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얼굴의 예수 - 김용민, 인간 예수를 좇다
김용민 지음 / 동녘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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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당선 이후 희한한 일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중 유독 불편했던 것은 박정희 추모예배였다. 물론 대통령이나 되는 사람이 그것을 지시하거나 종용했을 리는 만무하고 알아서 자발적으로 박정희 추모예배를 실행했을 것이 틀림없다.

추모 예배에는 박정희에 대한 찬양 발언이 한가득 쏟아졌다고 한다. 박정희로 인해 대한민국이 축복을 받았고 가난에서 벗어났다고 하고 어떤 목사는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도 무조건 순종하라며 독재했다. 우리나라도 독재해야 한다.”라는 비이성적이고 비성경적이며 비역사적인 발언도 했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일부 그릇된 사람들이 박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 대통령을 괴롭히고 있지만 그런 방해를 이겨 내고 박근혜 대통령이 큰일을 해낼 것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이들은 예배 후 박 전 대통령의 사진 앞에 헌화까지 했으며 박정희 추모예배를 준비한 박정희대통령추모예배준비위원회는2017년 박정희 대통령 100주년 탄신일까지 매년 추모 예배와 준비 모임을 이어 갈 계획이라고 했다고 한다.

자,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예수적인가? 교회적인가? 나는 기독교인이다. 나름 이성과 합리와 상식을 가지고 위태하지만 지금껏 내 신앙을 고수하고 확립시켜 왔다. 그런데 내가 믿는 기독교와 저들이 믿는 기독교가 과연 같은 것인지 모르겠다.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박정희를 추도하고 추모하며 내 기준으로는 거의 신격화하는 것에 다름없는 행위를 하는 것이 예배인가? 제사인가? 나는 구분하지 못하겠다.

이 어이없고 황당무계한 촌극에 대해 네티즌들은 비난을 폭주했다.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말이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어떤 논평을 내놓았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그냥 개인적 일탈로 치부하고 입 다물고 있으면 되는 문제인가?

이 촌극은 한국 기독교의 병든 모습을 만천하게 드러내는 단면이다.

 

 

“나치 정권 당시 90퍼센트에 이르는 독일 교회는 나치의 독재와 혹세무민, 전쟁 범죄, 학살에 침묵했다. 오히려 하나님이 영적인 구원을 위해 ‘예수’를 보냈다면, 사회·경제적 구원을 위해 ‘히틀러’를 보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p.161)

“박정희 추모예배는 상징적이다. 그것은 한국 기독교 보수 기득권 세력의 숨겼던 발톱이자 민낯이었다. 마음속에 숨은 본성을 드러낸 것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이 좋으며, 이는 하나님의 방법과 다르지 않다고 떠벌릴 지경이다.” (p.211)

 

이 책 「맨얼굴의 예수」를 펴낸 김용민씨는 이 촌극을 일종의 상징으로 인식한다. 노무현 정권 시절 사학법 개정을 두고 그렇게 한나라당과 한통속이 되어 난리를 치던 기독교계, 이명박 대통령 후보를 노골적으로 지지하고 투표를 종용하던 기독교계가 날개를 단 것이다. 숨겨진 발톱으로도 모자라 마음껏 하늘을 나는 날개를 달아줄 꼴이라는 시각이다. 동의한다. 아찔했을 것이다. 그들이 지지하고 그들의 텃밭을 자처하는 기독교계에서는 김대중,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고 한나라당이 야당으로 전락하는 일이 지옥문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무서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 위대한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된 지금, 그들은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다. 영원히 이들과 함께 무소불위의 권력 편에 서는 것. 그것이 한국 교회가 그토록 욕을 먹고 비판을 받고 있는 주된 이유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그런 목소리에는 귀를 닫기로 한 것일 테다. 물론, 박정희 추모예배를 한 사람들이 한국 교회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다. 자신들도 민망했는지 애초 추모예배에 참석하기로 했던 사람들이 참석하지 않기도 했고 참석하지도 않았는데 이름이 올라간 사람들은 항의를 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공공연하게 역사적으로 비판을 받는 박정희를 추모하고 그를 신격화하는 예배를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다는 것에 나는 주목한다. 그 용기가 그들과 내가 함께 보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예수의 가르침과는 반목하기 때문이다. 악과 싸우고 정의를 위해 힘쓰고 고아와 과부로 대변되는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고 사랑하며 그들을 끌어안아야 하는 본질적 교회의 모습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이 모든 범죄적 행위의 배경에는 범죄를 묵인하고 심지어 동조하기까지 하는 교인들이 있다." (p.151)

 

박정희 추모예배에서 쏟아진 말 중 맞는 말도 있다. 박정희 통치기간 중 경제발전과 더불어 교회의 급격한 성장도 있었다는 것. 경제발전이 되면 그에 비례해 교회성장이 동반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박정희는 독재를 했다. 시민들을 억압하고 짓눌렀다.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맞설 수 없는 강력한 독재권력 앞에 존재론적 허무를 느껴 신에게 귀의했다는 논리인가. 그렇다면 교회는 독재를 행한 박정희를 옹호했거나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모른 체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정치와 교회가 결탁하면서 사람들이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종교적인 것에 집중하도록 방조했다면 그것은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가.

한국 교회의 교인들은 박정희와 전두환 독재를 경험하면서 동시에 개별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했다. 그래서 정치지도자의 비위와 잘못에 대해 함구하는 것이 유전이 되어 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더군다나 교회 지도자들의 비위와 잘못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입을 다물고 더 나아가서는 그 교회와 교회 지도자의 비위와 잘못을 파헤친 언론사와 언론인에 대해 무차별적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교회 돈을 횡령하고 불륜을 저지르고 일반인들의 공분을 사는 대형 건축을 실행해도 교인들은 그저 가만 있는다. 혹시 교회 내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들리면 과감하고 신속하게 잘라낸다. 그리고 다음 주 예배 시간에 교회 의자에 앉아 그 목사가 하는 말에 아멘으로 답한다.

내가 다니는 교회도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교회다. 대부분 지역의 중·대형 교회가 그렇듯(서울과 수도권의 일부 중·대형교회를 제외하고) 노년층 교인이 많다. 이제는 더 이상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버지 어머니가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무조건 교회에 다니는 젊은 교인은 많지 않다. 그저 관성대로 습관대로 교회에 다니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자연스레 교회에 발길을 끊는다. 예배 시간이 되어 예배당 뒷자리에 앉아서 앞을 보면 교인들이 거의 노년층이다. 점점 유럽의 교회를 닮아가고 있는 듯하다. 각 교회마다 다음세대를 준비하고 다음세대를 위한 대책을 내놓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일 경우가 많고 더 심각한 것은 왜 젊은이들이 청·장년층이 교회를 떠나는지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교회 자체가 병들어 있으니 더 이상 젊은이들은 교회를 찾지 않는다. 매번 똑같은 얘기가 울려 퍼지는 예배당 안에서 참된 안식과 위로를 받지 못한다.

 

 

“출석이나 봉헌 또는 교회 봉사를 하지 않으면 무슨 대역죄를 저지른 양, 지옥에 갈 것처럼 교인들에게 죄의식과 공포감을 불어넣는다. 결국 신을 빙자한 종교 산업의 종사자가 되는 것이다.” (p.7)

 

이런 식의 교인 확보 전략도 더 이상은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지금 교회들을 보면 다음 세대에 대한 전략이 전무한 것 같다. 지금 안정된 것처럼 보이는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에 급급하다.

 

 

“우리가 기적에만 주목하고 몰두하면, 이 이야기의 진짜 뜻을 놓칠 수 있다. 오병이어의 진의는 굶주린 백성의 마음을 헤아렸던 예수의 측은지심이다.” (p.120)

 

일반인도 대부분 알고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두고 신앙의 정체성에 따라 다양한 분석과 자기화를 한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들은 예수가 행한 당연한 기적이라 생각하고 성경의 우화와 예시를 상징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선행을 보고 그 곳에 모인 오천 명의 사람들이 각자의 방법대로 나눔을 실천한 나눔의 기적으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다. 책에서 소개하는 성서학의 국제적 권위자인 조철수 교수는 최초 아람어로 쓰인 성경이 지금 전 세계로 퍼져 나간 헬라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오역이 발생해 다섯 명의 천부장(당시 계급 중 하나)이라는 단어가 오천 명이라는 단어로 잘못 쓰였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김용민씨의 말대로 자신을 따르는 사람이 다섯이었든 오천이었든 그 굶주림과 아픔을 그대로 자신의 것으로 감싸 안은 예수의 마음이다. 한국의 샤머니즘과 결합된 기복신앙이 깊이 뿌리내린 한국 교회는 예수의 기적에 집중한다. 신약성경 뒷부분 바울의 서신서들에 서도 어김없이 기복을 추려낸다. 그것이 간편하고 이해하기 쉽다. 예수를 잘 믿는 것보다 교회에 잘 출석하고 목사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잘 따르며 열심히 봉사하고 빠짐없이 헌금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 생각한다. 심지어 교회 목사들 중에서도 그렇게 설교하는 이들도 있다. 병들어 있는 교회에서는 병들고 값싼 복음만이 울려 퍼진다. 예수가 행한 기적의 본질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따져 보지 않는다.

 

 

“누미노제(Numinose) - 인간이 거룩한 존재 앞에 섰을 때 자신이 진실로 피조물임을 존재론적으로 체험하는 것 - 여기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역사 비평적 성서 읽기와 치밀한 신학공부” (p.115)

 

한국교회사에서 최초의 설교 비평을 시도했다는 평가를 받는 정용섭 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이 한 말이다. 신비주의적이고 기복적인 것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역사 비평적 성서 읽기와 치밀한 신학 공부.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 젊은이들조차 성경을 비평적으로 보지 않는다. 성경을 잘 읽지도 않을뿐더러 다른 신앙 서적도 잘 읽지 않는다. 그냥 습관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출근하거나 학교에 가는 것처럼 일요일에 일어나 씻고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성경을 비평하는 것, 설교를 비평하는 것 자체를 죄악시했다. 인간에게는 전적인 믿음만 강조 되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성경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고 교회와 사회를 들여다 볼 수 없었다. 예배당 안에서 울려 퍼지는 설교는 일요일을 제외한 6일을 살아가는 사회의 그 어떤 것에도 적용될 수 없는 교회 안의 울림일 뿐이었다. 일요일에 말끔하게 차려 입고 출석한 교회에서는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울며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기도 하며 간절하게 아멘하기도 하지만 월요일의 일상은 전혀 변화가 없고 일요일의 감격이 전혀 미치지 않는 껍데기 신앙이 반복되는 것이다. 아예 “나는 전적으로 교리를 믿고 교회를 옹호한다.”라는 생각이라면 더 성경을 읽지 않아도 공부하지 않아도 크게 상관은 없다. 열렬하고 충실한 교인이 될 수 있다.

 

 

“공부하면서 예수를 믿자고 말하고 싶다. 많은 이들은 왜 하나님의 자신에게 지성과 양심을 주었는지 고찰하지 않고, 덮어 놓고 믿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p.213)

 

그러나 병들어가고 무너져가는 한국 교회를 회생시킬 수는 없다. 가라앉는 배 위에서 여전히 구슬픈 찬송만 부르고 있는 꼴이 될 것이다. 김용민씨의 말에 동의한다. 예수 믿는 사람들,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 특히 젊은 교인들이 공부를 좀 했으면 좋겠다. 믿음을 주셨다면 당연히 지성과 양심을 주신 것이 분명한데도 교회와 성경, 믿음에 대해서는 지성과 양심을 적용하지 않는다. 개독, 개독 소리에 움츠러있기만 할 뿐 나서서 해명하지도 더불어 나는 아닌 척 함께 개독이라 비아냥대지도 못한다. 자신이 없고 용기가 없다. 몰라서. 나도 잘 모른다. 성경을 몇 번 읽고 신앙서적은 물론 인문학·사회과학·철학 책을 많이 읽어도 나는 늘 내 신앙에 대해 점검한다.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성경은 읽을수록 모르겠다. 출석하는 교회가 아니더라도 내가 듣고 싶은 설교가 있으면 찾아서 듣는다. 비슷한 생각과 신앙관을 가진 친구와 자주 이야기를 나눈다. 신앙은 물론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서도 가감 없는 대화를 나눈다. 깨닫는 것도 많고 새롭게 알게 되는 사실도 많다. 찾지 않고 노력하지 않으면 신앙은 정체한다. 습관과 관성으로 출석하는 텅 빈 껍데기 신앙으로는 한국 교회의 몰락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으로 맨얼굴의 예수를 만나는 일은 더욱 요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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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사람들 - 육체파 지식노동자 김남훈이 만난 30인의 인생 필살기
김남훈 지음 / 씨네21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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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호루라기라는 고발프로그램에서 김남훈을 처음 봤다. 우락부락한 외모와 덩치에 살짝 시옷 발음이 부정확한 진행자가 낯설었다. 고액세금연체자의 집을 찾아가는 세무당국자들과 동행한 그의 모습은 마치 보디가드 같았다. 으리으리한 집에 집 한 채 값인 외제차가 2대나 있는데 세금낼 돈이 없다고 버티는 뻔뻔한 사람들 앞에서 “왜 세금을 안 내는 겁니까?”라고 말했다. 양복 입고 안경낀 전형적인 공무원들 모습을 한 세무당국자들 앞에서는 배째라는 식으로 벌렁 나자빠지던 연체자가 김남훈의 한마디가 깨갱 하며 돈을 내겠다는 서약을 하는 것을 보고 고발프로가 아니라 코미디프로로 착각하기도 했다. 찾아보니 그는 몇 안 되는 현역 프로레슬러이자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 몇 권의 책을 출간한 작가이기도 했다.

이 책 「싸우는 사람들」은 순전히 그때 호루라기에 나온 김남훈씨에 대한 강렬함 때문에 구입한 것이다. 무슨 책인지, 어떤 종류인지 찾아보지도 않고 그냥 그의 책을 읽고 싶었다.

 

책은 인터뷰로 채워져 있다. 총30명의 인터뷰어를 만난 기록이다. 한겨레에 연재한 것을 책으로 엮은 것인데 30명 중에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1/3도 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발견하고 위로와 위안을 얻었다. 무슨 말이냐고? 이 책의 제목은 ‘싸우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표현대로 육체파 지식노동자이자 프로레슬러답게 강렬한 제목을 붙였다. 그러면 이 책에 등장하는 30명의 사람들이 싸우는 대상은 무엇일까? 라는 것이 책을 읽기 전 나를 사로잡은 물음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요즘처럼 하수상한 시절 싸운다라고 하면 흔히 정부나 정권, 기득권이나 잘못된 권력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이 책에서 등장하는 사람들의 싸우는 대상은 그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한계와 속물적 본성이라고 생각 되었다. 자신의 분야에서 자신의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별다를 것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는 삶 말이다. 더군다나 그렇게 자신의 자리에서 악착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을 내가 몰랐다는 것이 더욱 감사했다. 나도 알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차피 그 나물에 그 밥일 터. 내가 모르는 그 곳에서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보다 밝고 명랑한 사회를 위해 분투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새삼 놀랍고 감사했다.

 

 

“이 책을 위해서 내가 만나봤던 사람들은 대부분 호기심과 집념을 동시에 갖춘 인물들이었다. 이명희 씨도 마찬가지다. 인간에 대한 호기심과 타인을 돕고 싶다는 선의에 대한 집념. 뚜껑을 열면 잠깐 동안 공기 중에 향기를 발산하고 그대로 사라지는 선의가 아니라 끝까지 가겠다는 집념 가득한 선의.” (p.185)

 

이명희씨는 국군 생명의 전화에서 상담관으로 일하는 사람이다. 캐나다 캘거리 대학교 심리학과 졸업하고 횃불트리티니신학대학교대학원 기독교상담 졸업했으며 상일여중 외 중·고등학교 집단상담사, 서울특별시 청소년상담지원센터 청소년동반자 상담사, 다문화상담사, 교도서 상담, 인터넷중독예방전문강사로 일했다. 22사단 병영생활전문상담관을 거쳐 현재 국방부 생명의 전화 상담관으로 일다. 외국에서 유학도 하고 잘나가는 영어강사직을 그만두고 많은 사람들이 별로 내켜하지 않는 국군 생명의 전화 상담일을 시작했을 때 주위에서의 반대 및 우려는 당연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의 일에 대한 사명과 좀 더 나아질 병영 환경에 대한 긍정적인 믿음이 있었다고 한다. 김남훈씨의 말처럼 일시적으로 생기는 호기심이 아니라 꾸준히 그 신념을 지켜갈 수 있는 용기와 선의가 동반된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누가 강요하거나 주입할 수 없는 믿음 말이다. 오롯이 내 것으로 소화하고 사명으로 발전시켜야 가능한 그 선의의 믿음. 그런 친구가 내게도 있다. 돈 안 되고 고생하는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친구다. 벌써 4년째 되었다. 나는 오로지 사명감만으로 일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어설프게 위로를 하려 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아니었다. 당연히 사명감도 있지만 그 일 자체를 즐긴다는 것이었다. 이 책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아? 그런 거 없는데요. 네. 전 그냥 재미에요. 재미. 저한테 사막은 그냥 살짝 위험한 롯데월드 같은 거죠.” (p.25)

 

2002년 사하라 사막 완주를 시작으로 고비 사막, 아타카마 사막, 남극 등의 오지 레이싱을 완주하며 국내 최초 사막 레이스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오지 레이서 유지성씨도 그렇다고 한다. 그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이것이다. ‘왜 이런 일을 하세요?’, ‘왜 오지를 선택하신 거예요?’ 멋지게 말하려고 한다면 질문하는 사람이 감탄할 정도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만다 오지성씨는 허탈하고 짧은 답을 한다. ‘재미있어서요.’ 간단하고 명료하다. 군더더기가 없다. 만약 내가 언론사 직원이어서 인터뷰를 하러 왔는데 저런 대답을 한다면 열불이 나겠지만 살짝 위험한 롯데월드 가는 심정으로 세계의 오지를 다니는 그의 순수함의 가공할 위력이 놀랍다. 오지성씨 챕터를 읽으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얼마나 간단하고 명료하게 살고 있는지를. 맺고 끊는 것을 잘 하고 우유부단한 것을 저주하며 시간 약속을 칼 같이 지키고 면전에서 잘못을 지적하는 나 같은 이는 반드시 간단하고 명료해야 한다. 그런데 잠시 나를 돌아보니 구질구질했다. 내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아니 보지 않으면서 남의 눈에 티끌에는 목숨 걸고 달려드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무섭고 아찔했다. 오지성씨가 오지를 재미로 찾아다니며 그것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간단함과 명료함을 견지할 수 있었듯이 나 또한 좀 더 넓고 낮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타인을 향한 배려에 재미를 담을 수 있다면 지금의 ‘나’보다는 더 간단하고 명료한 ‘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는 약 2천 명의 판사가 있다. 그리고 300여 명의 국회의원이 있다. 대개 개체수가 적을수록 더 존중을 받는 법. 그런 식으로 따지면 국내에 있는 현역 프로레슬러는 12명 남짓이니 대체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할까.” (p.115)

 

WWA 소속 국내 유일 20대 프로레슬러 김민호씨도 마찬가지다. 12명 남짓한 한국의 현역 프로레슬러로 활동하면서 그 꿈을 잃지 않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재미다. 재미있어서 하는 일이다. 비록 2천 명의 판사만큼, 300명의 국회의원의 절반만큼도 인정받지 못하는 직업이지만 그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조금 빨리 하는 편법이 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한번 그렇게 하면 되돌릴 수 없어요. 어떤 일이든 시간을 들여서 경험과 기술을 누적해야 하는데 그걸 그냥 편법으로 지나가 버리면 제가 어떻게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겠어요.” (p.109)

 

12년 만에 주짓수 블랙벨트 따낸 그래플러 팩토리 관장 남상운씨의 이야기에서는 정직함과 성실함을 배울 수 있었다. 주짓수 블랙벨트는 쉽게 딸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무진장 어려운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조금 빨리 하는 편법도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는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 거의 모든 기술과 노동이 그렇듯이 시간을 들여서 노력하고 연마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몸으로 하는 노동과 기술, 머리로 하는 노동과 기술 둘 다에 적용되는 원리다. 그는 자신이 기술을 연마해 제자들에게 그 기술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에 사명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정직하게 기술을 배우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말한 편법을 우리가 일상에서 얼마나 자주 마주하나. 애써 고민하고 토론한 팀의 결과물을 부하직원들 이름을 쏙 빼고 자신의 이름으로 가로채는 상사들 하며 어떻게든 쉽고 간편한 길만 찾아다니는 승냥이들은 또 얼마나 많나. 국가를 이끌어갈 사회지도층 인사들과 그 아들들의 병역기피와 위장전입, 세금탈루 등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과정과 시간을 생략한 채 얻고 싶은 결과에만 천착한 결과다.

 

 

“그는 일 년에 서너 번씩 태국으로 건너가 무에타이 수련을 하고 이 년에 한번 씩은 브라질에 가서 두세 달씩 주짓수를 수련한다. 이미 기반이 잡힌 체육관 관장으로서는 보기 힘든 일이다.” (p.109)

 

남상운 관장은 지금도 일 년에 서너 번씩 태국에서 무에타이를 배우고 이 년에 한번 씩 브라질에서 주짓수를 배운다고 한다. 개업을 한 의사가 일 년에 한번 씩 졸업한 의대에 가서 수련의 체험을 하고 이 년에 한번 씩은 경영대에 가서 병원 경영에 대한 공부를 하는 것이다. 다른 개업의가 본다면 미쳤다고 할 일이다. 다른 체육관 관장이 본다면 남상운 관장의 저런 모습은 시간낭비일지도 모른다. 괜히 시간 들이고 돈 들이는 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남상운 관장은 배우고 익히는 것을 지속한다. 시간을 들이고 돈을 들여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 한창 잘 되고 있는 체육관에 관장이 한 달씩 두 달씩 자리를 비운다면 그것만으로 체육관의 손해는 엄청난 것이다. 한국의 학부모들 그런 것에 굉장히 민감하다. 유명하다는 학원 원장의 직강에는 벌떼처럼 아이들을 집어넣으면서 그 원장이 없는 강의나 요일에는 아이들을 보내지 않는다. 그러니 그런 손해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남관장은 태국으로 브라질로 날아가는 것이다. 주위의 오해와 걱정, 뻔 하게 보이는 손해와 위험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30명의 사람들 모두 동일하다. 그들은 좀 더 편하고 좀 더 돈 많이 벌고 좀 더 인정받고 싶은 자신의 욕심과 본성, 주위의 기대와 우려, 오해와 불신들과 싸우는 사람들이다. 억척스럽게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를 찾고 자신만의 정직과 겸손함으로 싸우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더 배울 것이 많은 사람들이다.

나도 내가 싸울 것들을 생각해 본다. 바깥보다 안이 더 시급함을 깨닫는다.

나 자신의 것들과 싸울 생각에 벌서부터 오금이 저린다.

길고 지난한 싸움이 되지 않았으면 싶다. 나름 재미를 찾을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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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크라트 -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지음, 박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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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노제가 열리던 그날, 삼성의 경영권 승계에 대한 무죄 판결이 대법원으로부터 나왔다. 노 전 대통령이 생전에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 갔다.”라고 했던 말이 그대로 현실이 된 것이다. 집착적인 미디어의 탐사 보도도 있었고 내부 조력자였던 사람의 내부 고발도 있었지만 결국 무죄가 되었다. IMF이후부터 거의 모든 곳간을 잠식해 가던 삼성이라는 어마어마한 재벌이 드디어 한 나라의 주인으로 등극하는 것을 공인 인증하는 순간이었다.

 

 

“관료 집단과 그들과 유착하여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법률을 바꾸며 사회 초고위층으로서의 지위를 지키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파벌 자본가들” (p.294)

 

책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플루토크라트라 지칭 한다. 저자 크리스티아 프릴랜드는 20년 동안 전 세계 부자들, 특히 그중에서도 미국과 러시아 갑부들의 삶과 행적을 추적한 저널리스트다. 책에는 그들 신흥 갑부들이 출현한 배경과 그들의 진면모를 자세하게 소개한다. TV 뉴스에서는 자세하게 다루지 않는 것들이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2011년 사모펀드 그룹인 아폴로(Apollo)의 설립자 레온 블랙은 자신의 60번째 생일 파티를 위해 100만 달러를 들여 엘튼 존의 무대를 벌였다.” (p.178)

 

이제는 TV로 보던 스타들을 자신의 생일파티에 기꺼이 초대한다. 100만 달러쯤 주면 그들을 내 눈 앞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일은 그렇게 낯설지 않은 일이다.

영국의 팝스타 조지 마이클의 경우 영국에서 점심 식사를 한 뒤 저녁에 러시아로 날아가 광산 재벌 블라디미르 포타닌이 개최한 신년축하 파티에 참석했다. 그는 불과 100여명의 손님들 앞에서 1시간가량 노래하고 돌아왔을 뿐인데 그가 이 행사에서 받은 돈은 무려 300만 달러나 된다고 한다.

또 주택자재 공급회사인 '84럼버'의 설립자인 조 하디 회장은 지난주 자신의 생일 파티에 팝디바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와 오스카상에 빛나는 배우 로빈 윌리엄스를 피츠버그로 불렀다. 이 행사 참석으로 팝스타들이 받은 돈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길레라는 2005년 9월 러시아 사업가 안드레이 멜니첸코 결혼파티때 150만 달러를 받고 노래를 불렀었다.

또 윌리엄스를 저녁 행사에 부르기 위해서는 100만 달러가 드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윌리엄스는 2002년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텍사스 퍼시픽 그룹 공동설립자인 데이비드 본더먼의 생일파티때 존 멜렌캠프, 롤링스톤스 등과 함께 출연했으며 이 파티에 연예인을 부르는데 든 비용은 무려 1천만 달러였다.

이제 이런 것들이 가능한 일이 되었다. 한국의 재벌들도 국내 내놓으라하는 유명 연예인들을 중요한 행사 때 불러서 공연을 한다는 것도 다들 아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 유일하게 거부한 가수가 나훈아씨 라는 소문도 알고 있다. 사실인지의 여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사는 것이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약 중인 추신수선수가 텍사스 레인저스로 팀을 옮기면서 1억3000천만 달러를 받게 되었다. 수천억이다. 수천억. 1시간당 200만원이 넘는 돈을 7년 계약기간동안 버는 것이라고 분석한 친절한 기사도 있었다.

 

 

“우리는 스타를 응원하는 관중에 불과하지만, 기적이 찾아와 언제든 비즈니스와 스포츠 세상에서 최고의 스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꿈꾸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 시대에 존재하고 있는 슈퍼스타 경제학의 아이러니다. 사람들은 모두 슈퍼스타를 꿈꾸고 있다. 하지만 승자 독식 시장에서 정상의 자리는 오직 소수에게만 허락되어 있다.” (p.220)

 

추신수 선수의 대박 계약 소식을 보면서 사람들은 좋아 한다. 내가 계약을 맺은 것도 아니고 내가 추신수 선수의 친척이나 친구인 것도 아닌데 좋아 한다.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이 가져다 준 가장 큰 착각의 일면이다. TV나 다른 매체를 통해 전해 듣는 이야기는 온갖 수치와 숫자다. 내 것이 아님에도 마치 내 것인 것처럼, 내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처럼 착각을 일으킨다. 스포츠 스타들의 대박 계약은 오히려 더 순수한 편이다. 그들의 몸을 가지고 승부를 보는 것이니 더 깨끗하다. 문제는 플루토크라트이다. 앞서 소개한대로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같은 팝스타가 러시아의 신흥갑부의 파티에 날아가는 세상이다. 아길레라가 러시아 갑부의 돈을 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인가? 전혀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스타고 잘나가는 가수다. 그런데 전용기를 타고 날아가서 노래 몇 곡 부르면 엄청난 돈을 손에 쥘 수 있다. 이 편리성. 이 간편함이 플루토크라트가 줄 수 있는 선물이다. 예전처럼 백만장자 운운 하는 것은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다. 억만장자가 넘쳐 나는 세상이다.

 

 

“GDP 1조 달러당 10억 달러 이상의 재산을 보유한 억만장자들의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1조 3,000억 달러의 GDP에 87명의 억만장자들이 살고 있는 러시아가 차지했다. 그리고 1조 1,000억 달러의 GDP에 55명의 억만장자를 거느린 인도가 그 뒤를 이었다.” (p.292)

 

러시아의 억만장자들은 대부분 그들의 국가가 개방되고 난 후 즉각적으로 국영기업과 대규모 자원기업을 차지한 사람들이다. 그야말로 노른자위를 그대로 차지한 사람들이다. 제반 규정과 법률이 마련되기 이전, 말그대로 어수선할 때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권력과 자본으로 더 많은 것을 차지하는 것이다. 책에서 저자가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것이다. 예전처럼 자수성가해 백만장자가 된 스토리는 플루토크라트 끄트머리에도 들지 못한다. 지금의 플루토크라트가 되기 위해서는 이미 대단한 권력과 대단한 자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정보와 권력에 가깝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다. 부자가 더 부자가 되고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되는 것이다. 1%과 99%의 비교가 아니라 1% 중에서도 0.1%와 0.9999%의 비교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 0.1%는 국가를 초월한다. 경제블록을 초월하고 초국가적 기구들도 초월한다. 그들의 아이들은 가장 비싼 영국의 사립 고등학교에서 공부하고 가장 비싼 미국의 대학교에서 공부하며 그들의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아버지가 러시아인이거나 인도인이거나 미국인이거나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플루토크라트들 만의 세상을 만들어 간다.

 

 

“<플루토크라트 세상에서 미국 소비자, 영국 소비자, 러시아 소비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수적으로는 아주 적지만 소득과 소비에서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부유한 소비자들이 있다. 그리고 수적으로는 많지만 전체 파이에서 놀라울 정로도 작은 조각만을 차지하고 있는 부유하지 않은 나머지 소비자가 있을 따름이다.>” (p.27)

 

우리는 그 부유하지 않은 나머지 소비자들일 뿐이다. 사실 플루토크라트들의 이야기는 낯설다. 몇% 인상되는 연봉과 연말 상여금에 목이 빠진 우리들에게 플루토크라트의 이야기는 너무나 먼 이야기다. 하다못해 백만장자라도 되는 것이 수많은 노동자들, 일반인들의 소원일 텐데 플루토크라트는 그 어려운 이름처럼 멀기만 하다. 그들은 한국의 평범한 사람들의 연봉보다 더 많은 돈을 아이의 고등학교 등록금으로 쓰는 사람들이고 한국의 평범한 사람들이 평생 만져볼 수도 없는 돈을 미국의 연예인을 한 번 부르는 데 쓸 수 있는 사람들이다.

어차피 이해도 되지 않고 닿지도 않을 거라면 그냥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면 되지 않나 싶다. 그런데 그들은 거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국가의 운영 방식도 바꾸고 싶어 한다.” (p.126)

 

그들은 국가의 운영 방식도 바꾸고 싶어 한다. 1%만의 세상. 아니 0.1%만의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려는 구상도 실제로 했다고 한다. SF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세계. 인공섬을 만들거나 우주로 나아가 그들만의 세계를 만든다는 것이다. 더 이상 99%, 99.9999%들의 볼멘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고 국가니 뭐니 하는 귀찮은 존재들의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을 실제로 꿈꾼다고 한다. 어차피 내가 겁을 집어 먹을 사안은 아니지만 그들이 꿈꾸는 대로 국가의 운영 방식을 바꾸고 싶어 한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미 권력과 돈을 다 가진 그들이 그들에게는 허울뿐인 것으로 보이는 국가의 운영 방식조차 바꾸려 한다면 어떤 세상이 올까?

 

책에서 저자인 프릴랜드는 베네치아 갑부들의 선례를 소개하면서 오늘의 플루토크라트들의 미래를 예견하며 경고한다. 세계적인 관광지인 베네치아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옛날 지도층의 조급한 이기심으로 유럽의 역사 속에서 존재감을 잃어갔던 실패한 도시 국가를 소개한다. 베네치아는 새로운 인물과 자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코멘다>라는 시스템으로 당시 유럽에서 가장 성공한 자본주의 도시국가가 되었다. 그런데 돈과 권력을 두 손에 쥐게 된 기득권들은 <황금의 책>이라는 귀족 명부를 만들거나 그들만의 폐쇄적인 집단을 만들면서 유연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던 그들의 본 모습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오늘날 플루토크라트들 역시 그들을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엄청난 돈방석에 올려놓았던 자본주의의 개방성과 민주주의의 유동성이라는 가치의 사다리를 걷어차려고 하고 있다고 지적 한다. 자기들은 다 올라왔으니 더는 자신들의 자리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사다리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자신들만의 <황금의 책>을 다시 만들어 그들만의 세상을 구가하려는 것이다. 이것에서 저자는 수백 년 전 베네치아의 귀족들의 비참한 말로를 대비시킨다. 그들의 이기심과 절정의 탐욕을 오늘의 플루토크라트들이 따라가지 말 것을 경고한다. 유럽의 일부에서 정착되어 있는 협동조합과 같은 개방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을 확대해 나갈 것을 주문한다. 그리고 우리들과 같은 99.9999%들이 이런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정부를 선택해야 함을 역설한다.

분명 쉬운 일은 아니고 더군다나 단기적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지만 뾰족한 대책도 없다.

 

 

 

“기업은 직접 고용하지 않은 근로자들을 얼마든지 차별 대우할 수 있습니다. 화장실 청소부는 우리들과 같은 부류가 아닙니다. 기분 나쁘게 들리겠지만, 그게 현실이죠.” (p.358)

전(前)구글 회장 에릭 슈미트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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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의 사상 - 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3
박가분 지음 / 오월의봄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안녕들 하십니까?”

라는 대자보는 죽어 있던 이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누군가의 조종이나 선동이 아닌 젊은 대학생이 자기 자신에게 경종을 울렸다. 자기 자신을 일깨우는 대자보가 하나둘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잠자고 있던 혹은 죽어 있던 젊은 야성을 깨울 것인지, 잠시 반짝했던 이벤트로 끝날 것인지는 아직 모른다.

한 대학교 학생이 시작한 “안녕들 하십니까?”에 가장 먼저 반응을 한 것은 인터넷 언론사다. 그리고 바로 다음 직접적인 대응(?)을 한 것은 일베다. 자신들만의 손가락 모양 식별법을 찢어진 대자보에 중첩해 찍은 사진 게시물이 일베에 올라갔다. 사람들은 일제히 일베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런 썩어빠진 놈들~’, ‘오죽 용기가 없으면 사람들이 없는 새벽시간에 대자보를 훼손하나 xx들’. 젊은 지성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과 현정부에 대한 결기 있는 비판에 대한 쓰레기 같은 꼴통보수 게시판의 비이성적 테러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물론, 완전히 망가져버린 한국의 언론들은 제대로 비판하지도 않고 제대로 보도하지도 않기 때문에 이 사안에 대해서 우리는 제대로 알 수 없다.

간단하게 생각해서 대자보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 붙이는 것은 자유다. 그리고 그 대자보를 찢는 것도 자유다. 두 행위에 대한 정당성은 개인적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자유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대자보를 붙이고 그것에 대해 지지하고 찬성한다 할지라도 그 대자보의 내용과 그 대자보의 게시에 대해 불만을 갖는 것도 자유다. 그것이 민주주의 사회다. 그런데 일베는 이러한 정당성과 가치판단의 경중을 가소롭게 여긴다. 그것이 그들의 존재이유다.

 

 

 

일베하세요?

 

일베하세요? 라고 묻는 것이 실례일까. 나는 10대 청소년들을 주기적으로 만난다. 한동안 만나는 아이들에게 꼭 물었다. “일베하냐?”고. 10명에게 물어보면 9명은 하지 않는다고 하고 1명 정도가 자주 들어가 본다고 했다. 그런데 그 1명조차 게시물을 쓰거나 하지는 않고 구경하다가 나온다고 했다. 이유는 재미있어서.

 

“인터넷 바깥의 무언가에 자신의 이상을 전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굳이 어떤 이상을 말하고 싶다면 인터넷 안에서 자신들끼리 서로를 희화화하며 노는 방식으로 그것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것이 일베의 리얼리즘이다.” (p.221)

 

일베는 한국에서 현존하는 인터넷 게시판 중 가장 유명하다. 각종 논란과 고소·고발에도 그들의 열기는 식지 않는 것 같다. 이 책 「일베의 사상」의 작가 박가분은 일베의 리얼리즘을 가장 간명하게 요약한다. 그가 지적한 일베의 리얼리즘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자보를 새벽 시간에 훼손하고 그것을 촬영한 사진을 게시판에 올려 자기들끼리 좋아하는 일베의 전반적인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유명한 일베를 정작 한다는 사람들은 많이 없는 이상한 이유 또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굳이 어렵고 강경하고 뭔가 멋있고 대의를 위해 일베를 하지 않는다.

 

“일베 유저들은 그러한 규범들을 유머감각이 결여된 ‘씹선비질’이라며 격하하고 도리어 적극적으로 물리친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끝없는 토론이나 논증의 과정이 아니라 상대를 단번에 희화화하고 규정짓는 유머감각이다.” (p.12)

 

예전에는 그런 것들을 ‘꼰대질’이라고 했다. 지금 일베에서는 그런 것들을 ‘씹선비질’이라고 한다. 노골적이고 수준 낮은 단어들은 일베에 가득하다. 그들만의 언어는 계속해서 재생산된다. 대학교에 붙여진 대자보를 바라보는 그들의 관점도 동일한 맥락일 것이다. 민주주의가 어떻고, 지금의 현실이 어떻고, 그것에 대한 젊은 지성들의 자세는 어떻고 하는 것들 자체가 그들에게는 웃음거리다.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어떻게든 불법이나 종북 내지는 빨갱이로 뒤집어 씌우려하는 자들과 움직임은 예전 수구꼴통들의 ‘꼰대질’이다. 일베는 웃음거리로 만든다. 애써 논리를 개발하거나 맞부딪쳐 싸우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에게 리얼리즘이 아니다.

 

“인터넷에서 국가와 사회를 향해 무언가를 위선적으로 요구하는 대신 자신들끼리 평등한 ‘병맛’이 되는 것에 의해 현실의 국가와 사회를 넘어선 자율적인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좀 더 근본적인 사상에서 비롯된다.” (p.93)

 

‘씹선비질’, ‘병맛’은 일베의 용어다. 입에 담는 것조차 불결해지는 것 같은 단어와 비속어로 가득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이 쉽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는 재미있다. 저자의 분석에 의하면 그들은 애초에 국가와 사회에 대한 요구를 위선이라고 단정한다. 피아식별이 선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선을 긋고 모니터를 응시한 채 키보드 워리어가 된다. 어설프게 가르치려 한다거나 그들의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인 되지도 않는 존대를 한다거나 하는 것들은 모조리 부서진다. 인정받지 못한다.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돌아선 후 그(녀)가 어떤 인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들 안에서 함께 ‘병맛’으로 뭉쳐진다.

똥꼬깊수키 라는 천하에 다시없을 저질적이고 극악무도한 타이틀을 건 딴지일보의 초창기와 이상하게 닮아 있는 것이 일베다. 당시로서는 전무했던 패러디와 지금의 짤방과 유사한 이미지를 만들어 냈던 딴지일보는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열풍과 같은 인기를 끌었다. 기존의 딱딱하고 위압적이고 권위적이며 교조적인 진보의 이미지를 한순간에 ‘똥칠’해버리며 동시에 딱딱하고 위압적이고 권위적이며 교조적인 수구꼴통들을 향해 ‘똥꼬’를 날리는 패악질에 열광했다. 신선하고 창의적이며 재미있었다. 정치적 경향성과 진영만 살짝 반대로 바꾸면 비슷한 맥락이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에 대해 샤이니의 종현이 본인의 SNS에 응원글을 남겼나 보다. 그것에 대해 일베와 샤이니월드(샤이니 팬클럽이라고 한다)가 전쟁을 벌였다나 뭐래나. 그런데 이 사안에서 가장 가관인 것은 이 전쟁(?)을 두고 민주당에서 ‘일베가 드디어 임자를 만난 것 같다’는 논평을 낸 것이다. 정말 ‘병맛’이다. 일베가 보면 얼마나 웃길까? 철도 노동자, 인천공항 노동자, 밀양의 노인들이 이 추위에 저렇게 고생하는데 제1야당이라는 분들은 기껏 이런 것에 논평을 내고 앉아 있다.

 

“일베 유저들은 대한민국의 공적 영역이 소위 종북좌파에 의해 잠식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시간에 그것을 단적인 사실로 간주한 채 자신이 적대시하는 사람들을 희화화하고 우습게 만드는 새로운 신조어나 짤방을 개발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들일 것이다.” (p.223)

 

일베는 ‘종북돌(종북+아이들)’, ‘좌이니(좌익빨갱이+샤이니)’라는 신조어를 이미 만들어 냈다. 민주당이 저렇게 뻘짓하고 있는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조금 더 재미있고 그들만의 ‘병맛’을 즐길 수 있는 신조어와 짤방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그들의 리얼리즘이다.

 

“그들만의 유토피아, 모두가 병신인 사회” (p.141)

 

 

 

 

일베는 이미 깊숙이

 

그러면 일베를 하는 이들은 특별한 사람들일까? 절대로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몇 달 전 내가 자주 이용하는 홈플러스 매장에서 일베 회원이 노알라(노무현+코알라) 합성 사진을 노트북 바탕화면에 띄우고 그것을 일베에 게시했다. 이 사진이 일파만파 퍼져 나가고 경찰이 수사를 하는 것에 이르렀다. 최초 게시자는 이 매장 외주업체 이동통신사 판매 계약직 직원이었는데 처음에는 매장에 방문한 부모를 따라 온 초등학생이 한 짓이라고 했다가 경찰 조사에서는 자신의 짓이라고 시인했다. 그날 오후 구미점 홈플러스에서도 노알라 합성 사진이 또 게시되었다. 게시자는 고등학생이었고 일베에 인기게시물을 만들고 싶어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했다.

홈플러스는 부랴부랴 해명을 했다. 그 사건 이후에도 해당 매장은 장사가 여전히 잘 된다. 여전히 외부업체 계약직 직원들로 가득 차 있다. 20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카트 열차를 온몸의 힘을 다해 끌고 가는 어린 남자 직원들부터 너무나도 친절하게 문의에 응답하시는 중년의 여자 직원들까지. 내 동생 같은, 내 엄마 같은 사람들이다. 나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 밥벌이를 위해 일찍 출근해 열심히 일하고 늦게 퇴근하는 사람들이다. 영화 「존 말코비치」의 포스터처럼 모두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어 누가 일베인지, 일베가 아닌지 구별할 수 없다.

그렇다. 일베는 이미 깊숙이 들어와 있다.

 

“무엇보다 일베 게시물의 유행어들을 살펴보면 젊은 한국 여성에 대한 비하가 유독 두드러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베인들은 한국 여성들을 싸잡아 ‘김치녀’, ‘김치년’이라고 부른다.” (p.113)

 

사실 나는 일베의 정치적 편향성이나 사자(死者)에 대한 희화화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몰상식적 여성 폄하는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책에서 소개된 일베의 유행어들 말고도 일베의 게시물들은 대부분 여성을 폄하하고 여성을 성적 하위계층으로 단정한다.

더군다나 자신들보다 약자로 인정되는 사람이나 계층, 이를테면 초등학생이나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게시글의 폭력수준은 상상을 초월한다. 당연히 여성도 들어간다.

한동안 큰 논란이 되었던 초등학생에 대한 이유 없는 폭행은 그들에게는 신나는 일이다. 여성을 강간하는 방법, 실제인지는 모르지만 그 후기에 대한 내용도 게시된다. 정말 모니터에 비치는 그들의 글과 시진과 동영상만 보면 유럽의 네오나치를 연상시킬 정도다.

 

“일베 유저들은 제멋대로 행동하는 ‘인터넷의 나’가 사회적 예의범절을 통합된 ‘현실의 자아’와 다르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일베의 ‘인증 대란’도 그것을 보여준 것이다. 한편에서는 여성에 대한 과격한 혐오발언을 늘어놓으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여자와 소개팅한 사실을 태연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좋은 예다.” (p.157)

 

하지만 ‘인터넷의 일베’와 ‘현실의 나’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 저자 박가분의 분석이다. 이렇게 유치하고 폭력적이며 다분히 선동적인 사이트에서 글을 올리고 좋아하고 노닥거리는 것을 보니 초·중·고딩들에 불과할 것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일베에는 한꺼번에 자신의 학력을 인증하는 사진을 게시했다. ‘인증 대란’이 일어난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양가적인 태도는 이미 우리 깊숙이 들어 온 일베현상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은 단정할 수 없지만 나는 최소한 그들이 우리와 완연히 다르지 않다는 것에 안도한다. 내가 일하는 곳 노트북에 노알라 사진을 올리고 모니터 앞에서는 ‘김치년’ 운운하며 마초짓을 하지만 내일 아침에는 어김없이 출근하고 등교하고 데이트하고 쇼핑하고 친구들과 수다 떠는 현실로 돌아온다는 점이 다행이다.

 

“일베 유저들은 시위나 집단적 의견 표명 방식을 꺼린다는 점에서 진보적인 네티즌들과 다르고 심지어 일본의 넷우익과도 다르다.” (p.89)

 

그러면 왜? 도대체 왜? 일베를 하는 것일까?

 

 

 

 

일베의 사상?

 

“여기서 내가 보려고 하는 것은 일베 유저들이 일으키는 집단행동 배후에 있는 그들 나름대로의 ‘사상’이다.” (p.38)

“팩트를 중시하는 태도, 상대의 과거 발언에서 현재 행동의 모순점을 지적하는 자세, 모두가 평등한 병신이라는 사상, 이 모든 것이 ‘데이터베이스’라는 인터넷의 특성에서 나왔다.” (p.57)

 

일베는 팩트를 중시한다. 이것은 기존 진보진영이나 진보논객, 글쟁이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요소다. 지난 대선 전 광폭질주를 했던 “나는 꼼수다”의 동력은 팩트였다.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하고 알수도 없는 팩트가 생생하게 전해졌기 때문에 공감을 얻었다. 그런데 이제는 일베마저도 팩트를 중요시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예전처럼 진보논객, 진보글쟁이들과 논리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한 말실수나 행동, 나아가서는 학력과 논문까지 팩트라는 기준을 가지고 물고 늘어진다. 이전까지 보수·우익 진영은 대게 말 못하고 논리도 없고 뭉치기만 하는 사람들로 생각했는데, 일베는 팩트를 중시하면서 젊은이들의 관심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 공감이 된다. 무작정 이상한 신조어나 패러디, 움짤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논리와 구조를 갖춘 논객 행세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팩트 중시 태도는 5.18과 광주에 이르러서는 어김없이 무너진다.

 

“‘성역’으로서 5.18이 지닌 숭고한 위상을 훼상하고 싶은 것이다. 5.18에 관한 일베 게시물을 보면 그들이 좋아하는 ‘팩트’는 온데간데 없다.” (p.169)

 

이미 정치적·사법적 판결이 난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 이상한 자료들을 짜깁기 하거나 예전의 일부 논리를 가지고 와 폄하하고 명예를 훼손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에 대해 지난 5월 광주광역시장이 엄포를 놓자 대량 게시글 삭제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볼 때, 그들이 이야기하는 팩트 중심이라는 기준이 단지 진보진영의 인사와 글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써만 사용된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일베를 하는 것일까? 그들의 생각은 무엇일까?

 

“일베는 대한민국의 문화적, 정치적 동질성과 집단주의적 문화 속에서 표출될 수 없었던 사회적인 갈등과 적대들이 특유의 ‘혐오 문화’라는 전치되고 응축된 형식으로 표출된 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p.123)

 

한국에는 무수한 갈등이 산재해 있다. 지역, 문화, 종교, 정치, 학교, 세대 등등. 해방된 이래로 지금까지 계속해서 동일하게 이러한 갈등이 반복되고 재생산되고 있다. 언제 적 지역 갈등이 아직도 존재한다. 이러한 갈등은 개별 한국민들에게 내제되어 있는데 군사독재정권과 권위주의정권 하에서는 강제적으로 억압되어 왔다. 국가, 이념, 개발, 성장이라는 도그마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었다. 개인은 국가의 톱니바퀴 날의 하나가 되어 꾸역꾸역 돌아가기만 했다. 정치적 민주주의가 달성되고 어느 정도의 경제적 발전 이후, 특히 IMF이후 강제적으로 억압되어 오던 갈등과 적대는 한꺼번에 터졌다고 생각한다. ‘나만 잘 살면 된다.’라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경쟁에서 살아남아 성공해야만 했다. 최초로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졌고 민주정부가 10년을 집권했다. 이제는 정말 많은 것이 바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아진 것이 별로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더욱 좌절했다. 복지, 평등을 부르짖었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 된 것이 없었다. 다시 보수진영에 정권을 내어줬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고 있다. 작금에 대자보 열풍이 이는 것처럼 그 반대편에서도 하고 싶은 말들이 있었을 것이다. 책에서는 일베 이전 그들의 기원에 대한 추정도 자세하게 열거되는데 꼭 진보가 좌파만이 옳은가? 라는 궁금증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그들과 다른 생각을 하면 생각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고 정권과 자본주의에 세뇌된 사람으로 치부되었다. 그런데 민주·개혁 정권이 들어서도 그 반대쪽 정치진영의 정권과 별반 차이가 없고 그들이 오히려 입만 살아 떠들어 대는 자들로 여겨졌을 수도 있다. 여전히 자신들의 삶은 지루하고 힘들고 밥벌이의 고통은 줄어들지 않는데 여전히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허상과 같은 이상놀음에 빠진 이들을 놀리고 성질을 건드리며 이들이 자신들에게 달려들기를 유도했을 것도 같다. 나도 힘들고 너도 힘들도 다들 힘든데 뚜렷한 방법은 보이지 않고 뭔가 응축된 응어리와 분노를 표출하고 싶은데 마땅한 대상이 떠오르지 않을 때 그들은 사자(死者)와 사회적 약자들을 대상화했다.

 

“현실의 국가에서 불가능한 이상이나 도덕성을 국가와 정치인에게 기대하거나 설교하는 상상력 대신 일상 속의 타인들에게 먼저 자신의 이상을 작게나마 공유하고 검증받을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p.241)

 

책의 저자는 제목부터 「일베의 사상」이라 정하고 일베의 사상에 대한 자세하고 복잡하며 다소 어려운 분석을 한다. 일베의 기저에 깔린 사상을 분석하는데 사실 나는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특별히 일베의 사상이라는 것이 없다고 생각 한다. 그들 또한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고, 컴퓨터 모니터를 벗어나면 일상에 찌든 내 얼굴이 그대로 오버랩 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당연히 대다수일 일베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별다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명예훼손이나 사건·사고에 대해서는 구별해서 처벌하거나 고발·고소를 해야겠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글이나 패러디 움짤에 대해서 너무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도 제대로 일베를 파악하지 못하는 현상에 기인한다고 본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무관심·무대응도 능사는 아니다. 실제로 그들이 일본의 넷우익이나 유럽의 네오나치처럼 모니터 밖으로 차고 나와 실제적 행동을 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최소한 지금처럼 제대로 파악하고 인정해 비판하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지지하고 응원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치권은 어느 쪽이든 일베를 이용하면 안 된다. 그리고 언론은 그들의 논조가 어떠하든 정치적 경향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일베를 이용하여 언론놀음을 해서도 안 된다.

일베가 어떤 사상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내 옆으로 마주쳐간 사람들일수도, 내가 만나 인사하고 밥 먹은 사람들일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우선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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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 교사들과 함께 쓴 학교현장의 이야기
엄기호 지음 / 따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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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

 

학교가 붕괴됐다. 교실도 붕괴됐다. 교사도 붕괴됐다. 부모도 붕괴됐다.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라는 직설적인 고백은 이미 들었다. 공립 중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딸을 대안학교에 보내고 있다. 그 친구는 가끔 가지는 모임에서 괴로워하며 학교를 고백한다. 교사 생활을 한지 7년째인데 매해 붕괴의 속도는 가중되고 매해 바뀌는 교육제도만큼 순식간에 저 만큼 더 붕괴되고 있는 학교의 민낯을 안타까워하며 토로한다.

따지고 보면 학교의 붕괴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심한 감기몸살이 오기 전 머리가 지끈거리고 오한이 시작되며 팔다리가 쑤시기 시작하는 것처럼 학교의 붕괴도 이미 표면화 되어 있었다. 너도 나도 그 붕괴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 것 같았고 ‘그렇게 될 줄 알았다.’라고 미리 예언을 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에서부터 ‘그러면 이제 어쩌나.’라고 마지막 희망을 놓아버린 안타까운 탄식을 하는 사람에까지 다양한 의견이 많았다. 늘 그렇듯이 정부와 교육당국은 뒤처리하거나 쉬쉬하며 묻어버리기에 급급했고 자신들의 이전 정부와 이전 교육당국자들 혹은 이전 교육정책에 책임을 떠넘기는 것으로 면피하려 했다.

 

“지식 습득의 장으로서도, 계몽의 공간으로서도, 신분 상승의 도구로서도, 다양한 재능을 발견하고 계발하는 곳으로서의 의미도 상실한 학교는, 나아가 다양한 사람을 만나 폭넓은 경험을 하는 ‘성장의 공간’, ‘삶의 공간’으로서의 역할도 상실하고 있다.” (p.25)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기쁨이 있었다. 주로 세계지리, 역사, 사회문화, 정치경제 시간이었는데 세상이 돌아가는 꼴을 알아가는 것이 짜릿하기도 했다. 학교 수업에만 충실해도 나름의 성적을 얻을 수 있었고, 설익은 채였지만 한 사람의 사회인이 되어 간다는 뿌듯함도 있었다. 물론 내가 겪은 학교도 저자가 겪은 학교만큼 나쁘고 비상식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완전히 붕괴되지는 않았다. 지금은 총체적으로 붕괴하고 있는 것이다.

 

“교실과 함께 교무실 또한 붕괴하였다. 교실만 침묵의 공간이 된 것이 아니라 교무실 역시 침묵의 공간이 되었다. 반교육적인 교육 행정이나 지침에 대해 집단적으로 항의하는 풍경도 사라졌다.” (p.137)

 

저자는 이 책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에서 붕괴된 교무실에 집중 한다. TV에서 신나게 떠들어대는 교권붕괴 같은 어설픈 인식이 아니라 직접 일선 교사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생각해보면 교사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본 적은 별로 없었다. 친구로부터 듣게 되거나 자식들로부터 듣게 되거나 TV를 통해 전달되는 학교에 대한 이야기와는 또 다른 측면의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 들을 수 있다. 더 가슴 아픈 것은 교사들의 이야기가 더 실제적이고 참담하다는 것이다. 학교에 대해 좋지 않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교무실에 대한 기억도 좋지 않다. 그곳에서 체벌을 받거나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교사들이 수업을 제외하고 학교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교무실인데 그곳 또한 붕괴되었다는 사실을 책을 통해 알게 된다. 저자가 말하는 침묵은 붕괴된 현장을 바라보며 하릴없이 쳐다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묘사한다. 교실도 붕괴되고 교무실도 붕괴된 학교에서 도대체 어떤 작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얼핏 생각하면 교사의 진짜 임무는 간단해 보인다.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교사에게 정작 중요한 임무의 하나는 학생들을 감시하고 돌보는 일이다.” (p.155)

“학교의 주된 역할이 교육이나 성장 혹은 훈육에서 학생들의 생명을 ‘안전하게 관리’하는 것으로 전환했음을 의미한다. 이제 학교에서 학생들을 분류하고 구분하는 것은 ‘성적’만이 아니라 ‘마음’이 되었다.” (p.107)

 

학생을 가장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들이 교사다.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힘든 자격을 얻어 학교에 취직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제는 가르치는 것은 고사하고 학생들을 감시하고 돌보는 돌보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나의 군 생활도 그랬다. 큰 뜻을 품고 장교로 입대한 군 생활은 애초의 기대와 장교양성학교에서 배운 교육과는 완전히 달랐다. 내가 지휘하는 30여명의 병사들을 돌보고 감시하는 것이 가장 큰 임무였다. 훈련, 교육, 작전보다 훨씬 중요한 명령이 되었다. 잠을 쪼개어 병사들과 상담하고 그것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병사들의 부모와 정기적으로 통화도 해야 하는 병사 돌보미였다. 지금의 교사와 나의 장교 군 생활을 직접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이 사실이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은 듯하다.

제대로 교육하고 훈련시켜 멋진 군인을 만드는 것보다 2년 남짓 무탈하게 병사들을 관리하고 돌보는 것에 집중했던 것처럼 교사들은 학생들을 돌봐야 한다. 어차피 한 반에서 수업에 집중하는 학생들은 소수다. 제대로 된 수업을 진행할 수 없는 붕괴된 교실에서 교사는 두려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도 군대는 명령체계가 있어 오히려 질서를 잡고 관리하는 것이 수월했다. 지금의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은 더 이상 이전의 교사와 학생 사이에 존재했던 질서와 관계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슬픈 현실이다. 그리고 교사는 분명히 힘들다.

 

 

 

 

무력감

 

처음에 이야기했던 일선 교사 친구에게 가장 듣는 말이 무력감이다. 수업을 하러 들어가서 나올 때마다 그 무력감이 쌓인다고 했다. 제대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손에 꼽을 정도고 자는 학생, 딴 짓하는 학생, 일부러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 학원 숙제를 학생 등 ‘도대체 내가 왜 여기에 있나?’라는 자괴감으로 괴롭다고 했다. 책에 등장하는 많은 교사들도 이것을 토로한다. 무력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교육에 대해, 학생들을 만나는 것에 대해 열정을 가지고 교육현장에 뛰어든 교사들이 어떻게 소진되며 고립되고 있는지를 이 책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p.11)

 

저자는 교사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교사들이 어떻게 소진되고 고립되었는지를 분석한다.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돌보는 것에 매진해야 하는 교사들은 처음 가졌던 사명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저 큰 탈 없이 학기를 보내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붕괴된 교실은 더 이상 스승과 제자의 관계구도를 희망할 수 없게 되었다. 교사들은 직업인으로 교탁에 서고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끌려나와 앉아있는 것에 불과하다. 붕괴된 교무실은 교사들 사이갈등의 골도 깊게 만들었다. 마지막 부분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학생을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교사는 칭찬을 받거나 인정을 받기는커녕 교사들 사이에서 왕따가 되는 현실이라고 한다. 가속화된 학교의 붕괴는 교사들의 무력감을 배가 시키고 있다.

 

“과거에도 학교는 관리자의 왕국이었지만, 학교단위경영책임제의 도입과 더불어 이제는 기간제 교사를 선발하고 해임하는 권한에서 교사 초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권한을 관리자가 가지게 되었다.” (p.234)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같이 있었다. 중학교2학년 때 학교를 신축하면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걸어서 30분 정도 되는 거리를 중·고등학교 학생 전체가 책상을 들고 이사를 했다. 평일 수업 시간에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때는 교장 한마디가 법이었던 모양이다. 특히 사립학교는 면책특권을 가진 것인지 치외법권을 가진 것인지 시대가 변하고 정권이 바뀌어도 도무지 과거와 달라지지 않는다. 학교는 관리자의 왕국이다. 그 관리자가 학교의 형태에 따라서 교장이 될 수도 있고 이사장이 될 수도 있는데 책에서는 교장의 경우에 국한해서 설명한다. 붕괴된 학교에도 효율의 가치는 어김없이 이식되어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관리자의 제왕적 옹립은 학교를 수렁으로 빠트렸다. 학교단위경영책임제는 말 그대로 학교간 서열과 경쟁을 강화하는 정책이다. 교육당국은 일시키기 편한 것이다. 공문 한 장 내려 보내면 학교는 사활을 건다. 각종 기안을 만들어 낸다. 기간제 교사의 도입과 확장은 학교와 교사의 붕괴를 가속화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더불어 기간제 교사의 선발과 해임의 권한을 통째로 쥐고 있는 관리자는 마음껏 그들을 부릴 수 있게 되었다. 중견 교사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쓸데없는 분란을 야기하지 않아도 젊고 일 잘하고 순응 잘 하는 젊은 기간제 교사들의 숨통을 죄고 있으면 교장은 마음껏 학교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학생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지만, 학교는 학생들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p.224)

 

더 이상 먼저 나서려는 교사들이 없어지고 있다고 한다. 교무실 안에서도 서로 업무 이야기만 잠깐씩 나눌 뿐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나 교과과정에 대한 진지한 토론은 없어지고 있다고 한다. 교사들은 더 이상 학생들을 책임지지 않는다. 교사들의 무력감은 가시화 되고 현실화 되었다.

어차피 먼저 나서도 동료 교사들에게도, 학부모에게도, 학생들에게도, 학교 관리자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싫은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굳이 나설 이유가 없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하고 학생들과도 암묵적 합의에 의해 서로 적정한 선을 그어 놓고 그 선을 넘지 않는다.

이 숨 막히는 무력감은 무책임을 낳을 것이다.

 

 

 

 

불신

 

교실과 교사, 학교의 붕괴와 무력감을 가져 온 가장 큰 동기는 불신이다. 학부모가 학교와 교사를 믿지 못하고 교사와 학생이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것은 흔히 알고 있는 바다. 책에서는 교사와 교사간의 불신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 한다. 다른 곳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다.

 

“교실은, 모르는 존재를 만나 그들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하면서 타자가 되는 경험을 하는 공간이 아니라 다름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단절의 공간이 되고 있다.” (p.83)

 

요즘 중고등학생들 중 많은 아이들이 배려, 공감, 동료 등의 단어에 대한 사전적 의미와 포괄적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한다. 부모나 주위 어른들로부터 그런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경쟁, 성적, 성공 등의 단어만 들어왔던 아이들은 학교에서 나와 다른 너와 만나는 사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학교의 가장 큰 문제이기도 한 왕따 문제는 실제로 왕따를 가하는 학생들보다 바로 옆에서 왕따가 가해지고 왕따를 당하는 데도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아무렇지 않게 자기 할 일만 하는 아이들의 무관심과 단절이 더 큰 문제다. 분명히 일어나고 있는 왕따를 마치 다른 세계의 일처럼 여기는 것이다. 철저하게 배제하고 차별하여 단절한다. 일부러 그런 것이 라면 설득이라도 해볼 텐데 애초에 그렇게 프로그램 되어 있듯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더 심각하다. 이 정도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그런데 책에서는 교사들 사이에서의 불신에 대해 언급한다. 중견 교사들과 젊은 교사들 사이의 불신과 괴리는 이미 심각한 지경이라고 한다. 이미 가시화된 학교의 붕괴에 대해 누구하나 나서서 책임을 지려는 주체가 없고 학교는 완전히 파편화되어 살아 있어도 죽은 듯 견딜 뿐이다. 젊은 교사들은 체제에 순응하고 맡겨진 일(잡무, 행정업무)을 깔끔하게 처리한다. 중견 교사들은 전교조 시절을 추억하고 지금의 학교와 학생들을 비판한다. 중견 교사들은 젊은 교사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서서 불합리에 맞서지 않고 교장과 학교에 충성하는 그들이 못마땅하다. 젊은 교사들은 중견 교사들의 꼰대 짓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신들보다 더 쉽게 학교에 들어와 이제까지 지내 온 관성으로 교사 생활을 하는 그들에 대한 피해의식이 기저에 깔려 있다. 특히 기간제 젊은 교사들은 중견 교사들이 손 사레를 치며 맡지 않으려는 수업과 잡무와 행정업무를 모두 감당해야 한다. 젊은 교사들이 보기에 중견 교사들은 꼰대에 불과하다. 그들이 아직도 성과급제의 평등화 따위는 전교조 시절을 추억하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피곤한 나르시즘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제 교사들에게 꼴통들과의 만남은 삶의 지평이 넓어지는 경험이 아니라 적대감을 쌓는 경험으로 바뀐 것이다. ‘남’이 ‘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이 ‘적’이 되었다.” (p.273)

 

IMF이후 교사직은 가장 인기 있는 직업이 되었다. 교대와 사범대의 합격점수는 수직 상승했다. 책에서도 여러 번 언급하지만 지금의 젊은 교사들은 모범생이 다수였다. 학교생활이 단정하고 집에서도 큰 문제 일이키지 않고 대학에서도 임용을 위해 열심히 공부한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붕괴된 학교의 교실에서 만나는 말 안 듣고 반항하고 수업에 따라오지 못하는 학생들은 외계인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공감할 수도 없는 완전히 다른 존재들이다. 적어도 이른바 꼴통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것조차 불필요한 것으로 인식한다. 물론 모든 젊은 교사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인 경향성을 말하는 것이다. 나름 이해는 간다. 어떻게 공부하고 경쟁해서 된 교사인데, 나보다 쉽게 학교에 들어온 나이 많은 선생들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만 하고 있으면 열불이 난다. 어차피 30-40명의 학생들 모두를 이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대한 따라오는 학생들에게만 최선을 다한다. 예전처럼 정년이 확실히 보장 되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기간제로 들어 왔다면 학교의 관리자, 교장이 지시하는 것은 충실하게 이행해야 한다. 그것이 그들의 살 길이기 때문이다.

 

 

 

 

특별재난지역 선포

 

무너진 학교를 살펴봤다. 학교의 무력감과 교사들의 불신은 붕괴를 가속화하고 현실화 했다. 그렇다면 공교육은 사라져야 할까? 모두가 대안학교와 홈스쿨링으로 아이를 양육해야 할까?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답을 모르겠다. 지금 이 시점에서 누가 나와서 답을 할 수 있을까 싶다.

 

“나는 이 책을 시작하며 교사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둥그렇게 모여 앉아야 한다고 말했다.” (p.311)

 

저자는 아무리 무력감을 가지고 서로를 불신한다 해도 교사들이 먼저 나서야 할 것을 종용한다. 정치적 견해나 교육적 가치관이 다르다 할지라도, 학교 관리자의 전적인 권한에 묶여진 직장인으로 전락했다 할지라도 교사들이 먼저 나서야 함을 피력한다. 전교조니 사학법이니 이런 문제 다 집어 치우고 폐허가 된 학교를 둘러앉아 제대로 응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도 알고 당신도 아는데 모른척하며 살아가는 무책임을 떨쳐야 한다.

마지막으로 내 개인적 견해는 교사의 정년을 지금에서 10년 이상 단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40대 중반 이후에는 학생들과 소통이 어렵다. 젊은 교사의 신규 채용이 늘어야 단지 공부 잘하고 모범생만이 교사가 될 수 있는 지금보다는 더 다양한 교사들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날 수 있다. 학교가 확실하게 달라지지 않는 이상 학교의 붕괴를 막을 길은 요원하다.

또 하나 마냥 비난하고 욕만 해서는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다. ‘저 아이의 부모가 저렇게 하니까 내 아이도 그렇게 해야지’라는 생각으로만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다. 나 먼저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내 아이만큼은, 내 아이가 다니는 학교와 내 아이를 맡고 있는 교사에게 만큼은 나부터 먼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실컷 학교 욕하고 교사 욕하고 남는 것은 절망감밖에 없다. 모두가 두려워한다고 해서 학교를 없앨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 살려내야 한다. 폐허를 보수하고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머리를 맞대야 한다.

 

학교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해야 한다. 모른 척, 아무일도 없는 척, 내게는 어떤 책임도 없는 척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심각한 재해로 인해 폐허가 되었음을 인정하고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하고 선포하는 것이 우선이다. 인정한 후 머리를 맞대고 둘러앉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한다는 것은 반드시 복구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다. 학교를 이대로 두고 볼수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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