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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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막 나왔을 때, 읽어보기도 전에 ’박완서’ 작품이니까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거란 믿음 하나로, 세살 위의 내 언니와 이웃 언니에게 생일선물로 주었다. 하지만, 정작 내 책은 지인에게 선물을 받고도 두달이나 지나서 읽었다. 지난 주부터 밤참을 먹듯이 단편 하나씩 야금야금 먹는 그 맛이 참 좋았다. 단편집은 한번에 쭈르르 읽어버리면 제목과 내용이 헷갈리기 때문에, 단편집을 읽어내는 내방식은 매번 이렇다.

지난 월요일, 아이들 중학교에서 방과후학교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화요일 집에 돌아와오니, 중3 아들녀석이 아무것도 신청하지 않았다며 게임을 하고 있었다. 삼남매 중에 특히 아들에게 믿음을 덜가진 나는 대뜸 뚜껑부터 열렸다. "니 알아서 신청한다더니~ 아무것도 안 했단 말야?" 자기발전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지, 왜 그런 기회를 그냥 보내는지 안타까웠다. 아들녀석은 해봐야 별로 득되는 것도 없고, 배우고 싶은 것도 없노라고 항변했다. 이 녀석의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이 딱히 없다는게... 3년간 장래희망에 '한의사'라고 써서 내긴 하지만, 그닥 공부에도 열심내지 않는다. 그날 모자간에 엄청난 설전이 오갔고, 분이 충천한 녀석은 이를 뿌드득 갈아대며 "시험에서 성적 올리면 될 것 아니냐? 중학교때 그렇게 열심히 안해도 된다고 담임샘도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내가 바닥을 기는 것도 아닌데..." 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런 녀석을 놔두고, 나는 꾸역꾸역 밥을 먹었다. 내 눈물을 씹어 삼키는 밥을......

이런 진통을 치르고 나면 한동안 살맛이 나지 않는다. 그날 밤, 나는 저녁밥상을 차리지 않았다. 그냥 누워서 내가 아들을 너무 못 믿고 몰아세우나 반성도 하고, 지가 웬만큼 했으면 이렇게 불신할까? 눈물과 반성이 교차되면서 텅 비어버린 것 같은 공황상태가 지속되었다. 녀석도 한숨 자고 났는지 배가 고팠는지 제방에서 나와, 모른척 밥상을 차려주지 않아도 주섬주섬 꺼내어 밥을 먹었다. 미운 마음에 밥도 주기 싫었지만, 그래도 짠한 맘이 들어 치나물을 내어주고 비벼먹으라 일렀다.

그날 밤, 곱게 잠이 올리 없어 한밤중까지 뒤척이다 '친절한 복희씨'와 벗하려고 책을 펴 들었고,  세번째 단편인 '마흔아홉 살'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며 나는 울었다.

   
 
 그 여자는 요새 부쩍 더해진 식탐이 걷잡을 수 없이 도지는 걸 느꼈다. 조금씩 같이 먹을 줄 알았는데 김밥과 순대는 거의 그냥 남아 있었다. 그 여자는 그 소박하고도 느글느글한 것들을 짐승 같은 식욕으로 먹어치우고 인삼차를 한 잔 더 시켰다. 금년부터 치수를 28로 늘려 입었는데도 바지 허리는 만복을 이기지 못해 짤룩하게 뱃살과 허릿살을 갈라놓고 있었다. 명치가 등에 붙을 듯이 날씬하다가도 생명만 잉태했다 하면 보름달처럼 둥글게 부풀어오르던 배는 이제 두꺼운 비계층으로 낙타 등처럼 확실한 두 개의 구릉을 이루고 있었다. 허리의 후크를 풀자 역겨운 트림이 올라왔다. 자신이 비곗덩어리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지면서 메마른 설움이 복받쳤다. (107~108쪽)
 
   
아~ 여자 나이 '마흔아홉 살'이면 이렇게 꾸역꾸역 밥을 먹을 수 있는거구나, 분에 겨워 길길이 날뛰는 녀석을 두고 꾸역꾸역 밥을 먹은 내가 용납되지 않았는데, 여자 나이 마흔아홉 살이면 다들 그러는구나, 그럴 수 있구나! 그럴 수 있구나! 수없이 되뇌이며 100% 절대 공감으로 위로가 되었다. 

이 책은 중년, 혹은 노년의 여성 화자 - 박완서의 모습이라 생각되는 - 들이 등장해 삶을 풀어낸다. 공선옥의 작품에 등장하는 구질구질한 삶에 치인 여자들이 아닌, 그럭저럭 살만하거나 그런대로 유복했다 여겨지는 여자들의 삶이 펼쳐진다. 작가가 추레한 생활을 하지 않았으니 신산한 삶을 그리진 못할거란 생각도 살짝 들었다. 마흔아홉의 나는 노후를 위한 연금도 없고 재테크는 꿈도 못 꾸는 상황인지라, 노년에 자식들이 주는 용돈 몇푼으로 살겠구나 생각하니, 소설속의 여자들은 팔자 좋은 여편네일지도 모른다는 삐딱한 심사도 좀 생겼다.

내 나이 마흔이 넘어서면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니까, 마치 박경리가 그려낸 '토지' 속의 '임이네' 같아서 스스로 혐오스런 감정을 한동안 갖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어쩜 이렇게 깍쟁이 같은 속내를 술술 잘 풀어내는지, 작가의 맛깔나는 수다에 빠져 들며 공감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기막힌 상황에서도 꾸역꾸역 밥을 먹듯, 어떤 상황도 이해 못하거나 용서 못할 것이 없는거구나 생각되었다. 노년을 맞는다는 것, 노년을 누린다는 건 작가나 작품속 주인공처럼 체면이나 허위를 벗어버리고, 제 나름대로 삶의 철학과 지혜를 갖는 거구나 짐작해본다. 

이 책에 수록된 '마흔아홉 살'뿐 아니라, '대범한 밥상'에서도 외동딸 내외를 졸지에 잃고, 세살, 여섯살 외손주가 남겨진 상황에서 '그 끔찍한 참척을 겪고도 눈이 초롱초롱해서 밥을 아귀아귀 먹은 것' 을 흉보는 동창들의 수다가 나온다. 그 외에도 그리움을 위하여, 후남아 밥 먹어라를 비롯한 거의 전편에서 밥 이야기가 나온다. 며칠 전 걸려온 큰언니의 전화에, 아들녀석과 있었던 이야기를 풀어내며, 내가 꾸역꾸역 밥을 먹었다고 토로하자, 쉰여섯이나 된 언니는 "그래, 그럴 수 있어. 그렇게 살기 위해 꾸역꾸역 밥을 먹는거야. 너도 이제 그 나이가 되었구나!" 위로하였다. 7남매의 장남에게 시집 간 언니는, 장애와 모자람까지 있는 시동생과 얍삽한 시동생까지 그 형제들의 일에 치여 참으로 힘들게 살아왔다. 그러니, 꾸역꾸역 밥을 먹는 일이 사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표제작인 '친절한 복희씨'가 남편이나 자신에게 느끼는 살의를 충족시켜 줄 죽음의 고약덩어리를 강물에 던져버림으로, 생에 친절한 복희씨가 되어 반신불수가 된 남편이나 자신을 위해서 이후에도 꾸역꾸역 밥을 먹었을거라 짐작한다. 이 책을 다 읽고 며칠 숙성시킨 결론은, "삶은 밥이구나!" 내 나이 마흔아홉 만큼의 어설픈 철학으로 마무리하며, 여든이 되어가는 작가의 건강을 기원하며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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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9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4-10 0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08-04-09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의 리뷰에는 언제나 '삶'이 묻어 있어요. 그래서 더 마음에 와 닿고 깊이 공감해요. 꾸역꾸역 밥을 먹어가면서 억척스럽게 이어가는 모진 삶을, 우리 함께 경배해요.

순오기 2008-04-10 05:35   좋아요 0 | URL
억척스럽게 살아낸 우리 어머니들의 삶을, 우리도 이어가야겠지요?
부끄럽지만 저렇게 쓰고 나니 마음이 많이 녹아졌어요.^^ 알라딘은 해우소!

웽스북스 2008-04-10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계속 손이 안가 못읽고 있는 책이에요 이책
얼마전에 명랑한 밤길 다 읽으면서 순오기님 생각 했어요
그리고 어제 식코를 다시 보면서
자꾸만 식코를 보고 일어나지 못했다는 순오기님 독서모임 회원 분이
계속 마음에 밟혔어요

휴일 잘 보내셨지요?

순오기 2008-04-10 05:38   좋아요 0 | URL
어제 새벽에 이 리뷰 쓰고는 늦잠 잤어요.ㅠㅠ
빈둥거리다 오후 늦게 투표하고..결과 보다가 살맛 안나서 그냥 자버리고, 다시 새벽에 일어나 알라딘 즐기는 중이에요.^^
지역영화관 사이트에 투표하기 전에 '식코'보라고 후기 올렸는데, 많이들 봤으려나?~~~ 이동네야 식코 안봐도 녹색동네지만...^^

프레이야 2008-04-10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뜨거운 가슴의 소유자 순오기님, 쉰여섯의 언니에게도 경배를 보냅니다.
꾸역꾸역 밥을 먹는 나이, 삶을 제대로 살아내는 나이인 것 같아요.

순오기 2008-04-10 17:33   좋아요 0 | URL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머리가 되어야 하는데, 머리가지 뜨거워서 문제랍니다.ㅠㅠ 꾸역꾸역 밥을 먹는 나이가 제대로 사는 삶이어야 하는데 그도 아닌 것 같아서 착잡했어요.

희망찬샘 2009-02-17 0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편이 사서 읽고는 책꽂이에 고이 꽂아 둔 책... 꼭 읽어야 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