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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거짓말 ㅣ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내일을 준비하던 천지가, 오늘 죽었다"
로 소설을 시작하다니!
"엄마를 잃어버린지 일주일째다."
라고 시작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처럼 숨이 멈출 것처럼 꽂혔다.
소설이든 삶에서든 누군가의 '죽음'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을 만들어내는게 싫다. 그래서 여러 말 하지 않으려고 대화를 인용한 리뷰로 대신한다. 천지의 죽음이 남긴 의문을 풀어가는 과정을 구질구질 끌지 않으며 상큼하고 발랄하다 할만큼 명랑한 대화로 이야기를 풀어냈지만 눈물이 났다.
책을 읽는 내내 모녀의 대화에 주목했다. 이런 대화를 주고 받는 모녀란, 이미 엄마와 딸의 관계를 넘어선 친구 같은 존재라고 생각됐다. 하지만 천지는 제 속을 다 털어놓지 못하고 가버렸다. 어째서 그토록 짜장면이 싫었는지 알았다면 그렇게 보내지는 않았을 텐데... 엄마와 천지가 주고 받은 대화는 천지의 죽음을 예고한 대화였고, 왜 죽었는지 의문을 풀어가는 열쇠다.
엄마하고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았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는 게 왜 이렇게 무겁냐."
엄마는 냉장고 안을 살폈습니다.
"천지야, 반찬도 없는데 짜장면이나 시켜 먹자."
"나 짜장면 싫어......"
"내가 못 살아. 지오디네는 엄마가 짜장면이 싫다고 했다던데, 우리 집은 왜 딸년이 싫다고 해. 그럼 라면이나 끓여 먹자."
나는 자장면이 싫습니다.
"엄마, 혹시 내가 죽으면, 내 사진 앞에서라도 짜장면은 먹지 마."
"보기 드문 짜장 안티네. 짜장이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나는, 짜장면이 너무 싫어....."
내가 느낄 만큼 눈이 뜨거웠습니다.
"알았어. 무슨 짜장면을 그렇게 서러워해. 걱정 마, 라면 끓일 테니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지만 뜨거운 눈은 식지 않았습니다.
"라면도 슬프냐?"
"짜장면 때문에...... 나, 죽을 거야......"
"이런 살인 짜장을 봤나. 내가 그놈의 짜장에 된장을 확 발라버릴라니까, 걱정말고 물부터 마셔라."
엄마가 준 컵을 꼭 쥐었습니다. 차가웠습니다.
"천지야, 속에 담고 살지 마. 너는 항상 그랬어. 고맙습니다, 라는 말은 잘해도 싫어요, 소리는 못 했어. 만약에 지금 싫은데도 계속하고 있는 일 있으면, 당장 멈춰. 너 아주 귀한 애야. 알았지?"
이제 그만 멈추려고요. 눈물이 자꾸 굵어졌습니다.
"에이, 나도 갑자기 라면이 슬퍼지네. 라면이 너무 슬퍼."
미안해요, 엄마.(111쪽)
내가 울었던 장면, 천지의 독사진과 세 모녀가 찍은 사진을 강물에 떠내려 보내면서 엄마가 하는 말을 우리 딸들에게 읽어주려다 눈물나서 끝내 다 읽어주지 못했다.
"천지 아빠, 천지 가. 만나면 왜 그랬느냐고 묻지 말고, 그냥 꼭 안아줘."
거짓말처럼 두 장의 사진이 나란히 떠내려갔다.
"이 웬수야, 애들 이름이 너무 크면 일찍 간다고 안 그래! 바득바득 우겨서 그렇게 짓더니, 이제 좋냐? 데려가려면 곱게나 데려가든가!"
사진이 반짝이는 물빛처럼 작게 보일 만큼 멀어졌다.
"우리 천지 만나면 발이나 꼭 감싸줘라. 감기 있는 거 같아서 보일러 좀 틀랬더니 공기가 찼는가 봐. 안 틀어지데. 쉬는 날 손보려고 했는데, 기집애가 가버렸어......"
"아요, 나쁜 년. 잘 가라, 이년아......"(77쪽)
그리고, 만지가 천지의 유언을 담은 편지를 발견하고 엄마와 주고 받은 말은 작가 김려령이 독자에게 당부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편지, 엄마도 있어서 진짜 다행이다......"
만지는 편지지를 본래의 실패 모양으로 접어 손에 꼭 쥐었다. 그리고 책가방에서 비타오백을 꺼내 엄마 얼굴 옆으로 불쑥 내밀었다.
"마셔."
"아오, 깜짝이야. 너 먹으라니까."
"두 개 샀어."
"뒀다 나중에 먹어."
"의자가 없어서 엄마도 비타민 필요할 것 같더라."
"기집애가 순 싸구려로 감동시키네."
엄마는 코를 한 번 훌쩍이고 비타오백을 쭈욱 마셨다."
"반만 남겨줘."
"켁!"
"나는 죽을 생각 전혀 없는데, 천지나 잘 보지 그랬어."
"그러게 말이다. 너, 죽지 마라. 언전가는 죽기 싫어도 죽어. 일부러 앞당기지 마.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사람들, 더 아프게 하는 거야. 죽어서 해결될 일 아무것도 없어. 묻어둘 수는 있겠지. 근데 그거, 해결되는 거 아냐. 냄새가 진동하거든. 진짜 복수는 살아남는 거야. 생명 다할 때까지 살아."(148쪽)
천지의 짧은 인생은 작년에 스스로 가버린 그녀의 죽음과 더불어 나를 울렸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진실을 깨닫는 건 너무 아프다. 정말 당부하건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미리 생을 내려놓지 말자. 그리고 진정으로 "잘 지내고 있지?" 안부를 묻지 못했던 그녀에게 용서를 구한다.
이번 설에는 그동안 잊고 살았던 사람들에게 "잘 지내지?" 안부를 묻는 명절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