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20일부터 오후만 되면 머리가 아팠다. 전에도 가끔 편두통이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커피를 한 잔 마시거나 찬바람을 쐬면 괜찮아지기도 했고, 누군가와 수다를 떨고 나면 풀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며칠 째 지속되는 두통~~~참을 수 없을 정도여서 큰딸의 입학식이었던 22일 오후는 내리 잠을 잤다. 그 다음 23일엔 숙녀가 될 딸을 위해 구두와 핸드백, 옷가지와 필수품을 사면서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다. 마구 앞으로 쏟아질 것 같은 두통에 진통제를 먹고 죽은듯이 잤다. 그 다음 24일도 쇼핑하는데~~~ 같은 상황 반복.ㅠㅠ

2. 24일 밤, 광주행 고속버스가 막 출발했는데 동생으로부터 친정엄마가 쓰러졌다는 전화가 왔다. 막 터미널을 빠져 나왔기에 기사님께 부탁해서 내렸다. 다시 터미널로 돌아가니 걸려온 전화, 심하지 않으니 그냥 내려가라는 친정엄마의 목소리였다. 큰딸 입학식 때문에 금욜 수업을 빼먹었기에 월욜 아침부터 보강이라 두 시간 뒤, 다시 고속버스에 올랐다. 집에 들어온 시간은 밤 12시가 넘었다.

3. 월요일 25일 밤, 친정엄마가 어떠신가 전화하니 많이 안 좋으셔서 시간이 걸리겠단다. 금요일 우리딸 입학식에 가신게 무리였을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 혼자 계신 엄마가 토요일에 식사도 제대로 안하고 당뇨약을 드셨단다. 일요일에 교회가다 넘어졌는데 혼자 못 일어나서 지나가던 분이 일으켜주고, 근처 가게에 들어가 쉬었다 집으로 와 실신하듯... 이웃 할머니들이 걱정하는데 아들한테 연락을 못하게 하셔서 저녁 늦게서야 노인들이 전화하셨다.ㅠㅠ 나도 토요일에 엄마한테 들렸다 내려오려다 바람이 심하니 오지 말라는 엄마전화도 있었고, 머리도 너무 아프고 '나를 버리고 가지 마!'라는 큰딸이 짠해서 하루 더 묵으면서도 엄마한테는 안 갔었다.ㅠㅠ

4. 남편에게 친정엄마 상황을 설명하니, 토요일에 시아버님도 쓰러져서 구급차로 응급실에 가고 퇴원했단다. 아~~~무도 모르지만, 나만 아는 양심에 찔려 밤새 잠을 못 잤다. 5년전 시엄니가 암으로 운명하실 때 혼자 임종을 보게 된 나는, 2주째 혼수상태로 숨을 거두지 못하는 어머니께, "아버님 때문에 못 가세요? 제가 성심껏 모실테니 걱정말고 편히 가세요!"라고 말씀드렸더니, 마치 그 말씀을 들으신 듯 한 시간도 못되어 숨을 거두셨다. 그 후 우여곡절이 있어 내 마음의 약속을 방치한 채 지냈고, 아버님 혼자 산 세월이 5월이면 만 5년이 되며 연세도 여든이나 되셨다.

5. 시아버님이나 친정엄마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미래 모습이지 싶다. 길어야 2~30년 후의 내모습이라 생각하면 참 남의 일이 아니다. 물론 노인들도 거동할 수 있으면 혼자 살겠노라 고집하셔 혼자 계셨지만, 이제는 모셔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내 친정엄마를 거둬주는 올캐들이 한없이 고마우면서도, 내가 그런 며느리가 되는 건 마다하고 싶은 무한이기심이 부끄러워 얼굴이 벌개졌다. 부모에게 못하면서 내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고, 복받기를 바란다는 것도 어불성설이었다. 막발로 '제자식 영어공부를 위해 ㅇ둥이 빤스도 빨아주고(물론 세탁기가 빨았지만) 살았는데, 내 부모한테 못하랴.' 는 마음이 들었다. 17년 전 부모님 모시고 살려고 설계한 이 집에서, 우리끼리 그동안 잘 살았으니 이제는 집값을 해야할 듯하다. 예전이나 지금도 셋째라서 부모를 안 모시겠단 마음은 없는데, 늘 열악한 우리의 경제여건이 좋아진 것도 아니지만, 다음날 아버님께 전화를 드렸다. 홈스테이하던 버논도 2월로 끝내고 민주도 인천으로 갔으니, 광주로 오셔서 같이 살자, 잘 모시겠다고는 못하지만 그냥 편하게 한 식구로 살자고......아버님은 고맙다며, 병원에서 몇 가지 검사도 해야되고 생각해 보신단다.

6. 큰딸의 이부자리를 택배로 보내려는데 날마다 머리가 아파서 챙겨지지 않았다. 게다가 27일은 바쁜 일정에 점심도 거르고 다섯시까지 일을 봤더니 편도가 부어 침 삼키기도 힘들다. 웬만하면 하룻밤 따뜻한 차를 마시면 나았는데 점점 심해졌다. 열 때문인지 오후면 여전히 머리가 아프고... 혈압이 높아 오는 두통이라면 뒷골이 아파야 하는데, 왜 난 앞머리가 쏟아지듯 아프지? 갑자기 두통의 심각성과 가족력(할아버지와 아버지형제분들 모두 뇌경색)의 공포감이 밀려와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동맥경화나 기타 등등 정상에서 큰 이상은 없다며 갱년기 증상이고 스트레스성이란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아플 만큼의 스트레스는 없는데.......

7. 하루 이틀 미뤄지니 3월 1일에 택배가 도착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3월 1일날, 할 수없이 커다란 이불 보따리를 고속버스에 싣고 인천으로 갔다. 제 자식 일이니 이런 짐보따리도 마다 않지, 시부모가 하라면 절대 못한다 했을거라 싶어 씁쓸한 미소가 지어진다. 고속버스에서도 아침부터 시작된 두통에 견디기 힘들었다. 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딸한테 두통약을 사 놓으라 했다. 동생집에 들어가니 조카들과 한의원에 가려던 올캐가 기어코 나를 끌고갔다. 모든 검사를 마친 한의사님 왈, "누가 그렇게 속을 썩여요? 하루 이틀에 이리 된 게 아니고 그 동안의 스트레스가 누적된 결과로 뇌경색이 올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라며 겁을 주었다. 글쎄~~~ 누구야? 나를 이렇게 스트레스 쌓이게 한 인간이~~~^^ 나름 스트레스를 잘 풀고 즐겁게 산다고 자부했는데,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가 보다.ㅠㅠ

8. 침과 부황에 온갖 물리치료를 받으니 머리도 좀 가볍고 기분도 풀린 듯하다. 무엇보다 체중을 줄이는 게 급선무라며, 저녁식사는 선식을 먹으라며 한 박스 안겨주고...... 우선 20일치 한약을 택배로 보내줄테니 먹으며 관리를 잘 하라는 당부였다. 흠~~~거금일텐데, 올캐가 이미 결제를 끝냈다. 우리 올캐 왈, "형님이 아프면 어머니가 걱정하느라 더 아프고, 어머니 아프면 결국 며느리인 내 몫이니, 형님이 건강한게 나를 돕는 것"이라는 논리였다. 손아래 올캐지만 참 고맙고 미안하다. 우리 큰딸한테도 엄마보다 더 살갑게 대하고 짐으로 여기지 않는 것만도 고마운데, 이런 신세까지 졌으니 건강관리를 잘 해서 보답하리라 불끈 다짐한다.

9. 3월 2일, 기숙사에 기본 짐을 넣고 선배들의 말을 들으니, 아침만 주는 식사문제로 먹을거리로 필요한 게 많았다. 오빠 집 근처에 있는 광명성애병원에 들러 엄마를 잠간 보고, 올캐와 아울렛으로 장을 보러 갔다. '컵라면'이나 '햇반'을 누가 먹는가 했더니 우리 딸이 먹게 되더라~ 기숙사에서 취사는 안되기에 휴일 식사나 평일 점심 저녁을 사먹기 싫으면, 햇반을 전자렌지로 데우거나 컵라면 같은 걸 먹게 된단다. 고3때 11개월을 기숙사에 있으면서 '집밥~ 집밥'하던 딸인데... 그래도 곁에 외숙모가 있어 다행이다. 엄마는 많이 좋아진 듯하고 내가 엄마 딸이어도, 우선은 내딸 문제가 시급한지라 밤 8시 병원을 나섰다. 밤9시 큰딸을 기숙사에 보내며 기어코 모녀간에 치열한 전쟁을 치뤘다. 서로 정을 떼려는 것인지 떨어지는 게 무리였는지 딸도 아프고 나도 아픈데, 몸만 아픈게 아니고 마음도 아파서 눈물바람을 했다. 아이도 그날 밤은 기숙사에 안 들어가고 외삼촌집으로 와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고 울었다는데, 나도 돌아오는 고속버스에서 내내 울었다. 시집 보내는 것도 아니면서 뭔 정을 떼겠는가, 그저 우리 모녀가 너무 닮은꼴이라 그런거겠지. 하여간에 이제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제 알아서 할 일이다. 제 말마따나 '마법의 횡단보도(웬디양님 페이퍼)'는 '엄마의 존재 유무'로 갈린다는데, 어련히 잘 하리라 믿는다.

10. 3월 3일 새벽 2시가 넘어 광주에 도착했다. 맘도 몸도 편치않아 깊은 잠을 못자고, 아침에 일어나 다들 보내고 10시 민경이 중학교 입학식에 갔다. 중학교야 학부모들이 많이 오지 않지만, 삼남매의 입학과 졸업을 지켜보는 게 내 몫이라 사진도 두어장 찍었다. 교실 복도에서 선생님 얼굴도 확인하고 교과서를 한아름 안고 민경이와 돌아왔다. 오후 3시 방과후학교 강사 회의가 있어 참석하고, 간만에 여유롭게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약발이 떨어지면 재발되는 두통도 좀 풀린 듯하다.^^ 대학가는 언니에 치여 중학교 입학을 알아주지도 않아 나름 서운했던 민경이를 불러내 옷을 사줬다. 바지 두개와 셔츠와 가디건, 청바지와 셔츠는 모녀가 세트로 샀다. 나를 위한 호사가 얼마만인지, 만날 가죽 자켓만 입는 내게 바바리스타일의 자켓도 사줬다. 요즘 내리 긁어 댄 카드결제가 걱정되긴 하지만, 뭐 어떻게 되겠지!ㅠㅠ

11. 저녁을 먹으며 남편한테 딸과 치룬 전쟁을 전하고- 제 외숙모한테 미안한 엄마 마음은 모르는지- 딸에 대한 괘씸함은 잠시고, 짠한 마음이 앞서는지라 전화를 하니 안 받아 잠들기 전 문자를 보냈다. 

"오늘, 밥 잘먹고 잘 살았느냐? 밥을 먹는 건 신성한 일이다. 반드시, 꼭 챙겨 먹어라!"

"오늘도 밥 잘 챙겨먹고 잘 살았어.ㅋㅋ지금은 기숙사에서 잘려고 누웠어. 잘 지낼게, 걱정 마!"

*내 사랑 애물단지, 기숙사의 첫 밤 편히 자고~~~ 씩씩하게 잘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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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8-03-04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을 먹는 건 신성한 일이다. 그게 엄마의 마음이군요. 왜 난 아직 그걸 잘 모르죠. ㅠ.ㅠ

순오기 2008-03-04 11:39   좋아요 0 | URL
밥을 먹는 건 살기 위한 거니까 신성하죠.
공지영의 '즐거운 나의집'에 나온 대사를 인용했어요.^^

2008-03-04 1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8-03-04 11:4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저도 그리 해봐야겠군요.
오늘은 두통약 먹지 않았는데 견딜만하군요.^^

웽스북스 2008-03-04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짠해요.....
제가 이래뵈도 기숙사 4년 살았는데, 흠, 뭔가 도움이 될만한게 있으려나....

순오기 2008-03-04 11:45   좋아요 0 | URL
웬디양님의 기숙사 4년이, 저는 왜 짠~할까요.ㅠㅠ
우리딸은 입이 짧고 소식하는데다 고3때 기숙사에서 수시로 나온 냉동식품 같은거 질색이에요. 잘 안 먹고 못 자서 쓰러진 경력(?)이 있는지라 섭생이 젤 걱정이에요.

웽스북스 2008-03-04 12:20   좋아요 0 | URL
저는 아무거나 잘먹고 튼튼해서 기숙사에서 잘 살았었어요
냉동식품같은 것도 잘 먹었다는 -_-v
궁하면 다 먹게 돼있어요 ;;;

흠, 저도 취사가 안되서, 학교 밥은 싫구 뭔가 맛있게 먹고싶을 땐 전자렌지로 김치찌개를 끓여먹었었어요- 식권을 내고 밥이랑 김치를 타왔는데, 그 학교는 그게 안되면 햇반에 포장김치로 끓여야겠네요. 김치 넣고, 참치 넣고, 스팸 같은 거 있으면 넣고, 라면 하나나 반개 정도 넣어서 뜨거운 물 붓고 렌지에 20분 정도 돌리면 김치찌개가 돼요. 라면은 보글보글 찌개면이 맛있구요, 맛낼 줄 모르는 저는 찌개면 스프도 살짝 가미해서 먹었었어요 이렇게 끓여서 친구랑 둘이 나눠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는데 말이죠 ^^

무스탕 2008-03-04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 맘에야 환갑을 넘겨도 아이는 아이지요..
큰 따님 잘 해낼테니 일부러라도 맘 편안하게 지내도록 하세요.
글고 꼭 병원가서 검사 받으시고요. 오늘 괜찮다고 그냥 넘기지 마세요!!

순오기 2008-03-04 17:50   좋아요 0 | URL
부모마음은 여든이 돼도 예순된 아들에게 길조심 하라고...^^
글세~~오늘은 좀 살만하네요. 뇌검사를 한다는게 겁도 나고...ㅠㅠ

bookJourney 2008-03-04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 입장에서 걱정되는 마음이야 어디 가겠습니까만 ... 아이들(!)은 엄마가 걱정하는 것보다 잘 지낸다고들 하더군요. ^^
건강 조심하시고요 ~~

순오기 2008-03-04 17:5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알아서 다 잘하는데 괜히 걱정하는거겠죠. 엄마 잔소리 안 들어서 살맛 날텐데...ㅎㅎ

마노아 2008-03-04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바탕 전쟁을 치루었어요. 딸로서 며느리로서 또 엄마로서, 삼박자를 다 해내는 순오기님이 너무 대단하고 또 짠합니다. 이렇게 치열하게 사는데 모두에게 축복이 옴이 마땅해요. 따님 기숙사에서 멋진 추억 만들며 잘 살 거예요. 밥을 먹고 사는 일은 정말 신성하지요. 저도 잘 새기겠습니다.(물론 너무 잘 먹어서 탈이지만요..;;;)

순오기 2008-03-04 17:52   좋아요 0 | URL
아직 며느리 노릇은 시작도 안 했어요. 마음만 먹고 있지요~~~ 내 맘 변하기 전에 오셔야 되는데...^^
밥벌이도 신성하고 먹는 일도 신성하죠. 우린 둘 다 잘 해내고 있고요!!

마미's애물단지No.1 2008-03-04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난 진짜 잘 살고 있어; 오늘 아침밥은 고3때 기숙사 아침밥을 떠오르게 하는 수준이었지만..
그럭저럭 국에 말아서 먹었고 수업도 괜찮았어.
고등학교 때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었던 수업보단 훨~~~~~~~~~~씬 괜찮았어!ㅋㅋ
엄마도, 동생들도, 아빠도 다들다들 잘 살아~! 안녕~!!

순오기 2008-03-05 08:21   좋아요 0 | URL
오우~ 내 애물단지^^ 잘 살아야지!
엄마 컨디션이 최악이라 어젯밤은 푸~욱 잤다.
믿으니까 자주 연락 안해도 섭섭해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