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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위증 1 - 사건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9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평점 :
불협화음만큼 듣기 싫은 소리는 없다. 각자 제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결코 아름답지도 조화롭지도 않은 모양새가 우습기만 할 뿐이다. 더 심각한 것은 불협화음을 만들어 내고 있는 당사자들은 각자가 그 불협화음의 주인공임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경우는 꽤 자주, 흔하게 보게 된다. ‘나는 아니야~’라는 생각은 누구나 하고 있는 것이다. ‘쟤 때문이야. 저 사람 때문이야.’라고 결론부터 내버리면 뒷일은 쉽다. 이후에는 피아(彼我)식별만 눈치껏 하면 된다.
삐걱삐걱 대는 소리가 익숙할 만큼 삐걱대는 세상이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관계에서, ‘나’라는 존재 안에서조차 삐걱대고 있다. ‘언제 제대로 한 번 굴러가 본 적이 있나?’싶을 정도로 이런 상황에 적응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 세상이 완전하지 않다고 믿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광적인 원리주의 종교 집단에서도 가질 수 없는 확고한 믿음이다. 다들 소망하는 바와 그 소망하는 바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절망의 양가성 (Ambivalence)을 내포한다.
미야베 미유키는 이러한 극단적인 사회적 병리를 문학으로 표현해 낸다. 그녀의 이전 작품 중 「모방범」과 가장 닮은 작품이 바로 「솔로몬의 위증」으로 보인다.
작가는 극단으로 치닫는 사회의 병리를 에둘러 표현하지 않는다. 도무지 붙을 것 같지 않는 패를 보자마자 화투장을 엎고 판에서 이탈하는 선수의 가부좌를 풀지 못하게 한다. 직접 판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끝까지 지켜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은 불편하다. 어려운 표현이 많거나 전문적인 용어로 가득 차 있어서 어렵고 불편한 것이 아니라 집채만 한 거울에 비친 나와 당신의 민낯을 그대로 활자로 투영해 내기 때문이다.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나와 당신이 겪었던, 겪고 있는, 겪을 양가적으로 병리된 세상을 그대로 보여 준다. 날 것 그대로.
작가가 이 작품을 쓰기 위해 구상하고 연재한 기간은 고스란히 그녀의 몫이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작품은 이제 독자들의 몫이다. 같은 사진 한 장을 보고도 각자의 감상이 다른데 이렇게 방대한 양의 책은 오죽하겠나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을 내 방식으로 파헤쳐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은 나와는 다른 ‘당신’도 그럴 것이다.
소설의 배경의 되는 1990년대 초 일본의 사회·경제·문화적 배경이 2013년 한국의 그것에 그대로 겹쳐진다. ‘그러니까 아직도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했잖아!!’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어디까지나 이 책은 픽션이니까. 소설이니까. 다만 1990년대 초 일본의 상황과 2013년 한국의 상황이 어떻게 이렇게 유치원생이 하는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을까 하는 의구심은 가득 하다. 뭐, 이것 또한 내 몫이라 하면 할 말은 없지만.
나도 당신도 학교를 다녔다. 아주 드물게 대안 학교라는 특수한 교육을 받거나 검정고시를 통해 교육기간을 이수한 사람도 있겠지만. 보편적인 경우에 학교를 다녔다. 학교에 대한 경험과 추억이 혼재한다. 나에게 학교는 추억보다는 경험이 많았다. 별로 추억할 아름다운 기억이 없다는 것을 에둘러 말했다.
학교와 학부모와 학생이 만들어 내는 불편하고 절망적인 불협화음 속으로 들어가 본다.
학교
“모리우치 선생님은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된다. 선생님은 겐이치처럼 눈에 띄지 않는 학생에게 관심이 없으니 겐이치를 알지도 못한다.” (1권, p.74)
내가 다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교실에는 최소한 50명이 넘는 아이들로 가득했다. 고등학교 때는 에어컨이 있었지만 3년 내내 단 한 번도 가동되지 못했다. 그 에어컨은 살아있는 시체였다. 아! 장학사인가 교육청에서 인가 양복 입은 꼰대들이 우르르 몰려 온 적이 있는데, 그때 한번 가동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이 오기 며칠 전부터 우리는 단 한 번도 맞아보지 못한 시원한 바람을 쌩쌩 내뿜어줄 것 같은 필터와 에어컨 내부 장기를 열심히 청소했었다. 50명이 넘는 우리들은 번호로 불렸다. “야! 몇 번! 이거 풀어 봐.”, “몇 번! 나와~!” 아! 물론, 공부 잘하는 몇 명의 아이들과 전교에서 이름난 불량학생 몇 명의 이름은 정확하게 불렸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도쿄의 한 공립학교에서 죽은 가시와기 타쿠야는 별로 존재감이 없는 학생이었다. 여리고 자신만의 생각에 잠긴 그를 애써 무시하기도 하고, 아예 관심이 없기도 하고, ‘어린 철학자’로 마음속으로만 추종하기도 했다. 그런 타쿠야가 죽었다.
“선생님도 완벽하지 않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전부 알지는 못한다.” (1권, p.580)
교사가 완벽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매일 출석한 콩나물시루 속 50명의 아이들 중 그 누구도 교사에게 ‘완벽’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나를 좀 알아줘요’
타쿠야의 죽음으로 도쿄3중학교는 멘붕 상태로 빠진다. 인자하고 합리적일 거라 생각했던 쓰자키 교장과 다카기 학생주임은 결국 ‘학생의 죽음’을 ‘별 것 아닌 일’로 덮어버리려 했다. 그런 시도들이 하나같이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아 일이 커지고 결국 학생재판 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다.
“머리를 굴려 함정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후지노 료코가 평소 구스야마 교이치라는 교사의 성격과 특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날 얕보지 마라, 난 선생이니 너희보다 높은 사람이라고 입만 열면 으스대는 남자에게는 강경책이 잘 먹힌다.” (3권, p.48)
아내의 친구 중 동사무소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다. 동사무소 직원들이 가장 상대하기 싫어하는 민원의 직업이 <교사>라는 얘기를 듣고 목이 부러질 듯 끄덕이며 공감했다. 일단 민원을 하면서 동사무소 직원을 가르치려 한다는 것이다. 사실 나도 최근까지 관계가 굉장히 껄끄럽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도 교사다. 자기 말이 다 맞다고 결론 내리고 난 뒤부터는 대화가 아니라 가르치는 것이다. 오랜 기간 그렇게 교실에서 가르쳐 왔던 것처럼 그렇게 가르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물론, 아닌 교사가 더 많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나는 내 얘기를 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만난 교사들 중 대다수가 그런 교사였다. 존재감 없는 겐이치와 타쿠야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모리우치 선생과 같은 교사들이 대부분이었다. 모두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이 그랬다.
2000년을 넘기며 한국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학교문제’의 경우, 학교는 늘 방어하고 숨기기에 급급했다. 교육정책이라는 것이 동전 뒤집는 것만큼 쉽게 바뀌는 국가이다 보니 학교는 늘 ‘경쟁’ 메커니즘을 고육지책으로 내걸고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좋은 성적으로 좋은 상급 학교에 진학시키는 것에만 혈안이 되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 학교에서 왕따니, 학교폭력이니, 자살이니 하는 문제들은 없어야 한다. 또 다른 타쿠야가 새벽 밤을 가르며 자신의 몸을 내던졌는데도 학교에서는 ‘없는 일’, ‘없어야 하는 일’이 되었다.
학교는 콘트라베이스다.
무슨 꿍꿍이인지 무겁고 어둡다.
학부모
타쿠야의 죽음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있던 간바라 가즈히코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하고 자살했다. 간바라는 타 중학교 재학생임에도 학생재판에 참여하여 3중학교 최고의 문제학생 오이데 슌지를 변호한다. 그 변호인단의 조수, 처음 타쿠야의 시신을 발견한 노다 겐이치는 부모를 살해하려 했다. 타쿠야의 형은 부모의 일방적인 편애를 견디지 못해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조부모와 산다. 고발장을 만들어 사건의 국면을 급격하게 전환시킨 미야케 주리의 어머니는 딸의 아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모두가 싫어하던 주리의 유일한 친구가 되었던 아사이 마쓰코의 어머니는 그저 착한 사람일 뿐, 딸의 죽음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던 오이데 슌지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에게 정답게 물어보지 않는다. 늘 몰아세우고 다그치고 지적하고 폭력을 휘두른다.
작품에 등장하는 학부모들의 모습은 가관이다. 차라리 ‘이런 부모라는 없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타쿠야의 죽음이 외부로 알려진 후 부랴부랴 차려진 학부모 회의와 이후 학생재판을 참관하는 자리에서도 학부모들은 어른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내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네 아이’의 문제라는 것이다. 타쿠야의 죽음을 가져 온 근본적인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무슨 수를 쓰든지 간에 빨리 범인을 잡든지, 본인의 자살로 결정 나든지, 어서 빨리 사건이 결론 나서 더 이상 소문나지 않고 자신의 아이가 마음 놓고 학교에 다시 다닐 수 있는 것에만 집중 했다.
내 어머니는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일을 하셨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미안하다.’는 말을 하실 때가 있다. 그 때 더 신경 쓰고 챙겨주고 뒷바라지 해줬어야 하는데……. 하는 미안함이다. 나는 어머니가 그런 말을 하실 때마다 손사래를 치며 당시 치맛바람을 일으켰던 유명한 누구누구 엄마들 얘기를 또 다시 꺼내며 대화를 급하게 마무리 한다.
내 경우를 돌이켜보면 ‘내 아이’의 문제에만 함몰되는 것이 나쁜 것이라 할 수만은 없는 문제인 듯하다. 일반적인 경우,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평균적인 교육혜택을 자식에게 시킬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내 아이’ 신경 쓰는 것도 벅차다. ‘네 아이’까지 신경 쓸 여유가 도저히 없다. 교내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 것은 애석하고 마음 아프지만 ‘내 아이’가 그것 때문에 공부하는데 방해가 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어야 한다. 그래야 ‘내 아이’만은 지킬 수 있을 테니까. 슬프지만 현실이다.
학부모는 비올라다.
담담한 듯 여리고 애처롭다.
사회
“최근 몇 년간 호경기를 넘어 ‘초’호경기라 할 만한 경제상황은 필연적으로 주택 건축 러시를 불러왔다. 사람들은 1960년대의 ‘내 집 마련’ 열풍과는 또 근본적으로 다른, 훨씬 호화로운 열기에 들떠 있다.” (1권, p.335)
일본의 버블경제는 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무너졌다. 이 작품의 배경은 그 직전이다.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고 있지만 아무도 모른다. 천년만년 호황이 계속될 줄 알았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문제쯤은 가볍게 여겨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을 정도의 호황이었다. 모두가 행복한 듯 했지만 모두가 병들어가고 있었다.
타쿠야의 죽음 이후의 상황을 크게 휘두른 사건은 모기 기자에 의해 벌어졌다. 그의 고발 프로그램에서 타쿠야의 죽음과 제3중학교를 다루면서 성장과 발전, 희망으로 질주하던 폭주기관차의 엔진 하나를 파괴했다. 모두가 장밋빛 희망만을 부르짖을 때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는 이미 중병(重病)이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되어 있었다. 모기는 그것을 취재하고 폭로했다. 그로 인해 애꿎은 사람이 피해를 보기도 하고 사건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했지만 최소한 그는 불의한 것, 잘못된 것을 파헤치고 알리려 했다. 그가 출세를 위해, 명성을 위한 의도로 이 문제를 취재했다 하더라도 그에게 무조건적인 비판을 가할 수는 없다. 모기 기자와 같은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아무도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 말하지 않고 불의한 것에 대해 고발하지 않는 다면 그 사회는 썩은 물과 같다.
아이들이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잘못된 관습과 행태를 아무런 비판적 사고 없이 답습하는 사회에서 희망을 찾기란 어렵다.
“학교는 사회의 필요악이야. 하지만 지금 같으면 ― 그리고 이대로 두면 미래에는 ‘필요’가 빠지고 그저 ‘악’으로 전락할 거야. 사회악으로.” (2권, p.300)
사회는 드럼이다.
드럼이 박자를 놓치면 연주는 완전히 망가진다.
아이들
“아무도 가시와기 다쿠야를 걱정하지 않았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같이 학교에 가자고 하지도 않았다. 어떤 아이도. 어떤 학생도.” (1권, p.114)
“내용은 모두 엇비슷했다. 주리를 헐뜯고 욕하는 것들이다. ‘거짓말쟁이’, ‘여드름괴물, 죽어버려’, ‘너 때문에 우리 학교 평판이 엉망이 됐어. 지망학교에 못 들어가면 다 네 탓이야.’, ‘재판에서 유죄를 받을 사람은 바로 너야.’” (2권, p.662)
“그게 누구 얼굴인지 알았어. 내 얼굴이다. 주리는 생각했다. 가키우치 미나에의 얼굴은 나와 똑같다. 그것은 거짓말쟁이의 얼굴이다. 거짓말을 해서 남에게 상처 주고 자신도 상처받는 인간의 얼굴이다.” (p.508)
아이들은 불쌍하고 무섭다.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학교와 부모와 사회와 어른의 책임이다. 그 책임에서 발을 빼내려 발버둥치고 싶지 않다. ‘우리 때는 말이야~’라며 꼰대질 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모른 채 하고 싶지도 않다.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솔직한 심정이다. 얼마 전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어떤 사이트에 몰려드는 아이들에게서는 불쌍하다 못해 무서웠다. 아무도 그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숨겨진 욕망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가장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것을 찾았다. 그곳에서는 내가 가진 고민과 문제쯤은 익명성에 묻어 버릴 수 있었다. 당연히 편할 수밖에 없다. 이유 없이 불특정 대상에게 폭행을 가하고(당연히 자신보다 훨씬 어리고 힘없는 아이들에게) 그것을 촬영해 게시판에 올리거나 중범죄인 강간과 성폭행에 대한 행동지침이나 후기 같은 말세적인 내용의 글까지 게시판에 올려 베스트 게시물이 되는 등 가학과 피학이 함께 뒹구는 시궁창에 기꺼이 자신의 영혼을 내던졌다.
무작정 그 아이들, 그 사이트를 욕할 수 있을까? 이렇다 할 대안하나 마련하지 못한 채 무조건 ‘나쁘다.’, ‘안 좋다.’ 하는 것은 무책임이다.
하지만 그 아이들이 무섭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약간의 쾌감으로 찾아간 곳에서 그들을 끝을 생각하지 않고 폭발한다. 악의와 조롱과 선동에 그대로 넘어간다. 아이들을 무조건 ‘피해자’라 할 수 있을까? 그들은 피해자 겸 가해자다. 피해자 겸 용의자다.
작품에 등장하는 아이들에 대한 예민하고 감수성 넘치는 작가의 묘사가 사실 이 작품의 묘미다. 중학생 아이들을 합숙을 시키며 그대로 카메라에 영상으로 담은 것 같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아이들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치열한 게임을 펼치고 있었다. 어느 한 쪽을 특정해 비판하거나 추종할 수 없다. 매 순간 긴장과 스트레스의 연속이다.
다만 “누군가 내 마음을 좀 알아줬으면 좋겠어……. 누군가 내 얘길 좀 들어줬으면 좋겠어…….”
아이들은 데쓰메탈 밴드의 보컬소리다.
그 소리가 무섭다. 그렇게 그로울링 하다가 성대가 없어져 버리는 것은 아닌가 불쌍하고 가련하다.
콘트라베이스와 비올라와 드럼과 데쓰메탈 보컬이 각자 최선을 다해 합주를 하는 데 불협화음이다. 도무지 맞춰질 것 같지 않다. 몇 주 동안 합숙을 해도 맞춰지지 않을 것이다. 록, 클래식, 메탈이 크로스오버 되는 세상이지만 학교와 학부모와 사회와 아이들은 결코 사위일체(四位一體)되지 못할 것이다.
2000년 하고도 10년이 지난 시간 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학교문제’는 말 그대로 ‘문제’였다. 왕따, 학교폭력, 체벌, 교권붕괴, 학생인권, 무상급식 등등. 도무지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역사 상 가장 지혜로운 판결을 내렸다는 솔로몬 대왕조차 위증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 문제를 꼬여 있다. 각자의 방식대로, 각자의 악보대로 매듭을 지은 채 뒤섞이다 보니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지 조차 막막하다.
콘트라베이스 연주자가 조금 더 밝은 음을 내고 비올라 연주자가 조금 더 묵직한 음을 내고 드럼 연주자가 인간 메트로놈이 되어 그 어떤 변주에도 박자를 놓치지 않아야 하며 데스메탈 밴드의 보컬은 그로울링을 자제하고 조금 더 악기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런 노력이 선행되지 않는 이상 조화롭고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내는 일은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1,2,3권 통합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