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독서 두번째 이야기 - 길을 안다는 것, 길을 간다는 것 여행자의 독서 2
이희인 지음 / 북노마드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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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아웃도어 브랜드 시장이 기형적으로 커지고 동네 뒷산에만 올라도 마치 히말라야 7좌를 등정하는 데 필요할 것만 같은 장비와 도구, 옷을 구비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최근 몇 년간 아웃도어 캠핑 시장도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고 한다. 산이나 바다 어디를 가도 이제는 캠핑장이 구비되어 있고 그들이 선보이는 캠핑 장비들은 어마어마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캠핑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단 귀찮고 성가시다. 아무래도 캠핑은 여름에 많이 하게 되는데 나는 일단 여름에 밖에 나가는 것이 너무 싫다. 그렇지 않아도 더위에는 쥐약이고 선풍기를 틀어 놓아도 땀이 나는 내 눈에는, 집 살림 정도의 물건들을 굳이 밖으로 가져 나가서 사서 고생하는 것 같은 캠핑이 이해되지 않는다. 캠핑을 하면서 맛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점이 많겠지만 나는 캠핑! 하면 ‘출발 전부터 장비 챙기느라 땀으로 흠뻑, 출발해서 도착할 때까지 차 밀리며 땀 흠뻑, 도착해서 준비하면서 땀 흠뻑, 텐트에서 땀 흠뻑, 돌아오기 위해 장비 철수하면서 땀 흠뻑, 집에 와서 정리하고 장비 씻느라 땀 흠뻑’

여행도 처음에는 그랬다. 여행의 무용성을 떠들고 다니기도 했다. 여행갈 돈으로 책을 사 보면 그 여행에서 맛볼 수 없는 신세계를 경험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이런 내 생각과 확신은 몽골여행 한 번으로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나’라는 존재를 압도하며 펼쳐진 사막의 일출 장면에 눈물을 쏟았다. 참회와 부끄러움, 찬양과 경외의 눈물 이었다. 수백 권의 책에서도 차마 맛볼 수 없는 경험이었다. 여행에 대한 생각과 자세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후로는 나보다 조금이라도 어린 친구들에게 “땡빚을 내서라도 배낭짐을 싸라. 최소한 2주는 여행해라. 남들이 가지 않은 곳으로 여행해라.” 전향했다.

아웃도어 장비와 옷, 캠핑 장비들의 참맛을 경험하면 쉽게 사상전향하지 않을 까 싶기도 하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톈진에서의 마지막 밤. 여행이 아쉽고 젊음이 슬프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엉엉 울어야 했다. 어떤 경험은 너무 아름다워 상흔이 되기도 한다.” (p.37)

 

 

이 책 「여행자의 독서 - 두 번째 이야기」의 저자는 최소한 나보다는 훨씬 많이 여행을 다닌 여행객이다. 이미 고등학교 때 자신의 힘으로 번 돈으로 여행경비를 마련 해 여행을 다녔다. 뒤늦게 사상전향한 나와는 다르다. 그런데 ‘어떤 경험은 너무 아름다워 상흔이 되기도…….’라는 말에 왜 이렇게 공감이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몽골 엘승타슬라헤 사막에서 마주한 사막의 일출 앞에서 쏟아낸 눈물에는 ‘내 젊음이 슬프다. 여행이 아쉽다.’라는 속뜻은 없었는데 말이다. 나는 그저 경탄해 마지않는 자연 앞에 찬양의 눈물을 쏟은 것이었다. 저자의 표현처럼 여행 자체가 아쉽고 젊음이 슬퍼서 엉엉 울었다는 경험이 낯설기는 하지만 탐이 난다. 언제 내 자신을 두고 울어 볼 수 있을까? 쉽지 않은 경험이리라. 한 번 해보고 싶다.

 

 

“세르비아의 평화.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만난 평화는 내내 불안하고 갑갑했다. 보스니아와 코소보에서 살벌한 폭력을 저지른 이들의 도시와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듯 평온할 수 있는 것일까? 전쟁은 그저 허깨비였단 말인가? 전쟁은 과연 사람이 했던 짓인가?” (p.156∼157)

 

사실, 책이나 TV를 통해 알게 되는 것에는 것과 실제로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는 것에는 차이가 있을 때가 많다. ‘코소보 사태’로 잘 알려진 보스니아 내전은 나치의 인종말살 정책 이후 가장 잔인하고 무모한 전쟁이었다. 유서 깊은 짧은 다리를 하나 두고 민족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매일 마주치며 인사하던 이웃을 무참히 살해 했다. 그리고 그들의 아내와 딸과 어머니를 강간했다. 다시는 그들과 같은 인종이 탄생하지 않도록. 잔인하고 무자비하다. 그런데 실제로 그 잔인한 전쟁의 주도자였던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는 평화로웠다고 한다. 책에 삽입된 베오그라드 시민들의 평화롭고 여유로운 모습에서는 전쟁의 상흔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환각 상태에 빠진 것처럼, 허깨비를 보고 있는 것인지 내가 허깨비인지 분간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여행이 아니면 결코 맛볼 수 없는 경험이다. 활자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알 수 없다. 어떠한 형태로든 가공되고 수정되어 편집된 화면으로도 결코 알 수 없다. 내 눈으로 직접보고, 내 손으로 직접 만지고, 내 귀로 직접 듣고, 내 코로 직접 맡아야 알 수 있다. 물론,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기에 동일한 베오그라드 주민을 보고 저자와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의 만행, 특히 아우슈비츠의 기억은 서구 유럽에 씻을 수 없는 원죄의식을 심어 놓았다. 수세기 동안 세계의 중심을 자처하며 이성과 합리성을 신봉해온 콧대 높은 유럽 대륙에 극단의 야만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은 유럽인들에게 적잖은 충격이었으리라.” (p.205)

 

체코의 프라하와 독일의 드레스덴에 신혼여행을 갔었다. 프라하도 좋았지만 나는 드레스덴이 더 좋았다. 2차 대전 당시 연합군의 폭격으로 도시가 완전히 폐허가 된 드레스덴. 이미 책을 통해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직접 경험한 드레스덴은 많이 달랐다. 시민들의 힘으로 전쟁이 가져 온 폐허를 이겨내고 새로운 도시로 탄생했다는 활자를 읽었지만 실제로 그 도시에 어떻게 숨 쉬고 있는지는 직접 발로 다니며 경험할 수 있었다. 깨끗하고 단정하고 심플했다. 독일의 도시 ‘다웠다.’ 그런데 뭔가 알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 과도하게 절제된 것 같은 느낌.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였는데, 이미 전쟁의 상처에서 완치되었는데 차마 씻어내지 못한 슬픔, 절망, 공포 같은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드레스덴을 신나게 돌아다니고 난 후 돌아온 숙소 침대에서 갑자기 그런 느낌이 몰려 왔다. 슬펐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함께 여행하지 말라 한다. 사이가 멀어질 수 있다고? 그렇다면 진정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걷는 길이 가장 쉽고 아름다운 길이다.” (p.76∼77)

 

이 책은 다른 여행서적과는 많이 달랐다. 여행지에서의 경험이 주가 되지 않는다. 여행지에서의 ‘내’가 주인공이다. 여행지에 들고 간 ‘책’이 주인공이다. 저자의 탄탄한 인문학적 내공도 한 몫 한다. 저자가 책에서 ‘문학’ 쪽에 더 관심이 많다고 하는데, 책에서 소개한 많은 문학작품들 중 대부분이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중간 중간 읽고 싶은 책을 메모하고 리스트를 만들었다. 주로 한 분야의 책만 편식하는 내게 저자의 책소개는 보약과도 같다. 책이 재미있고 저자의 글에 고개가 끄덕여 지면 저자가 하는 말에도 동의하고 싶어지게 마련인데 이 책과 저자에게도 그랬다.

나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여행이 가장 좋았다. 혼자서 배낭 짊어지고 고생한 여행도 좋았지만 둘이서 함께 하는 여행이 주는 달콤함을 넘어설 수 없었다. 아내와 하는 여행이 가장 좋았다. 여행 중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당연한 건데 너무 자랑처럼 얘기했나?^^;;) 그저 좋았다. 기질과 성향이 비슷해 그런 것 같다. 계획하고 있는 여행도 무척 기다려진다.

 

 

“아시아나 아프리카 나라들이 번잡하고 지저분하지만 어쩐지 활기 넘쳐나는 시장통을 활보하는 기분이라면, 유럽은 조용하고 인적 드물며 경비가 삼엄한 부유한 주택가를 산책하는 것만 같다. 좀 심하게 말해 어딘가 박제가 되어버린 여행, 핏기 없는 여행을 하는 것만 같다.” (p.181)

 

계획하고 있는 여행이 유럽인데 이 사람이 산통을 깨고 있다. 아직 많지 않은 여행 경험이라 저자의 내공에 미치지 않는다. 그래서 별로 상관할 것 없어 보인다.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남미를 경험하고 나서야 ‘말이지~ 아시아는 말이야~ 아프리카는~ 유럽은 말이야~’ 으름장을 놓을 수 있는 것이지.

 

 

“길 가기와 책 읽기에 관해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걸 당신에게만 말해주겠다. 부지런히 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다. 부지런히 읽는 책이 가장 빨리 읽는 독서다.” (p.329)

 

여행도 부지런히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다.

가세~ 가세~ 젊어서 가~ 늙어지면 못 가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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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이 책이 다시 개정합본으로 출간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박정희 시대는 자연스레 끝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둔한 기대였습니다. 혹자는 30-40년 정치적 민주주의가 후퇴를 했다는 둥 말이 많습니다만 뭐 어쩌겠습니까 모든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을요.

개인적으로는 진중권씨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한 번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지금은 그 위세가 많이 약해진 조갑제 옹의 책을 절묘하게 패러디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말하기 좋아하고 논쟁하기 좋아하는 진중권씨의 글쓰기는 어떤지 들여다보는 것도 나름 의미있는 시간일 것입니다.

 

 

 

 

 

 

 

 

 

 

 

 

 

 

 

 

 

 

2. <산체스네 아이들>

한 가족의 생애를 역사로 기록한 저자 오스카 루이스의 집념도 대단하지만 자신들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펼쳐낸 산체스 가족의 용기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부자가 되고 평안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지요. 반대로 어럽게 살거나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입니다. 함께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꺼이 ARS전화를 걸어 후원을 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삶이 각박해지고 인간성이 급격하게 소멸되는 시대라 해도 최소한의 인간애는 마지노선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체스네 가족의 이야기를 1인칭으로 서사했다는 서술 방식이 흥미롭습니다. 공감하며 보는 TV다큐멘터리나 곤궁한 지역을 탐사하는 르포르타주를 보는 것과 비슷할 것 같습니다. 출간 50주년 기념으로 재출간 된 이 책에는 이 가족들의 후일담도 담겨 있다고 하니 더욱 흥미로울 듯 합니다.

 

 

 

 

 

 

 

 

 

 

 

 

 

 

 

 

 

3. <여행을 팝니다>

관광이라는 것이 단순히 경제적 관점에서만 고려될 때 일어나게 되는 상황에 대해 풀어낸 책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몽골의 경험을 통해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관광산업의 어두운 면을 들여다 본 바 있습니다. 첫 몽골 여행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과 광경을 3년 후 두번째 몽골 여행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무분별한 부동산 개발, 한국에서 넘어간 섹스산업 등으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가 180도 변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관광 산업을 통해 경제발전을 이뤄주겠다 라는 장밋빛 희망을 던져준 채 온갖 추악한 형태의 어두운 관광을 수출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해당 국가와 그 국민들에게도 장기적으로 볼 때 도움이 되고 그들의 손에 이득이 되는 것으로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돈이 되는 것이라면 아무리 더럽고 추악한 것이라도 가차없이 내지르는 천박함. 뭐, 국내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몇 해전부터 올레길, 둘레길 등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었죠. 각 지자체마다 고유한 길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당장 돈이 되고 사람들이 모이고 전시성으로 보이기에 안성맞춤이니 뛰어들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었죠. 그런데 무턱대도 뛰어들다 보니 오히려 자연경관을 해치거나 녹지를 훼손하고 원주민들의 삶의 영역을 침범하는 등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습니다.

여행과 관광이 단지 상품으로만 해석될 때 그저 돈 놓고 돈 먹는 놀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 진정한 여행과 관광의 의미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4. <기술과 문명>

기술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문명의 혜택을 입지 않고서는 발전할 수 없습니다. 첨단의 끝을 달리는 시대를 살고 있어 때로는 머리가 핑핑 돌 정도로 어지럽기는 하지만 이제는 손목에 시계만한 컴퓨터를 차고 생활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편리하죠. 쉽고 간편하고 좋습니다. 모두가 이 은혜를 입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모두가 첨단의 끝을 두려워하고 컨트롤하고 싶어 합니다. 이율배반이죠.

이 책은 삶의 질과는 무관한 이윤과 효율성으로 기계문명을 타락의 길로 이끈 권력의 실체를 폭로합니다. 진정 인류에게 위협이 될 만한 실체에 대한 대응이기도 할 것입니다. 권력과 자본을 동시에 움켜쥔 기득권은 그것을 결코 놓거나 양보하지 않기 때문에 견제하고 경고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기술과 문명의 인류의 실재와 미래에 대한 조력자가 되느냐 지배자가 되느냐의 문제는 이제 먼 미래의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5. <한반도 분할의 역사>

한반도 분할의 역사가 임진왜란 당시부터 시도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실재적 분할의 정치,군사적 상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읽어야 할 책입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최대한 역사적 사료와 근거가 객관적으로 전해지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러시아와 일본, 미국의 방대한 자료를 비교하고 분석합니다.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단순히 연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재적 분할의 시기에 역사적 교훈을 주고자 합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많이 읽어야 할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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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한국사회 - 단지 공화국에 갇힌 도시와 일상
박인석 지음 / 현암사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아파트에 처음 이사 갔던 날을 잊지 못한다. 첫 아파트는 5층짜리 아파트였다. “얘들아~ 우리 이제 우리 집으로 이사 간다.” 라고 하시며 환하게 웃으셨던 어머니의 얼굴이 아직 또렷하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초등학교 고학년 때로 기억 된다. 이전까지 이사를 참 많이 다녔다. 주로 주택이었고 상가 건물 1층에서 살았던 기억도 있다. 그렇다면 그전까지는 ‘우리 집’이 없었다는 것일 테다. 아무튼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 집꿈’을 이뤄내신 것이다. 이사 가던 날 1톤 봉고 트럭 2대를 나눠 타고 하얗고 크고 멋있는 ‘우리 집’으로 이사를 갔다. 무척 좋았다. 방2개짜리 집이었고 부모님이 ‘주공, 주공’ 하셔서 ‘아~ 우리 집이, 우리 아파트가 주공아파트구나~’ 하며 알았다. 5층짜리 아파트였고 우리 집은 1층이었다. 방이2개가 있었다. 동생과 나는 처음 가져본 침대에서 내려올 줄 모르고 한참을 뛰어 놀았다. 우리 주공아파트와 같은 아파트가 20개가 넘었고 우리 주공아파트 주민들을 위해 시내버스 노선도 바뀌어 우리 아파트 입구에 정류소가 생기기도 했다. 이사하기 전까지 학교는 늘 걸어 다녔었는데, 이제는 시내버스를 타고 다녔다. 종이로 된 학생용 버스표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도 좋았다. ‘우리 집’이 생기고 나서 얼마 뒤 ‘우리 차’가 처음으로 생겼다. 좋은 일이 연달아 생겼다. 부모님은 얼마 전까지 ‘우리의 첫 집’ 주공아파트를 팔지 않으시고 세를 주고 있었다. 오래 되고 좁은 아파트를 파시라고 진작부터 말씀을 드렸는데 어머니는 차마 팔지 못하겠다고 하셨다. 그래도 그 집에 들어가면서부터 일이 잘 풀리고 그 첫 집에서 살았던 기억이 좋아서 팔지 못하겠다고. 2년 전에 그 집을 파시고 그 동네 주변을 지나갈 때마다 애틋한 눈길로 쳐다보시고는 했다.

어머니에게 15평 주공아파트는 ‘첫 집’이었다. 남편을 따라 누구하나 아는 사람 없고, 말투도 다르고, 고향과는 먹는 음식이나 날씨도 완전히 다른 타향에 와서 이룬 첫 번째 꿈이었다. 주인 집 눈치 보며 두 아들 놈 마음껏 뛰어놀지도 못하게 하며 이리저리 이사 다녀야 했던 서러움을 한 번에 씻어 준 고마운 ‘첫 집’이다. 철없던 시절에는 몰랐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이 책 「아파트 한국사회」는 ‘아파트 단지’가 가진 문제점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담은 책이다. 적어도 나와 내 가족에게 ‘아파트’, ‘아파트 단지’는 좋은 기억이다. 지금도 그렇고.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아파트’와 ‘아파트 단지’는 많은 문제를 양산한 것이 사실이다. 분양이 되지 않는데도 어김없이 하늘로 솟구치며 건설되는 아파트를 보며 ‘도대체 살 사람이 있을까?’ 의문을 가져 본 적이 다들 있을 것이다. 실제로 무분별하게 건설된 아파트로 인해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일어나기도 했다. 많은 문제들 중에 가장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은 아파트 입주를 두고 먼저 입주한 주민과 이사를 오려고 하는 입주자 사이에 벌어진 대치였다. 9시 뉴스에서도 크게 보도되었는데, 똑같은 아파트를 두고 처음 입주했던 사람은 2억을 주고 들어왔는데 이후 분양이 되지 않아 회사 측에서 1억5천에 입주를 시킨 것이다. 먼저 입주한 사람은 자신들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아파트에 입주하려는 사람을 막은 것이고 후에 입주한 사람들은 정당하게 돈을 주고 법적으로 문제없이 입주하려는데 그것을 불법으로 방해하는 것이라고 대치한 것이었다.

또 하나 고위공직자나 어떤 국가기관의 수장으로 임명된 사람들의 인사청문회에서 벌어진 일. 공무원으로 수십 년을 살아온 사람이 아파트를 몇 채나 보유하고 있고 자녀교육을 위해 위장전입을 필수코스로 자행하는 꼴을 보면서 사람들은 두 가지 생각을 했다. ‘결국 잘 사는 놈들만 잘 사는 나라구나’, ‘나도 돈 있으면 저렇게 해야지’

 

이 책은 ‘아파트 공화국’이 된 한국사회의 여러 제반 문제들에 대해 두루 다루지 않는다. 폭을 좁혀 ‘아파트 단지’에 대한 문제와 ‘아파트의 고층화, 고립화’, 특히 ‘발코니 확장’에 관련된 문제를 주로 다룬다. 그래서 아파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생각을 한데 수렴하지는 못하지만 누구라도 한번쯤은 생각해 봤을만한 아파트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아파트가 아니라 아파트 단지가 주인공이라면 한국사회의 도시와 주거를 진단하는 문제들 역시 ‘아파트’에서 ‘단지’로 바꾸어야 한다. 한국은 아파트 공화국이 아니라 ‘단지 공화국’인 것이다.” (p.24)

“소필지 조직 없이 아파트 단지로 채운 탓에 도시가 동맥경화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p.42)

 

먼저 저자는 우리가 아파트에 대한 문제를 다룰 때 ‘아파트’ 자체가 아니라 ‘아파트 단지’의 개념을 전제해야 한다고 주장 한다. 도심이나 상권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지역에 홀로 서 있는 아파트는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다. 흔한 아파트 광고에는 반드시 ‘아파트’가 아닌 ‘아파트 단지’에 들어 설 여러 공공시설과 상권에 대한 홍보로 가득 차 있다. 아무리 인기 있는 브랜드의 아파트라도 주변에 아무런 시설 없이 홀로 동 떨어져 있다면 분양은 고사하고 외딴 섬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들어 설 ‘아파트’ 주변에 좋은 학군이 위치해 있고 지하철 몇 호선이 지나고 상권이 얼마나 발달되어 있는지, ‘아파트 단지’의 모습이 좋다면 아무리 비싸더라도 그 아파트의 분양은 순식간에 동이 난다.

책에서 소개된 대로 요즘은 아파트 안에 헬스센터나 독서실, 육상트랙이나 운동기구, 심지어 대형마트까지 갖춘 단지들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내에서 모든 생활이 가능해 진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건설되는 고층 아파트는 그 아파트가 가진 높은 가격에 맞게 만들어진 수많은 편의시설과 보안시설로 인해 일반 주거지역에서는 엄두도 못 낼 위화감을 조성하기도 한다. 아파트 입구에서부터 보안요원들이 새까만 양복을 입고 위용을 드러낸다.

단순한 위화감만 유발한다면 큰 문제는 아니겠지만 무분별하게 건설되는 아파트 단지들로 인해 주변의 교통과 오히려 소상권이 몰락하는 등의 전체 도시기능은 저하되는 것을 저자는 정확하게 지적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은퇴를 앞둔 중년세대들이 주로 시골이나 한적한 곳에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것이 희망사항이었는데, 지금은 젊은 세대 중에서도 그런 희망사항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가까운 지인은 이미 시골에 땅을 사놓기도 했다. 아파트와 아파트단지가 무척 편리하고 유용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흙을 만지고 밟으며 살고 싶어 한다. 도시의 삭막함, 아파트의 획일성을 지적하면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척하지만 실제로 쉽게 떠나지는 못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20∼30년간 도시 기반시설에 대한 엄청난 공공투자를 통해 도시 공간 환경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 도시 어디에서나 공원이며 녹지, 생활체육시설, 도서관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자 굳이 자족적인 환경을 갖춘 아파트 단지를 선호할 이유가 사라졌다. 오히려 인간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골목길과 도시의 흥취가 배어나는 상점가에 가까운 동네가 훌륭한 집터로 선호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p.69)

 

한국사회는 너무 쉽게 아파트로 몰렸다. 그것만이 전부인 줄로 알았다. 유럽이 가진 경험을 조금이라도 염두에 두었다면 지금과 같은 아파트 공화국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혼 전 원룸에서 자취생활을 5년 동안 했다. 정말이지 너무 불편했다. 일단 주차문제. 퇴근의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어디에다 주차하지?’ 생각하며 골머리를 앓았다. 특히 금요일 밤이나 일요일 밤은 지옥이다. 오죽하면 걸어서 15분이나 걸리는 인근 아파트 주차장에 주차하기도 했었다. 또 쓰레기 처리 문제. 아파트단지 안에서는 원스톱으로 해결된다. 두 손에 잔뜩 음식쓰레기와 종량제봉투, 분리수거바구니를 들고 나가서 처리하면 끝. 원룸을 그렇지 않다. 하나하나 날짜를 맞춰야 하고 구청에서 나눠 준 규격에 맞게 기다려야 하고……. 정말 불편했다. 근처에 제대로 된 놀이터가 있기를 하나 운동 할 수 있는 공간도 없고 조깅할 수 있는 곳은 더더욱 찾기 어려워 결국 인근 학교 운동장을 찾아야 했다.

 

 

“결국 선호하는 주거 형태가 아파트에서 단독주택으로 바뀌려면 우선 도시 공공공간 환경이 그만큼 좋아져야 한다. 현재 한국 도시 공간 환경이 매우 취약한 수준임을 감안한다면 무엇보다 도시 기반시설과 시민 편의시설에 대한 대대적인 공공투자가 필요하다.” (p.70)

 

급격한 경제 성장을 겪으며 유럽모델, 가까운 일본모델조차 차용하지 못한 것이었다. ‘일단 짓고 보자.’, ‘아파트 올리고 보자.’ 그리고 ‘부수고 보자.’ 공공단지, 공공공간에 대한 고민을 배제한 채 그저 아파트 올리는 것에만 급급했던 결과다. 지방의 중소도시 같은 경우에는 도로건설 또한 아파트 단지의 유무에 따라 달라진다. 새로 건설된 아파트 단지 주변으로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도로가 만들어 지고 하면서 이어붙이기식 도로건설이 진행되는 것이다. 그나마 광역시나 신도시 정도 되면 상황은 나아지지만 그것도 아파트 단지에 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불편함을 초래하는 또 다른 문제가 된다. 그나마 사용하던 운동시설과 놀이터, 도로와 소필지 들이 대규모 아파트단지의 건설로 인해 파헤쳐지고 부서지고 하면서 점점 없어진다. 시민과 주민을 위한 공공공간에 대한 공공투자가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건설이라는 괴물로 인해 당연한 듯 사라지는 것이다.

사실, 지금 당장 내게 “너 20평짜리 아파트에 살래? 30평짜리 주택에 살래?” 물어본다면 당연히 아파트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파트가 아닌 다른 주거 형태가 아파트가 갖는 여러 장점을 뛰어넘지 않는 이상 한국의 아파트 사랑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고밀개발-고층개발-단지개발’의 불가피해 보이는 관계는 사실은 거짓말로 맺어진 불편한 삼각관계다. 도시 공공공간 환경에 대한 투자를 최소화하려는 꼼수와 단지화 전략이 그 불편한 삼각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진짜 이유인 것이다.” (p.89)

 

저자는 이런 과도한 사랑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지적 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공공공간 환경에 대한 투자와 계획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검토와 준비가 필요하다. 바닥부터 싹 갈아엎어야 하는 수준일 텐데 과연 한국의 행정부와 주관부서 해당지자체에서 특별한 이유 없이, 당위성 없이 뛰어들까? 전혀 그렇지 않다. 한국 공무원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저자는 ‘고밀개발-고층개발-단지개발’의 삼각관계가 거짓말로 맺어진 불편한 꼼수라고 주장 한다. 늘 그래왔듯이 대규모로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고 그 안에 공공공간 환경을 만들고 공공기관 및 시설, 교육시설, 여러 상권을 조성하면 한 번에 해결될 일이다. 그리고 책에서는 차마 지적하지는 않지만 현대 한국경제사를 통해 건설사가 해온 온갖 비리와 불법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다들 알고 있는 문제다. 한때 재벌기업들에서는 다른 사업 분야에서 본 적자를 건설 분야에서 충당한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국가기관이나 공무원들은 어디에서부터 손대야 할지조차 가늠이 안 가는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이지 않아서 좋고 건설기업들은 늘 해오던 대로 돈만 벌면 그만인데 이 좋은 일을 놔두고 단지 국민과 세입자, 주민들을 위해 이제 와서 유럽모델을 도입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한국 도시들의 인구밀도와 유럽 문화수도 선정 도시들의 인구밀도를 나란히 놓고 보면 한마디로 별 차이가 없다. 파리나 아테네는 서울과 부천, 코펜하겐이나 스톡홀롬은 목포나 부산에 견주어 인구밀도가 비슷하거나 오히려 조금 높다. 그토록 아름다운 도시라고 떠들어대는 프라하나 아비뇽, 베르겐은 인천이나 김해, 통영과 인구밀도를 견줄 만하다. 적어도 인구밀도에서 우리나라 도시들이 유럽 유수의 문화도시들에 비해 결코 높지 않다. 땅이 좁지 않은 것이다.” (p.79)

 

이렇게 속아 온 것이다. 학교에서부터 ‘우리나라의 인구밀도는 엄청나게 높답니다.’를 주구장창 들어 왔다.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듣다 보면 사실인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중·고등학교 이후 인구밀도에 대해서 다른 나라의 도시와 직접 비교한 것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찾아볼 필요도 없었고 그럴만한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의 직접 비교는 놀라웠다. 파리, 아테네, 프라하와 같은 세계유산급 도시들과 서울, 부산, 인천과 같은 도시들의 인구밀도가 비슷하다니…….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배워왔는지 모르겠다.

결국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한국이 주거할 땅이 좁은 것도 아니고 한국의 도시들의 인구밀도가 너무 높아 초고층·대규모 아파트 건설이 당연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저자는 이런 한국의 아파트와 아파트 단지가 가진 이해되지 않는 문제에 대해 직접 코멘트를 하지는 않지만 이런 문제들이 총체적으로 결합된 하나의 사안을 소개한다.

바로 발코니 문제다.

 

 

“발코니 문제가 풀리지 않는 것은 이를 가로막는 세력들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발코니가 바닥 면적에 불가피해질 실질적인 용적률 하락과 수익률 하락을 걱정하는 건설회사의 집요한 로비, 과거의 어정쩡한 새시 설치보다는 제대로 거실이나 침실로 확장 공사를 하도록 합법화하는 쪽이 합리적이라는 엉뚱한 합리주의, 발코니 확장이 불가능해지면, 소형 아파트에서의 실질 거주 면적 축소가 걱정된다는 뚱딴지같은 충정, 새시로 막힌 발코니가 갖는 다기능적 공간 기능을 한국적 주거문화로 긍정하는 순진함 등등, 이해관계로 무장한 치열한 반대에서부터 비합리적이고 순진한 논리를 앞세운 무지한 반대 주장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고도 많다.” (p.355)

 

결혼 전 신혼집을 알아보기 위해 몇 개월 동안 발품을 팔았다. 발코니 확장을 한 집은 그렇지 않은 집보다 훨씬 비쌌다. 그만큼 발코니를 확장하는 데 많은 돈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같은 평수의 아파트라도 발코니를 확장한 집은 훨씬 넓고 깨끗해 보였다. 여름에 좀 더 덥고 겨울에 좀 더 춥기는 하지만 그렇게 넓은 평수를 선택할 수 없는 처지라면 차라리 좀 더 덥고 춥더라도 좀 더 넓은 공간을 소유하고 싶다. 그때도 생각했다. ‘예전엔 발코니 확장이 불법이었다고 들었는데 이런 집은 다 불법으로 확장한 것인가?’, ‘왜 처음부터 확장해서 지으면 되지, 이렇게 세대별로 나중에 골치를 먹게 하는 거지?’

저자는 정확하게 내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이유를 맞추지만 결국 자신들이 이제까지 해오던 대로 하는 것이 편하고 그렇게 해야 이렇게 저렇게 주워 먹을 콩고물도 있고 그런 것이리라 짐작해 본다.

 

 

“어차피 제값 다 받고 파는 주택이라면 처음부터 제대로 설계해야 한다. 처음부터 90m규모로 설계한다면 훨씬 자유롭게 합리적으로 좋은 설계를 할 수 있는 데 말이다. 발코니 확장 관행은 우리나라 주택 설계를 왜곡시키고 주거문화를 왜곡시키는 주범이기도 하다.” (p.138)

 

저자는 이런 문제가 단순히 아파트단지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주거문화를 왜곡시키는 주범이라고 주장 한다. ‘어차피 아파트가 가장 편하게 많으니까 거기에서 사세요.’라는 논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국가나 해당부처가 나서서 한국사회의 주거문화가 가진 불균형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할리 만무하고 건설 회사들이 너도나도 ‘이제 아파트 시대는 끝났다.’라며 아파트 건설을 중단할 리도 만무하다. 연일 TV에서는 친절하게도 ‘빚을 내서 내 집을 사세요. 멋진 아파트를 사세요. 그러면 당신도 이 광고하는 연예인처럼 살 수 있어요.’라는 착각을 심어준다. 최면이다.

그런데도 나는 아파트에서 계속 살고 싶다. 나의 첫 아파트이자 부모님이 처음으로 소유했던 ‘첫 집’ 주공아파트에 대한 아름답고 애틋한 기억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줄곧 아파트에 살다 5년 간 자취생활 했던 공동주택, 원룸의 불편하고 온통 스트레스였던 기억 또한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아파트 문제’, ‘아파트 단지 문제’가 저자의 지적과 주장처럼 심각한 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아직도 그런 아파트 하나, 내 집 하나 마련하는 것이 꿈인 수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크고 좋은 아파트나 그런 아파트를 몇 채나 가진 사람들이나 이제는 전원생활을 좀 해볼까 하며 멋있는 단독주택을 가질 만한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은 저자와 이 책이 던져 주는 시사점이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확 와 닿지 않는다. 아직은 연구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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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너희가 나쁜 게 아니야
미즈타니 오사무 지음, 김현희 옮김 / 에이지21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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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괜찮아."


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용기다. 나는 아직 아이가 없어 이것이 얼마나 큰 용기인지 체감하지 못하지만 주변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대단한 용기임을 알게 된다. 어설프게 걸어 다니면서부터 아이는 본격적으로 엄마와의 전쟁을 시작한다. 치우고 치워도, 챙기고 챙겨도 끝이 없는 것이 보통이다. 아이가 자라고 사춘기가 되면 극렬해지고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한 이후에도 "괜찮아."라는 말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한다. 친자식과 친부모 사이에도 이런데 학생과 교사,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끈끈한 혈연관계도 없다.

핸드폰의 기술력이 나날이 발전하면서 학교에서 벌어지는 교사의 체벌과 훈육이 큰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고3이던 시절에도 어른들이 "집안에 가장 큰 상전은 고3 자식이다."라는 우스개를 하셨는데 요즘은 초등학교 이전부터 졸업을 하고 난 이후에도 상전중의 상전이 되어 버린 듯 하다. 이제 더 이상 아이들에게 예절 따위를 가르치고 훈계하려 들다가는 예상하지 못했던 주먹이 날아들지도 모른다. 골목길 깊숙한 곳에서 몰래 피우던 담배를 이제는 교복을 입고 떳떳하게 피워도 아무도 나서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괜히 참견했다가 봉변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2학년 겨울방학 전까지 실컷 놀았다. 당시 불량학생으로 분류되던 아이들이 하는 짓을 모두 해봤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지역에서 두 번째로 공부를 잘하는 인문계 고등학교 였는데, 놀 때는 정말 신나게 놀았다. 경찰서에 가보기도 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묘기를 부리다 다치기도 했다. 괜한 의협심을 부리다 큰 싸움에 빠지기도 했다. 다행히 고3이 시작되기 전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학업에 매진하게 되었다. 대학 입학 후 노는 것이 재미가 없었다. 시시하고 지루했다. 이미 고등학교에서 다 해 본 것들이고 제대로 놀아보지 않은 아이들이라서 어설펐다.

 

이후로 교회에서 만나는 아이들이나 이전에 일하던 학원에서 만나는 아이들을 보면 꼭 나와 같은 아이들이 먼저 눈에 들어 왔다. 교회에 꼬박꼬박 잘 나오는 성실한 아이보다, 학원에서도 성실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보다, 뭔가 불만에 가득 차 있고 유난히 눈에 독기가 가득 하고 껄렁껄렁한 아이가 있으면 단번에 눈이 가고 기어코 친해졌다.

 

 

"꽃을 활짝 피우지 못하고, 그대로 시들어버리거나 말라버리는 아이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어른들의 잘못이다. 아이들은 피해자다. 나는 그런 피해자인 아이들과 만나기 위해 오랫동안 밤거리에서 살았다. 그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그저 그들 옆에 있고 싶었다." (p.37)

 

이 책 「얘들아, 너희가 나쁜 게 아니야」의 미즈타니 선생님은 그저 그들 옆에 있고 싶어 하는 어른이었다. 단순히 불량학생이라 판단해서 멀리하는 어른이 아니라 불량학생이 될 수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요인을 생각하고 결코 이 아이들이 가해자가 아니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사회에게 말하고자 했다. 어설프게 구원자 코스프레 하며 아이들의 삶을 단번에 바꿀 수 있을 것처럼 굴지 않았다. 미즈타니 선생님은 그들 옆에 있고자 했을 뿐이다. 밤거리에 널브러진 아이가 있으면 쉴만한 곳으로 데려가 그저 그 아이의 옆을 지켰다. 학교도 가지 않고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는 아이의 집을 찾아가 몇 날 며칠을 그저 함께 있을 뿐이었다.

 

 

"생선이야 썩을 수 있지만, 아이들은 절대로 썩지 않아. 그들이 그렇게 된 건 누군가가 그들을 썩게 만들었기 때문이야. 그런 아이들을 구하는 게 바로 교육이야!" (p.205)

 

이미 인생이 결정 난 것처럼 방치하고는 하지만 미즈타니 선생님은 결코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썩을 것처럼 보이고 그렇게 판단할 뿐 아이들은 절대로 썩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졌다. 명문 주간 고등학교에서 야간 고등학교로 자진해 전출을 하고 누가 시키거나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12년 간 매일같이 밤거리를 찾아 갔다.

사회가, 부모가, 학교가 챙기지 못해 밤이 토해낸 아이들을 찾아내 보듬었다.

 

 

"경찰에서는 나를 두고 '일본에서 가장 죽음 가까이에 서 있는 교사'라고 말한다. 입이 험한 어떤 경찰은 이런 말까지 한 적이 있다. '아마 당신은 언젠가 목이 잘려 죽게 될 거요. 아님 쥐도 새도 모르게 바닷물 속에 수장될지도 모르지." (p.34)

 

책을 읽다 보면 아찔한 장면이 더러 있다. 이미 십여 년 전에도 일본에서는 청소년 문제가 큰 사회적 이슈가 되었고 이지메와 히키코모리, 청소년 폭력조직. 약물복용에 대한 심각성이 대두되었다. 특히 폭주족에 가담하는 아이들의 사례가 책에 여러 번 등장하는데 미즈타니 선생님은 아무리 위험하고 무모해 보이는 조직과 상황 앞에서도 겁먹지 않고 주저하지 않는다. 수십 명이 뒤엉켜 있는 패싸움 한가운데 뛰어 들어 아이들 구하고 폭주족 우두머리를 만나 담판을 짓기도 한다.

 

 

"미즈타니씨. 우리도 체면이란 게 있는데, 약속을 어겼으면, 뭔가 대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들은 나의 손가락 하나를 요구했다."

"손가락 하나를 잃은 아픔은 매우 컸다. 그러나 소년의 미래를 위해서 손가락 하나쯤은 희생할 수 있었다."(p.144)

 

급기야 아이를 폭주족에서 빼내는 대신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기도 했다. 부모도 아니고 무슨 특별한 사명을 가진 영웅도 아닌데 그는 아낌없이 내어 주었다. 그리고 책에 등장하는 아이들에 대한 에피소드 말미에는 이 아이가 취직을 하거나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아 지금은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내용이 등장하는 데 책을 읽는 내내 마치 내가 가까이 알고 지낸 아이처럼 마음이 놓이고 뿌듯했다.

미즈타니 선생님은 책에서 줄곧 자신은 특별한 희생을 하거나 멋들어진 목표가 있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는 데, 그것 자체가 멋있고 대단한 헌신과 희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표시내고 생색내는 사람도 엄청나게 많다. 아낌없이 희생하는 것에는 어김없이 자신과 그 주변 사람의 희생이 동반된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미즈 타니 선생님이 12년 동안 밤거리를 다니며 5천 명이 넘는 아이들을 만나는 대신 어떤 개인적 삶의 희생이 있었고 주변사람들의 고통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전혀 없다. 그 정도 이야기는 살짝 곁들여줘도 독자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아예 그런 내용은 없다.

 

 

"나는 다카시와 만날 때마다 그가 가진 훌륭한 장점들을 강조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보지 않겠냐고 권유했다." (p.92)

 

밤거리의 토사물이 되었던 아이들은 미즈타니 선생님에 의해 구원되기 시작했다. 물론, 책에서도 언급하듯이 전혀 아이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 경우도 많다고 한다.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인정해 주는 것도 아닌 일을 하면서 성공하는 것보다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면 얼마나 힘이 빠질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선생님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가 포기하지 않으니 아이들도 포기하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에 다시 유혹에 넘어가 죄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감옥에서 마주한 선생님 얼굴 앞에서 오열 하며 뉘우치고 새 삶을 각오 한다.

 

많은 사람, 큰 힘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다. 단 한 사람. 자신을 믿고 기다려 주는 단 한 사람이 필요하다. 벌써 나도 어른이 되어 아이들의 행동을 볼 때 눈꼴사납고 훈계하고 싶을 때가 많다. 나는 실컷 놀아본 학창 시절 경험이 있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기다려 주는 것이 필요하다. 미즈타니 선생님의 12년 동안의 밤거리 활동을 이 책 한 권에 다 담을 수 없듯이 우리가 만나는 혹은 이야기 듣는 불량 학생, 4가지 없는 청소년들에게도 다 이야기 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그들만의 상황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최소한 내가 주기적으로 만나는 청소년이 있다면 그 아이를 기다려 주고 옆에 있어 주는 어른이 되기를 제안해 본다. 뭔가 가르치려 들거나 훈계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아이의 친구가 되어 아이가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한다면 최소한 그 아이가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한 명 생기게 되는 것이다. 책에서도 이것을 강조한다. 많은 힘이 아니라 "당신의 힘과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주위를 둘러보자. 아이를 찾아보자. 그리고 그 전에 미리 다짐하고 연습해 보자.

"아이에게 훈계하지 않기. 야단치지 않기. 가르치려 들지 않기. 아이보다 말 많이 하지 않기."

나는 당장 한 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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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가족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춘미 옮김 / 사과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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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水)’은 있는 그대로 흘러야 한다. 그대로 흐르지 못하면 탈이 나게 마련이다. 욕심이 생기고 다른 꿍꿍이가 생기면 그대로 놔두지 않는다. ‘물(物)’은 채워지지 않은 상태다. ‘물(物)’이라는 한자 단어가 가진 모양 또한 그렇다. 앞뒤로 접두어, 접미어가 끌어주거나 당겨주지 않으면 ‘비어있는(空)’ 것에 불과하다. 보이는 것은 잡고 싶고 만지고 싶다. 만지고 나면 가지고 싶다. 가지고 나면 더 가지고 싶다. ‘욕심(慾)’은 죄를 잉태한다. 남자를 단 한 번도 알지 못했던 마리아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수태 기운과 같은 뜬금없음이다. 뜬금없이 큰 죄악을 나라는 존재의 자궁 속에 이미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구태여 챙기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태반이 되고 탯줄이 되고 ‘물(物)’은 ‘욕심(慾)’의 양분을 받아먹는다. 공염불을 늘어놓는다. 이미 그것은 정해진 바다. 물이 애초에 높은 곳에서부터 낮은 곳으로 흐르는 성질의 것이라는 진리는 이미 중학교 때 유난히 땀이 많이 흐르던 과학 선생님에게 배웠던 바다. 철통같은 과학적 진리를 거스르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억지로 물길을 돌리고 아래에서부터 위로 퍼 올리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대로 흐르게 놔두는 것이 애면글면 힘쓰지 않아도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내가 쓴 것은 주로 물에 대해서였다.”

“야에코가 내게서 물을 빼앗아버렸다.” (p.64∼65)

 

 

소설 속 ‘나’는 별 볼일 없는 사내다. 바다가 있고 강이 있는 조그만 시골 마을, 쿠사바에 나고 살았다. 평생을 뱃일로 가정을 꾸린 아버지와 병으로 몸져누운 어머니, 유령 같이 집 안을 떠도는 조부, 형과 형수, 동생……. 아버지의 기대를 안고 형제 중 유일하게 4년제 대학을 나왔지만 별 볼일 없이 집에서 지내고 있는 둘째 아들이다. 그런데 ‘나’는 죽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여기에 머물고 있다.”

“들개조차 가까이 오지 않는 깊은 대나무숲 속에, 녹나무 고목에 기댈 듯이 서 있는 오두막에 있으면서, 나는, 건너편 기슭 주민의, 때에 따라서는 가족의 목소리와 생활하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p.22)

 

 

나는 죽었다. 25년을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생각 없이 흘러가다 쿠사바로 이르렀다. 5년을 외딴 오두막에서 살았다. 일부러 물길을 내어 물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수천 년, 수만 년을 그대로 흘러갔을 물의 흐름을 거슬렀다. 그래서 ‘원죄(原罪)’를 얻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래 전에 땅이 솟고 하늘이 무너져 바다가 호수가 되고 지축이 구름이 되던 때처럼 덩그러니 대양의 품을 벗어나 어느 시골 도시 석호(潟湖)가 된 것처럼 동떨어진 오두막에 유폐되었다. 나는 떠나지 못한다. 황홀한 델릴라의 유혹에 넘어가 머리카락이 잘리고 두 눈이 뽑혀 양손에는 청동족쇄를 찬 채 하릴없이 거대한 맷돌을 돌리는 노리개가 된 삼손처럼. 삼손이야 이방 신전의 기둥을 무너뜨려 결국 시원한 복수라도 했지만 쿠사바의 어부의 둘째 아들인 ‘나’는 그냥 죽어 버렸다. 죽고 나서도 쿠사바를, 가족을 떠나지 못한다. 물이 증발해 수증기가 되고 구름에 섞여 비가 되어 다시 내리는 것처럼 끝없는 시작과 끝의 착시현상의 감옥에 갇혀 있는 꼴이다.

나는 내 여동생이 낳은 아이의 아버지다.

 

 

 

“야에코는 여자고, 나는 남자다. 우리 둘 사이에 흐르고, 불탔던 것은, 순수하고 맑은 물과 불꽃이었을 뿐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실제로는 나뿐일지도 모른다. 쿠사바 마을의 물은 훨씬 전에 나를 용서했고, 우리 가족 또한” (p.158)

 

 

근친(近親)의 상간(相姦)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황불로 인해 순식간에 폐허가 된 소돔과 고모라를 피해 살아남은 롯과 그의 두 딸은 인류 최초로 근친상간을 저지른다. 핏줄을 잇기 위해 핏줄을 더럽힌 것이다. ‘물(水)’을 흐르게 하기 위해 ‘물(物)’에 대한 ‘욕심(慾)’을 가중시켰다.

‘나’는 여동생 ‘야에코’와 유폐된 오두막에서 ‘사통(私通)’한다. 사방으로 통하고(四通) 팔방으로 닿아있어(八達) 막힘이 없어야 하는데, ‘나’와 ‘야에코’의 ‘사통(私通)’ 그렇지 못했다. 자연스레 흐를 수 없는 결말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들개조차 거들떠보지 않는 허름하고 초라한 오두막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의 물(物)은 쿠사바의 물(水)을 벗어날 수 없다. 더군다나 도무지 애를 써도 애가 들어서지 않는 형과 형수에게도, 눈만 껌벅이는 채 누워만 있는 귀신같은 어머니에게 그건 못할 짓이다. 결국 ‘나’와 ‘야에코’의 짓거리도 들켜버리고 말았다.

죄가 있으면 벌이 있고 악이 있으면 선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죽어버렸다. 마치 장자가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는 꿈속에서 도를 발견한 것처럼 한 번의 꿈같은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나’는 과연 살아 있는지, ‘나’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내’가 살고 있는 쿠사바의 물은 흐르고 있는지 공식에 맞춰 풀어내듯 시원스런 답을 얻지 못한다.

‘나’는 스스로 나의 ‘죄’를 사했다. 처벌을 죽음으로 대치했다. 여전히 쿠사바의 물을 떠나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돌 듯 마냥 나비날개짓뿐이다.

애를 쓰며 나와 야에코의 사통(私通)을 정화시키려 하지만 어쩌면 나를 용서한 것은 유일하게 ‘나 자신’밖에 없을 수도 있다. 내 가족도, 쿠사바도 나와 야에코를 용서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결국 비겁하게 욕심과 본능의 끄트머리를 끝까지 놓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강바닥의 깊은 구덩이랑 대나무숲 속의 쓰러져가는 폐옥에서 몸과 마음을 갉아먹던 5년 사이에” (p.33)

 

비겁한 변명.

 

 

“쿠사바 마을의 물이 따뜻해져 간다.”

“쿠사바 마을에 일몰이 다가오고 있다.” (p.52∼53)

 

 

물은 따뜻해져 가는데 일몰이 다가온다. 시적 비유가 절묘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비겁하다. 여전히 ‘쿠사바는, 쿠사바만은 나를 용서했을 것이다.’라는 최면을 건다. ‘나’의 끝없는 재귀순환은 결코 쿠사바와 가족을 벗어나지 못한다. 야에코와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미 나는 죽었지만 여전히 끝나지 않는 일몰을 맞아야 한다. 언제 멈출지 알 수 없는 끝을 또 다시 맞이한다.

 

 

 

“나는 쿠사바 마을의 모든 것을 선명하게 감지할 수가 있다. 한창인 봄에 잠겨 있는 나의 쿠사바 마을은 지금, 막 태어난 아기처럼 따뜻한 비에 덮여 있고, 초산을 마친 지 얼마 안 되는 어머니처럼 부드러운 물소리에 싸여 있다. 모든 빗물은 강으로 모여, 빨간 다리 밑은 빠져나와, 세 바퀴 큰 물레방아를 돌리고, 깊은 대나무숲 곁을 천천히 흘러간다. 모든 물은 잠자고 있는 사람들의 가슴속을 흘러, 악몽과 슬픔의 잔재를 씻어내고, 그리고 망망한 바다를 향해 조용히 조용히 내려간다.” (p.267)

 

 

해결되지 않고 끝나지 않은 것들이 강으로 모여 든다. 버려진 ‘물(物)’들이 하나의 ‘물(水)’로 모인다. 누가 버렸는지, 누가 얼마만큼 지저분하게 분탕질 쳤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 그대로, 그 날것 그대로 모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저기에서 모여 든 물은 결국 한 곳으로 모인다. 조금 더 너른 품을 가진 곳으로 모인다. 계곡 구석에서 지류 저 구석에서 낮고 낮은 늪에서 조금씩, 조금씩 모여 든다. ‘어서 모여!!’라고 호각을 불지 않아도 ‘에~엥~!’ 확성기 사이렌을 울리지 않아도 저절로 모여 든다. 결국 그것밖에 없는 것일 테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이 당연한 것이다. 조금 더 너른 품은 조금 더 너른 품으로 흐른다. 대지를 적시고 영겁 같은 시간을 흘러 와 그 자리에 박힌 모래와 바위를 쓸어내린다. 굽이굽이 흐르고 흘러 한 번도 본 적 없는 바다로 향한다. 끝도 시작도 모호하고 경계와 깊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그곳으로. ‘나’의 원죄(原罪)는 여전한 사실이지만 오늘도 어제처럼, 내일도 오늘처럼 그렇게 쿠사바를 휘돌고 휘돌 쿠사바의 물은 또 다른 ‘나’를 품을 준비가 이미 되어있다.

 

 

 

 

이 책 「물의 가족」을 쓴 사람은 마루야마 겐지다. 우연히 트위터에서 “일본의 김훈, 마루야마 겐지”라는 글을 보고 무작정 이 책을 샀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김훈이고 가장 좋아하는 글이 김훈의 글이다 보니, 잴 것 없이 읽었다. 마루야마 겐지의 글을 처음 접했는데 비록 김훈의 글을 처음 접했을 때만큼의 낯섦과 충격은 아니었지만 나는 좋아하지 않지만 한국 독자들에게 유별나게 인기가 많은 무라카미 하루키나 요시모토 바나나의 글과는 분명히 다른 차원의 글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나는 하루키나 바나나의 글은 도무지 이해되지도 뭔가 감상이 되지도 않는다. 그들의 감성이 내 가슴이 와 닿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마루야마 겐지의 건조하고 직설적인, 그러면서도 치밀하고 정확한 묘사와 전개가 더 좋다. 에둘러 표현하거나 알아듣지 못하는 묘사는 머리만 아프다.

 

 

 

“야에코는, 먹고, 마시고, 떠든다.” (p.46)

“당장 동생은 밀어 따위에 발을 들여놓고 있고, 실제로 누이동생은 저런 식으로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형 부부한테는 아직 아이가 없고, 생길 전망도 없을 것 같다.”

“어머니는 졸고 있다.” (p.87)

 

 

 

일본 문단 내에서 리얼리즘 작가로 분류되고 있는 마루야마 겐지의 글은 편하게 읽히지 않는다. ‘설마 이런 일이 현실에?’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얼마나 많이, 그리고 자주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실재하는지 알 수 있다. 마루야마 겐지는 에두르지도 서두르지도 않는다. 그저 담담히 상황을 직시한다. “야에코는, 먹고, 마시고, 떠든다.” 라는 직설적인 문장에 숨이 막혔다. 물은 흐르고 일상은 반복되며 삶은 유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지가 개벽할 소용돌이 속에서도 야에코는 먹고 마시고 떠든다. 또한 그런 야에코를 보는 나머지 가족들, 특히 어머니는 마지막 숨을 두 눈동자에 머금은 채 그저 끔뻑거리기만 하는 그 두 눈으로 “졸고 있다.” 둘째 아들과 야에코 사이의 짓거리를 알게 되었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가만히 누워 있지만 잠은 온다. 잠은 자야 한다. 어제도 흐르고 오늘도 흐르고 내일도 흐르는 쿠사바의 물(水)처럼 잠을 자야 삶을 이어 갈 수 있다. 그렇게 살아내는 것도 사는 것이다.

 

마루야마 겐지의 글은 무겁다. 물의 이미지를 반복이라는 개념으로 작품 전개의 중요한 도구로 삼는다. 언뜻 비슷해 보이는 문장과 단어가 반복되지만 같지는 않다. 어제 본 강물이 오늘의 그것과 비슷해 보이지만 결코 같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제의 물이 있고 오늘의 물이 있다. 찰랑찰랑 물결치는 것이 아니라 큰 바위를 시원하게 휘돌아 급류로 파고드는 물살과 같이 무겁지만 힘차다. 이 책을 다 읽기 전 그의 다른 책을 구입했다. 마루야마 겐지의 글을 더 읽고 싶다.

 

 

 

 

“한 작가가 지니는, 혹은 지키는 삶의 자세는 가시적이다. 개중에는 투명하다 할 정도로 단순한 선으로 획이 그어지는 존재양식이 있다. 마루야마가 바로 그런 작가이다. 단선철로 같은 궤적을 반복운동으로 채운다.

독자가 편지를 보내와도 어지간해서는 답장을 안한다. 전화도 안 받는다. 찾아와도 얘기 상대 노릇은 안한다. 나는 작가이고, 그들은 독자이다. 둘 사이에는 소설만이 존재한다. (「사인회에서의 사인펜」)”

 

 

단선철로 같이 단순하고 투명한, 그렇지만 그 철로의 무게만큼 무겁고 정확한 그의 글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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