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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하지 않은 삶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3월
평점 :
'서른 잔치는 끝났다'며 포효하는 사자처럼 등장한 최영미, 그녀도 이젠 쉰에 근접한 나이가 됐다. 지천명이란 하늘의 도를 아는 게 아니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 들이는 것으로 나는 이해되던데, 그녀의 지천명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하며 조심스레 시집을 넘겼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mypaper/pimg_714960143471162.jpg)
일요일 오전 11시
유럽인들이 버린 神을
아시아의 어느 뭉툭한 손이 주워
확성기에 쑤셔넣는다
중년의 기쁨
화장실을 나오며 나는 웃었다
끝난 줄 알았는데.....
그게 다시 시작됐어!
젊어서는 쳐다보기도 역겨웠던
선홍빛 냄새가 향기로워.
가까이 코를 갖다댄다
그렇게 학대했는데도
내 몸의 시계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벌써 가버렸던가? 하하~~ 완전히 가버리기 전에 잠간 다시 찾아온다더라. 그녀에게 다시 찾아온 거시기는 마지막 작별을 고하기 위한 일정일 텐데...... 시로 쓸만큼 즐거워하는 그녀를 보며 슬며시 웃었다. 난, 그녀보다 한 살 위지만 아직 건재하단 말이지.^^
나쁜 평판
예술가에게도 도청 공무원의 품성을 요구하고
시인도 지방 면서기의 충성심을 보여야
살아남는 한국 사회에서
(중략)
어차피 사람들의 평판이란
날씨에 따라 오르내리는 눈금 같은 것.
날씨가 화창하면 아무도 온도계를 눈여겨보지 않는다.
이 시를 읽다가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 실렸던 Personal Computer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다.
'아아 컴 - 퓨 - 터와 씹할 수만 있다면!'
글자까지 굵게 새겨 넣었던 그녀의 이 시를 보고,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서 '선운사' 하나 빼곤 건질게 없다던 지인의 말도 생각났다. 어딜가든 따라 붙었을 평판에 그녀도 이제는 온도계를 보지 않아도 될 나이가 된 게야, 동감하며 동지의식을 느꼈다.^^
나는 시를 쓴다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혀를 깨무는 아픔 없이
무서운 폭풍을 잠재우려
봄꽃의 향기를 가을에 음미하려
잿더미에서 불씨를 찾으려
저녁놀을 너와 함께 마시기 위해
싱싱한 고기의 피로 더렵혀진 입술을 닦기 위해
젊은날의 지저분한 낙서들을 치우고
깨끗해질 책상서랍을 위해
안전하게 미치기 위해
내 말을 듣지 않는 컴퓨터에게 복수하기 위해
치명적인 시간들을 괄호 안에 숨기는 재미에
부끄러움을 감추려, 詩를 저지른다
-----시를 저지른다는 표현에, 그녀는 타고난 시인이구나 싶었다. 여기저기로 떠나기만 하고 도착하지 않은 삶을 기다리며, 빠져나간 젊음을 후회할 시간도 모자른다는 그녀의 삶은 시와 함께였음을 다시 새긴다. 4부로 나뉜 59편의 시를 읽으며, 그녀도 나이 먹었고 그의 시도 같이 나이 먹은 듯 많이 부드러워졌다. 얼굴 붉히며 읽지 않아도 되는 시가 좋아진 내 나이만큼이나 그녀의 시도 둥글어졌음을 느낀다. 하지만 여전히 솔직한 그녀의 시어들이 반갑다. 도착하지 않은 삶을 기다리는 시인처럼, 나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내 삶을 기다려 보련다.
시집을 읽다 보면 시보다 뒤에 쓰인 해설이 더 어려운 시집을 만나기도 하는데, 여기에 실린 일본인 사가와 아키씨의 해설은 어렵지 않아서 좋았다.^^ 그녀의 예전 시집을 뒤적이며 더불어 보는 맛도 좋았다.
*리뷰에 인용된 구절과 사진이미지의 저작권은 출판사에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