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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가족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춘미 옮김 / 사과나무 / 2012년 6월
평점 :
‘물(水)’은 있는 그대로 흘러야 한다. 그대로 흐르지 못하면 탈이 나게 마련이다. 욕심이 생기고 다른 꿍꿍이가 생기면 그대로 놔두지 않는다. ‘물(物)’은 채워지지 않은 상태다. ‘물(物)’이라는 한자 단어가 가진 모양 또한 그렇다. 앞뒤로 접두어, 접미어가 끌어주거나 당겨주지 않으면 ‘비어있는(空)’ 것에 불과하다. 보이는 것은 잡고 싶고 만지고 싶다. 만지고 나면 가지고 싶다. 가지고 나면 더 가지고 싶다. ‘욕심(慾)’은 죄를 잉태한다. 남자를 단 한 번도 알지 못했던 마리아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수태 기운과 같은 뜬금없음이다. 뜬금없이 큰 죄악을 나라는 존재의 자궁 속에 이미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구태여 챙기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태반이 되고 탯줄이 되고 ‘물(物)’은 ‘욕심(慾)’의 양분을 받아먹는다. 공염불을 늘어놓는다. 이미 그것은 정해진 바다. 물이 애초에 높은 곳에서부터 낮은 곳으로 흐르는 성질의 것이라는 진리는 이미 중학교 때 유난히 땀이 많이 흐르던 과학 선생님에게 배웠던 바다. 철통같은 과학적 진리를 거스르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억지로 물길을 돌리고 아래에서부터 위로 퍼 올리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대로 흐르게 놔두는 것이 애면글면 힘쓰지 않아도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내가 쓴 것은 주로 물에 대해서였다.”
“야에코가 내게서 물을 빼앗아버렸다.” (p.64∼65)
소설 속 ‘나’는 별 볼일 없는 사내다. 바다가 있고 강이 있는 조그만 시골 마을, 쿠사바에 나고 살았다. 평생을 뱃일로 가정을 꾸린 아버지와 병으로 몸져누운 어머니, 유령 같이 집 안을 떠도는 조부, 형과 형수, 동생……. 아버지의 기대를 안고 형제 중 유일하게 4년제 대학을 나왔지만 별 볼일 없이 집에서 지내고 있는 둘째 아들이다. 그런데 ‘나’는 죽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여기에 머물고 있다.”
“들개조차 가까이 오지 않는 깊은 대나무숲 속에, 녹나무 고목에 기댈 듯이 서 있는 오두막에 있으면서, 나는, 건너편 기슭 주민의, 때에 따라서는 가족의 목소리와 생활하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p.22)
나는 죽었다. 25년을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생각 없이 흘러가다 쿠사바로 이르렀다. 5년을 외딴 오두막에서 살았다. 일부러 물길을 내어 물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수천 년, 수만 년을 그대로 흘러갔을 물의 흐름을 거슬렀다. 그래서 ‘원죄(原罪)’를 얻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래 전에 땅이 솟고 하늘이 무너져 바다가 호수가 되고 지축이 구름이 되던 때처럼 덩그러니 대양의 품을 벗어나 어느 시골 도시 석호(潟湖)가 된 것처럼 동떨어진 오두막에 유폐되었다. 나는 떠나지 못한다. 황홀한 델릴라의 유혹에 넘어가 머리카락이 잘리고 두 눈이 뽑혀 양손에는 청동족쇄를 찬 채 하릴없이 거대한 맷돌을 돌리는 노리개가 된 삼손처럼. 삼손이야 이방 신전의 기둥을 무너뜨려 결국 시원한 복수라도 했지만 쿠사바의 어부의 둘째 아들인 ‘나’는 그냥 죽어 버렸다. 죽고 나서도 쿠사바를, 가족을 떠나지 못한다. 물이 증발해 수증기가 되고 구름에 섞여 비가 되어 다시 내리는 것처럼 끝없는 시작과 끝의 착시현상의 감옥에 갇혀 있는 꼴이다.
나는 내 여동생이 낳은 아이의 아버지다.
“야에코는 여자고, 나는 남자다. 우리 둘 사이에 흐르고, 불탔던 것은, 순수하고 맑은 물과 불꽃이었을 뿐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실제로는 나뿐일지도 모른다. 쿠사바 마을의 물은 훨씬 전에 나를 용서했고, 우리 가족 또한” (p.158)
근친(近親)의 상간(相姦)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황불로 인해 순식간에 폐허가 된 소돔과 고모라를 피해 살아남은 롯과 그의 두 딸은 인류 최초로 근친상간을 저지른다. 핏줄을 잇기 위해 핏줄을 더럽힌 것이다. ‘물(水)’을 흐르게 하기 위해 ‘물(物)’에 대한 ‘욕심(慾)’을 가중시켰다.
‘나’는 여동생 ‘야에코’와 유폐된 오두막에서 ‘사통(私通)’한다. 사방으로 통하고(四通) 팔방으로 닿아있어(八達) 막힘이 없어야 하는데, ‘나’와 ‘야에코’의 ‘사통(私通)’ 그렇지 못했다. 자연스레 흐를 수 없는 결말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들개조차 거들떠보지 않는 허름하고 초라한 오두막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의 물(物)은 쿠사바의 물(水)을 벗어날 수 없다. 더군다나 도무지 애를 써도 애가 들어서지 않는 형과 형수에게도, 눈만 껌벅이는 채 누워만 있는 귀신같은 어머니에게 그건 못할 짓이다. 결국 ‘나’와 ‘야에코’의 짓거리도 들켜버리고 말았다.
죄가 있으면 벌이 있고 악이 있으면 선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죽어버렸다. 마치 장자가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는 꿈속에서 도를 발견한 것처럼 한 번의 꿈같은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나’는 과연 살아 있는지, ‘나’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내’가 살고 있는 쿠사바의 물은 흐르고 있는지 공식에 맞춰 풀어내듯 시원스런 답을 얻지 못한다.
‘나’는 스스로 나의 ‘죄’를 사했다. 처벌을 죽음으로 대치했다. 여전히 쿠사바의 물을 떠나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돌 듯 마냥 나비날개짓뿐이다.
애를 쓰며 나와 야에코의 사통(私通)을 정화시키려 하지만 어쩌면 나를 용서한 것은 유일하게 ‘나 자신’밖에 없을 수도 있다. 내 가족도, 쿠사바도 나와 야에코를 용서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결국 비겁하게 욕심과 본능의 끄트머리를 끝까지 놓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강바닥의 깊은 구덩이랑 대나무숲 속의 쓰러져가는 폐옥에서 몸과 마음을 갉아먹던 5년 사이에” (p.33)
비겁한 변명.
“쿠사바 마을의 물이 따뜻해져 간다.”
“쿠사바 마을에 일몰이 다가오고 있다.” (p.52∼53)
물은 따뜻해져 가는데 일몰이 다가온다. 시적 비유가 절묘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비겁하다. 여전히 ‘쿠사바는, 쿠사바만은 나를 용서했을 것이다.’라는 최면을 건다. ‘나’의 끝없는 재귀순환은 결코 쿠사바와 가족을 벗어나지 못한다. 야에코와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미 나는 죽었지만 여전히 끝나지 않는 일몰을 맞아야 한다. 언제 멈출지 알 수 없는 끝을 또 다시 맞이한다.
“나는 쿠사바 마을의 모든 것을 선명하게 감지할 수가 있다. 한창인 봄에 잠겨 있는 나의 쿠사바 마을은 지금, 막 태어난 아기처럼 따뜻한 비에 덮여 있고, 초산을 마친 지 얼마 안 되는 어머니처럼 부드러운 물소리에 싸여 있다. 모든 빗물은 강으로 모여, 빨간 다리 밑은 빠져나와, 세 바퀴 큰 물레방아를 돌리고, 깊은 대나무숲 곁을 천천히 흘러간다. 모든 물은 잠자고 있는 사람들의 가슴속을 흘러, 악몽과 슬픔의 잔재를 씻어내고, 그리고 망망한 바다를 향해 조용히 조용히 내려간다.” (p.267)
해결되지 않고 끝나지 않은 것들이 강으로 모여 든다. 버려진 ‘물(物)’들이 하나의 ‘물(水)’로 모인다. 누가 버렸는지, 누가 얼마만큼 지저분하게 분탕질 쳤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 그대로, 그 날것 그대로 모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저기에서 모여 든 물은 결국 한 곳으로 모인다. 조금 더 너른 품을 가진 곳으로 모인다. 계곡 구석에서 지류 저 구석에서 낮고 낮은 늪에서 조금씩, 조금씩 모여 든다. ‘어서 모여!!’라고 호각을 불지 않아도 ‘에~엥~!’ 확성기 사이렌을 울리지 않아도 저절로 모여 든다. 결국 그것밖에 없는 것일 테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이 당연한 것이다. 조금 더 너른 품은 조금 더 너른 품으로 흐른다. 대지를 적시고 영겁 같은 시간을 흘러 와 그 자리에 박힌 모래와 바위를 쓸어내린다. 굽이굽이 흐르고 흘러 한 번도 본 적 없는 바다로 향한다. 끝도 시작도 모호하고 경계와 깊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그곳으로. ‘나’의 원죄(原罪)는 여전한 사실이지만 오늘도 어제처럼, 내일도 오늘처럼 그렇게 쿠사바를 휘돌고 휘돌 쿠사바의 물은 또 다른 ‘나’를 품을 준비가 이미 되어있다.
이 책 「물의 가족」을 쓴 사람은 마루야마 겐지다. 우연히 트위터에서 “일본의 김훈, 마루야마 겐지”라는 글을 보고 무작정 이 책을 샀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김훈이고 가장 좋아하는 글이 김훈의 글이다 보니, 잴 것 없이 읽었다. 마루야마 겐지의 글을 처음 접했는데 비록 김훈의 글을 처음 접했을 때만큼의 낯섦과 충격은 아니었지만 나는 좋아하지 않지만 한국 독자들에게 유별나게 인기가 많은 무라카미 하루키나 요시모토 바나나의 글과는 분명히 다른 차원의 글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나는 하루키나 바나나의 글은 도무지 이해되지도 뭔가 감상이 되지도 않는다. 그들의 감성이 내 가슴이 와 닿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마루야마 겐지의 건조하고 직설적인, 그러면서도 치밀하고 정확한 묘사와 전개가 더 좋다. 에둘러 표현하거나 알아듣지 못하는 묘사는 머리만 아프다.
“야에코는, 먹고, 마시고, 떠든다.” (p.46)
“당장 동생은 밀어 따위에 발을 들여놓고 있고, 실제로 누이동생은 저런 식으로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형 부부한테는 아직 아이가 없고, 생길 전망도 없을 것 같다.”
“어머니는 졸고 있다.” (p.87)
일본 문단 내에서 리얼리즘 작가로 분류되고 있는 마루야마 겐지의 글은 편하게 읽히지 않는다. ‘설마 이런 일이 현실에?’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얼마나 많이, 그리고 자주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실재하는지 알 수 있다. 마루야마 겐지는 에두르지도 서두르지도 않는다. 그저 담담히 상황을 직시한다. “야에코는, 먹고, 마시고, 떠든다.” 라는 직설적인 문장에 숨이 막혔다. 물은 흐르고 일상은 반복되며 삶은 유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지가 개벽할 소용돌이 속에서도 야에코는 먹고 마시고 떠든다. 또한 그런 야에코를 보는 나머지 가족들, 특히 어머니는 마지막 숨을 두 눈동자에 머금은 채 그저 끔뻑거리기만 하는 그 두 눈으로 “졸고 있다.” 둘째 아들과 야에코 사이의 짓거리를 알게 되었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가만히 누워 있지만 잠은 온다. 잠은 자야 한다. 어제도 흐르고 오늘도 흐르고 내일도 흐르는 쿠사바의 물(水)처럼 잠을 자야 삶을 이어 갈 수 있다. 그렇게 살아내는 것도 사는 것이다.
마루야마 겐지의 글은 무겁다. 물의 이미지를 반복이라는 개념으로 작품 전개의 중요한 도구로 삼는다. 언뜻 비슷해 보이는 문장과 단어가 반복되지만 같지는 않다. 어제 본 강물이 오늘의 그것과 비슷해 보이지만 결코 같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제의 물이 있고 오늘의 물이 있다. 찰랑찰랑 물결치는 것이 아니라 큰 바위를 시원하게 휘돌아 급류로 파고드는 물살과 같이 무겁지만 힘차다. 이 책을 다 읽기 전 그의 다른 책을 구입했다. 마루야마 겐지의 글을 더 읽고 싶다.
“한 작가가 지니는, 혹은 지키는 삶의 자세는 가시적이다. 개중에는 투명하다 할 정도로 단순한 선으로 획이 그어지는 존재양식이 있다. 마루야마가 바로 그런 작가이다. 단선철로 같은 궤적을 반복운동으로 채운다.
독자가 편지를 보내와도 어지간해서는 답장을 안한다. 전화도 안 받는다. 찾아와도 얘기 상대 노릇은 안한다. 나는 작가이고, 그들은 독자이다. 둘 사이에는 소설만이 존재한다. (「사인회에서의 사인펜」)”
단선철로 같이 단순하고 투명한, 그렇지만 그 철로의 무게만큼 무겁고 정확한 그의 글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