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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의 맛 ㅣ 사계절 중학년문고 16
류호선 지음, 정지윤 그림 / 사계절 / 2009년 10월
평점 :
중학교 2학년 때 충청도 시골에서 부평으로 전학 간 나는, 학교에서 충청도 사투리가 튀어나올까봐 말을 아꼈었다. 집에서도 일부러 서울말로 연습했으니, 사투리를 쓰는 걸 촌스럽고 부끄럽게 여기던 보편적 정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더구나 충청도 사투리는 TV드라마에서 가정부(당시엔 '식모'라고 불렀다)들이 쓰는 말 정도로 치부했기 때문에 더 부끄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충청도 사투리처럼 구수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전라도에서 20년 넘게 살았더니 내 말씨나 억양도 전라도화 되어서 충청도 말은 많이 잊어버렸다. 그래도 친정엄마나 형제들을 만나면 자연스레 충청도 사투리가 튀어나오는 걸 보면 고향 말은 쉽게 잊히는 게 아닌가 보다.
10년도 훨씬 전 큰딸 초등 1학년 때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으려다 전라도 사투리가 입에 붙지 않아 못 읽었다. 한 5년이 흐른 후 다시 도전했다가 역시 실패했고, 3년 전 태백산맥 배경지 벌교로 문학기행 가느라 부랴부랴 3권까지 읽고는 또 멈췄다. 비록 태백산맥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이젠 전라도 말을 못 알아먹는 건 별로 없다. 광주살이 초기엔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마다 전라도 말을 내가 알아먹는지 확인하셨지만, 이젠 사투리의 뉘앙스까지 알아 먹는다. 전라도에선 '알아듣는다'는 말도 '알아먹는다'로 표현한다. 난 이제 전라도 사람 다 돼부렀다.ㅋㅋ
사설이 길었지만, 이 책 '사투리의 맛'은 전라도 여수말의 진수를 보여준다. 전라도 사투리라고 다 같은 게 아니어서 광주말 다르고 목포나 여수, 특히 섬 지역 사투리는 다른 게 많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아는 말과 다른 쓰임이 있어 혹시 잘못 표기된 건 아닌가 독서회원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아따~ 언니가 쓰는 전라도 말은 제대로 된 거시 아니고 여수 말은 또 다르당께." 라면서 예를 많이 들어줬는데 글로 옮기려니 또 난감해서 그냥 넘긴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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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환이 니는 좋겄다. 서울로 강께, 나도 데불고 갔음 싶다."
"뭐 서울이 별거 있간디! 별로 좋을 것도 읎다."
"자슥, 니 서울 감 우리 다 잊어뿔지 말그라."
"별걸 다 걱정한다."
"니 솔찮이 겁나 불지? 그려도 쫄지 마러! 니가 우리 동네 아나운서다. 이참에 서울 애들 기를 팍 죽여뿌려라."
"아먼, 암시롱토 않다. 느그들 걱정 말랑께."(2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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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에 사는 철환이가 서울로 전학가기로 정해진 후 혁이랑 주고 받은 말이다. 이 책의 대화는 전라도 사투리를 제대로 전달한다. 아나운서가 되고 싶은 철환이가 학교방송에서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동네 소식을 전했는데, 서울가서는 어찌할지 자못 기대되는 진행이다. 전학생은 이미 형성된 그들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려면 위축되기 마련인데, 우리의 주인공 구철환은
'서울이 별거간디! 별거간디! 나는 암씨롱토 않다. 암씨롱토 안 혀.'
마음을 다잡았지만, 자기 꿈을 발표하면서
"나넌 아나운서고 되고 잡습니다."
불쑥 사투리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웃음거리가 되었다. 너무 또박또박 말하느라 서울말로 바꿔 말하는 걸 깜빡했기 때문이다.ㅋㅋㅋ 게다가 조폭을 다룬 영화나 TV드라마에서 그들이 전라도 사투리로 했기 때문에, 졸지에 '돌산도 아나운서' 철환이는 '전라도 조폭'으로 불렸다. 호남을 차별하던 군사정권의 폐해를 보여주는 설정이라 유감스럽지만, 이것이 현실이니까 동화에서도 그대로 표현되었다. 우리가 흔히 서울말이라 하는 표준말은 '교양있는 사람들이 쓰는 현대 서울말'로 정의하고 있지만,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당시 중세국어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말이 전라도 말이라는 건 언어학자들도 인정하니 기죽을 필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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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방송반에 들어가고 싶은 철환이는, 할머니가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는 깍쟁이 혜향이의 개인지도로 발음교정에 들어간다. 이 부분을 읽는 독자는 그 누구라도 소리내어 읽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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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장 공장 공장장은 강 공장장이고 된장 공장 공장장은 장 공장장이다.
한양 양장점 옆 한영 양장점, 한영 앙장점 옆 한양 양장점.
저기 있는 말 말뚝이 말 맬 만한 말 말뚝이냐 말 못 맬 만한 말 말뚝이냐.
우리 집 옆집 앞집 뒷창살은 홑겹 창살이고, 우리 집 뒷집 앞집 옆창살은 겹겹 창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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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에 연습을 하고 방송국 아나운서 면접에 참여했지만 우리의 주인공 구철환, 그만 한 문장을 읽기도 전에
"그만! 너 고향이 어디니? 발음이 왜 그래?"
"선상님, 지가요......."
그만 쫄아버려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끝나 버렸다. 하지만 이대로 끝나면 동화가 아니지.^^ 허탈함에 소리없이 흐르던 철환이의 눈물은 급기야 담임선생님 앞에서 봇물이 터져 버렸다.
"고향이 전라도여서라! 엉엉엉, 사투리를 써 버려서라! 엉엉엉, 참말로 속이 징하게 상허요, 엉엉엉."
하염없이 흐르는 철환이의 눈물을 보며 선생님은 어떤 처방을 내리셨을까? 완전 반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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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메, 요 자슥 봐라, 봐라! 선상님 말씀허시는데 못 믿는 눈 봐라! 철환이 니는 모를 것이구먼. 학생이니까 사투리를 써 불면 쫌 으떠코, 안 써 불면 쫌 으떠냐? 나넌 선상이라고 아덜이 비웃어 불고 얕잡아 뿌리면 고것이 문제가 겁나게 심각해 불지 않겄냐? 그란디, 요 고향 말 요거시 그리 쉽게 고쳐 불면 고향 말이 아니제, 안 그냐?
"그라믄 선상님! 으찌혀서 서울말을 요리 나긋나긋 사근사근 잘허시게 되셨어라? 지는 고것이 참말로 궁금시러워 죽갔는디."
"고것이냐 나가 공짜로 알려 줄 수가 읎제. 철환이 니가 공부도 욜씸히 허고 학교 생활도 욜씸히 허는 거 보고 내 결정할 것잉께. 요로코럼 징징 짜고 있음 백날이 지난다 혀도 어림도 읎다! 사내 자슥이 말이여 우리 전라도 근썽이 있는디, 그깟 시험 쪼까 못 봐 부렸다고 울고 잡고 그라믄 서울 아덜이 너럴 뭐라 생각허겄냐?"
"아니여라! 아니여라! 인자 다 울었어라." (10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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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축된 철환이의 마음도 풀어주고, 아이들의 참여학습으로 사투리를 활용하는 담임선생님의 교수법은 썩 훌륭하다. 전라도 사투리의 맛을 제대로 살려낸 류호선 선생님의 창작동화 '사투리의 맛'을 안 읽으면, 우리의 주인공 철환이의 고군분투 사투리 탈출기가 어찌 되었을지 니들이 알것냐?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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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2~3학년 이상, 전라도 사투리가 궁금한 어른이나 어린이 누구나 좋을 유쾌한 동화다. 특히 사투리엑 얽힌 추억이나 아픔을 경험한 사람이 읽으면 기를 펴게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