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얼굴의 예수 - 김용민, 인간 예수를 좇다
김용민 지음 / 동녘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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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당선 이후 희한한 일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중 유독 불편했던 것은 박정희 추모예배였다. 물론 대통령이나 되는 사람이 그것을 지시하거나 종용했을 리는 만무하고 알아서 자발적으로 박정희 추모예배를 실행했을 것이 틀림없다.

추모 예배에는 박정희에 대한 찬양 발언이 한가득 쏟아졌다고 한다. 박정희로 인해 대한민국이 축복을 받았고 가난에서 벗어났다고 하고 어떤 목사는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도 무조건 순종하라며 독재했다. 우리나라도 독재해야 한다.”라는 비이성적이고 비성경적이며 비역사적인 발언도 했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일부 그릇된 사람들이 박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 대통령을 괴롭히고 있지만 그런 방해를 이겨 내고 박근혜 대통령이 큰일을 해낼 것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이들은 예배 후 박 전 대통령의 사진 앞에 헌화까지 했으며 박정희 추모예배를 준비한 박정희대통령추모예배준비위원회는2017년 박정희 대통령 100주년 탄신일까지 매년 추모 예배와 준비 모임을 이어 갈 계획이라고 했다고 한다.

자,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예수적인가? 교회적인가? 나는 기독교인이다. 나름 이성과 합리와 상식을 가지고 위태하지만 지금껏 내 신앙을 고수하고 확립시켜 왔다. 그런데 내가 믿는 기독교와 저들이 믿는 기독교가 과연 같은 것인지 모르겠다.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박정희를 추도하고 추모하며 내 기준으로는 거의 신격화하는 것에 다름없는 행위를 하는 것이 예배인가? 제사인가? 나는 구분하지 못하겠다.

이 어이없고 황당무계한 촌극에 대해 네티즌들은 비난을 폭주했다.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말이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어떤 논평을 내놓았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그냥 개인적 일탈로 치부하고 입 다물고 있으면 되는 문제인가?

이 촌극은 한국 기독교의 병든 모습을 만천하게 드러내는 단면이다.

 

 

“나치 정권 당시 90퍼센트에 이르는 독일 교회는 나치의 독재와 혹세무민, 전쟁 범죄, 학살에 침묵했다. 오히려 하나님이 영적인 구원을 위해 ‘예수’를 보냈다면, 사회·경제적 구원을 위해 ‘히틀러’를 보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p.161)

“박정희 추모예배는 상징적이다. 그것은 한국 기독교 보수 기득권 세력의 숨겼던 발톱이자 민낯이었다. 마음속에 숨은 본성을 드러낸 것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이 좋으며, 이는 하나님의 방법과 다르지 않다고 떠벌릴 지경이다.” (p.211)

 

이 책 「맨얼굴의 예수」를 펴낸 김용민씨는 이 촌극을 일종의 상징으로 인식한다. 노무현 정권 시절 사학법 개정을 두고 그렇게 한나라당과 한통속이 되어 난리를 치던 기독교계, 이명박 대통령 후보를 노골적으로 지지하고 투표를 종용하던 기독교계가 날개를 단 것이다. 숨겨진 발톱으로도 모자라 마음껏 하늘을 나는 날개를 달아줄 꼴이라는 시각이다. 동의한다. 아찔했을 것이다. 그들이 지지하고 그들의 텃밭을 자처하는 기독교계에서는 김대중,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고 한나라당이 야당으로 전락하는 일이 지옥문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무서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 위대한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된 지금, 그들은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다. 영원히 이들과 함께 무소불위의 권력 편에 서는 것. 그것이 한국 교회가 그토록 욕을 먹고 비판을 받고 있는 주된 이유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그런 목소리에는 귀를 닫기로 한 것일 테다. 물론, 박정희 추모예배를 한 사람들이 한국 교회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다. 자신들도 민망했는지 애초 추모예배에 참석하기로 했던 사람들이 참석하지 않기도 했고 참석하지도 않았는데 이름이 올라간 사람들은 항의를 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공공연하게 역사적으로 비판을 받는 박정희를 추모하고 그를 신격화하는 예배를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다는 것에 나는 주목한다. 그 용기가 그들과 내가 함께 보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예수의 가르침과는 반목하기 때문이다. 악과 싸우고 정의를 위해 힘쓰고 고아와 과부로 대변되는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고 사랑하며 그들을 끌어안아야 하는 본질적 교회의 모습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이 모든 범죄적 행위의 배경에는 범죄를 묵인하고 심지어 동조하기까지 하는 교인들이 있다." (p.151)

 

박정희 추모예배에서 쏟아진 말 중 맞는 말도 있다. 박정희 통치기간 중 경제발전과 더불어 교회의 급격한 성장도 있었다는 것. 경제발전이 되면 그에 비례해 교회성장이 동반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박정희는 독재를 했다. 시민들을 억압하고 짓눌렀다.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맞설 수 없는 강력한 독재권력 앞에 존재론적 허무를 느껴 신에게 귀의했다는 논리인가. 그렇다면 교회는 독재를 행한 박정희를 옹호했거나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모른 체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정치와 교회가 결탁하면서 사람들이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종교적인 것에 집중하도록 방조했다면 그것은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가.

한국 교회의 교인들은 박정희와 전두환 독재를 경험하면서 동시에 개별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했다. 그래서 정치지도자의 비위와 잘못에 대해 함구하는 것이 유전이 되어 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더군다나 교회 지도자들의 비위와 잘못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입을 다물고 더 나아가서는 그 교회와 교회 지도자의 비위와 잘못을 파헤친 언론사와 언론인에 대해 무차별적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교회 돈을 횡령하고 불륜을 저지르고 일반인들의 공분을 사는 대형 건축을 실행해도 교인들은 그저 가만 있는다. 혹시 교회 내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들리면 과감하고 신속하게 잘라낸다. 그리고 다음 주 예배 시간에 교회 의자에 앉아 그 목사가 하는 말에 아멘으로 답한다.

내가 다니는 교회도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교회다. 대부분 지역의 중·대형 교회가 그렇듯(서울과 수도권의 일부 중·대형교회를 제외하고) 노년층 교인이 많다. 이제는 더 이상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버지 어머니가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무조건 교회에 다니는 젊은 교인은 많지 않다. 그저 관성대로 습관대로 교회에 다니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자연스레 교회에 발길을 끊는다. 예배 시간이 되어 예배당 뒷자리에 앉아서 앞을 보면 교인들이 거의 노년층이다. 점점 유럽의 교회를 닮아가고 있는 듯하다. 각 교회마다 다음세대를 준비하고 다음세대를 위한 대책을 내놓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일 경우가 많고 더 심각한 것은 왜 젊은이들이 청·장년층이 교회를 떠나는지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교회 자체가 병들어 있으니 더 이상 젊은이들은 교회를 찾지 않는다. 매번 똑같은 얘기가 울려 퍼지는 예배당 안에서 참된 안식과 위로를 받지 못한다.

 

 

“출석이나 봉헌 또는 교회 봉사를 하지 않으면 무슨 대역죄를 저지른 양, 지옥에 갈 것처럼 교인들에게 죄의식과 공포감을 불어넣는다. 결국 신을 빙자한 종교 산업의 종사자가 되는 것이다.” (p.7)

 

이런 식의 교인 확보 전략도 더 이상은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지금 교회들을 보면 다음 세대에 대한 전략이 전무한 것 같다. 지금 안정된 것처럼 보이는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에 급급하다.

 

 

“우리가 기적에만 주목하고 몰두하면, 이 이야기의 진짜 뜻을 놓칠 수 있다. 오병이어의 진의는 굶주린 백성의 마음을 헤아렸던 예수의 측은지심이다.” (p.120)

 

일반인도 대부분 알고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두고 신앙의 정체성에 따라 다양한 분석과 자기화를 한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들은 예수가 행한 당연한 기적이라 생각하고 성경의 우화와 예시를 상징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선행을 보고 그 곳에 모인 오천 명의 사람들이 각자의 방법대로 나눔을 실천한 나눔의 기적으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다. 책에서 소개하는 성서학의 국제적 권위자인 조철수 교수는 최초 아람어로 쓰인 성경이 지금 전 세계로 퍼져 나간 헬라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오역이 발생해 다섯 명의 천부장(당시 계급 중 하나)이라는 단어가 오천 명이라는 단어로 잘못 쓰였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김용민씨의 말대로 자신을 따르는 사람이 다섯이었든 오천이었든 그 굶주림과 아픔을 그대로 자신의 것으로 감싸 안은 예수의 마음이다. 한국의 샤머니즘과 결합된 기복신앙이 깊이 뿌리내린 한국 교회는 예수의 기적에 집중한다. 신약성경 뒷부분 바울의 서신서들에 서도 어김없이 기복을 추려낸다. 그것이 간편하고 이해하기 쉽다. 예수를 잘 믿는 것보다 교회에 잘 출석하고 목사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잘 따르며 열심히 봉사하고 빠짐없이 헌금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 생각한다. 심지어 교회 목사들 중에서도 그렇게 설교하는 이들도 있다. 병들어 있는 교회에서는 병들고 값싼 복음만이 울려 퍼진다. 예수가 행한 기적의 본질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따져 보지 않는다.

 

 

“누미노제(Numinose) - 인간이 거룩한 존재 앞에 섰을 때 자신이 진실로 피조물임을 존재론적으로 체험하는 것 - 여기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역사 비평적 성서 읽기와 치밀한 신학공부” (p.115)

 

한국교회사에서 최초의 설교 비평을 시도했다는 평가를 받는 정용섭 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이 한 말이다. 신비주의적이고 기복적인 것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역사 비평적 성서 읽기와 치밀한 신학 공부.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 젊은이들조차 성경을 비평적으로 보지 않는다. 성경을 잘 읽지도 않을뿐더러 다른 신앙 서적도 잘 읽지 않는다. 그냥 습관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출근하거나 학교에 가는 것처럼 일요일에 일어나 씻고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성경을 비평하는 것, 설교를 비평하는 것 자체를 죄악시했다. 인간에게는 전적인 믿음만 강조 되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성경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고 교회와 사회를 들여다 볼 수 없었다. 예배당 안에서 울려 퍼지는 설교는 일요일을 제외한 6일을 살아가는 사회의 그 어떤 것에도 적용될 수 없는 교회 안의 울림일 뿐이었다. 일요일에 말끔하게 차려 입고 출석한 교회에서는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울며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기도 하며 간절하게 아멘하기도 하지만 월요일의 일상은 전혀 변화가 없고 일요일의 감격이 전혀 미치지 않는 껍데기 신앙이 반복되는 것이다. 아예 “나는 전적으로 교리를 믿고 교회를 옹호한다.”라는 생각이라면 더 성경을 읽지 않아도 공부하지 않아도 크게 상관은 없다. 열렬하고 충실한 교인이 될 수 있다.

 

 

“공부하면서 예수를 믿자고 말하고 싶다. 많은 이들은 왜 하나님의 자신에게 지성과 양심을 주었는지 고찰하지 않고, 덮어 놓고 믿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p.213)

 

그러나 병들어가고 무너져가는 한국 교회를 회생시킬 수는 없다. 가라앉는 배 위에서 여전히 구슬픈 찬송만 부르고 있는 꼴이 될 것이다. 김용민씨의 말에 동의한다. 예수 믿는 사람들,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 특히 젊은 교인들이 공부를 좀 했으면 좋겠다. 믿음을 주셨다면 당연히 지성과 양심을 주신 것이 분명한데도 교회와 성경, 믿음에 대해서는 지성과 양심을 적용하지 않는다. 개독, 개독 소리에 움츠러있기만 할 뿐 나서서 해명하지도 더불어 나는 아닌 척 함께 개독이라 비아냥대지도 못한다. 자신이 없고 용기가 없다. 몰라서. 나도 잘 모른다. 성경을 몇 번 읽고 신앙서적은 물론 인문학·사회과학·철학 책을 많이 읽어도 나는 늘 내 신앙에 대해 점검한다.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성경은 읽을수록 모르겠다. 출석하는 교회가 아니더라도 내가 듣고 싶은 설교가 있으면 찾아서 듣는다. 비슷한 생각과 신앙관을 가진 친구와 자주 이야기를 나눈다. 신앙은 물론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서도 가감 없는 대화를 나눈다. 깨닫는 것도 많고 새롭게 알게 되는 사실도 많다. 찾지 않고 노력하지 않으면 신앙은 정체한다. 습관과 관성으로 출석하는 텅 빈 껍데기 신앙으로는 한국 교회의 몰락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으로 맨얼굴의 예수를 만나는 일은 더욱 요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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