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네킹 > 88고속도로에 대한 추억
밤이 길어 가면서 빗줄기가 굵어졌다.
새벽이 되면서도 비가 그칠 줄 모르고 창문은 계속 덜컹대는 바람에 잠을 이룰 수 없다.
라디오에서는 계속 태풍이 북상하면서도 위력이 줄지 않는다는 소식만이 흘러 나오고 있다.
잠을 설친 가운데 눈을 뜨고 가만히 귀기울여 본다.
아직껏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마당에 내려서서 지리산을 보니 구름이 산중턱에 여전히 걸쳐 쉬고 있다.
이른 아침을 먹고 버스를 기다렸다. 다행스럽게도 빗방울이 점차 가늘어지고 있다. 바람은 여전이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불어대고 있다. 하늘엔 갈매기(?)인듯한 새들이 바람에 밀려다니며 날고 있었다. 세찬 바람에 여기까지 밀려 왔나 생각하니 가엾기만 하다.
곳곳에서는 논과 밭이 물에 잠겨 야단이다.
기다리는 버스도 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다.
학교에 연락해보니 그 곳도 학교 앞에서 출발하는 버스도 그냥 있단다.
여러 선생님들과 의논한 끝에 걸어서 가기로 하고 빗물로 깨끗이 씻겨진 아스팔트를 걸었다.
한참만에 88고속도로와 통근길이 갈라지는 곳에 다다랐다.
통근길은 비포장이라 많이 질척이고 고속도로는 사람들이 걸을 수 없는 곳이라 고민이 되었다.
다행이 고속도로는 차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다는 것이 위안일 뿐.....
통근길은 너무 질어서 걷기에 불편하다는 결정을 내리고 88고속도로로 걸어가기로 하였다.
그동안 빗줄기가 다시 굵어졌다.
음악 선생님의 수궁가가 지리산의 젖은 산봉우리를 달래듯 미끄러져갔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우산을 받고 걷는 것이 힘이 들고 비맞은 바지가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가끔씩 지나는 차들이 있어 손을 흔드니 모두들 그냥 지나쳐 버린다.
그러던 중 어느 트럭 한 대가 서더니 여선생님 두 분만을 태우고는 떠나 버린다.
'이런것이 남녀차별인 것이여!' 하시는 음악선생님 말에 모두들 웃음으로 길을 메웠다.
시원스레 뻗은 길을 걷고 있노라니 비에 젖은 모습이 생쥐꼴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마음만은 가벼워진다.
버스로 가면 15분이 채 걸리지 않는 길을 바람이 세차게 불고 비가 내리는 중에 걸은지라 시간은 몇 배나 더 들고 힘이 들었는지.
멀리 학교가 보이기 시작한다.
고속도로 아래로 펼쳐진 논밭들은 거의 황토색 물결일 뿐 마을만 섬처럼 떠있고 길들만 손등의 힘줄처럼 여기저기 드러나 있다.
피해가 너무 크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학교에 들어섰다.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교무실에 들어가니 10시가 다 되어있었다.
교실에 올라가 보니 학생들은 절반도 오지 않았다.
물이 넘쳐 길이 막혀 못 온 경우가 태반이었다.
오후가 되면서 비가 그치고 다시 하늘이 맑아진다.
빗속에 이 길을 걸었다는 것이 나 혼자 생각해도 힘든 결정이었던 것 같다.
벌써 20여년 전 이야기이다.
지금은 포장이 다 되어 통근길이 깔끔해졌고 내가 살던 인월이라는 곳도 더 도시화가 되어있었다. 그렇지만 그 때 그 산들은 그대로 남아 내 기억을 되살려 주고 있다. 지금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와 같은 결정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