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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매혹적인 고전이라면 -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고전 읽기의 즐거움 ㅣ 서가명강 시리즈 15
홍진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2월
평점 :
독일 문학과 고전 문학 읽기의 즐거움을 단박에 선물하는 책!
이토록 재미있고 다양한 해설을 즐길 수 있다면 고전 문학에 대한 장벽은 낮아지지 않을까!
몇 주 전, 나는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으며 또 다시 낭패감에 빠지고 말았다. 문장의 흐름대로 의식이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기존의 독서법으로는 쉬이 접근하기 어려운 데다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어 읽어가면서도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가야 하는 수고로움을 번번이 겪었기 때문이다. 그건 단지 『시지프 신화』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고전 문학을 읽을 때마다 앓게 되는 나의 고질병 같은 것이었다.
물론 하루에도 수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볼거리도 넘쳐나는 시대에 어렵게만 느껴지는 고전 문학은 굳이 읽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과 세계에 대한 진지하고 변함없는 고민을 담고 있으면서 시대가 달라져도 끊임없이 회자되는 고전 문학에 대한 열망은 또 다시 나를 붙든다. 이처럼 좌절과 열망을 반복하는 고전 문학 읽기의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현직 서울대 교수진의 강의를 엄선한 ‘서가명강(서울대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 열다섯 번째 시리즈 『이토록 매혹적인 고전이라면』은 바로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독자들을 위해 쓰인 책이다. 헤세, 괴테, 호프만스탈, 카프카에 이르기까지, 매혹적인 고전 읽기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고전 읽기의 즐거움
서점에 방문했다가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눈에 띄는 한 책을 발견했다. 바로 『데미안』이다. 화제가 되고 있는 여러 책들 사이에서 꿋꿋하게 고전 문학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광경이 무척 흥미로웠다. 어째서 이 작품은 이토록 오랫동안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현대인들에게 있어 『데미안』은 어떤 의미일까, 궁금해졌다. 홍진호 교수는 우리가 『데미안』을 읽는 이유는 어쩌면 모두 인생의 중요한 한 순간을 공유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그들에게 『데미안』은 책장 속에 꽂혀 있는 여러 소설들 중 하나가 아니라 삶의 가장 개인적인 부분에 연결되어 있는, 어쩌면 지나간 삶의 일부인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 중에서도 헤세가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을 강조한 것이야말로, 20세기 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방황하는 젊은 영혼들이 이 소설에 빠지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설명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떤 것이 가치가 있고 없는지, 삶과 가치의 모든 기준이 불분명한 방황의 시기에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보잘것없어 보이는 나의 내면에 존재한다는 것만큼 멋진 위로의 말은 없을 테니까.
이처럼 『이토록 매혹적인 고전이라면』은 『데미안』이라는 고전 문학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그것을 즐기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소개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해석’이라 부르는 세심한 독서와 성찰을 통해, 작품의 배경이나 당대의 가치관 또는 작품 밖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숨겨진 이야기 등으로 하여금 작품을 올바로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한다. 한편, 『데미안』이 문학작품은 ‘해석’을 거쳐야만 진정한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작품이라면 괴테의 『젊은 베르터의 고통』 은 한 작품이 여러 해석의 층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는 한 번만 읽어서는 눈치 채기 어려운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비극적인 짝사랑이라는 줄거리 층위의 이야기(경험, 진정성), 그 아래 숨어 있는 계몽주의와 질풍노도 예술관의 대립, 기독교 안에 머무르지만 교리를 보다 자유롭게 해석하는 범신론적 종교관, 궁정과 공직사회 문화를 비판하면서 귀족 계급과 시민계급 사이의 정치적 갈등을 보여주는 정치관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다양한 해석의 층위는 독자와 작품 간의 거리를 좁히고 좀 더 밀도 있는 독서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준다.
헤세가 유년기와 젊은 시절을 보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전통적인 인간관과 세계관, 가치체계가 붕괴되었지만, 아직 새로운 인간관과 세계관, 가치체계가 자리를 잡지 못한 혼돈 상태가 이어졌다. 개인의 삶으로 비유하자면 교육을 통해 배운 부모세대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이유 없이 거부하지만, 아직 이를 대체할 새로운 가치간과 세계관을 갖추지 못한 현대 유럽 문명의 ‘사춘기’와도 같은 시기가 바로 유럽의 세기전환기였던 것이다. / 57p
인간 개개인이 세계, 혹은 총체로서의 자연이 개별화된 존재이며, 개별화된 상태를 벗어나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때 삶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발상은 『데미안』에 나타난 헤세의 인간관과 일맥상통한다. 인간은 개별화된 존재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연의 일부이며, 총체로서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 혹은 우리가 ‘나’로 인식하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작고 힘없는 존재이지만, 자연적 존재로서 내면 깊은 곳에 세계 전체를 가지고 있는 일종의 마이크로 코스모스라는 생각은 헤세와 니체, 쇼펜하우어를 하나로 묶어준다. / 65p
이 질풍노도는 1767년부터 1785년까지, 문예사조로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유행한 경향으로, 20대 초반의 젊은 작가들이 주도한 것이었다. 이들은 모든 것을 이성의 잣대로 판단하는 계몽주의적 예술에 반대하며, 직관과 천재적 영감, 격정적인 감정, 예민한 감수성을 다시 문학과 예술의 중심에 놓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 문학 운동의 핵심에 『젊은 베르터의 고통』을 쓰던 시기의 젊은 괴테가 있었다. / 126p
앞서 헤세의 『데미안』, 괴테의 『젊은 베르터의 고통』처럼 익히 알려진 작품과 달리 책에는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작가의 작품이 하나 등장한다. 바로 호프만스탈의 「672번째 밤의 동화」다. 복잡한 해석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와도 같은 작품도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은 한 부잣집 남자가 하인의 누명을 풀어주러 시내에 나갔다가 말에 차여 죽는다는 비교적 간단한 줄거리를 하고 있지만 너무나도 긴, 뜻을 알 수 없는 묘사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수수께끼 같은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홍진호 교수는 세기말의 염세적인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유미주의라는 예술 사조를 끌어온다. 유미주의란 ‘아름다움’ 즉, 미의 창조를 예술의 유일한 가치로 삼는 것을 일컫는다. 호프만스탈은 소설 「672번째 밤의 동화」를 통해 최대한 유미주의적 이상을 가진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함으로써 결코 순수한 유미주의적 삶을 살아갈 수 없음을, 결코 “삶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유미주의적 삶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화의 원동력은 가능한 한 많은 개체를 생산해내고자 하는 자연적 의지, 즉 성적 욕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생물의 내면에 존재하며 모든 생물을 진화로 이끄는 가장 본질적인 자연적 성질은 바로 성적 욕망이다. 인간 역시 자연현상이며 진화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 존재라면 그들의 본질을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다른 생물들과 다를 바 없이 바로 성 욕망이다. 오랜 기독교의 전통 속에서 항상 죄악으로 여겨져 은폐되고 억압되었던 성 욕망이 이제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성격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 166p
이렇게 본다면 문명의 끝자락에서 태어나 유미주의적 삶을 살아가다가 결국 유미주의적 삶의 내적 모순 때문에 몰락하고 마는 상인의 아들 이야기는 이율배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의 죽음은 유미주의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자세를 드러내주지만, 동시에 유미주의적 삶을 체현하고 있는 주인공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율배반은 이 이야기의 작가인 호프만스탈이, 이미 극복되어버린, 혹은 극복하는 과정에 있는 과거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섬세하고 예민한 젊은 유미주의자에 대한 연민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연민은 구제할 길 없이 몰락할 수밖에 없는 자에 대한 연민이라는 점에서 우울한 정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 233p
마지막으로 만나게 될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과 『시골의사』는 독자가 정보나 경험의 부족으로 해석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해석이 불가능한 작품의 예를 보여준다. 홍진호 교수는 수십 년에 걸친 평론가들과 연구자들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정설이라 할 만한 해석이 나오지 않았지만, 전 세계적으로 큰 사랑을 받는 작품과 작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프란츠 카프카라고 말한다. 저자는 ‘카프카의 작품을 해석한다는 것은 카프카의 작품을 올바로 이해하는 수단이라기보다는 작품을 즐기는 수단’이라고 표현한다. 이처럼 『이토록 매혹적인 고전이라면』은 작품과 작가에 대한 정보를 찾고, 이를 바탕으로 또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들을 함께 동원하여 작품을 해석해보고, 처음 읽을 때 해독할 수 없었던 내용을 하나씩 알게 되어갈 때 느끼는 즐거움을 알려주고자 한다. 최종적으로 작품 전체의 의미가 보이고, 작가의 의도를 깨닫게 될 때 느끼는 기쁨은 정서적 감동과는 전혀 다른, 지적인 울림이 큰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책을 읽고 나면 고전 문학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어서 빨리 소개된 작품들을 읽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국내 번역본 중에 호프만스탈의 작품이 거의 없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환상문학은 몇 가지 공통적인 성격을 갖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초자연적 사건이 벌어진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와 일상생활을 결정짓는 법칙성이 깨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안정적으로 보이는 우리 세계의 질서가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환상문학이 현실비판적인 성격을 가진다면, 이는 바로 초자연적 사건으로 생겨난 이러한 ‘세계의 균열’ 때문이다. / 270p
카프카는 벌레로의 변신이라는 초현실적 상징을 사용함으로써 현실세계의 모순을 보다 강조하여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초자연적 사건을 활용하여 독자를 우선 현실세계 맥락에서 멀리 떼어놓았다가, 알게 모르게 다시 접근하여 현실세계의 모순을 눈앞에 덜컥 던져놓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어쩌면 그동안 너무나 익숙한 것으로,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을 현실 문제를 다시 한 번 충격적인 방식으로 인지하도록 만들어준다. / 276p
사실 고전 문학을 읽다보면 책의 말미에 수록된 해석을 읽는 것조차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에 비해 『이토록 매혹적인 고전이라면』은 비교적 다양한 층위에서 작품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되어 있어 유쾌한 지적 탐험을 한 듯한 기분이다. 이 책으로 하여금 독일 문학에 보다 관심을 갖게 되었을 뿐더러 당시 독일의 시대 상황과 문학 사조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었던 점도 좋았다. 믿고 읽는 서가명강 시리즈답게 독일 문학과 고전 문학에 대한 흥미를 한껏 끌어올려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