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사람들 - 육체파 지식노동자 김남훈이 만난 30인의 인생 필살기
김남훈 지음 / 씨네21북스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호루라기라는 고발프로그램에서 김남훈을 처음 봤다. 우락부락한 외모와 덩치에 살짝 시옷 발음이 부정확한 진행자가 낯설었다. 고액세금연체자의 집을 찾아가는 세무당국자들과 동행한 그의 모습은 마치 보디가드 같았다. 으리으리한 집에 집 한 채 값인 외제차가 2대나 있는데 세금낼 돈이 없다고 버티는 뻔뻔한 사람들 앞에서 “왜 세금을 안 내는 겁니까?”라고 말했다. 양복 입고 안경낀 전형적인 공무원들 모습을 한 세무당국자들 앞에서는 배째라는 식으로 벌렁 나자빠지던 연체자가 김남훈의 한마디가 깨갱 하며 돈을 내겠다는 서약을 하는 것을 보고 고발프로가 아니라 코미디프로로 착각하기도 했다. 찾아보니 그는 몇 안 되는 현역 프로레슬러이자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 몇 권의 책을 출간한 작가이기도 했다.

이 책 「싸우는 사람들」은 순전히 그때 호루라기에 나온 김남훈씨에 대한 강렬함 때문에 구입한 것이다. 무슨 책인지, 어떤 종류인지 찾아보지도 않고 그냥 그의 책을 읽고 싶었다.

 

책은 인터뷰로 채워져 있다. 총30명의 인터뷰어를 만난 기록이다. 한겨레에 연재한 것을 책으로 엮은 것인데 30명 중에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1/3도 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발견하고 위로와 위안을 얻었다. 무슨 말이냐고? 이 책의 제목은 ‘싸우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표현대로 육체파 지식노동자이자 프로레슬러답게 강렬한 제목을 붙였다. 그러면 이 책에 등장하는 30명의 사람들이 싸우는 대상은 무엇일까? 라는 것이 책을 읽기 전 나를 사로잡은 물음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요즘처럼 하수상한 시절 싸운다라고 하면 흔히 정부나 정권, 기득권이나 잘못된 권력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이 책에서 등장하는 사람들의 싸우는 대상은 그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한계와 속물적 본성이라고 생각 되었다. 자신의 분야에서 자신의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별다를 것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는 삶 말이다. 더군다나 그렇게 자신의 자리에서 악착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을 내가 몰랐다는 것이 더욱 감사했다. 나도 알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차피 그 나물에 그 밥일 터. 내가 모르는 그 곳에서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보다 밝고 명랑한 사회를 위해 분투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새삼 놀랍고 감사했다.

 

 

“이 책을 위해서 내가 만나봤던 사람들은 대부분 호기심과 집념을 동시에 갖춘 인물들이었다. 이명희 씨도 마찬가지다. 인간에 대한 호기심과 타인을 돕고 싶다는 선의에 대한 집념. 뚜껑을 열면 잠깐 동안 공기 중에 향기를 발산하고 그대로 사라지는 선의가 아니라 끝까지 가겠다는 집념 가득한 선의.” (p.185)

 

이명희씨는 국군 생명의 전화에서 상담관으로 일하는 사람이다. 캐나다 캘거리 대학교 심리학과 졸업하고 횃불트리티니신학대학교대학원 기독교상담 졸업했으며 상일여중 외 중·고등학교 집단상담사, 서울특별시 청소년상담지원센터 청소년동반자 상담사, 다문화상담사, 교도서 상담, 인터넷중독예방전문강사로 일했다. 22사단 병영생활전문상담관을 거쳐 현재 국방부 생명의 전화 상담관으로 일다. 외국에서 유학도 하고 잘나가는 영어강사직을 그만두고 많은 사람들이 별로 내켜하지 않는 국군 생명의 전화 상담일을 시작했을 때 주위에서의 반대 및 우려는 당연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의 일에 대한 사명과 좀 더 나아질 병영 환경에 대한 긍정적인 믿음이 있었다고 한다. 김남훈씨의 말처럼 일시적으로 생기는 호기심이 아니라 꾸준히 그 신념을 지켜갈 수 있는 용기와 선의가 동반된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누가 강요하거나 주입할 수 없는 믿음 말이다. 오롯이 내 것으로 소화하고 사명으로 발전시켜야 가능한 그 선의의 믿음. 그런 친구가 내게도 있다. 돈 안 되고 고생하는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친구다. 벌써 4년째 되었다. 나는 오로지 사명감만으로 일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어설프게 위로를 하려 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아니었다. 당연히 사명감도 있지만 그 일 자체를 즐긴다는 것이었다. 이 책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아? 그런 거 없는데요. 네. 전 그냥 재미에요. 재미. 저한테 사막은 그냥 살짝 위험한 롯데월드 같은 거죠.” (p.25)

 

2002년 사하라 사막 완주를 시작으로 고비 사막, 아타카마 사막, 남극 등의 오지 레이싱을 완주하며 국내 최초 사막 레이스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오지 레이서 유지성씨도 그렇다고 한다. 그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이것이다. ‘왜 이런 일을 하세요?’, ‘왜 오지를 선택하신 거예요?’ 멋지게 말하려고 한다면 질문하는 사람이 감탄할 정도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만다 오지성씨는 허탈하고 짧은 답을 한다. ‘재미있어서요.’ 간단하고 명료하다. 군더더기가 없다. 만약 내가 언론사 직원이어서 인터뷰를 하러 왔는데 저런 대답을 한다면 열불이 나겠지만 살짝 위험한 롯데월드 가는 심정으로 세계의 오지를 다니는 그의 순수함의 가공할 위력이 놀랍다. 오지성씨 챕터를 읽으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얼마나 간단하고 명료하게 살고 있는지를. 맺고 끊는 것을 잘 하고 우유부단한 것을 저주하며 시간 약속을 칼 같이 지키고 면전에서 잘못을 지적하는 나 같은 이는 반드시 간단하고 명료해야 한다. 그런데 잠시 나를 돌아보니 구질구질했다. 내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아니 보지 않으면서 남의 눈에 티끌에는 목숨 걸고 달려드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무섭고 아찔했다. 오지성씨가 오지를 재미로 찾아다니며 그것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간단함과 명료함을 견지할 수 있었듯이 나 또한 좀 더 넓고 낮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타인을 향한 배려에 재미를 담을 수 있다면 지금의 ‘나’보다는 더 간단하고 명료한 ‘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는 약 2천 명의 판사가 있다. 그리고 300여 명의 국회의원이 있다. 대개 개체수가 적을수록 더 존중을 받는 법. 그런 식으로 따지면 국내에 있는 현역 프로레슬러는 12명 남짓이니 대체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할까.” (p.115)

 

WWA 소속 국내 유일 20대 프로레슬러 김민호씨도 마찬가지다. 12명 남짓한 한국의 현역 프로레슬러로 활동하면서 그 꿈을 잃지 않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재미다. 재미있어서 하는 일이다. 비록 2천 명의 판사만큼, 300명의 국회의원의 절반만큼도 인정받지 못하는 직업이지만 그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조금 빨리 하는 편법이 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한번 그렇게 하면 되돌릴 수 없어요. 어떤 일이든 시간을 들여서 경험과 기술을 누적해야 하는데 그걸 그냥 편법으로 지나가 버리면 제가 어떻게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겠어요.” (p.109)

 

12년 만에 주짓수 블랙벨트 따낸 그래플러 팩토리 관장 남상운씨의 이야기에서는 정직함과 성실함을 배울 수 있었다. 주짓수 블랙벨트는 쉽게 딸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무진장 어려운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조금 빨리 하는 편법도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는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 거의 모든 기술과 노동이 그렇듯이 시간을 들여서 노력하고 연마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몸으로 하는 노동과 기술, 머리로 하는 노동과 기술 둘 다에 적용되는 원리다. 그는 자신이 기술을 연마해 제자들에게 그 기술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에 사명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정직하게 기술을 배우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말한 편법을 우리가 일상에서 얼마나 자주 마주하나. 애써 고민하고 토론한 팀의 결과물을 부하직원들 이름을 쏙 빼고 자신의 이름으로 가로채는 상사들 하며 어떻게든 쉽고 간편한 길만 찾아다니는 승냥이들은 또 얼마나 많나. 국가를 이끌어갈 사회지도층 인사들과 그 아들들의 병역기피와 위장전입, 세금탈루 등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과정과 시간을 생략한 채 얻고 싶은 결과에만 천착한 결과다.

 

 

“그는 일 년에 서너 번씩 태국으로 건너가 무에타이 수련을 하고 이 년에 한번 씩은 브라질에 가서 두세 달씩 주짓수를 수련한다. 이미 기반이 잡힌 체육관 관장으로서는 보기 힘든 일이다.” (p.109)

 

남상운 관장은 지금도 일 년에 서너 번씩 태국에서 무에타이를 배우고 이 년에 한번 씩 브라질에서 주짓수를 배운다고 한다. 개업을 한 의사가 일 년에 한번 씩 졸업한 의대에 가서 수련의 체험을 하고 이 년에 한번 씩은 경영대에 가서 병원 경영에 대한 공부를 하는 것이다. 다른 개업의가 본다면 미쳤다고 할 일이다. 다른 체육관 관장이 본다면 남상운 관장의 저런 모습은 시간낭비일지도 모른다. 괜히 시간 들이고 돈 들이는 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남상운 관장은 배우고 익히는 것을 지속한다. 시간을 들이고 돈을 들여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 한창 잘 되고 있는 체육관에 관장이 한 달씩 두 달씩 자리를 비운다면 그것만으로 체육관의 손해는 엄청난 것이다. 한국의 학부모들 그런 것에 굉장히 민감하다. 유명하다는 학원 원장의 직강에는 벌떼처럼 아이들을 집어넣으면서 그 원장이 없는 강의나 요일에는 아이들을 보내지 않는다. 그러니 그런 손해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남관장은 태국으로 브라질로 날아가는 것이다. 주위의 오해와 걱정, 뻔 하게 보이는 손해와 위험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30명의 사람들 모두 동일하다. 그들은 좀 더 편하고 좀 더 돈 많이 벌고 좀 더 인정받고 싶은 자신의 욕심과 본성, 주위의 기대와 우려, 오해와 불신들과 싸우는 사람들이다. 억척스럽게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를 찾고 자신만의 정직과 겸손함으로 싸우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더 배울 것이 많은 사람들이다.

나도 내가 싸울 것들을 생각해 본다. 바깥보다 안이 더 시급함을 깨닫는다.

나 자신의 것들과 싸울 생각에 벌서부터 오금이 저린다.

길고 지난한 싸움이 되지 않았으면 싶다. 나름 재미를 찾을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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