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 공지영 에세이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2월
평점 :
이 책은 제목처럼 가볍게 크크~ 낄낄거리며 읽었다. 그런데 2~3일 지나 리뷰를 쓰려니 몇 가지 에피소드 외엔 생각나지 않는다. 음~ 몸통이 아니고 깃털을 얘기한 사회적인 메시지들도 있었는데 말이다. 할 수없이 다시 뒤적이니 작은 제목들만 봐도 웃었던 장면들이 되살아났다. 가볍게 읽고 부담없이 잊어도 좋을 우리들의 소소한 일상을 얘기하지만, 그럼에도 지천명에서 멀지 않은 공지영의 인생 연륜이 묻어나는 이야기다.
내가 읽은 책은 2009년 2월 16일 초판 이후 3월 27일의 '23쇄'인데 놀랍다. 초판 찍고 8개월이 지난 지금은 얼마나 많이 찍어냈을지 정말 궁금하다. (리뷰 쓰고 출판사에 전화해봤더니, 담당자는 아니라서 정확하진 않지만 1쇄 3,000부로 30쇄쯤 찍었단다) 공지영의 저력일까? 세상 사는게 팍팍해서 사람들은 가벼운 읽을거리에 목말랐을까? 아니면 가볍다고 선언했으되 결코 가볍지 않은 공지영의 솔직하고 거침없이 털어놓은 일상에 열광했을까? 수수께끼로 남기며 내가 공감한 이야기들을 풀어보련다.^^
동창친구들과의 이야기 '소중한 존재라는데 왜 화가 나지?'를 읽으며 어찌나 낄낄거렸는지, 옆에 있던 막내가 '그렇게 재밌어?' 하고 물었다. 나이 마흔이 넘어 30년만에 초등 동창들을 만났던 내 얘기와 다르지 않았다. 충청도 깡촌에서 등장불 켜놓고 살았던 유년의 악동들이 중후한 멋쟁이가 되어 나타났지만, 여전히 어딘가에 숨기고 있던 개구쟁이 본래의 모습이 드러날 때, 우린 원없이 웃었다. 두번째 동창회로 고향에서 만날 때는 혼숙도 불사했던, 절대 애인이 될 수 없는 진짜배기 친구였다. 하지마남 미사리 찻집에서 근사하게 차 한잔 마시자는 여자 동창들의 바램을 무참히 짓밟고, "그렇게 비싼 찻집엔 '남의 것(불륜의 애인)' 데리고 폼 잡으러 가는 거지, 절대 가슴 설레지 않는 니들(친구) 데리고 가는 데가 아니야"라던 녀석들 말이 떠올라 '소중한 존재' 의미에 박장대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낙장불입 시인과 버들치 시인' 이야기는 너무나 부러워서, 내겐 이런 친구가 없는가 헤아려 봤고, '다꽝과 오뎅'에 관한 미스터리엔 '내가 만난 새침떼기 같던 공지영 이런 사람이었어?'킬킬킬 웃고 말았다. '담요 드릴테니 사인해 주세요'에 나온 출산 후 한기에 떠는 산모에게 사인해 달라는 간호사들이나, 이혼서류를 접수시켰던 법원 로비에서조차 책을 들고 와 사인을 요구하던 그 남자는, 유명인에게 거침없이 혹은 인정사정 볼 것없이 가하는 팬들의 폭력(?)과 이기심조차도 웃을 수 있는 공지영의 인생 연륜에 박수를 보낸다.
목걸이 순정의 어린 제제조차도 '딴사람 사랑하면 인정하는 게 도리'라는 걸 아는 것처럼, 정치가들이 말하는 '사랑하는 국민을 위해 내린 결단'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삼척동자도 안다. '사소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라라'는 촛불집회에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정부에게, 춤추고 노래하며 가벼운 일상을 즐길 수 있게 해달라는 우리들의 소원이기도 하다. 남자 친구와 헤어져 훌쩍이는 딸내미와 술 한잔을 나누는 엄마, 게으르고 멋진 시어머니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작가와 같이 나도 마음의 손가락을 걸었다.^^
나도 젊은 날에는 무언가 잘못되면 큰일나는 줄 알고, 쌍심지를 켜고 목소리 높여 잘잘못을 가리던 일이 많았다. 그러나 살아보니까, '나이를 먹는다는 건 목소리 높이며 잘잘못을 따지는 일이 적어진다'는 걸 깨닫는 것이더라. 하늘이 두 쪽 날거 같던 큰일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된다. 내 생활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도 맘에 안 들면 속을 끓였는데, 이제는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 상대를 파악하면 그냥 그러려니 묵인한다. 어쩌면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공감한 것도 같이 나이를 먹어가는 공지영에게 인생 연륜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엄숙주의로 글을 썼기에 소탈하고 재미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 아주 가볍고 소소한 일상을 털어놓는 글을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작가는 인생의 질곡을 겪으며 정말 힘든 시기에 필요한 건 '유머'였다는 걸 깨달았고, 진정한 유머를 즐기는 것은 정의를 추구하고 불의와 맞서는 일에도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는 게 심각할 때일수록 정말 유머가 필요하다는 건 살아보면 안다. 이 책을 읽고 가볍게 잊어버려도 작가의 의도를 기억한다면 그도 나쁘지 않은 독자일 듯하다.
지승호씨가 인터뷰한 책 '괜찮다 다 괜찮다'에서 공지영이 추구한 작품세계와 그의 삶을 이해했다면, 이 책에서는 소소한 일상에 웃고 우는 우리 이웃인 공지영을 만날 수 있다. 아이들 문제로 속을 썩히거나 친구들과 수다떠는 아줌마, 깔끔할 거 같은데 엄청 게으르고 치우기 싫어한다는 것도 우리네와 다를 바 없다. 숨기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풀어내는 용기도, 가볍게 웃으며 눙치고 들어가는 여유도 있다. 심각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지만 가볍게 큭큭거리면서도 뭉클한 마음결도 만나게 된다.
*삽화는 개성있는 캐릭터지만 좀 황당하고 엽기적이다.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는 건 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