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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 교사들과 함께 쓴 학교현장의 이야기
엄기호 지음 / 따비 / 2013년 9월
평점 :
붕괴
학교가 붕괴됐다. 교실도 붕괴됐다. 교사도 붕괴됐다. 부모도 붕괴됐다.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라는 직설적인 고백은 이미 들었다. 공립 중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딸을 대안학교에 보내고 있다. 그 친구는 가끔 가지는 모임에서 괴로워하며 학교를 고백한다. 교사 생활을 한지 7년째인데 매해 붕괴의 속도는 가중되고 매해 바뀌는 교육제도만큼 순식간에 저 만큼 더 붕괴되고 있는 학교의 민낯을 안타까워하며 토로한다.
따지고 보면 학교의 붕괴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심한 감기몸살이 오기 전 머리가 지끈거리고 오한이 시작되며 팔다리가 쑤시기 시작하는 것처럼 학교의 붕괴도 이미 표면화 되어 있었다. 너도 나도 그 붕괴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 것 같았고 ‘그렇게 될 줄 알았다.’라고 미리 예언을 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에서부터 ‘그러면 이제 어쩌나.’라고 마지막 희망을 놓아버린 안타까운 탄식을 하는 사람에까지 다양한 의견이 많았다. 늘 그렇듯이 정부와 교육당국은 뒤처리하거나 쉬쉬하며 묻어버리기에 급급했고 자신들의 이전 정부와 이전 교육당국자들 혹은 이전 교육정책에 책임을 떠넘기는 것으로 면피하려 했다.
“지식 습득의 장으로서도, 계몽의 공간으로서도, 신분 상승의 도구로서도, 다양한 재능을 발견하고 계발하는 곳으로서의 의미도 상실한 학교는, 나아가 다양한 사람을 만나 폭넓은 경험을 하는 ‘성장의 공간’, ‘삶의 공간’으로서의 역할도 상실하고 있다.” (p.25)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기쁨이 있었다. 주로 세계지리, 역사, 사회문화, 정치경제 시간이었는데 세상이 돌아가는 꼴을 알아가는 것이 짜릿하기도 했다. 학교 수업에만 충실해도 나름의 성적을 얻을 수 있었고, 설익은 채였지만 한 사람의 사회인이 되어 간다는 뿌듯함도 있었다. 물론 내가 겪은 학교도 저자가 겪은 학교만큼 나쁘고 비상식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완전히 붕괴되지는 않았다. 지금은 총체적으로 붕괴하고 있는 것이다.
“교실과 함께 교무실 또한 붕괴하였다. 교실만 침묵의 공간이 된 것이 아니라 교무실 역시 침묵의 공간이 되었다. 반교육적인 교육 행정이나 지침에 대해 집단적으로 항의하는 풍경도 사라졌다.” (p.137)
저자는 이 책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에서 붕괴된 교무실에 집중 한다. TV에서 신나게 떠들어대는 교권붕괴 같은 어설픈 인식이 아니라 직접 일선 교사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생각해보면 교사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본 적은 별로 없었다. 친구로부터 듣게 되거나 자식들로부터 듣게 되거나 TV를 통해 전달되는 학교에 대한 이야기와는 또 다른 측면의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 들을 수 있다. 더 가슴 아픈 것은 교사들의 이야기가 더 실제적이고 참담하다는 것이다. 학교에 대해 좋지 않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교무실에 대한 기억도 좋지 않다. 그곳에서 체벌을 받거나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교사들이 수업을 제외하고 학교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교무실인데 그곳 또한 붕괴되었다는 사실을 책을 통해 알게 된다. 저자가 말하는 침묵은 붕괴된 현장을 바라보며 하릴없이 쳐다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묘사한다. 교실도 붕괴되고 교무실도 붕괴된 학교에서 도대체 어떤 작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얼핏 생각하면 교사의 진짜 임무는 간단해 보인다.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교사에게 정작 중요한 임무의 하나는 학생들을 감시하고 돌보는 일이다.” (p.155)
“학교의 주된 역할이 교육이나 성장 혹은 훈육에서 학생들의 생명을 ‘안전하게 관리’하는 것으로 전환했음을 의미한다. 이제 학교에서 학생들을 분류하고 구분하는 것은 ‘성적’만이 아니라 ‘마음’이 되었다.” (p.107)
학생을 가장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들이 교사다.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힘든 자격을 얻어 학교에 취직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제는 가르치는 것은 고사하고 학생들을 감시하고 돌보는 돌보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나의 군 생활도 그랬다. 큰 뜻을 품고 장교로 입대한 군 생활은 애초의 기대와 장교양성학교에서 배운 교육과는 완전히 달랐다. 내가 지휘하는 30여명의 병사들을 돌보고 감시하는 것이 가장 큰 임무였다. 훈련, 교육, 작전보다 훨씬 중요한 명령이 되었다. 잠을 쪼개어 병사들과 상담하고 그것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병사들의 부모와 정기적으로 통화도 해야 하는 병사 돌보미였다. 지금의 교사와 나의 장교 군 생활을 직접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이 사실이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은 듯하다.
제대로 교육하고 훈련시켜 멋진 군인을 만드는 것보다 2년 남짓 무탈하게 병사들을 관리하고 돌보는 것에 집중했던 것처럼 교사들은 학생들을 돌봐야 한다. 어차피 한 반에서 수업에 집중하는 학생들은 소수다. 제대로 된 수업을 진행할 수 없는 붕괴된 교실에서 교사는 두려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도 군대는 명령체계가 있어 오히려 질서를 잡고 관리하는 것이 수월했다. 지금의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은 더 이상 이전의 교사와 학생 사이에 존재했던 질서와 관계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슬픈 현실이다. 그리고 교사는 분명히 힘들다.
무력감
처음에 이야기했던 일선 교사 친구에게 가장 듣는 말이 무력감이다. 수업을 하러 들어가서 나올 때마다 그 무력감이 쌓인다고 했다. 제대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손에 꼽을 정도고 자는 학생, 딴 짓하는 학생, 일부러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 학원 숙제를 학생 등 ‘도대체 내가 왜 여기에 있나?’라는 자괴감으로 괴롭다고 했다. 책에 등장하는 많은 교사들도 이것을 토로한다. 무력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교육에 대해, 학생들을 만나는 것에 대해 열정을 가지고 교육현장에 뛰어든 교사들이 어떻게 소진되며 고립되고 있는지를 이 책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p.11)
저자는 교사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교사들이 어떻게 소진되고 고립되었는지를 분석한다.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돌보는 것에 매진해야 하는 교사들은 처음 가졌던 사명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저 큰 탈 없이 학기를 보내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붕괴된 교실은 더 이상 스승과 제자의 관계구도를 희망할 수 없게 되었다. 교사들은 직업인으로 교탁에 서고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끌려나와 앉아있는 것에 불과하다. 붕괴된 교무실은 교사들 사이갈등의 골도 깊게 만들었다. 마지막 부분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학생을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교사는 칭찬을 받거나 인정을 받기는커녕 교사들 사이에서 왕따가 되는 현실이라고 한다. 가속화된 학교의 붕괴는 교사들의 무력감을 배가 시키고 있다.
“과거에도 학교는 관리자의 왕국이었지만, 학교단위경영책임제의 도입과 더불어 이제는 기간제 교사를 선발하고 해임하는 권한에서 교사 초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권한을 관리자가 가지게 되었다.” (p.234)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같이 있었다. 중학교2학년 때 학교를 신축하면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걸어서 30분 정도 되는 거리를 중·고등학교 학생 전체가 책상을 들고 이사를 했다. 평일 수업 시간에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때는 교장 한마디가 법이었던 모양이다. 특히 사립학교는 면책특권을 가진 것인지 치외법권을 가진 것인지 시대가 변하고 정권이 바뀌어도 도무지 과거와 달라지지 않는다. 학교는 관리자의 왕국이다. 그 관리자가 학교의 형태에 따라서 교장이 될 수도 있고 이사장이 될 수도 있는데 책에서는 교장의 경우에 국한해서 설명한다. 붕괴된 학교에도 효율의 가치는 어김없이 이식되어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관리자의 제왕적 옹립은 학교를 수렁으로 빠트렸다. 학교단위경영책임제는 말 그대로 학교간 서열과 경쟁을 강화하는 정책이다. 교육당국은 일시키기 편한 것이다. 공문 한 장 내려 보내면 학교는 사활을 건다. 각종 기안을 만들어 낸다. 기간제 교사의 도입과 확장은 학교와 교사의 붕괴를 가속화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더불어 기간제 교사의 선발과 해임의 권한을 통째로 쥐고 있는 관리자는 마음껏 그들을 부릴 수 있게 되었다. 중견 교사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쓸데없는 분란을 야기하지 않아도 젊고 일 잘하고 순응 잘 하는 젊은 기간제 교사들의 숨통을 죄고 있으면 교장은 마음껏 학교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학생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지만, 학교는 학생들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p.224)
더 이상 먼저 나서려는 교사들이 없어지고 있다고 한다. 교무실 안에서도 서로 업무 이야기만 잠깐씩 나눌 뿐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나 교과과정에 대한 진지한 토론은 없어지고 있다고 한다. 교사들은 더 이상 학생들을 책임지지 않는다. 교사들의 무력감은 가시화 되고 현실화 되었다.
어차피 먼저 나서도 동료 교사들에게도, 학부모에게도, 학생들에게도, 학교 관리자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싫은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굳이 나설 이유가 없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하고 학생들과도 암묵적 합의에 의해 서로 적정한 선을 그어 놓고 그 선을 넘지 않는다.
이 숨 막히는 무력감은 무책임을 낳을 것이다.
불신
교실과 교사, 학교의 붕괴와 무력감을 가져 온 가장 큰 동기는 불신이다. 학부모가 학교와 교사를 믿지 못하고 교사와 학생이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것은 흔히 알고 있는 바다. 책에서는 교사와 교사간의 불신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 한다. 다른 곳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다.
“교실은, 모르는 존재를 만나 그들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하면서 타자가 되는 경험을 하는 공간이 아니라 다름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단절의 공간이 되고 있다.” (p.83)
요즘 중고등학생들 중 많은 아이들이 배려, 공감, 동료 등의 단어에 대한 사전적 의미와 포괄적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한다. 부모나 주위 어른들로부터 그런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경쟁, 성적, 성공 등의 단어만 들어왔던 아이들은 학교에서 나와 다른 너와 만나는 사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학교의 가장 큰 문제이기도 한 왕따 문제는 실제로 왕따를 가하는 학생들보다 바로 옆에서 왕따가 가해지고 왕따를 당하는 데도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아무렇지 않게 자기 할 일만 하는 아이들의 무관심과 단절이 더 큰 문제다. 분명히 일어나고 있는 왕따를 마치 다른 세계의 일처럼 여기는 것이다. 철저하게 배제하고 차별하여 단절한다. 일부러 그런 것이 라면 설득이라도 해볼 텐데 애초에 그렇게 프로그램 되어 있듯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더 심각하다. 이 정도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그런데 책에서는 교사들 사이에서의 불신에 대해 언급한다. 중견 교사들과 젊은 교사들 사이의 불신과 괴리는 이미 심각한 지경이라고 한다. 이미 가시화된 학교의 붕괴에 대해 누구하나 나서서 책임을 지려는 주체가 없고 학교는 완전히 파편화되어 살아 있어도 죽은 듯 견딜 뿐이다. 젊은 교사들은 체제에 순응하고 맡겨진 일(잡무, 행정업무)을 깔끔하게 처리한다. 중견 교사들은 전교조 시절을 추억하고 지금의 학교와 학생들을 비판한다. 중견 교사들은 젊은 교사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서서 불합리에 맞서지 않고 교장과 학교에 충성하는 그들이 못마땅하다. 젊은 교사들은 중견 교사들의 꼰대 짓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신들보다 더 쉽게 학교에 들어와 이제까지 지내 온 관성으로 교사 생활을 하는 그들에 대한 피해의식이 기저에 깔려 있다. 특히 기간제 젊은 교사들은 중견 교사들이 손 사레를 치며 맡지 않으려는 수업과 잡무와 행정업무를 모두 감당해야 한다. 젊은 교사들이 보기에 중견 교사들은 꼰대에 불과하다. 그들이 아직도 성과급제의 평등화 따위는 전교조 시절을 추억하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피곤한 나르시즘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제 교사들에게 꼴통들과의 만남은 삶의 지평이 넓어지는 경험이 아니라 적대감을 쌓는 경험으로 바뀐 것이다. ‘남’이 ‘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이 ‘적’이 되었다.” (p.273)
IMF이후 교사직은 가장 인기 있는 직업이 되었다. 교대와 사범대의 합격점수는 수직 상승했다. 책에서도 여러 번 언급하지만 지금의 젊은 교사들은 모범생이 다수였다. 학교생활이 단정하고 집에서도 큰 문제 일이키지 않고 대학에서도 임용을 위해 열심히 공부한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붕괴된 학교의 교실에서 만나는 말 안 듣고 반항하고 수업에 따라오지 못하는 학생들은 외계인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공감할 수도 없는 완전히 다른 존재들이다. 적어도 이른바 꼴통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것조차 불필요한 것으로 인식한다. 물론 모든 젊은 교사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인 경향성을 말하는 것이다. 나름 이해는 간다. 어떻게 공부하고 경쟁해서 된 교사인데, 나보다 쉽게 학교에 들어온 나이 많은 선생들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만 하고 있으면 열불이 난다. 어차피 30-40명의 학생들 모두를 이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대한 따라오는 학생들에게만 최선을 다한다. 예전처럼 정년이 확실히 보장 되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기간제로 들어 왔다면 학교의 관리자, 교장이 지시하는 것은 충실하게 이행해야 한다. 그것이 그들의 살 길이기 때문이다.
특별재난지역 선포
무너진 학교를 살펴봤다. 학교의 무력감과 교사들의 불신은 붕괴를 가속화하고 현실화 했다. 그렇다면 공교육은 사라져야 할까? 모두가 대안학교와 홈스쿨링으로 아이를 양육해야 할까?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답을 모르겠다. 지금 이 시점에서 누가 나와서 답을 할 수 있을까 싶다.
“나는 이 책을 시작하며 교사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둥그렇게 모여 앉아야 한다고 말했다.” (p.311)
저자는 아무리 무력감을 가지고 서로를 불신한다 해도 교사들이 먼저 나서야 할 것을 종용한다. 정치적 견해나 교육적 가치관이 다르다 할지라도, 학교 관리자의 전적인 권한에 묶여진 직장인으로 전락했다 할지라도 교사들이 먼저 나서야 함을 피력한다. 전교조니 사학법이니 이런 문제 다 집어 치우고 폐허가 된 학교를 둘러앉아 제대로 응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도 알고 당신도 아는데 모른척하며 살아가는 무책임을 떨쳐야 한다.
마지막으로 내 개인적 견해는 교사의 정년을 지금에서 10년 이상 단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40대 중반 이후에는 학생들과 소통이 어렵다. 젊은 교사의 신규 채용이 늘어야 단지 공부 잘하고 모범생만이 교사가 될 수 있는 지금보다는 더 다양한 교사들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날 수 있다. 학교가 확실하게 달라지지 않는 이상 학교의 붕괴를 막을 길은 요원하다.
또 하나 마냥 비난하고 욕만 해서는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다. ‘저 아이의 부모가 저렇게 하니까 내 아이도 그렇게 해야지’라는 생각으로만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다. 나 먼저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내 아이만큼은, 내 아이가 다니는 학교와 내 아이를 맡고 있는 교사에게 만큼은 나부터 먼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실컷 학교 욕하고 교사 욕하고 남는 것은 절망감밖에 없다. 모두가 두려워한다고 해서 학교를 없앨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 살려내야 한다. 폐허를 보수하고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머리를 맞대야 한다.
학교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해야 한다. 모른 척, 아무일도 없는 척, 내게는 어떤 책임도 없는 척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심각한 재해로 인해 폐허가 되었음을 인정하고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하고 선포하는 것이 우선이다. 인정한 후 머리를 맞대고 둘러앉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한다는 것은 반드시 복구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다. 학교를 이대로 두고 볼수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