이제
쓸모도 없는 거시기만 남았다고
두 다리보다도 그게 더 길다고
막걸리 거품처럼 웃는다 

 

’이것이 인생이다’에 나올 만한 인생 아닌가! 

'구라'로 유명한 황석영도 고개를 저으며 '너한테 졌다'라고 할만큼 시인의 말빨은 독보적이라고 한다. 수록된 시를 읽어보면, 시인이 시를 쓸 때 어머니만큼 강력한 동기와 큰 메타포가 없을거라는 해설도 이해가 된다. 어머니가 없었다면 대한민국 시인의 태반은 삼수째, 사수째, 자격증 취득 실패에 머물고 있을 거란다. 그래서 어머니는 시의 출발점이고 창작과정이며 도달점이란다.  

시인은 '시는 쓰는 게 아니라 받아 모시는 거다. 시는, 온 몸으로 줍는 거'라고 한다. 하지만 아무나 줍는 게 아니라서 역시 시는 천재의 영역이구나, 또 한 풀 꺾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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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5-12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시가 걸죽하네요, 막걸리보다 더.
이래서 시는 우리 시가 좋아요.
번역된 시는 시언어가 와닿지 않고, 원어는 제대로 음미가 안 되고.
우리 시는 읽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져버려요. 참 좋아요, 언니.

순오기 2010-05-13 01:21   좋아요 0 | URL
걸죽하고 맛깔납니다.^^
요런 우리말을 번역하기란 쉽지 않을 거 같죠.

穀雨(곡우) 2010-05-12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떨 땐 긴 글보다 짦으나마 시가 팍 와 닿더군요.
게다가 향수라도 불러 일으키면 더할 나위 없겠고.
시가 온 몸으로 줍는다는 말씀.
온 몸으로 끄덕여집니다.

순오기 2010-05-13 01:21   좋아요 0 | URL
좋지요~~~~~~~ 아무나 줍기 어려운 시지만요.^^

뽀송이 2010-05-12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 잘 지내시죠?
매번 주인장 뜸한 서재에 격려글 남겨주시고~ 저 너무 감동 먹은 거 있죠.^^*
요즘 고 1,3 두 아들 녀석 중간고사 기간이라 저도 덩달아~ 녹초가 되었답니다.ㅎ ㅎ
5월 6일부터 오늘까지 5일간의 셤이 끝나요~~~~~야호^^
안그래도 고3 아들 녀석은 홍삼액은 달고 살고 있고, 오메가3 에다가 종합비타민제까지,,,
약을 너무 좋아하는지라,,, 여기다가 더 먹이면 약물중독 될 것 같아요.^^;; ㅋ ㅋ ㅋ
늘~ 따스한 애정과 관심 감사해욤.^.~
아침 저녁으로는 아직 기온이 차가워요. 모쪼록 건강관리 잘하셔요.^^


순오기 2010-05-13 01:25   좋아요 0 | URL
애들 셤이면 엄마도 힘드나요? 난 한번도 그래본 적이 없어서.ㅋㅋ
우리딸은 기숙사에 있을 때 아빠가 챙겨준 저런 것들을 제대로 안 먹고~
못 먹고 못 자서 결국 쓰러졌었어요.ㅜㅜ
그래서 아들녀석은 2학년 되면서 미리 보약 한재 먹였는데, 약효는 모르지만 기분으론 확실히 효과를 보는 거 같아서 권해봤는데~ 약물 중독 수준이군요.^^

L.SHIN 2010-05-12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온 몸으로 줍다' 멋진 표현 배우고 갑니다.
그런데 두 번째 시는....아, 도무지,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ㅡ.,ㅡ

순오기 2010-05-13 01:25   좋아요 0 | URL
아~ 두번째 시는 충청도가 아니면 잘 못 알아 듣나요?ㅋㅋ

꿈꾸는섬 2010-05-12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아요.^^ 저도 찾아 읽어봐야겠어요.

순오기 2010-05-13 01:25   좋아요 0 | URL
좋지요~~~ 난, 너무 어두운 시보다 이런 풍자와 해학적인 시가 좋아요.

2010-05-12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0-05-13 01:26   좋아요 0 | URL
에구~ 늦게라도 받아서 다행이에요.
결국은 내가 주소를 잘못 써서 일어나 사단이었군요.ㅜㅜ
다음에 정확하게 쓸게요~ 고생하셨어요.

소나무집 2010-05-13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 알아들었습니다. 저도 친정이 충청도잖아요. 사투리 구수하네요. 그런데 요즘 친정에 가보면 저 정도로 사투리를 쓰지는 않으시더라구요. 같은 충청도라도 바닷가랑 육지 쪽이랑 말이 또 다르기도 하고 그래요.

순오기 2010-05-13 18:35   좋아요 0 | URL
후후~ 충청도는 역시 알아듣는군요.ㅋㅋ
전북 접경지역은 전라도 사투리랑도 많이 비슷하고요.^^

2010-05-13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0-05-13 18:39   좋아요 0 | URL
우와~ 학창시절 이정록 시인이 선생님이셨군요. 발문에 종례해달라는 고등학생 전화에 엉뚱한 답하는 에피소드도 나오거든요.^^
반갑습니다~ 그런데 어째 제가 부산인줄 아셨을까요?ㅋㅋ
저는 대놓고 빛고을이라고 홍보하는데요.^^

같은하늘 2010-05-13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입에 착착 감기네요.ㅎㅎ
근데 두번째 시 저도 통 뭔 소린지... 사투리에 너무 약해서...
찾아 볼라고했더니 일시품절이라네요. ㅜㅜ

순오기 2010-05-14 02:27   좋아요 0 | URL
말이 입에 착착 감기는 맛을 알면~~~~~~~~ 좋죠!!
사투리는 역시 그 지방에서 나고 자라야 완벽히 이해가 될 듯.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