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밤길
공선옥 지음 / 창비 / 200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00년이던가,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라는 산문집을 읽다가 그녀처럼 엎드려 울었다. 울다 보니 내 설움인지 통곡이 되었고, 놀란 우리 아이들이 "엄마, 왜 그래? 책이 그렇게 슬퍼?"라고 물었다. "아니, 너무 아름다워서, 자운영 꽃밭에서 울 수 있는 감성이 아름다워서..."라고 궁색한 변명을 했었다. 그 후 뒤늦게 그녀의 등단작부터 찾아 읽었고 새 작품이 나오는 족족 읽으며, 공선옥 그녀에게 전염되어 갔다. 사랑도 병이런가! 그녀에게 애정이 깊어가면서 내 삶도 신산해졌고, 그녀의 작품에서 만나는 여자들의 삶이 지지리 궁상스러워 신물이 났다. 내 삶이나 그녀들의 삶이 왜 다 그 모양인지...... 굳이 책을 찾아 읽으며 스트레스 받을 이유가 없기에 '붉은 포대기' 이후 손을 딱 끊었다.

그리고 5년이 흘러 다시 만난 공선옥, 그녀는 여전히 상처뿐인 여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무책임하고 뻔뻔하고 이기적인 남자도 여전하고, 더 이상 숨길 것도 없고 물러설 곳도 없는 여자들을 아주 가까이서 냉정하게 그려내고 있다. 마치 내 얘기를, 내 치부를 들춰내듯 속삭이는 그녀에게 빨려들었다. 바로 이것이 공선옥의 매력 아닐까? 한 발 물러나서 편안하게 관찰하는 독자가 아니라, 내 얘기를 주절주절 털어내는 주인공 같은 느낌으로 맞딱뜨리게 된다. 결코 편안치 않은 독서이면서 손에서 내려놓을 수도 없는 '명랑한 밤길'이었다. 12편을 하루에 한 편씩 내 삶의 단면을 들여다보듯 야금야금 씹어 먹었다.

맹랑한 통증으로 같이 한 숨 쉬며 체념하고 싶은 인생들, 무엇 하나 만족스럽거나 윤택과는 거리가 먼 그녀들의 삶에서 건져올리는 명랑함이라니? 작가의 사진을 보니, 예전보다 볼 살이 올라 좀 여유롭고 윤택해 보이기는 하는데, 그렇다면 작품 속 여자들의 삶도 좀 나아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살짝 내 눈꼬리가 흘겨지려 한다. 그러나 12편의 단편을 다 읽고나선, 공선옥 그녀도 나이 먹었고 두어 살 더 먹은 나도 나이 먹었음을 발견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삶을 대하는 자세나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음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불에 덴 혀로 왕소금을 씹어 삼키는 것 같은 나날들'이지만, 꿈에서나 상상속에서라도 행복이 다글다글 굴러다닐 것 같은 희망과 용기가 있다면 사는 거다. 남편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울지 않는다고 구박 받으면서도 울 수 없던 영희가, 장례를 치르고 살기 위해 목놓아 통곡하는 것처럼.(영희는 언제 우는가) 아무리 힘든 파출부 일을 다녀도 쓰레기가 될 뿐인 온갖 도구에 흙을 채워 꽃과 채소를 가꾸고 있으면 근심걱정이 사라지는 즐거움이 있기에.(도넛과 토마토) 스물한살 처녀를 가지고 장난치지 말라고 격렬하게 떨면서도 또박또박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기에.(명랑한 밤길) 처녀가 애를 낳는 게 죄가 되는 세상에, 낳아서 버린 아이를 대신해 입양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79년의 아이)

12편 모두가 웃을 일 하나 없는 신산한 그녀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신산한 삶에서도 왜 명랑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삶이 신산할수록 웃어야 살 수 있다. 나도 근 1년을 웃지 않고 이를 북북 갈듯이 산 세월이 있었다. 그 결과 내 삶이 달라지는 건 없었고, 머리가 듬성듬성 빠지는 원형탈모만 겪었다. 지금도 숭덩숭덩 빠지고 나고를 반복하지만 이젠 탈모 자체에 신경쓰지 않는다. 웃지 않는 신산한 삶은 자기를 소모시킬 뿐, 결코 상황이나 현실을 바꿀 수 없었다. 그 상황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지고 내 삶을 다른 시각으로 직시했을 때,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그래서 삶이 신산할수록 명랑해야만 살 수 있다. 명랑할 이유를 찾아 자기의 인생을 가꿔가야 한다고, 공선옥 그녀는 12편의 그녀들을 통해 독자에게 소곤소곤 풀어낸다.

동감이다~~~ 공선옥, 그녀의 삶이 누구보다도 신산했기에, 이렇게 분신같은 그녀들의 애정어린 삶을 얘기할 수 있는 거다. 나도 이를 갈며 웃지 않고 산 세월이 있었기에, 구질구질하다 여겨졌던 그녀들의 삶에 동감할 수 있는 거다. 내가 신산한 삶을 살았기에, 비로소 남들의 신산한 삶이 눈에 들어오는 인생의 이치를 발견한 독서였다. 오늘 내 삶이 어이없이 황당하고 억울해도, 웃을 수 있는 이유를 찾아내어 명랑하게 웃으며 살자. 그것이 신산하기만 한 우리네 인생을 지탱하는 힘이고, 세상을 따뜻하게 살 수 있는 길이기에......

*이 책을 선물해 주신 멜기님께 마구 고마움이 일어나는 독서였어요. ^^


댓글(12) 먼댓글(1)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순오기님을...
    from 나비의 오래된 감각 2008-02-10 10:14 
    알라딘의 친선대사로 임명해야 한다는 생각이 다른사람들의 댓글(내것도 포함해서)에 다신 글을 읽으며 들었다. 알라딘에서의 생활에 활기를 넣어주시는 순오기님 화이팅!!
 
 
세실 2008-02-09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는게 거짓말 같을때>,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살> 참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랑 이름이 같아서 더 와닿았던 작가. '삶이 산산할수록 웃어야 살 수 있다'는 님의 말씀에 공감 갑니다.

순오기 2008-02-10 08:34   좋아요 0 | URL
<사는게 거짓말 같을 때>는 내가 손을 끊었을 때 나온 책이라, 아직 못봤어요.^^
작가 또래의 연배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겠죠? 신산함을 겪어야 비로소 남들의 신산한 삶이 눈에 들어오는 인생의 이치를 발견한 독서였어요.

2008-02-09 14: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8-02-09 15:51   좋아요 0 | URL
작가의 삶이 그만큼 신산했음을 알기에 더 공감하지요.
올려놓고 수정하는 사이에 기다렸다는 듯 댓글이 달려 있어 깜짝 놀랐어요. 부족한 리뷰를 보고 이 책을 읽고 싶어졌다니 감사해요.
인생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져야 명랑하고 따뜻하게 살 수 있는 듯해요.^^

라로 2008-02-09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병랑한 밤길...꼭 읽고 싶어졌어요.
명랑하게 웃는게 인생을 지탱하는 힘이고, 세상을 따뜻하게 살 수 있는 길이란 말씀 깊이 담아갑니다.

순오기 2008-02-09 15:51   좋아요 0 | URL
어머~ 나비님 안녕! 명절 잘 지냈죠?
이젠 희망이도 나이가 두 살이군요. 겨우 백일 막 지났는데 두살이라니?ㅎㅎ
명랑하게 웃는 게 인생을 지탱하는 힘이라, 우리가 날마다 알라딘에서 웃잖아요! ^^

bookJourney 2008-02-09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신산한 소설을 감히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감당이 안되더라구요. 그런데, 순오기님의 리뷰를 읽으니 ... 다시 시작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순오기 2008-02-10 08:35   좋아요 0 | URL
살다보면 그런 소설이 싫어지는 때가 있더군요.^^
역시~ 공선옥이다! 싶을만큼 괜찮았어요. 꼭꼭 씹어가며 먹을 책이에요!

프레이야 2008-02-09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랑한 순오기 님, 목포 잘 다녀오셨지요? ^^

순오기 2008-02-10 08:36   좋아요 0 | URL
옙, 혜경님도 즐거운 명절 보내셨나요?
알라딘의 즐거움이 명랑한 삶을 살 수 있게 하지요!!^^

마노아 2008-02-11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랑 가족 한 권 읽었을 뿐인데 참 오래오래 마음에 남았어요. 신산함... 공선옥 작가를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단어 중 하나일 거예요. 신산함을 넘어선 명랑함을 만날래요^^

순오기 2008-02-11 04:10   좋아요 0 | URL
그래서 공선옥의 작품을 읽기가 버거울때가 있죠~~~
우리 다같이 신산함을 넘어 명랑함을 만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