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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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이라는 제목을 보고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첫 번째는 홋카이도였다. ‘눈의 나라’ 설국. 눈 하면 일본에서는 당연히 홋카이도를 생각하기 마련인데, 아니었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니가타현은 지리상 동해와 인접해 있고 도쿄와의 거리도 멀지 않은 지역이었다. 두 번째는 [신 설국]이라는 영화를 찍은 배우 ‘유민’이었다. 한 동안 국내 연예계에서 활동하다 일본으로 돌아간 유난히 얼굴이 새하얗던 배우 ‘유민’이 생각났다.


소설의 배경이 된 니가타 현 유자와 지역은 4월 언저리까지 눈이 온다고 한다. 한국의 영동지방의 지리적 특성과 유사하다. 한껏 수증기를 담은 구름이 태백산맥의 준령에 부딪혀 눈을 쏟아 내듯 니가타 현 유자와 지역 또한 습기를 머금은 북풍이 높이 1963m의 다니카와 산에 부딪혀 많은 눈을 쏟아낸다고 한다.


「설국」은 시종일관 여러 가지 눈 덮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다. 언젠가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봤던 장면, 검은 밤바다만 빼놓고 사방이 눈으로 뒤덮인 한 겨울 매복진지에서 한 없이 떨어지던 함박눈을 봤던 장면 등.

작품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눈’이 형상화되고 개별 캐릭터에 투영되기도 하며 배경 및 캐릭터의 심리묘사를 대변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p.7)


서양인의 마음을 한 방에 잡았다는 작품의 첫 문장이다. 새하얀 눈이 생각난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눈 말이다.

눈은 반드시 녹는다.

아무리 추운 겨울에 내린 눈이라 해도 반드시 녹는다.


“창틀 안으로 보이는 잿빛 하늘에서 커다란 함박눈이 흐릿하게 이쪽으로 떠내려 온다. 어쩐지 고요하고 비현실적인 세계였다.” (p.129)

“먼 산들은 눈이 자욱할 때와 같은 부드러운 우윳빛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p.59)


작품에서 배경을 묘사하는 ‘눈’은 아름답고 황홀하게 그려진다. 때로는 몽환적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환상적이기도 하다. 한창 내리는 함박눈은 모든 것을 잊게 만든다. 한창 내리는 함박눈을 한참 바라보고 있다 보면 스멀스멀 걱정 반 투정 반이 기어오른다. ‘내일 출근 어쩌지? 체인을 감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버스 타고 갈까? 눈 녹으면 차 엉망일 텐데? 제기랄~!’

하지만 작품 속 ‘눈’은 녹지 않을 눈 같다. 그렇게 느껴진다. 눈이 녹은 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결코 녹을 것 같지 않은 ‘눈의 세계’다.

인간의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감정의 양태도 그러하다. 사랑, 연민, 신뢰. 변하고 바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지만 적어도 나만은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그 사람만은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되리라고 끊임없이 자기주문을 건다. 아무리 각박하고 감정이 메말라버린 현실이라 해도 인간이라면 기대고 싶은 감정의 원형이 있다. 찌든 일상을 잠시라도 잊게 만들어 주는 사랑, 연민, 신뢰. 그냥 기대고 싶은 것이다.


“시마무라는 공허한 벽에 부딪는 메아리와도 같은 고마코의 소리를, 자신의 가슴 밑바닥으로 눈이 내려 쌓이듯 듣고 있었다.” (p.134)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심리는 쉽게 녹아버리는 ‘눈’과 같다.

특히 시마무라는 흩날리는 눈처럼 공허하고 메마르다. 일정한 직업이 없이 무용관련 번역일을 하는 한량 시마무라는 이미 다 녹아버린 ‘눈’을 가지고 ‘눈’의 고장을 찾는다. 새로운 삶에의 의욕과 기대는 애초에 없었던 것 같다. 그냥 갔는데

‘눈’과 같은 고마코와 요코를 만난다.

작품의 중반부는 시마무라의 료칸 방에 무시로 찾아오는 고마코와의 대화로 이어진다. ‘눈’과 같은 대화다. ‘금세 녹아 버리는 눈’이다. 한 방에서 함께 대화를 나누지만 결코 점성이 있어 뭉쳐지는 찰진 눈처럼 감정을 함께 호흡하지 않는다.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점성 없는 싸리눈처럼 둘의 대화는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다.

시마무라를 향한 고마코의 연정은 식지 않는다. 아무렇지도 않게 방문을 닫고 도쿄로 돌아가는 시마무라를 고마코는 매년 기다린다.

공허하고 메마른 시마무라는 요코에게 마음이 간다. 요코에게 ‘눈의 결정’과도 같은 순수하고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고마코에게는 파혼한 유키오가 있고 유키오를 간호하다 게이샤 일을 하게 되었는데 유키오의 현재 애인은 요코라는 복잡 미묘한 구조는 별 문제 없다. 계속해서 고마코보다 요코에게 가는 자신의 마음을 제지하지 않는다.

원초적인 순수함을 지닌 요코는 도쿄로 돌아갈 때 자신을 꼭 데리고 가줄 것을 부탁한다. 시마무라는 흔들린다. 요코는 작품의 마지막까지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헌신한다. 큰 화재가 난 건물에서 노약자와 어린 아이를 구하려다 온 몸에 화상을 입게 된다. 여인(人)이라기 보다 여신(神)으로 정형화된다.


결국 시마무라의 ‘눈’은 모두 녹아 버렸다.

눈의 고장 ‘설국’에 처음 왔을 때에도 별다른 기대 없이 목적 없이 왔기에 일 년 만의 방문 후 돌아갈 때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고 고마코와 요코 사이에서 중년의 메마르고 차가운 싸리눈같은 가슴을 불태우지도 못했다. 그냥 스스로 녹아버렸다.

그래도 시마무라는 별로 손해 날 것이 없어 보인다.

어차피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이다.

고마코만이 눈으로 뒤덮인 눈의 고장 ‘설국’에서 ‘눈’처럼 흩날리는 시마무라를 기다릴 뿐이다.

 

 


사실, 내게 「설국」은 좀 어려웠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고 그 이름도 찬란한 노벨상까지 받은 작가니까 말이다. 나는 늘 노벨상을 받은 작품과는 맞지 않았었다. 읽고 나면 항상 ‘이게 도대체 왜 노벨상을 받았지?’ 했었다.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읽은 후 치밀었던 실망과 난해함을 되풀이 하고 싶지 않아 일본 소설은 오쿠다 히데오 정도만 읽고 있었다.

 

「설국」도 작품의 말미에 갑자기 불이 나고 요코가 사람들을 구해내는 장면이 끝내 이해되지 않았다. 흡사 국내 막장 드라마의 인물 간 구조 같은 얽히고설킨 관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왜 굳이 화재가 나고 요코가 희생해야 했는지는 쉬이 설득되지 않는다.

뭐, 작품을 읽는 독자가 판단하고 이해하고 느끼기 나름이니 더 긴말을 필요 없다. 나는 그랬다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읽었으면 그만이다.

 

다만, 하루키와 겐자부로로 인해 등한시 했던 일본 소설이었는데, 「설국」이후 다른 고전들 위주로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개인적으로는 큰 계기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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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틀마니아 - 20세기 최대의 마케팅 성공작, 생수에 관한 불편한 진실
엘리자베스 로이트 지음, 이가람 옮김 / 사문난적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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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퇴근 후 1시간 정도 달리기를 한다. 3주 정도 된 것 같다. 다이어트 겸 건강을 위한 습관 가지기의 일환이다. 나는 겨울철 오리털 점퍼 안에 반팔 티셔츠 한 장 입어도 땀이 난다. 한마디로 사계절 내내 땀이 나는 체질이다. 4월 중순이 되면 겁부터 난다.

‘이번 여름을 또 어떻게 보내나?’

그러니 달리기를 할 때 생수 한 병은 필수다. 처음엔 거추장스럽고 귀찮아 맨손으로 갔는데 탈수증세 직전을 경험한 다음날부터 생수를 꼭 챙긴다.

 

 

이 생수의 가격은 1병 당 200원이다. 동일한 용량의 타 생수 가격의 40∼50%정도이다. 2L짜리 생수도 마찬가지다.

1시간을 미친 듯이 달리고 흐르는 땀을 훔치며 들이키는 생수는 천국의 맛이다. 식도와 위, 소장과 대장을 훑어 내려가며 온 몸의 갈증을 해소해 준다.

 

어?

그런데 언제부터 돈을 주고 물을 사 마셨을까?

 

「보틀마니아」는 생수에 관한 불편한 진실을 파헤친 탐사보고서다.

미국에서 벌어진 생수업체와 지역주민 일부·환경단체들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총과 칼이 없을 뿐이지 물고 먹히고 회유하고 협박하는 등 온갖 전략이 난무한다.

 

“나는 갈수록 심해지는 우리의 게으름과 참을성 없는 성미에 생수가 맞아 떨어진다는 점이 한 가지 답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p.58)

“전 세계적으로 생수는 연간 6백억 달러 규모의 사업이다.” (p.8)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학교가 끝나도 집에 돌아가지 않고 아이들과 운동장에서 뛰어 놀았다. 아니면 동네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다보면 땀도 나고 목이 말랐다. 그러면 운동장에 있는 수도꼭지로 달려가 세수도 하고 물도 마셨다. 다들 그렇게 했다. 중학교 때도 그랬던 것 같고.... 정확하게 언제부터 생수를 사서 마시게 되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1991년 낙동강 페놀유입 사태가 있었다. 당시 낙동강 취수원까지 오염이 된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짐작해 보건대 아마 그 이후로 해서 생수가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수돗물에 대한 반작용으로 탄생한 것이 생수일 테니 말이다.

하긴 초등학교 때도 늘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수돗물 너무 많이 먹지 마라. 배탈 난다~~.”

 

 

 

 

1. 수돗물

수돗물을 마시면 배탈이 날까?

조금만 마시면 괜찮을까?

 

“‘수돗물이 어디서 오는지 알고 계십니까?’ 라는 설문조사를 해나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p.127)

 

아마 한국에서 유사한 설문조사를 해도 비슷한 결과가 나오리라 생각한다.

책에서도 여러 번, 국내 TV방송이나 여러 보고서를 통해서도 수돗물이 결코 생수보다 위험하지 않음을 피력한다. 그런데 여전히 사람들은 생수를 사 마신다.

각 가정의 싱크대와 세면대, 좌변기 등에 공급되는 수돗물을 그냥 마시는 가정이 얼마나 될까? 정수필터를 통해 수돗물을 마시는 가정은 꽤 많겠지만 수돗물 그대로를 컵에 받아 마시는 가정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 수돗물을 마시지 않는 걸까?

배탈 날까봐?

 

“수돗물에 대한 비판은 쉽게 들을 수 있다. 환경 단체, 학계, 생수와 정수필터를 파는 회사, 심지어 수자원을 보호해야 할 규제 기관에서도 수돗물을 비판한다.” (p.176)

 

사실, 더 쉽게 들을 수 있는 수돗물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비판적인 것이다.

대구·경북 지역의 사람들이 이미 20년이나 지난 91년 낙동강 페놀사태를 어제 일처럼 기억하는 것을 보면 한 번의 강렬했던 기억이 오랜 기간 지속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한 번씩 식수 내지는 수돗물에 대한 기사가 TV뉴스에 보도될 때면 꼭 자료화면으로 지역의 취수장이 나온다. 그런데 그 취수장 화면이 대부분 외부로 노출된 취수시설이다. 지붕도 없고 특별한 보호 장치도 없는 그런 취수장을 지속적으로 접하다 보면 당연히 수돗물을 마시고 싶지 않게 된다. 은연중에 각인되는 것이다.

 

“잘 관리된 식수대 찾기란 고장 나지 않은 공중전화를 찾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p.271)

 

또 하나, 저자의 지적처럼 집밖에 있는 한 돈을 주고 생수를 사 먹지 않으면 물을 마실 길이 없다. 물론 회사나 은행, 공공기관이나 거의 모든 건물에 정수기가 설치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수돗물이라 볼 수 없다.

분명 물은 공공재인데, 그런 공공재를 마음껏 사용하고 공유할 수 있는 홍보도, 제도도, 설비도 미흡하다.

그러니 수돗물을 마시지 않는다.

 

“그런데 생수 가격은 더 오르지 않을까?”

 

 

 

 

2. 생수

생수는 수돗물의 대용물인가?

생수는 믿을 만한가?

생수업체의 광고는 흥미를 유발한다. 예쁘고 잘생긴 연예인들이 나와서 그 회사의 생수를 마신다. 나도 마시고 싶다. 나도 쟤처럼 저 생수를 마시면 더 잘 생겨지지 않을까?

 

“1990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무작위로 페리에 병을 골라 검사를 한 결과 벤젠이 검출된 것이다.” (p.48)

 

1991년 낙동강 페놀사태가 벌어지기 1년 전 저 멀리 미국에서는 그 이름도 유명한 생수 ‘페리에’에서 벤젠이 검출되었다고 한다. 21년 전 이름도 어려운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페리에 병에 벤젠이 검출되었었다는 것에 대해 페리에를 사 마시는 한국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 아니, 알지도 못한다. 초록빛 병에 담긴 비싼 페리에를 사 들고 다니면 폼이 나서인지 굳이 그렇게들 산다.

낙동강 페놀사태가 수돗물에 대한 경각심은 물론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하게 끔 했다면 페리에 벤젠검출 사태로 생수에 대한 경각심은 물론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하게끔 하는 결과를 나았어야 하는데,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한국의 무수한 커피 전문점에서 무수한 페리에가 지금도 팔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시장에 팔기 위한 물병을 만드는 데는 매년 1천7백만 배럴(석유 1배럴은 158.9리터)의 석유가 든다. 이것은 130만대의 차를 1년간 움직일 수 있는 양이다.” (p.183)

“생수병을 생산하고 채우는 데는 병에 담기는 물의 두 배에 달하는 물이 쓰이게 되는데, 그중 일부는 병을 만들어내는 기계를 식히는 데 쓰인다.” (p.184)

 

생수를 담을 물병을 만들고 그 물병을 만들기 위한 기계를 식히는 데 엄청난 양의 물과 석유가 쓰인다는 현실.

이러한 현실을 이런 책을 읽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아직은 저렴한 가격대인 생수를 별 생각 없이 사 마시기 때문이다. 책에서 등장하는 ‘네슬레’와 같은 다국적 기업의 독점적 폐해 내지는 생수의 원료가 되는 수자원(주로 담수호) 확보를 위한 환경파괴, 자원고갈, 지역주민과의 갈등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인식조차 부족하다.

 

“식수대용이 아니라 모든 실생활에서 생수를 써야 한다면?”

 

 

 

 

3. 걱정되는 불확실성

지금은 식수대용으로 생수를 사 마시고 있다. 그런데 밥을 할 때도 샤워를 할 때도 설거지를 할 때도 청소를 할 때도 생수를 사용해야 된다면??

 

“2025년이 되면 세계 인구 세 명 가운데 두 명은 깨끗한 물을 얻지 못하는 무시무시한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p.26)

 

2025년... 불과 십여 년 남짓이다. 닥친 현실이라는 말이다. 지금도 국제 원조의 다양한 분야 중 아프리카에 우물을 만들어 주는 사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책을 읽어보면 결코 아프리카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미국도 미국이지만 한국만큼 ‘물을 물 쓰듯’ 하는 곳이 있을 까 싶다.

생수를 비단 식수대용으로만이 아니라 모든 실생활에서 써야 한다면 지금의 생수 값에서 몇 배가 인상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말 그대로 물이 금이 되는 것이다.

더 늦어지기 전에 대대적으로 홍보도 하고 교육도 해서 물 부족이 아니라 물 기근에 대비해야 하는데 리뷰를 쓰면서도 걱정이 되고 뾰족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하다.

 

“네슬레 생수회사는 풀무원 샘물과의 합작을 통해 국내에 진출해 있고, 코카콜라는 ‘순수’라는 이름의생수를 판매하고 있다.” (p.293)

 

생수 산업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최소한 거대 다국적 기업의 시장 점유를 적정한 수준에서 견제해야 할 텐데, 네슬레와 코카콜라가 이미 들어와 있단다. 이것도 전혀 모르던 사실이다.

이런……. 걱정만 한 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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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 - 인류는 전쟁 없는 세상을 꿈꿀 권리가 있다
아르노 그륀 지음, 조봉애 옮김 / 창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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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아르노 그륀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부모를 따라갔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나중에 독일로 돌아가 전후세대인 독일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평화와 공감과 인간 본연의 모습을 역설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황금기에서 꿈을 잃은 채 허덕이고 방향을 잃은 채 표류하는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꿈을 가질 것을! 평화로운 시대를 만들 것을! 독려했다.

 

사실 독일을 포함한 유럽에서 살지 않은 나에게 이 책에서 강력하게 드러나는 저자의 독려는 크게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지리·공간적인 공감대 형성이 불가능하고 어차피 먼 나라 얘기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이 일제 강점기 시대를 떠올리며 친일파를 생각할 때면 이를 바득바득 가는 것을 독일 사람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 생각한다. 물론 한국인들은 2차 세계대전이다, 나치다, 유대인 학살이다 세계사를 배우기도 하고 많은 책과 영상물을 통해 지식적으로 많이 알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직접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곳에서 사는 사람들만큼은 결코 공감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사고의 폭을 넓힌다. 비단 세계대전만이 아니라 수많은 학살과 민족 분쟁, 9.11 테러와 연속적으로 이어진 자살테러, 미국의 이라크·아프칸 침공 등 상식적·인도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현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무모하고 비이성적으로 보일 정도로 동조하고 묵시적 지지자가 된다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다.

똑똑하고 현명한 지성인들에게서 그런 무자비하고 비이성·비상식적인 동조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심리치료를 하는 저자는 이러한 현상의 근본 원인을 어린 시절 부모와의 소통과 유대에서 찾는다.

 

“폭력의 이면에는 절대 자기 자신의 본모습으로 살지 못하는 인간, 자신의 고유한 자아를 인정받지 못해 타인을 억압함으로써만 살아 있음을 느끼는 나약한 인간의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다.” (p.77)

“부모는 잠재의식 속에서라도 아이를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아이들의 ‘고유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p.61)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느냐에 따라 인격의 형성이 달라지고 부모로부터 정상적인 보호나 사랑을 받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낸 성인은 여전한 상처를 가진 채 비뚤어진 인격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의 문제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억압하고 타인에게 폭력(넓은 의미에서)을 가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적인 문제로 발전하고 더 나아가서는 히틀러 한 명에게 수많은 독일인들이 빠져들었던 것처럼 비극적인 문제로 대두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결속시키는 것은 감정이입, 즉 공감이다.” (p.84)

“공감은 인간 존재의 핵심이다.” (p.88)

 

그래서 저자는 ‘공감’을 주장한다. 인간 존재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일어나는 대부분의 가정문제, 학교문제가 ‘공감’의 결여에서 오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이것은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과 온라인 게임 등으로 ‘공감’이라는 단어의 의미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심각한 현상이라고 한다.

요약하자면 과거에 일어났던 전쟁과 학살, 폭력의 가해자와 동조자들 모두 개인적인 결함이 있다는 것이고 이것을 이해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인마다 ‘공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배려하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때 비로소 진짜 인간이 될 수 있다고도 한다. 그리고 이것이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미약해 보이는 과정일 수 있으나 결코 꿈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저자의 독려에 100% 동의되지 않았다. 앞서 말했던 대로 시대적·사회적 환경 자체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이해하는 것과 동의하는 것. 동의하는 것과 ‘공감’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오히려 나는 박근혜와 박정희를 오버랩하는 것으로 이 간극을 메워볼 수 있었다.

지난 주 본가에 내려가 부모님과 식사를 하던 중 우연히 이번 대선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결론은 부모님은 “이번에는 박근혜가 해야지” 이었다. 아무리 논리로 설득하려 해도 도무지 되지 않았다.

 

 

언젠가 김어준씨가 그랬었다. “박근혜는 감정이다. 논리로는 설명도 설득도 이해도 되지 않는. 이미 체화되고 일반화된 감정이다.” 라고 말이다.

부모님과 대화하며 김어준씨의 말에 100% 동의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과 [보릿고개] 시절을 겪은 나의 부모님의 박정희에 대한 기억과 [독재자], [비참한 죽음]의 역사를 익혀 온 나의 박정희에 대한 학습 사이에는 그랜드 캐년 협곡만큼이나 큰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경제개발]과 [새마을운동]에 대한 부모님과 나의 간극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결국에는 [박근혜]에 대한 부모님과 나의 간극의 각은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하느냐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이 책 「평화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에서 저자가 2차 세계대전과 이후 줄곧 현대사에서 이어진 학살과 폭력, 전쟁과 테러에 대한 암묵적 동조자와 침묵의 지지자들을 이해하는 것의 출발이 개인적 가정 사(史)라고 했다. 비극적이고 참담한 과거의 기억을 한 방에 상쇄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과정이었다.

또한 내가 이해 한 박정희와 박근혜에 대한 부모세대와 젊은 세대의 간극도 부모세대가 살아 온 역사에 대한 공감에서 시작해야 한다. 어쩌면 트라우마로 새겨진 전쟁과 빈곤에 대한 기억이 박정희라는 철옹성을 도저히 무너뜨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강풀의 웹툰 [26년]에서 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 동기가 여전히 그 대통령의 가장 측근 경호원으로 살고 있는 것에 대해 대통령 암살을 계획한 동기가 묻는다. “왜 아직도 그러고 있느냐”고. 경호원이 대답했다. “이분이 무너지면 나는 없어지는 것이다. 이분의 역사가 사라지면 나의 역사도 사라진다. 그래서 나는 지켜야 된다.”고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부모세대의 설득되지 않는 ‘감정적 동조’를 이해하고 나아가서는 ‘공감’해야 한다.

 

물론, 이 책의 저자가 펼친 논리와는 많이 다르다. 대상도 많이 다르고 결과도 다를 것이다. 다만 이 책을 좀 더 내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맥락을 잡은 것이다.

 

유럽 전쟁 주체 세대의 개인적인 가정 사(史)와 한국 부모 세대의 곡절 많은 성장 사(史)의 맥락을 통한 이해가 다소 무리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라 여기서 리뷰를 맺을까 모두 지우고 다시 쓸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냥 맺을까 한다.

 

리뷰라는 건 ‘읽는 이만’의 특권이니까. 내가 이해한 만큼 내 리뷰도 나아가는 것이니까.

보다 나은 인간이 되고 그런 사회와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독일의 젊은이와 한국의 젊은이가 가져야 할 꿈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역사에 대한 각기 다른 관점을 굳이 설득하려 애쓰는 것보다 저자의 독려처럼 조금만 더 ‘공감’하려는 노력이 절실 하다. 서로 탓해봐야 남는 것도 없으니 말이다.

 

“위장된 태도에 속아 넘어간 사람들은 그들에게 구원자 역할을 기대한다. 가짜 구원자가 그럴싸하게 포장한 행동이 그들을 불안에서 해방시켜 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p.120)

 

위장된 태도와 포장한 행동에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지우고 싶은 역사와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독일 사람은 독일사람 대로. 한국 사람은 한국사람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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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을 찾아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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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역사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선생님이 ‘지방’이라는 말은 ‘중심’이라는 개념에 대한 비하를 전제한 인식이라 하셨다. 그래서 ‘지방’이 아니라 ‘지역’이라고 표현해야 되며, ‘중심’이라는 것의 기준은 명확하지 않다고 하셨다. 어린 나이였지만 ‘참~ 맞는 말이네~’했다.

 

“변방과 중심은 결코 공간적 의미가 아니다. 낡은 것에 대한 냉철한 각성과 그것으로부터의 과감한 결별이 변방성의 핵심이다.” (p.141)

 

하지만 신영복 선생의 「변방을 찾아서」의 변방은 ‘지역’도 ‘지방’도 아니다. 공간적 의미가 아님을 책의 처음과 마지막에 강하게 말한다.

‘낡은 것’

미련이 남아 버리지 못하고 있거나 완전히 익숙해져 떨쳐내지 못하고 있거나 가진 것을 지키려 내어 놓지 못하고 있거나 혹시나 나보다 더 가질까 양보하지 못하고 있는 모든 것들의 통칭이라 이해했다.

 

“변방을 낙후되고 소멸해 가는 주변부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의 전위(前衛)로 읽어 냄으로써 변방의 의미를 역전시키는 일이 과제가 될 것이다.” (p.40)

 

‘변방’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가지는 낙후와 구림, 촌스러움으로 오히려 소멸하고 이겨내야 할 과제로 인식할 때가 많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중심부로 꼭대기로 들어가고 올라가려 아등바등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신영복 선생은 ‘변방’을 또 다른 ‘창조’를 낳는 역동성으로 인식 한다. 이겨내고 떨쳐 버리는 것을 넘어선 ‘뒤집어엎음’이다. 전위(前衛)하는 것이다. 부정(否定)하여 새로운 세상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내가 쓴 글씨가 있는 곳을 찾아가서 그 글씨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 글이다.” (p.7)

 

이 책 「변방을 찾아서」는 신영복 선생이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의 글씨를 써 준 곳을 찾아가 그 글씨를 쓴 연유와 글씨가 탄생한 배경, 상황을 설명하고 찾아간 곳의 모습을 살펴보는 글의 모음이다.

 

책에서 등장하는 곳의 지리적 특징이나 역사·정치적 배경을 차치하더라도 신영복 선생의 글은 모두 변방을 지향한다. 중앙·권력·정치를 지양하는 가치를 지닌다. 거기서 신영복 선생을 재발견 하는 것이다.

1995년 서울시에 기증한 [서울]이라는 작품이 이 가치를 가장 극명하게 대변한다고 생각하는데, 서울의 ‘서’자와 ‘울’자를 각각 북악산과 한강수로 형상화했다. 북안은 왕조의 권력을 상징하고 한수는 민초들의 애환을 상징하는 것으로 대비한 것이다.

 

 

“백성들의 애환은 뒷전이었고 그것이 탁상에 오른 경우에도 권력 투쟁의 방편에 불과했다. 그런 북악을 멀리 두고 한강수는 유유히 흘러간다. 서울시는 북악보다는 한강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권력의 중심이기보다는 시민들의 삶을 껴안고 흐르는 강물이어야 한다고 생각 한다.”

 

 

떠밀려 죽지 못해 존재하는 열등과 콤플렉스로 점철된 구질구질한 삶이 아니라 가치를 지향하는 변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새로운 창조를 전제한 변방이다.

 

“인류사는 언제나 변방이 역사의 새로운 중심이 되어 왔다.” (p.25)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말 맞는 말이다. 책에 소개된 신영복 선생의 말대로 근동에서 태동한 역사의 흐름이 그리스·로마로 합스부르크 왕가로 영국으로 미국으로 옮겨진 것과 중국의 왕조가 끊임없이 변방의 침입과 지배로 반복되는 변방의 역사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변방과 나의 변방에 대하 주목해야 함을 자명하다.

 

우리의 변방과 나의 변방에 대한 열등과 콤플렉스를 이겨내는 일이 새로운 창조와 역사를 낳은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구체적 답은 쉽게 찾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깊이 고민하고 성찰해야 할 문제다.

 

“놀라운 것은 변방의 작은 고인돌 하나로 남아 있는 이곳에 해마다 100만이 넘는 추모객이 찾아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봉하 묘역은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해후의 자리이면서 변방이 창조 공간이 되는 도약의 자리였다.” (p.140)

 

봉하의 고 노무현 대통령 묘역은 참 볼품없다. 그가 살다 간 여정처럼 늘 그렇게 변방이다. 우뚝 선 동상도 아니고 위용을 자랑하는 거대한 비석도 아니고 걸을 수만 있으면 어린 아이라도 올라가 놀 수 있는 낮은 고인돌이다. 소멸과 탄생의 장(場)이다. 비통과 위로의 장(場)이다.

 

“수많은 국민이 오열했던 비극의 현장, 작은 고인돌 하나로 남은 묘역이 그 변방의 고독을 떨치고 새로운 시대의 ‘시작’으로 도약하고 있었다. 변방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p.133)

신영복 선생의 인식에 깊이 공감한다.

“우리의 현대사에 있어서 광주와 노무현(1946∼2009)은 시대를 가르는 아이콘이다. 누구도 광주의 비극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없듯이 누구도 노무현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p.134)

 

사족을 달 수 없는 깊이 있는 성찰이다. 현대사에 지극한 관심이 있는 나의 흩어져 있어 갈피를 잡을 수 없던 사고를 한 데 뭉칠 수 있게 해준 성찰이다. 신영복 선생께 감사드린다.

사실 신영복 선생의 성찰까지 닿는 것이 쉽지 않다. 아직은 너무 멀다.

그래서 나는 ‘나의 변방’을 찾아보려 한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하고 있거나 애써 외면했거나 무시해 왔던, 그러나 새롭게 창조될 가능성이 농후한 ‘변방’을 찾아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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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클릭 - 아마존닷컴 창립자 제프 베조스의 4가지 비밀
리처드 L. 브랜트 지음, 안진환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나는 아마존에서 상품을 구매해 본 적이 없다. 아마존 사이트에 들어가 본 적도 없다. 이 책을 읽으며 아마존 사이트에 처음 들어가 봤다. 책을 읽기 전 까지 아마존은 그저 책만 취급하는 대형 서적사이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카테고리가 엄청났다. 일단 거기서 한 번 놀랐다. MP3, 영화, 게임, 컴퓨터, 가전제품, 의류, 가정용품, 스포츠·아웃도어까지 정말 엄청났다. YES24같은 경우에도 서적은 물론 선물용품, 화장품 등을 취급하고 있지만 아마존의 그것만큼은 아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원 클릭」시스템은 아마존의 창립자 제프 베조스의 아이디어이다. 책만을 예로 들어보자면 원하는 책을 찾아 들어가서 구매에 이르는 단계가 한 번의 클릭으로 모두 해결되는 시스템이다. 나는 이런 ‘원 클릭’ 시스템이 이미 인터넷에 광범위하게 통용된 후 인터넷 사이트를 사용했기 때문에 ‘원 클릭’이 가져 온 광풍과 혁명적인 변화를 피부로 체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원 클릭’은 기존의 오프라인 대형체인 서점과, 소규모 서점, 그리고 다른 여타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볼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가장 중요한 신념은 바로 고객을 통해 최대한 이윤을 올리려고 애쓰기보다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바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었다.” (p.115)

“‘나는 이 새로운 기술에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효과를 발휘한다는 걸 보여드리겠어요.’ 그리고 실제로 해냈다. 그는 반대자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입증해 보였다.” (p.62)

 

처음 제프 베조스가 이 ‘원 클릭’을 들고 나왔을 때, 모두 비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이고 사람들은 여전히 오프라인 매장에 가서 책을 손으로 만지고 책장을 넘기며 구입하는 구매행동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베조스는 90년대 중·후반 급속도로 팽창되던 인터넷 기술의 발전과 소비층의 확대를 정확히 예견하고 그것에 대비한 기술을 만들어 냈다.

1995년 7월 16일 아마존이 온라인 서점 서비스를 시작했을 때, 직원은 단 4명뿐이었다. 회계 전문가 1명과 컴퓨터 광 3명. 하지만 그들의 포부는 컸다. 새로운 세계를 열고 싶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대의 이윤을 확보하기보다 고객이 필요로 하는 바를 먼저 생각하겠다는 다짐이었다. 사실, 이러한 경영이념 혹은 경영전략을 곧이곧대로 믿을 고객은 없다. 아니 시장경제체제에서 기업이 최대의 이윤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인데, 그것보다 고객을 먼저 생각하겠다? 전형적인 ‘빛 좋은 개살구’전략이라 할 수 있겠다. 까놓고 말해서 기업 자체가 이윤을 내고 흑자를 내야 고객에게 서비스를 할 수 있는 것이지, 기업이 적자에 허덕이고 직원들 월급도 못 주고 있는 판에 무슨 고객 서비스고 나발이고가 나올 수 있겠나.

여튼, 아마존 창업 이념쯤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책에 대한 혹평까지도 올리게 하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고객 중심적인 회사를 만든다’는 베조스의 신념을 실현하는 과정의 일부였다.” (p.123)

“실패를 각오해야만 기대치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무언가를 추진할 수 있는 겁니다.” (p.94)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마존과 제프 베조스는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여 혁신적인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정해야 한다. 온라인 서점을 만들고 시장 정착 단계에서 아무도 하지 않았던 혹평리뷰를 올리게 한다는 것.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경쟁 업체들은 비웃었다. 곧 망할 거라 예견했다. 하지만 아마존과 베조스는 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혹평리뷰는 고객과 구매자들에게 아마존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 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온라인 서점에 리뷰를 쓰는 사람은 적어도 그 책을 읽어 본 사람이고 모든 구매자가 하나의 책에 동일한 반응과 리뷰를 적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호평이 있으면 혹평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야 구매실패를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 서점에 들어와 혹평 리뷰까지 읽어 본 사람은 다른 책을 구매할 가능성이 큰 고객이다. 애초에 책을 구매할 생각이 없는데 굳이 혹평 리뷰까지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점은 한국의 온라인 서점이 배워야 한다. 실제로 예스24나 아마존에서도 리뷰는 날짜순이나 많이 읽어 본 순으로 리뷰가 올라오는 데, 아예 호평리뷰와 혹평리뷰를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어 구분해 놓으면 고객의 입장에서는 쉽게 책에 대한 호불호를 알 수 있고 구매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처럼 리스트를 정렬하는 식의 고객 리뷰는 보기도 힘들뿐더러 책에 대한 평가가 한 눈에 딱!! 들어오지 않는다.

 

사실 현재 존재하는 거의 모든 온라인 서점은 아마존의 아류라 해도 과언은 아닌데, 아마존의 초기 정책에 존재했던 ‘고객 중심’, ‘혁신적 시스템’ 등은 아직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아마존도 창업 후 여러 가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일일이 열거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아마존의 가장 중요한 제품 킨들(kindle)이 2007년에 세상에 선보인 후 지금까지 전자 책 분야에서는 독보적 시장 점유를 하고 있다는 것 정도만 소개하면 될 듯하다.

나는 책에서 또 하나 주목했던 점은 아마존의 초기 창업 이후 지속적으로 경쟁업체나 오프라인 서점으로부터 받았던 비난이었다.

 

“아마도 가장 놀라운 사실은 많은 이들의 예상과 달리 아마존이 소형 독립 서점들을 몰락시키지는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p.211)

 

대형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에서 서적 유통업체와 계약을 맺어 독립 서점들 보다 훨씬 싼 가격에 서적을 판매하면 소형 독립 서점들이 남아나겠냐는 비판이었다. 일견 상식적인 선에서의 비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을 가장 가열차게 했던 대상은 다름 아닌 대형 서점 체인이었다. 이미 소형 독립 서점들의 상권을 거의 빼앗아간 그들이었기에 아마존의 출현은 엄청난 재앙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아마존은 독립 서점보다 서점 체인에 더 큰 타격을 주는 것 같습니다.” (p.212)

 

실제로 미국서점협회의 통계수치에서도 이것은 분명한 사실로 드러난다.

‘나는 지금도 책 두 권 중에 한 권은 동네 서점에서 삽니다. 답답한 사무실에서 나와 푸근한 서점 공간에 찾아가는 일도 즐깁니다.’

베조스가 했던 말처럼 모든 고객이 온라인 서점을 이용하지는 않는다. 아니 온라인 서점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나도 절판되거나 구하기 어려운 책은 중고서점을 이용한다. 그리고 주로 읽는 인문·사회 분야의 책이 아니면 직접 서점에 가서 비슷한 종류의 책을 비교해 구매한다.

 

결국, 소규모 독립 서점의 가장 큰 적은 아마존이 아니라 반드앤노블과 보더스그룹같은 대형 서점 체인업체들이다. 이들이 골목의 상권까지 야금야금 잡아먹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이다. 그들도 결국 아마존처럼 뒤늦게 온라인 시장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비판하고 욕했음에도 말이다.

 

“그는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는 언제나 대중 앞에 보이는 자신의 이미지를 신중하게 관리해왔다.” (p.217)

 

사실 ‘제프 베조스’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다. 하긴 아마존에 대해서도 몰랐으니 ‘제프 베조스’는 오죽할까 싶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탄생한 혁명적인 시스템을 만들어 온 그동안의 성과에 비하면 너무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의 저자의 말처럼 이미지를 신중하게 관리해서 그런 것인지, 원래 그의 성격이 그런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대중 앞에 서게 될지 자못 궁금하다.

 

뉴발란스운동화를 신고 청바지를 입은 채 한손에는 아이폰을 들고 세상을 까무러치게 했던 잡스 형님이 부재(不在)한 지금 그의 바통을 이어 받을 선두 주자가 바로 ‘제프 베조스’이니 말이다.

이제는 좀 더 대중 앞에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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