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평화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 - 인류는 전쟁 없는 세상을 꿈꿀 권리가 있다
아르노 그륀 지음, 조봉애 옮김 / 창해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저자 아르노 그륀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부모를 따라갔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나중에 독일로 돌아가 전후세대인 독일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평화와 공감과 인간 본연의 모습을 역설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황금기에서 꿈을 잃은 채 허덕이고 방향을 잃은 채 표류하는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꿈을 가질 것을! 평화로운 시대를 만들 것을! 독려했다.
사실 독일을 포함한 유럽에서 살지 않은 나에게 이 책에서 강력하게 드러나는 저자의 독려는 크게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지리·공간적인 공감대 형성이 불가능하고 어차피 먼 나라 얘기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이 일제 강점기 시대를 떠올리며 친일파를 생각할 때면 이를 바득바득 가는 것을 독일 사람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 생각한다. 물론 한국인들은 2차 세계대전이다, 나치다, 유대인 학살이다 세계사를 배우기도 하고 많은 책과 영상물을 통해 지식적으로 많이 알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직접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곳에서 사는 사람들만큼은 결코 공감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사고의 폭을 넓힌다. 비단 세계대전만이 아니라 수많은 학살과 민족 분쟁, 9.11 테러와 연속적으로 이어진 자살테러, 미국의 이라크·아프칸 침공 등 상식적·인도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현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무모하고 비이성적으로 보일 정도로 동조하고 묵시적 지지자가 된다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다.
똑똑하고 현명한 지성인들에게서 그런 무자비하고 비이성·비상식적인 동조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심리치료를 하는 저자는 이러한 현상의 근본 원인을 어린 시절 부모와의 소통과 유대에서 찾는다.
“폭력의 이면에는 절대 자기 자신의 본모습으로 살지 못하는 인간, 자신의 고유한 자아를 인정받지 못해 타인을 억압함으로써만 살아 있음을 느끼는 나약한 인간의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다.” (p.77)
“부모는 잠재의식 속에서라도 아이를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아이들의 ‘고유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p.61)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느냐에 따라 인격의 형성이 달라지고 부모로부터 정상적인 보호나 사랑을 받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낸 성인은 여전한 상처를 가진 채 비뚤어진 인격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의 문제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억압하고 타인에게 폭력(넓은 의미에서)을 가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적인 문제로 발전하고 더 나아가서는 히틀러 한 명에게 수많은 독일인들이 빠져들었던 것처럼 비극적인 문제로 대두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결속시키는 것은 감정이입, 즉 공감이다.” (p.84)
“공감은 인간 존재의 핵심이다.” (p.88)
그래서 저자는 ‘공감’을 주장한다. 인간 존재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일어나는 대부분의 가정문제, 학교문제가 ‘공감’의 결여에서 오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이것은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과 온라인 게임 등으로 ‘공감’이라는 단어의 의미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심각한 현상이라고 한다.
요약하자면 과거에 일어났던 전쟁과 학살, 폭력의 가해자와 동조자들 모두 개인적인 결함이 있다는 것이고 이것을 이해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인마다 ‘공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배려하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때 비로소 진짜 인간이 될 수 있다고도 한다. 그리고 이것이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미약해 보이는 과정일 수 있으나 결코 꿈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저자의 독려에 100% 동의되지 않았다. 앞서 말했던 대로 시대적·사회적 환경 자체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이해하는 것과 동의하는 것. 동의하는 것과 ‘공감’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오히려 나는 박근혜와 박정희를 오버랩하는 것으로 이 간극을 메워볼 수 있었다.
지난 주 본가에 내려가 부모님과 식사를 하던 중 우연히 이번 대선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결론은 부모님은 “이번에는 박근혜가 해야지” 이었다. 아무리 논리로 설득하려 해도 도무지 되지 않았다.
언젠가 김어준씨가 그랬었다. “박근혜는 감정이다. 논리로는 설명도 설득도 이해도 되지 않는. 이미 체화되고 일반화된 감정이다.” 라고 말이다.
부모님과 대화하며 김어준씨의 말에 100% 동의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과 [보릿고개] 시절을 겪은 나의 부모님의 박정희에 대한 기억과 [독재자], [비참한 죽음]의 역사를 익혀 온 나의 박정희에 대한 학습 사이에는 그랜드 캐년 협곡만큼이나 큰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경제개발]과 [새마을운동]에 대한 부모님과 나의 간극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결국에는 [박근혜]에 대한 부모님과 나의 간극의 각은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하느냐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이 책 「평화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에서 저자가 2차 세계대전과 이후 줄곧 현대사에서 이어진 학살과 폭력, 전쟁과 테러에 대한 암묵적 동조자와 침묵의 지지자들을 이해하는 것의 출발이 개인적 가정 사(史)라고 했다. 비극적이고 참담한 과거의 기억을 한 방에 상쇄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과정이었다.
또한 내가 이해 한 박정희와 박근혜에 대한 부모세대와 젊은 세대의 간극도 부모세대가 살아 온 역사에 대한 공감에서 시작해야 한다. 어쩌면 트라우마로 새겨진 전쟁과 빈곤에 대한 기억이 박정희라는 철옹성을 도저히 무너뜨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강풀의 웹툰 [26년]에서 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 동기가 여전히 그 대통령의 가장 측근 경호원으로 살고 있는 것에 대해 대통령 암살을 계획한 동기가 묻는다. “왜 아직도 그러고 있느냐”고. 경호원이 대답했다. “이분이 무너지면 나는 없어지는 것이다. 이분의 역사가 사라지면 나의 역사도 사라진다. 그래서 나는 지켜야 된다.”고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부모세대의 설득되지 않는 ‘감정적 동조’를 이해하고 나아가서는 ‘공감’해야 한다.
물론, 이 책의 저자가 펼친 논리와는 많이 다르다. 대상도 많이 다르고 결과도 다를 것이다. 다만 이 책을 좀 더 내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맥락을 잡은 것이다.
유럽 전쟁 주체 세대의 개인적인 가정 사(史)와 한국 부모 세대의 곡절 많은 성장 사(史)의 맥락을 통한 이해가 다소 무리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라 여기서 리뷰를 맺을까 모두 지우고 다시 쓸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냥 맺을까 한다.
리뷰라는 건 ‘읽는 이만’의 특권이니까. 내가 이해한 만큼 내 리뷰도 나아가는 것이니까.
보다 나은 인간이 되고 그런 사회와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독일의 젊은이와 한국의 젊은이가 가져야 할 꿈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역사에 대한 각기 다른 관점을 굳이 설득하려 애쓰는 것보다 저자의 독려처럼 조금만 더 ‘공감’하려는 노력이 절실 하다. 서로 탓해봐야 남는 것도 없으니 말이다.
“위장된 태도에 속아 넘어간 사람들은 그들에게 구원자 역할을 기대한다. 가짜 구원자가 그럴싸하게 포장한 행동이 그들을 불안에서 해방시켜 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p.120)
위장된 태도와 포장한 행동에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지우고 싶은 역사와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독일 사람은 독일사람 대로. 한국 사람은 한국사람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