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0시 5분
황동규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겨울밤 0시 5분'이란 제목에 걸맞게, 1부에는 겨울에 읽어야 제 맛이 날 시들이 포진했는데 한여름 땡볕에 읽었다. 그래서일까 감정이입이 안되고 시가 겉도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익숙지 않은 낱말들이 튀어나와 당황스럽기도 했고... 어쨋든 내게는 쉽게 쏘옥 쏙 들어오는 시가 별로 없었다. 그래도 몇 편은 확 들어와서 다행이었지만, 시집 말미에 정끝별 시인이 쓴 해설을 읽으니 조금 이해가 됐다. 그래서 다시 찬찬히 읽어봤더니 마음에 드는 시들이 더 늘어났다.  

잠깐 동안  

잠깐!
삶이 잠깐 동안이라는 말이 위안을 준다.
잠깐이 몇 섬광(閃光)인가?
(57쪽 전문)

이 시집에서 제일 짧고 쉽게 이해되는 시였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시란, 읽는 순간 화악~ 이해되는 시다. 읽는이가 느끼는 대로 이해하면 되지, 굳이 해설을 덧붙여야 알 수 있는 시라면 독자와 친해지긴 어렵다. 어릴 때는 시간이 안 지나서 발을 동동 구르며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어른이 되고 보니 세월이 너무 빨라서 뭔가 이뤄 놓은 것도 없이 나이만 먹었다는 자괴감이 들 때가 많았다. 그런데, 이 시처럼 삶이 잠깐 동안이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로 받을 때가 있다. 이런 삶이 한 생전 계속된다면 살아내기가 버거울 거 같다. 즐거움도 고통도 잠깐이기에 견디거나 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려니 생각한다.   

삶을 살아낸다는 건 

다 왔다.
하늘이 자잔히 잿빛으로 바뀌기 시작한
아파트 동과 동 사이로.
마지막 잎들이 지고 있다. 허투루루.
바람이 자나가다 말고 투덜거린다.
엘리베이터 같이 쓰는 이웃이
걸음 멈추고 같이 투덜대다 말고
인사를 한다.
조그만 인사. 서로가 살갑다. 
(16쪽 부분) 

사는 일이란 이렇게 아는 사람들이 인사를 나누며 살가운 정을 나누는 것이다. 같이 투덜거려주는 이웃, 먼저 인사를 건네는 이웃이 있어 사는 일이 즐거운 거다. 예전 농경사회에선 공동의 생활이 많았지만 현대화된 사회에선 개인주의가 팽배해 알면서도 인사조차 건네지 않고 사는 이웃이 많다. 시인의 발견처럼 걸음 멈추고 인사를 나누는 살가운 이웃들과 열심히 살아가자.   

 

헛헛한 웃음 

요새 뭘 하지?
뭘 하다니?

(중략)

뭘 하고 있지?
뭘 하든 않든 아침저녁으로
하늘과 땅이 서로 들고 난 곳을 새로 맞춰보는
소나무들이 솔가리를 촘촘히 빗질해 내려보내는
가을이 오고 있겠지.
그래 그 가을의 문턱에서 지금 뭘 해?
여름내 속으로 미워한 자 하나
내처 미워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지.
그 할까 말까가 바로 피 말리는 일.
아예 소매 걷어붙이고 나서 미워하든가
마음에서 슬쩍 지워버리는 거야.
아니면 어느샌가 바위의 따스함이 그리워지는 저녁.
바위의 피부를 간질이는가벼운 햇볕.
볕이 춤춰. 하면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가만히 춤추다가
생판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 한번 헛헛하게 웃든가?
 
(112~113쪽 부분) 

두번째 읽으니 마음에 쏙쏙 들어오는 시들이 많아서 시읽는 재미가 더했다. 황동규 시인은 소설가 황순원의 아드님 아니던가? 마종기 시인은 동화작가 마해송의 아드님이고. 부전자전이라고 다른 영역도 그렇겠지만 문학도 대물림이 많다. 황동규 시인과 마종기 시인처럼 대물림 된 문학적 유전자가 탐나고 시를 쓰는 삶이 부럽다! 표제작인 '겨울밤 0시 5분' 일부만 소개한다.

'겨울밤 0시 5분' 

별을 보며 걸었다.
아파트 후문에서 마을버스를 내려
길을 건너려다 그냥 걸었다.
추위를 속에 감추려는 듯 상점들이 셔터들을 내렸다.
늦저녁에 잠깐 내리다 만 눈
지금도 흰 것 한두 깃 바람에 날리고 있다.
먼지는 잠시 잠잠해졌겠지.
얼마 만인가? 코트 여며 마음 조금 가다듬고
별을 보며 종점까지 한 정거를 걸었다. 

. 

(20~22쪽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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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09-08-06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샌 도통 시를 보질 않는데 황동규님 신간이군요. 저도 얼른 사야겠어요.^^

순오기 2009-08-06 21:58   좋아요 0 | URL
시집은 많이 보는데 리뷰는 안 쓰고 주로 시를 소개하는 정도의 페이퍼만 썼는데... '도착하지 않은 삶'리뷰 이후 그냥 내 소감 정도로 써야겠다 생각해요.^^

하늘바람 2009-08-06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런가요? 이상하게 마리에요 시는 마음이 아주 처절하고 슬플때 아플 때만 도올라서요.
ㅣ를 쓰게되면 아주 슬플 것같아요

순오기 2009-08-06 21:58   좋아요 0 | URL
그럴때 떠오른 시를 남기면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을 듯...

같은하늘 2009-08-06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동시집 밖에 안봤는데...
저도 읽고 이해가 쉬운 시가 좋아요~~

순오기 2009-08-07 00:38   좋아요 0 | URL
저는 사실 동시집이 더 좋아요.^^
처음 읽을 때 내 마음에 꽂히는 시~~ 그게 좋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