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기록
네꼬님의 글을 보며 기어이 눈물을 흘렸다.
우리 애들에게 읽어주면서도 잠시 숨을 고르느라 멈추어야 했다.
종일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어제 새벽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 리뷰에도 썼듯이
현재 내가 갖고 있는 것들과 누리는 것들이 행복하다기 보단 미안함을
오늘 용산철거민 현장의 그들에게 또 다시 느껴야 했다.
시골에서 살때만 해도 우리가 그렇게 가난할 줄 모르고 자랐다.
할아버지의 재산이 다 종가로 넘어가서 아버지 앞으로 돌아올
땅 한뙈기 없단 현실에 울분을 토하던 아버지는
자식들 교육을 위해 방한칸 마련할 장리 쌀을 얻어 부평으로 올라왔다.
구 한옥이었지만 대궐(?)같은 집에서 시작한 셋집이 나쁘진 않았다.
그러나 75년이던가 뻥튀기 된 집값 상승은 대궐같던 셋집에서
방문을 열면 한뼘 쪽마루 아래 연탄 아궁이가 있는 두칸 셋방으로 내몰았다.
그것도 산동네 같은 변두리로~~~ 중3부터 3년간 이집에서 살았다.
자존심 셌던 나는 옹색함이 부끄러워 친구 하나 데려오지 못했다.
이런 현실을 빨리 벗고 싶어서, 경제 형편상 당연히 여상을 갔고
75년부터 연합고사로 선발하던 그 학교에 합격하지 못하면
인문계 배정을 안 받고, 공장에 가서 돈 벌겠다며 기어이 2차 지원을 안했다.
다행히 합격했고 3학년 2학기때 실습 나갔던 회사에 취업했다.
철없이 선발집단이라고 어깨에 힘주고 다녔던 교복을 벗으니
내가 얼마나 초라하던지 빛나는 청춘은 우울하기 그지 없었다.
내가 바라던 모습과 현실의 나, 그 괴리감 때문에........
셋집을 세번 옮겨 다니고, 연탄개스로 두 번이나 죽을뻔했던 셋방살이는
내가 직장생활로 3년간 모았던 적금을 보태 집을 장만하면서 끝났다.
그리고, 바로 위 언니가 빨리 결혼해 나혼자 쓰는 내방도 갖게 되었고,
그 후 못다한 공부를 했으며, 삼남매의 엄마가 되어서도 공부하는 주부로 살았다.
88년, 58년 개띠인 남편을 만나 살림을 차린지 21년이다.
억대 빚더미에 올라 집을 팔고 삭월세 가자는 남편을 만류하고
18년 전 지은 이 집을 고수하는 건
옹색함이 부끄러워 친구 하나 데려오지 못했던 학창시절을
내 자식들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 하나 뿐이다.
비록 빚을 대물림해서 우리 애들이 갚아야 할 지라도...
용산철거민들이 절실히 원했던 건, 몸 하나 편히 뉘일 공간이었거늘
가진 것 많은 자들이
몸하나 뉠 곳 없이 뼛속까지 시린 그네들의 고통을 짐작이나 하겠는가!
오늘도 '난쏘공'의 현실이 되풀이되는 대한민국이 부끄럽고,
난쏘공 하나로 붓을 꺾은 조세희 작가의 심정을 알 것 같은 기분이다.
2009년 1월 20일 대한민국의 현주소, 공권력을 동원한 살인행위를 똑똑히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