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란 고향은 충청도 당진인데, 정곡리(井谷里)라는 행정상 지명 외에 몇 집을 단위로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다. 동네의 중심이었던 우리집과 할아버지집, 작은집을 아우르는 이름은 '구루지'였고, 담안, 구억쟁이, 동미, 바드물, 사둘고지, 샘골, 함박섬, 속수섬... (모임하면서 다시 얘기해서 되살려낸 이름은, 상골, 몽추골, 배울, 증설미)이런 이름들로 불렸다. 하도 오랜만에 생각하니 입안에서만 뱅뱅 돌고 튀어나오지 않는 이름도 있지만, 시골에서 자란 분은 그렇게 작은 단위로 부르던 이름이 있다는 걸 알 것이다. 자~ 님들의 고향을 떠올려보면 배시시 미소가 지어지겠죠? ^^
이금이 작가의 '맨발의 아이들'에도 정겹고 예쁜 마을 이름이 나온다. '드무실, 양짓말, 새터말, 방죽거리, 가마골, 아래뜸, 감나무골, 음짓말, 안골' 등, 한 집 같던 마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내 고향 같은 느낌이라 따뜻함과 안타까움을 동시게 갖게 한다.
이렇게 예쁜 이름들이 왜 사라지게 됐는지 한비야는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에서 설명하고 있다. 해남 땅끝마을부터 통일전망대까지 800Km에 이르는 우리 땅을 두 발로 걸어 종단한 49일간의 여행기록인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 156~157쪽에 실린 내용이 중학교 1학년 1학기 생활국어 81쪽에 수록됐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인용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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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읍 지도에 나타나 있는 이 근처 동네 이름도 아래 파발, 점말, 새술막, 곰지골, 한여골 등 가지가지로 예쁘다. 어제 문경세재에 입구에 있던 마을 이름은 듣기에도 정이 가고 이국적이기까지 한 '푸실'이었다. 풀이 우거졌다는 뜻의 '풀'에다 마을을 나타내는 '실'을 합해 '풀실'이 되고, 거기서 발음하기 어려운 'ㄹ'이 탈락해 '푸실'이 되었단다. 다른 지방에 있는 '푸시울'이나 '풀실'도 같은 뜻이다.
푸실! 한번 소리 내서 불러보라, 참 예쁘지 않은가. 부르기도 좋고 듣기도 좋고 뜻도 좋은 이름이다. 이런 이름을 두고 일제 때 편한 대로 지은 상초리(上草里), 하초리(下草里) 등을 지금껏 공식 지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정겹고 사랑스런 토박이 이름이 멋도 뜻도 없는 한자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는 수천 수만 가지다. 곰내가 웅천(熊川), 까막다리가 오교(烏橋), 도르메가 조봉(周峰0, 따순개미가 온동(溫洞), 숯고개가 탄현(炭縣), 지픈내(깊은 내)가 심천(深川), 구름터가 운기리(雲基里) 등 생각나는 대로 살펴봐도 대번에 알 수 있다. 왜 우리는 토박이 이름을 제대로 찾아쓰지 못하고 있을까?
사실 한자 지명의 역사는 일제시대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시대에는 비록 우리 글은 없었지만 땅 이름을 우리말에 가깝도록 이두나 향찰 구결 등으로 표기했다. 그러나 통일신라 때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여 행정 구역 명칭을 한자로 바꾸면서 토박이 이름은 '족보'에 올라가지 못하고, 그저 입으로만 전해졌다. 그 위에 한문 우위 문화까지 가세해서 말로는 우리 지명을, 표기는 한자를 사용하는 땅 이름의 이중 구조가 시작됐다.
그러나 토박이 이름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집중적이고 의도적으로 없앤 때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일제시대다. 우리나라 지형이나 역사, 자연 환경에 아무런 애정과 이해가 없는 것은 물론 민족혼을 말살하려고 혈안이 돼 있던 일본인들이 우리 땅 이름을 어떻게 했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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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는 여기까지만 실렸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용은,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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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나라의 행정구역인 시, 도, 읍, 면, 동, 리를 통틀어 토박이 이름을 되찾아 쓰는 곳은 '서울' 한 곳뿐이라니 놀라움에 앞서 부끄럽기 짝이 없다. 한편 그나마라도 어떤 분들의 노력의 산물인지 진심으로 자랑스럽고 고맙다.
그러면 왜 일제시대 때 빼앗긴 이름을 우리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되찾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창씨개명으로 바뀐 사람 이름을 되찾듯 '창지개명'을 당한 땅에 제 이름을 찾아주어야 하지 않는가. 광복 이후 이런 움직임이 있기는 했지만 우리가 체감하기에는너무 미흡했다.
땅 이름은 단순히 토지나 장소의 이름만이 아니다. 한 동네의 지형적 특징, 역사와 자연 환경, 전통을 단번에 알 수 있는 귀중한 무형문화재이며 조상들의 영혼과 지혜를 담고 있는 훌륭한 유산이다. 또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변천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사전이기도 하다. 이렇게 소중한 것을 수수방관 모른 척했고, 그 결과 이제 우리 곁에서 영원히 사라질 위기를 맞고 있다. 그 이름을 기억하고, 지금도 쓰고 있는 70세 이상 되시는 동네 어르신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어디서 그것을 되찾을 수 있을까. 정말 이렇게 내버려둘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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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의 이야기는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일이고, 지금은 지자체에서도 우리 이름 찾기에 동참하고 있음을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지하철역 이름에서도......
내 고향 구루지도 九老地라고 표기한다. 하지만 이건 일제의 잔재로 그렇게 되었기에, 우린 그냥 구루지라 부르고 쓴다. 고향을 뜬 건 중학교 2학년이던 1974년이었고, 그 다음해 육영수 여사가 총격당하던 날에야 전기가 들어 온 그야말로 깡촌이었다. 그러나 한보제철이 들어오면서 많은 변화를 겪는 곳으로 서해대교 건너 '송악인터체인지'로 빠져 7~8분이면 우리 고향에 도착할 수 있다. 지금은 정미소를 하는 사촌이 지키는 고향이고, 6년 전 아버지를 뫼신 상여를 따르며 통곡했던 그 곳을 아버지를 뵈려고 간간히 찾게 된다.
형제들의 성장기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지만 살다보면 그러기가 쉽지 않은 것이 고향 찾기다. 그래도 아직은 사촌이 있고 작은어머니가 계시기에, 또 아버지를 모신 곳이기에 우리 형제들은 쉽게 가 닿을수 있다. 우리야 사촌이 같이 자랐으니 교류하지만, 우리가 늙으면 그도 어려운 일이고 자라나는 2세들한테는 아무 상관없는 곳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친정 사촌형제들의 모임인 '구루지회'였다. 우리 5남매와 같이 자란 사촌 4남매의 아홉 쌍이 시작한 모임은, 통틀어 막내이던 우리 민경이가 두 살이던 1996년에 시작했으니 10년 세월도 넘었다. 아홉쌍이 모이면 아이들은 기본이 둘이었고, 우리 오빠와 나만 셋을 두었으니 모두 38명이나 되었다. 거기에 우리 부모님과 작은어머니가 오시면 40명이 넘기도 했다. ^^
40명이나 되는 대가족이 여름, 겨울방학마다 모이는데 당진, 안양, 인천, 서울을 거쳐 내가 사는 광주까지 아홉 가정을 다 돌아보는데도 7,8년이 걸렸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체험학습을 겸한 모임으로 스키장이나 휴양림 등 물 좋고 산 좋은 곳을 찾아 다녔다. 4촌 6촌이 되는 아이들도 처음엔 서먹하더니 모이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만나면 반가움이 더했고, 어른은 어른끼리 애들은 애들끼리 날밤을 새우며 추억을 쌓았다. 성장기를 함께 하지 않으면 공유하는 추억이 없어 대화를 트기가 쉽지 않은 요즘, 우리 형제들은 '구루지 모임'을 통해 4촌과 6촌이어도 소통할 수 있는 추억을 만들어 간다.
잘 참여하던 아이들도 중,고등생이 되면 점차 얼굴 보기가 쉽지 않다가, 대학이나 군대를 가기 전엔 수금차(?) 꼭 얼굴을 들이민다. 우리 애들도 중학교부터는 안 가려고 해서 몇년 째 막내가 대표로 따라 나섰는데, 이번엔 민경이도 중학생 된다고 빠지고 대학가는 큰딸이 축하금(?)을 받으러 따라 나선다. ^^ 10년이 훌쩍 넘으며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2세도 있으니 3~4대가 함께 하는 명실상부한 '구루지회'가 된 것이다.
사촌이 어찌 사는지 두루 돌아보고는 교통사정을 감안해 중간지점인 도고에 콘도를 마련해 겨울방학엔 주로 그곳에서 모였는데, 이번엔 이사 한 큰언니의 집들이를 겸해 서울 중랑구 언니집으로 모인다. 이사를 하거나 애경사가 있을 때는 특별히 그 가정에서 모인다. 이렇게 구루지 모임으로 다져진 사촌간의 우애는 우리 시어머님 돌아가셨을 때, 목표까지 달려온 여덟쌍의 형제를 본 시아버님과 시댁형제들을 감탄하게 했다. 막내 며느리로 찌그러져 살던 순오기가 상중임에도 어깨가 펴지며 뿌듯했던 순간이었다.^^
그래서, 오늘 점심에 큰딸과 서울 갔다가 월요일에 내려온다. 동행을 거부한 둘째와 막내는 아빠와 같이 알아서들 무언가 끓여먹고 사흘을 살겠지? ^^ 난, 이렇게 출타해도 이것 저것 만들어두지 않는다. 처음엔 미안해서 이것저것 사다 놓거나 만들어 놓고 다녔는데, 엄마가 없어도 마누라가 없어도 전혀 아쉬움을 모르는 것 같아, 이제는 손가락이나 빨고 있으라고 그냥 간다. 지금도 아침 일찍 일어나 음식은 안 만들고 알라딘에 페이퍼나 쓴다. 요즘은 알라딘이 내 애인이라, 내일 모레 만날 알라딘의 새애인 생각에 구루지 모임에 가는 발걸음이 더욱 더 가쁜하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