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49>인간의 조건-앙드레 말로

이 시대가 비극적인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어떤 행위도 결국 좌절할 수밖에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 스스로 구원의 가능성을 거부하고 수동적이고 순응적인 태도로 이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일까? ‘인간’이 될 수 있는 ‘조건’은 따로 있는 것일까? 앙드레 말로는 ‘인간의 조건’에서 개인적이고 부분적인 것이 체제적이고 전체적인 것과 맺고 있는 관계를 조망하고, 한 인간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행위’임을, 그리고 그 행위는 역사 속에서 정당한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는 ‘삶의 역사성’을 강조함으로써 이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 듯하다.

‘인간의 조건’은 1927년, 중국 상하이에서 공산주의자의 주도 아래 총파업이 일어나고 군벌에 대항하기 위해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이 국공합작을 하고 분열하는 과정과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도 코민테른의 지도 노선에 충실한 인물과 공산당의 지령을 거부하는 소수파 사이의 갈등을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등장인물은 순간순간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 고뇌에 빠져드는데, 말로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인물을 형상화하고 있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 우세한 세력에 밀착하여 자본을 축적하고자 하는 은행가 페랄, 자신의 삶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무책임한 클라피크, 공산주의자에게서 받았던 고문 때문에 증오에 차 있는 쾨니히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에는 자신의 출신 계급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물질이나 환상 또 복수에 집착하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이해관계와 생명을 구하기 위해 타인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말로는 한 인물의 가치는 사유나 언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행위를 통해, 특히 죽음 앞에서의 마지막 선택을 통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이 관점은 혁명가에겐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다. 이들은 신분과 국적을 넘어 동지애로 묶여 있고 상황을 인내하고 숙명을 거부하기 위해 행동하는 인물이다.

상하이 폭동을 주도했던 기요는 새로운 폭동을 꾀하다가 잡힌 후 독약을 먹고 자살하며, 첸은 장제스를 암살하기 위해 폭탄을 안고 승용차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첸이나 기요는 행동하는 인간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죽음이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실패’의 신화를 보여 준다. 그러나 카토우는 체포된 후 다른 죄수에게 자기 몫의 독약을 건네주고 산 채로 열차 화통에 던져지는 영웅적 죽음을 선택한다. 그의 죽음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증오의 고리를 깨뜨리고 인간성을 재천명하는 순간을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죽음을 넘어선 죽음, 공동체 의식에 뿌리박은 ‘인간’의 죽음이다. 이처럼 말로는 전쟁과 혁명의 와중에서 인간은 희생자일 수밖에 없지만 절망적인 순간에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내고 연대의식을 드러내는 진정한 영웅이 탄생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인간의 조건’은 가벼움과 차이를 중시하고 개인을 우선시하며,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선언한 현대 문학과는 다른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 이 작품의 문학적 의미는 선택과 행위의 관계를 드러냄으로써, 문학을 통해 역사 속의 개인들을 형상화하고 역사를 통해 새로운 문학의 길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유호식 서울대 교수·불어불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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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50>의무론-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서양 고대에 우리가 바라는 이상 국가가 실제로 있었다. 그곳에는 경찰이 없었다. 시민은 단도를 지니고 다닐 수 없었고, 장군이건 병사건 도시로 들어오려면 성문에서부터 무장을 해제해야 했다. 카르타고, 마케도니아, 코린토스를 정복한 장군들은 하나같이 전리품을 국고에 넣거나 도시 장식에 사용했다. 사기, 수뢰란 말도 없었다.

기원전 2세기 중엽의 로마 공화국이 그러한 이상 국가였다. 이는 전적으로 로마인이 농민 출신으로서 검소 질박한 생활을 해온 데다 정의, 지혜, 용기, 인내의 4추덕(樞德)을 갖춰 행복한 생활을 추구하라는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 윤리 사상을 받아들인 덕분이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살던 당시 로마는 고통이 최고악이요 쾌락이 최고선이라는 에피쿠로스의 윤리 사상에 물들어 타락해 가고 있었다.

이를 안타까워한 그가 기원전 44년에 아테네에 유학하고 있는 아들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식으로 쓴 최후의 저술이 ‘의무론’이다.

비스마르크가 정치가가 되고자 하는 학생은 꼭 읽으라고 권유했듯이, 이 책은 그의 이상 정치가론이기도 하였다.

세계 역사상 윤리 면에서 키케로의 ‘의무론’만큼 후세에 줄곧 영향을 끼친 책은 일찍이 없었다. 서양 고대는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 중심의 중세 시대에도 이 책은 계속 도덕규범 도서였다.

15세기 중엽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에 ‘의무론’의 필사본이 700개나 세계 여러 도서관에 산재되어 있었다 하며, 인쇄술이 발명된 이후에도 ‘의무론’은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혔다. 1501년 에라스무스는 늘 지니고 읽어야 한다며 포켓용 번역판을 내놓았다.

셰익스피어의 시대에도 ‘의무론’은 도덕 철학의 결정체였다. 18세기 볼테르는 누구도 이보다 더 현명한 책은 쓰지 못할 것이라고 설파했고, 프레데리크 대왕은 이 책을 도덕에 관한 최상의 책이라고 극찬하였다.

키케로의 ‘의무론’은 3권으로 되어 있다. 제1권은 도덕적으로 선한 것(명예·名譽), 제2권은 유익하거나 편의적인 것(공리·功利), 제3권은 명예와 공리의 상충을 다루고 있다. 1, 2권의 내용은 중기 스토아학파의 파나이티우스에게서 따온 것이지만, 3권은 키케로의 독창적인 것이다.

그는 오리엔트, 그리스, 로마의 온갖 신화와 인간의 일화를 총동원하여 공리보다는 최고선인 명예를 택할 것을 주창했다. 포에니전쟁 때 국가의 안위를 위해 죽음의 자리를 찾아간 레굴루스 장군, 비겁자라는 온갖 비방에도 지연작전을 써서 로마를 구한 파비우스 장군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 물건의 하자를 숨기거나 남을 속여 실리만을 챙기는 사람은 혹독하게 질타 당한다.
건강에 좋지 않은 살기 나쁜 집인데도 건강에 좋은 집으로 상대에게 파는 자는 “결코 정직하지도 않고, 순박하지도 않으며, 명예롭지도 않고, 정의롭지도 않으며, 선하지도 않은 사람이다. 오히려 그런 자는 교활하고 간교하며, 남을 잘 속이고, 사악하고 난폭하며, 사기와 음흉의 세계에서 자란 사람이다”고 말한다.

라틴어 원전을 대본으로 한 키케로의 의무론(서광사·1989)이 번역본으로 나와 있다.

허승일 서울대 교수·역사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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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올 추석이 지나갑니다

바쁘게 움직였던 이번 한 주.

가족이 전국에서 모여 지난 이야기를 나누며 보낸 그 짧은 시간이 더욱 길게 느껴지는 것은

귀경길이 너무 막혀서 인지도 모릅니다.

새벽에 길을 나섰는데 평소보다 많이 걸릴거라 생각을 하고 있지만

올해도 여전히 길이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벌초하고 주변을 내려다보면 아버님이 평생을 다니셨던 논들이 발아래 펼쳐집니다.

지금은 황금빛으로 변해버렸지요.

콤바인이 오가며 추수를 하겠지만 10년전만 해도 사람 손을 빌려 추수하느라 많이 힘이 들었습니다.

시골사람과 결혼을 해서 논일, 밭일을 한다며 뭐하러 이런 결혼 했느냐며 농을 하시던 식구들.

지금은 기계화가 되어 농사일을 거들어 주러가는 횟수도 많이 줄었습니다.

아니 거의 가지 않아도 될 정도로 기계로 다 하니까요.

해마다 늘어가던 논이 원망스럽기만 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 많은 논을 혼자서도 꾸려가는 것을 보면

기계가 좋기는 좋은가 봅니다.

아직도 논밭너머 멀리 서울로 가는 차들의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듯 합니다.

귓가에 맴도는 대나무밭의 새소리 그리고 바람소리.

산어귀를 돌아서며 옛날 풀뿌리를 캐서 씹던 그 시절

왜 이리 그립습니까?

궁상이라 생각해도 좋겠지만 그래도 그때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10리가 넘는 먼 학교에  가기 싫어 아침마다 부모님 눈치를 보았던 시절.

 

이제 집에 누워 그 시절을 머릿속으로만 그려보아도

입가엔 미소가 맴돕니다.

내일부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도 이번 연휴는 즐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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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기억하십니까? 80년대 야학을!!

잊혀진 학교 새마을청소년 학교에 대한 추억
 
대학 2학년

뭔가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구시장 2층 건물에 있는 새마을 청소년학교를 찾아갔다.

낡은 건물에 깨진 유리창이 몇 개 보이는 허름한 학교였다. 1980년대 초였기에 야학이라고 하면 누구나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 시절.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는 3개의 교실에는 피곤함을 이기려는 학생들로 가득차있었다. 그 당시에는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꽤 많던 시기였다. 그나마 큰 회사에는 회사안에 학교가 있어 일하고 배우는 것에 어려움이 없었지만 아주 작은 규모의 공장들은 그나마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었다.

하여튼 학교의 일을 보던 교무선생님의 면담을 거쳐 학생들의 수학을 담당하게 되었다.

첫수업.

자신만만하게 생각하고 수업준비를 한 상황이라 여기고 학생들 앞에 섰다.

그런에 웬일인지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준비한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고 쉽게 풀 수 있으리라는 내용의 교과서도 감감할 뿐. 그저 막막함이 나를 가로막았다.

그때 경아라는 학생이 '선생님, 처음에는 다 그러는 거예요. 우리 재미있는 이야기 해요.'

하면서 분위기를 바꾸면서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게 되었고 그 아픈 기억을 되살리며 열심히 학교생활을 해 나갈 수 있었다. 그것이 나의 교직 생활에 많은 추억이 되고 좋은 도움이 되리라는 것을 그 당시에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나도 대학생이었고 전주로 통학을 하는 관계로 수업이 끝나는 대로 바로 학교로 돌아와 수업준비를 하고 교실도 정리해야 했었다.

선배 선생님들의 조언과 그동안의 재미있었던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도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 대학원을 마칠 때까지 4년여를 보냈다. 그냥 대학생의 젊음을 그곳에 다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된다.

이제 학교이야기를 해야겠다.

말이 학생이지 나이는 나보다 몇 살 위에서 부터 아래까지 별 차이가 없었다. 그냥 친구같은 선생님과 학생관계였었다.

지금같으면 드라마의 한 편에서나 볼 수 있는 선생님과 학생 사이의 사랑 이야기도 있었고 결혼으로 까지 성공한 경우도 있었다. 또 졸업한 후 대학을 마치고 다시 선생님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는 경우도 있어 공부의 뚜렷한 목표치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은 검정고시를 봐야 했는데 그것이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힘들게 일하고 밤에 회사의 배려하에 야근을 하지 않고 공부한 다는 것. 그 자체가 어려움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중학교 졸업장이라는 것이 크나큰 목표였던 것이다. 초등학교 졸업자와 중학교 졸업자와의 임금 격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문제시되는 학벌문제와 비슷한 것으로 생각해도 된다. 1년에 2번 치뤄지는 검정고시는 그런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더욱 분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학년에 처음 입학했을 때에는 음악, 미술 같은 선택과목을 중심으로 공부하고 2학년 때에는 암기과목 중심으로 그리고 3학년 때에는 어렵다는 국어, 영어, 수학, 과학의 교과에 도전하는 과정이 아주 힘이 들었으리라 생각된다.

시험이 다가오면 회사를 쉴 수 없기에 밤을 새워가면 공부하던 모습들.

그 옆에서 함께 밤을 지새며 라면을 끓여주고 함께 교실에서 수업 보충을 해주고 하던 시절들...

지금은 고등학교에 근무하면서 야간 자율학습을 하던 학생들 모습을 보면 가끔씩 그 당시가 떠오르기까지 한다.

어렵게 준비한 검정고시에서 한 번 치뤄질 때마다 2명에서 3명씩 전과목 합격자가 나오고 나머지는 몇 과목씩 합격을 하여 함께 웃고 울던 모습들.

지금은 다들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면 살고 있는지.

선생님들은 가끔 모임을 갖고 그 당시의 이야기를 군 시절 무용담처럼 이야기 하곤 한다.

그것이 추억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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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네킹 > 88고속도로에 대한 추억

밤이 길어 가면서 빗줄기가 굵어졌다.

새벽이 되면서도 비가 그칠 줄 모르고 창문은 계속 덜컹대는 바람에 잠을 이룰 수 없다.

라디오에서는 계속 태풍이 북상하면서도 위력이 줄지 않는다는 소식만이 흘러 나오고 있다.

잠을 설친 가운데 눈을 뜨고 가만히 귀기울여 본다.

아직껏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마당에 내려서서 지리산을 보니 구름이 산중턱에 여전히 걸쳐 쉬고 있다.

이른 아침을 먹고 버스를 기다렸다. 다행스럽게도 빗방울이 점차 가늘어지고 있다. 바람은 여전이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불어대고 있다. 하늘엔 갈매기(?)인듯한 새들이 바람에 밀려다니며 날고 있었다. 세찬 바람에 여기까지 밀려 왔나 생각하니 가엾기만 하다.

곳곳에서는 논과 밭이 물에 잠겨 야단이다.

기다리는 버스도 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다.

학교에 연락해보니 그 곳도 학교 앞에서 출발하는 버스도 그냥 있단다.

여러 선생님들과 의논한 끝에 걸어서 가기로 하고 빗물로 깨끗이 씻겨진 아스팔트를 걸었다.

한참만에 88고속도로와 통근길이 갈라지는 곳에 다다랐다.

통근길은 비포장이라 많이 질척이고 고속도로는 사람들이 걸을 수 없는 곳이라 고민이 되었다.

다행이 고속도로는 차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다는 것이 위안일 뿐.....

통근길은 너무 질어서 걷기에 불편하다는 결정을 내리고 88고속도로로 걸어가기로 하였다.

그동안 빗줄기가 다시 굵어졌다.

음악 선생님의 수궁가가 지리산의 젖은 산봉우리를 달래듯 미끄러져갔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우산을 받고 걷는 것이 힘이 들고 비맞은 바지가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가끔씩 지나는 차들이 있어 손을 흔드니 모두들 그냥 지나쳐 버린다.

그러던 중 어느 트럭 한 대가 서더니 여선생님 두 분만을 태우고는 떠나 버린다.

'이런것이 남녀차별인 것이여!' 하시는 음악선생님 말에 모두들 웃음으로 길을 메웠다.

시원스레 뻗은 길을 걷고 있노라니 비에 젖은 모습이 생쥐꼴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마음만은 가벼워진다.

버스로 가면 15분이 채 걸리지 않는 길을 바람이 세차게 불고 비가 내리는 중에 걸은지라 시간은 몇 배나 더 들고 힘이 들었는지.

멀리 학교가 보이기 시작한다.

고속도로 아래로 펼쳐진 논밭들은 거의 황토색 물결일 뿐 마을만 섬처럼 떠있고 길들만 손등의 힘줄처럼 여기저기 드러나 있다.

피해가 너무 크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학교에 들어섰다.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교무실에 들어가니 10시가 다 되어있었다.

교실에 올라가 보니 학생들은 절반도 오지 않았다.

물이 넘쳐 길이 막혀 못 온 경우가 태반이었다.

오후가 되면서 비가 그치고 다시 하늘이 맑아진다.

빗속에 이 길을 걸었다는 것이 나 혼자 생각해도 힘든 결정이었던 것 같다.


벌써 20여년 전 이야기이다.

지금은 포장이 다 되어 통근길이 깔끔해졌고 내가 살던 인월이라는 곳도 더 도시화가 되어있었다. 그렇지만 그 때 그 산들은 그대로 남아 내 기억을 되살려 주고 있다. 지금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와 같은 결정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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