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가 아니면 다 실패한 삶일까 - 철학자와 심리학자의 인생질문 20 Art of Lving_인생의 기술 4
줄리언 바지니.안토니아 마카로 지음, 박근재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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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선생님이 없다.

서른을 훌쩍 넘겨, 이제는 한 아이의 아비가 되었는데도 말이다.

나는 정말 선생님이 없다.

“선생님, 정말 힘드네요. 후... 선생님은 어떻게 사셨어요? 이럴 때 어떻게 하셨어요?”

라고 죽을 만큼 힘든 그때, 술 한 잔 기울이며. 아니, 술 한 잔 아니더라도 전화로라도. 아니, 카톡(참, 카톡은 안되지. 텔레그램?)으로라도. 아니면 밤 늦게 집 앞에 찾아가서라도.

 

나는 그런 선생님이 없다.

대학 3학년, 휴학 1년을 결정하고 졸업 후 학사장교로의 진로를 변경할 때 상의할 선생님이 없었다. 전역 후 이틀만을 쉬고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의논할 선생님이 없었다. 돈을 잘 버는 직장을 그만두고 싶었을 때, 진지하게 고민을 쏟아낼 선생님이 없었다.

친구 놈이 스승의 날을 맞아 선생님을 찾아뵈었다는 얘기를 들을 때 배가 아프다. 나는 왜 저런 선생님이 없을까. 짜증이 난다.

모르겠다. 나는 좋은 학생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던 것 같은데, 선생님들에게는 더 잘해주고 싶은 학생? 관심이 가는 학생? 평생의 제자로 삼고 싶은 학생은 아니었나 보다. 당연하게 생각되는 이치와 상식을, 당연하게 할 수 있는 의견을 제시했을 뿐인데, 그 선생은 영화에서처럼 시계 줄을 풀더니 폭력을 가했다. 맞으면서도 내가 왜 맞는지 몰랐다. 어린 나이였지만 ‘이건 분명 훈육이 아닌 폭력이다.’라고 생각되었다. 그 선생으로 인해 내 학창시절을 거친 모든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후로 ‘선생님, 교사’라고 하는 이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혐오와 비하, 냉소와 조롱이 체(體)화되었다.

사회생활을 하고 ‘그렇지 않은 선생님, 교사’ 분들은 여럿 만났지만 내 편견은 쉽게 걷히지 않았고, 당연히 ‘내 선생님’은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다.

슬픈 일이다.

 

 

 

이 책 「최고가 아니면 다 실패한 삶일까」는 내게 선생님은 될 수 없지만, 곁에 두고 반복해서 꺼내 보고 생각하고 또 고민하고 성찰할 만한 문장과 권유로 가득한 책이다.

 

이 책은 자기계발서가 아니다.

두 명의 저자는 책의 앞뒤에서 분명히 얘기한다.

자기계발·자기계발서라는 것이 극동아시아,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에서만 지난한 열풍을 이어가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프랑스와 유럽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한 번 휘익~ 하고 불었다는 사실을 가지고 ‘유럽도 별 수 없구만~’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프랑스에서도? 아니 그럼 자기계발서가 맞는 건가? 다시 사서 봐야 하나?’라고 생각해야 할지.

웃픈 일이라고 밖에.

 

 

 

“정말 인내심만 기르면 행복해질까?” (p.11)

 

 

철학자와 심리학자가 펼쳐내는 인생 이야기는 단지 자신들의 전공만 늘어놓거나 허접스러운 위로 따위를 늘어놓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계발과 자기계발서를 펴낸 유명한 사람을 그토록 비판하면서도 고작 대중들에게 하는 것이 간단한 윽박지름 정도에 불과한 가학적 상담을 내놓는 강 모 철학자와도 다르다. 쉽게 정의내리지 않고 간단하게 판단하지 않는다. 그래서 국내 자기계발서에 적응된 사람들에게는 피동적인 고객의 니즈 정도를 파악하는 백화점 영업파트 정도의 얄팍한 꼼수로 보일 수도 있고, 국내 자기계발서를 그토록 경멸하며 비판하는 강 모 철학자와 같은 이들에게 적응된 사람들에게는 차갑지고 뜨겁지도 않은 뜨뜻미지근한 무책임함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앞서도 말했듯이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팔만 뻗치면 닿는 그곳에 위치해 있는. 어디까지 읽었는지 책갈피를 찾지 않아도 되는,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도 재미있고 유의미하며 공감이 가는 문장들과 고민들로 새겨진 ‘하루계명’을 얻어 밤새 뒤척이던 시나이 산에서 내려갈 수 있는. 그런 책이다.

 

 

 

“‘나’를 긍정적으로 정의 내리기 위해서는 다른 이가 아닌 스스로를 정의 내려야 한다. 계발되지 않은 잠재 능력이란 꿈의 영역에 속하는 가정된 능력에 불과한 것이지, 우리의 실제 삶의 영역에서 유령과 같이 존재하는 어떤 것이 결코 아니다.” (p.31)

 

 

더군다나 유령이 필요하지도, 그런 유령으로 불리고 싶지 않을 대다수의 현대인들에게 ‘헛된 망상’과 ‘잡히지 않을 뜬구름’ 따위를 쏟아내는 진통제도 부정한다.

 

 

 

“우리는 자기비판의 적정선을 지키지 못한 채 살아간다. 대표적인 예가 지신이 평균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다. 이것은 자신에게만 유리한 편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인데, 그 결과 남들에게는 지나치게 엄격한 반면, 자신에게는 관대해지기 쉽다.” (p.86)

 

 

명쾌하다.

뒤통수가 근질근질 할 정도로 명징하다.

나도 충분히 그런, 일정 정도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살고 있는 현대인이니까.

‘에이~ 저 정도는 누가 못해?’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젠 채 하기는!’

이런 생각, 안 해본 사람이 있나?

하지만 어려운 일이다. 누가 남들에게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한, 이 달콤하고도 만병통치약 같은 최면에서 벗어나고 싶겠나. 남들에게 지나치게 관대하고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을 이제껏 단 한명이라도 만나봤다면 모르겠는데, 나는 만나본 적이 없어서 이런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많은 철학자들이 찬양해 마지않는 니체형의 ‘초인’ 정도 돼야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도 너무 명쾌하고 명징하게 나를 그려내는 통에, 이 페이지에서 한참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인생이 반드시 경주일 필요는 없다.” (p.102)

“훌륭한 목표는 ‘해냄’이 아닌 ‘하고 있음’에 초점을 둔 것” (p.54)

“선택이 항상 완벽할 필요는 없다. 그저 충분히 좋은 정도면 된다. 그리고 만약 충분히 좋은 것도 아님이 드러난다 하더라도 나중에 가서 방향을 바꾸기만 하면 될 것이다.” (p.147)

 

 

나는 이런 얘기를 듣고 싶었다.

이렇게 ‘살고 있음’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결코 안정적인 일상과 몇 천만 원 정도의 연봉에 비해 결코, 부족하지 않는 삶임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고 믿고 따르는 선생님에게 들을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런 사람이 당장 없으니 이 책으로 만족할 수밖에. 모두가 한쪽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는 이 미친 경쟁의 시대에서 다소 뒤쳐진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렇게 하루하루 밀어내는 삶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음을, 맞다. 그것을 격려 받고 싶었다.

 

 

 

“철학사에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논증들’을 살펴보라. 그 논증들이 진행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연역적 추리보다는 귀납적 관찰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p.275)

 

 

귀납적 관찰보다는 연역적 추리에 기초한 선택을 추구했다. 경험과 기억과 습관은 때로는 적확하지만 무모하리만치 무책임할 수도 있으니까. 굳이 거시 철학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내가 밀어내 온 삶의 궤적을 가만히 돌이켜 보면, 그렇다. 아니, 그랬다. 한심하고 늦춰지는 것처럼 보였던 오랜 시간의 고민과 그것으로 인한 고통스러운 선택의 순간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것이다. 하나하나 찾아내 들춰내어 톺아보지 않더라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 그거다.

지금이라도 ‘나만의 선생님’을 만나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찾아지지 않는 것에 힘을 쏟아 살기에는, 당장 내가 힘을 쏟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우리가 남길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걸작은 하루하루를 제대로 사는 것이다. 그 외의 다른 모든 일들은 보조물이고 부가물일 뿐이다.” (p.133)

 

 

500년 전 몽테뉴 선생께서 이렇게 멋진 말을 하셨단 말이지?

나는 오늘도, 오늘의 걸작을 온 몸으로 써 내려 가고 있다.

그래, 그것으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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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기 활동 마감 페이퍼를 작성해주세요!

1. 가장 기억에 남았던 책

 

 

 

 

 

 

 

 

 

 

 

 

 

 

 

14기 신간평가단 활동을 하면서 쓴 리뷰 중에 <이달의 당선작>에 당선되었다고 해서 이 책을 꼽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꽤 읽기 힘들다. 사회학적 철학적 고찰이 가득 담긴 책이라서 그렇다. 근대와 현대를 지나오며 우리가 살아온 도시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탄생하고 소멸했는지에 대한 고찰이다. 책을 읽으며 어떻게 하면 '내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싶었다. 갑자기 '동네 바보형'이 떠올랐다. 

'동네 바보형' 어린 시절 학교를 파하고 동네 놀이터나 공터에 모여 저녁 먹으러 오라는 엄마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뒹굴고 뛰어 다니며 놀았다. 그때 그곳에는 친구들과 형들과 동생들과 함께 '동네 바보형'이 있었다. 늘 그곳에 있었다. 딱히 무시하지도 딱히 같이 놀지도 않았지만 괴롭히거나 때리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냥 늘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동네 바보형'이 완전히 사라졌다. 동네 놀이터와 공터와 시장과 살던 집들이 허물어 지고, 전쟁놀이를 하며 뛰어 다니던 동네 뒷산도 말끔히 사라져 버리고 아파트와 상가가 들어섰다. 그러면서 '동네 바보형'도 사라졌다.

그런 이야기다. 재미있게 책을 읽었다.

왜 '동네 바보형'들이 갑자기 사라졌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책이다.

 

 

 

2. 내맘대로 좋은 책 베스트5

 

 

 

 

 

 

 

 

 

 

 

 

 

 

이유는 앞서 설명을 길게 해서...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즈음해서 월드컵과 피파에 관련된 책이 쏟아졌는데, 이 책이 최고였다.(2권 밖에 읽지 않았지만^^;;) 피파는 국제스포츠 협회 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곳인데, 완전 양아치 집단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씁쓸하고 불쾌한 책이었다. 스포츠 관련 탐사보도 기자인 저자의 끈질긴 추적과 열정이 돋보인 책이다.

 

 

 

 

 

 

 

 

 

 

 

 

 

 

 

제목과 표지만으로 맥주를 마시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책 내용도 좋지만 출판사의 편집자와 디자인팀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책이다. 치킨과 한국의 현대사를 병행해 여러가지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책이었다.

 

 

 

 

 

 

 

 

 

 

 

 

 

 

히틀러는 이미 역사에서 지워졌다고 생각하는데, 나치의 부역에 그토록 적극적으로 발을 벗고 나선 철학자와 지식인들이 있는 지 몰랐다. 그것도 아주 유명한 사람들. 그들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 대 철학자의 후학들로 인해 미화되고 변호된 그의 나치부역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이런 저린 고민이 되는 책이었다. 이명박 정권 시절 온통 삽질한 정책들로 인해 빚지 몇 조니 하니 뉴스가 많아지고 있는데, 이명박 집권 당시 각종 국책 사업에 대해 적극 찬동하며 이론의 틀을 제공한 그 수많은 지식인들과 교수, 학자들... 어떻게 해야 할까?

 

 

 

 

 

 

 

 

 

 

 

 

 

 

 

문학의 아토포스. 개념조차 낯선 제목이었다. 시인이자 예술가인 저자의 미학적이고 관념적인 글은 어렵지만 명쾌했다. 자신들의 기본권을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투쟁현장에서도 예술가들의 예술행위가 거리낌없이 이루어질 수있다는 것에 다소 충격이었다. 좋아하는 시를 낭송하고 잘하는 미술작품을 전시하는 등. 새로운 개념이었다. 생각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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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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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에서 진행하는 팟캐스트 방송 <라디오 책다방>을 챙겨 듣는다. 활자로만 보던 작가와 저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꽤 재미있는 일이다. 문학에서부터 인문,사회,예술 분야의 책까지 다양한 작가와 저자가 출연한다. 지난 주 방송에는 「차남들의 세계사」를 쓴 이기호 작가가 출연했다. 마침 그 책을 얼마 전에 읽은 터라 방송 처음부터 끝까지 귀를 쫑긋 세운 채 집중해서 들었다. 「차남들의 세계사」는 굴곡진 한국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밀어내며 살아간 한 사내의 기막힌 블랙코미디를 그려낸 작품이다. 책을 읽는 내내 웃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한, 복잡오묘한 감정선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이기호 작가의 작품을 처음이었고, 포털 검색으로라도 한 번도 그의 이름을 입력해 본 적이 없던 터라 팟캐스트 방송에서 전해오는 작가의 목소리는 고스란히 직전에 읽었던 그의 활자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 같았다. 새롭게 책의 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작품의 소재나 내용과는 사뭇 다른 작가의 목소리가 가장 특징적이었다. 나긋나긋 하고 여리여리 하고 바람이 불면 툭 넘어질 듯, 쿵 하고 떨어지면 바스러질 듯한 목소리라고나 할까. 방송을 진행하는 김두식 교수와 황정은 작가의 목소리 톤 자체도 여린 편인데도, 두 사람이 고래힘줄 마냥 큰소리를 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이기호 작가의 목소리는 작고 여렸다. 그의 작품을 미리 읽지 않고 방송을 통해 전해지는 목소리만 들었다면 소설을 쓰는 작가보다는 서정시를 쓰는 시인이나 풍경화를 그리는 서양화가로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슬프면서도 아름답고 따뜻하면서도 애틋한 멜로드라마를 쓴 시나리오 작가로 생각했을 수도.

이기호 작가는 진행자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 중, 최근 작품「차남들의 세계사」를 쓰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자료 조사를 위해서는 그 시대를 다시 들추어 볼 수밖에 없고 소소한 웃음이 많은 작품이지만 전반적으로 흐르는 분위기는 애틋하고 불쌍하며 엄혹하다. 독자로서 그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부터 끝내는 순간까지 참 힘들었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기호 작가는「소년이 온다」의 한강 작가를 비롯한 최근 한국의 굴곡진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을 만들어 내는 동료 작가들의 예를 든다. 미리 합을 맞추거나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밝고 유쾌하며 긍정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작품보다 어둡고 슬프고 엄혹하며 과거 지향적인 작품이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시대의 영향이다.

다른 예술의 장르들 중 소설이나 시를 쓰는 작가들은 유독 시대와 맞붙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문학을 하는 작가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땅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장함과 처절함을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호흡하는 이들이 문학을 하는 작가들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2012년 가을에 이르러 내 생각은 미묘하게 변했다. 제대로 메시지를 송출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사는 사회 안으로 탐침을 깊숙이 찔러 넣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p.209)

 

베스트셀러 작가 김영하의 이번 작품 「보다」의 탄생도 그랬다. 잠시 떠난 외국에서도 들려오는 코미디 같은 고국의 상황은 전기충격기를 맞댄 살 떨림 같이 작가의 폐부 깊숙이 찔러 들어갔다.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그들의 얄궂은 운명이야 독자인 우리가 보듬어야 할 오지랖은 없다. 하지만, 그런 작가들의 작품을 읽을 필요는 있다. ‘뭘 해도 안 될 거야.’, ‘어쩌면 저 치들이 말하는 게 진짜인 지도 몰라.’ 라며 포기해버리고 싶을 때, 문학을 탐해야 한다.

서두를 무겁게 시작하다 보니, 이 책도 무거운 얘기 일색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책은 김영하 작가의 짧은 생각을 모은 에세이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어렵지 않고 복잡하지 않으며 무겁지 않다.

시대를 날카롭게 꼬집는 비판이나 짙은 정치적 색채도 없다.

다만, 예민하고 예민한 작가의 눈과 비치고 피부에 부딪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풀어 놓았다. 개인적으로는 각 에세이마다 제목을 정말 잘 붙였다는 것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물론, 철학적·거시적 담론이나 수십 시간 떨어뜨린 더치커피 같은 농축된 그런 멋들어진 제목도 아니다.

 

 

“이 모든 군상을 싣고 오늘도 기차는 설원의 소실점을 향해 무정하게 달려간다.” (p.38)

 

<머리칸과 꼬리칸>이라는 제목의 마지막 문장이다. 영화『설국열차』에서 편집당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가상으로 만들어 낸 에세이 속 단편소설이라 봐도 무방하다.

“이제는 애원해도 소용없겠지~ 변해버린 당신이기에~” 좋아하는 노래, <무정부르스>의 첫 가사다. 결국은 소실(燒失)할 인간의 군상과 욕망이, 무정하게 소실점(消失點)을 향해 달려간다. 시적이다. 뭔가. <무정부르스>를 부른 가수 강승모의 목소리는 슬프다. 처음부터 “소용 없겠지”다. 이미 “변해버린 당신”을 붙잡아봐야... 1절의 마지막 가사는 “미련 없이 가야지”다. 그래. 미련 없이 가는 것이다. 사실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을 만큼 처절하고 힘겨운 하루하루다. 내가 타고 있는 기차가 설국열차인지, 파국열차인지 고민해 볼 겨를도 없다. 언제 멈출지 모르는 영화상의 열차를 탄 이들의 하루하루도 투쟁의 반복이다. 실제의 세상도 똑같다. 그렇다면 차라리 미련 없이 가는 게 맞다. 저런 사람도 있고 이런 사람도 있고, 자식 잃은 부모가 무릎을 꿇고 애원해도 눈길 주지 않는 사람도 있고, 자식 잃은 부모들이 경찰과 경호원의 벽을 겨우 기대 울며불며 사정해도 투명인간 취급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같이 가야 한다. 같이 무정한 기차에 올라타 있다. 이미.

현실이다.

    

 

“우리의 내면은 언제 틈입해 들어왔는지 모를 타자의 욕망들로 어지럽다. 그래서 늘 흥미롭다. 인간이라는 이 작은 지옥은.” (P.75)

“누군가에겐 선택의 여지없이 닥치고 받아들여야 하는 상태가 누군가에게는 선택 가능한 쿨한 옵션일 뿐인 세계. 세상의 불평등은 이렇게 진화하고 있다.” (p.31)

 

<인간이라는 이 작은 지옥>이 모이고 모여, 인두겁을 쓴 거대한 파국열차의 쇳덩어리를 굴러가게 한다.

<세상의 불평등이 진화하고 있다>는 별스럽지 않은 듯 참담한 현실은 정말 슬프다.

<>에 들어 간 문장들은 짧지만 여운은 길다. 한참을 생각하게 한다. 이것 또한 작가의 힘이라 생각된다. 짧은 문장으로 시대를 비유하고 은유한다.

작가 김영하는 에세이를 통해 시대의 속살과 조응한다. 허투루 표현하거나 남루한 미사여구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미건조하고 심각하지만은 않다. 이것이 이 책을 통한 작가의 메시지를 강하게 뒷받침한다. 피하지 않고 보는 괴로움이 전해진다. 이런 것들이 독자가 작가에게 기대하는 것이리라.

파국열차에 올라탄 현실을 직시하는 태도.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이렇게 무겁지 않은데, 병인가 보다. 도착적 비관주의 서평가. 도착적 비관주의에서 도착적 현실주의로 바뀌었으면 한다.

 

    

 

추신.

사람들이 책값을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는 시대가 도래할 수도 있다. 과다경쟁과 적은 이윤율로 출판계가 공멸하고 사람들은 책이 없는 상황에 익숙해지고, 그리하여 책이 더 이상 필수품이 아니게 된다면 말이다.” (p.162)

    

<패스트패션의 시대의 책>라는 제목의 에세이다. 도서정가제 시행을 앞두고 말이 많다. 나도 생각이 많다. 전 세계 어떤 나라보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정책을 옹호하고 떠받든다는 나라에서, 왜 작고 작은 출판시장에 개입하려 드는지 모르겠다. 도서정가제를 시행하는 표면적 이유야 선수들이라면 언론에 보여주기식 이유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는 터, 도대체 누구를 위해 도서정가제가 시행되는 지 정말 궁금한 지경이다. 결국 나중에야 알게 되겠지. 도서정가제로 인해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주체가 누구인지 말이다.

분명한 것은, 그 주체의 대상으로 각 출판사나 동네 작은 서점들은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 정도?

이것도 파국열차의 한 칸 인가?

왠지 으스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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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피드백의 기술 - 밀어붙이는 피드백에서 끌어당기는 피드백으로
더글러스 스톤 & 쉴라 힌 지음, 김현정 옮김 / 21세기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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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담화가 넘친다.

자애롭고 은혜로운 아내님 덕분에 쉬는 날이면 노트북을 싸 들고 밀린 서평을 쓰느라 카페로 향한다. 내가 자주 가는 카페는 세 군데다. 세 군데를 랜덤으로 다닌다. 자리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고 커피 주문을 하는 기준은 단 한 가지. 주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멀티 플레이가 불가능한 나는 노트북으로 한글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다른 작업을 하지 못한다. 한글 작업을 하면서 음악을 듣다 보면 어느새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노래 가사를 타이핑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어폰만 귀에 꽂은 채 작업을 한다. 이어폰이라는 것이 음악을 듣지 않은 채 꽂고 있으면 꽂지 않은 것보다는 주위 소음이 차단되지만 잠시, 집중력이 떨어지면 금세 귓구멍과 이어캡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커플이 나누는 달콤한 밀어(蜜語)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가장 참기 어려운 소음은 아주머니들의 뒷담화다. 그들의 내밀한 일상과 시댁 어르신들과 남편님들과 지독스럽게 말 안 듣고 공부 안 하는 자제분들의 일상까지, 의도치 않게 듣게 된다. 귓구멍과 이어캡 사이를 밀봉하거나 문맥에 전혀 상관없는 노래 가사가 갑자기 타이핑되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음악을 재생하지 않는 이상, 아주머니들의 뒷담화를 피할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며 문득 그 아주머니들의 뒷담화가 떠올랐다.

뒷담화의 대상이 되었던 그 시댁 어르신들과 남편님들과 자제분들이.

만약, 그 아주머니들의 질펀한 뒷담화를 옆 테이블에서 몰래 녹음해 대상자들에게 들려 드린다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뒷담화에 인색하다. 모두들 뒷담화를 하지만 자기가 그 뒷담화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싫어한다. 왁자지껄 뒷담화를 나누다 참기 어려울 만큼 화장실에 가고 싶지만, 참는다. 참아야 한다.

직장에서도 이런 일은 일반적이다.

 

 

 

“네가 하는 행동 중 어떤 것이 직원들의 학습을 방해하는 걸까?”

“직원들의 학습을 방해하다니? 농담하는 거야?”

“나의 어떤 행동이 직원들의 학습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 (p.412)

 

 

360도 피드백 평가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360도 피드백 평가가 다면평가 정도로 해석된다면 그건 해본 적이 있다. 그때는 다면평가도 흔하지 않아서, 동료들끼리 낄낄거리며 설문조사 하듯이 했던 것이 전부다. 현재 직장에서 360도 피드백 평가를 해본 사람이 이 책을 읽는다면 더 현장감 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피드백에 대한 무지와 편견은 오해를 낳는다. 나는 정말 잘하고, 잘 해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면!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그런 피드백을 부하직원들로부터 듣는다면 화부터 날 테고, 상사에게 듣는다면 억울함이 치솟을 테다. 360도 피드백 평가를 통해 알게 된 나에 대한 ‘전혀 다른 동료들의 생각’에 대해서 당장 직장에서는 반응하지 못한다. 집에 돌아오는 퇴근길에, 욕실 안에서 샤워기를 틀어 놓은 채, 잠자리에서 뒤척이며 곱씹고 곱씹는다.

‘왜 그럴까?’

‘그 사람은 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피드백의 효과를 높이려면 직장에서건 가정에서건 피드백을 ‘받는 사람’에게 초점을 둬야 한다. 즉 우리 모두가 좀 더 노련하게 학습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 (p.15)

 

 

나에게 피드백을 준 사람에게 초점을 두어야 한다. 근데 이게 어려운 일이다.

‘아~ 저 사람은 나를 저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내가 오해했네. 참 안타까운 일이네. 내가 더 노력해야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성인군자도 아니고 말이다. 저자는 학습의 필요성을 이야기 한다.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선물해 주는 것도 아니고 타고나는 천성도 아니다. 학습해야 한다는 것이다.

차라리 이것은 위로다. 새롭게 배우고 익히면 될 일이니까.

‘나는 글러 먹었어. 안 될 거야.’ 가 아니니까.

 

 

 

“당신이 피드백을 주거나 받는 주된 목표가 무엇인가? 조언인가, 평가인가, 인정인가? 개선을 원하는가? 평가를 원하는가?” (p.67)

 

 

저자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피드백의 정확한 방향이다. 아무리 훈련을 많이 하고 연봉을 많이 받는 투수라 할지라도 중요한 경기, 중요한 순간에, 정확한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다. 투수가 정확한 방향에 공을 던져야 하는 것처럼 내가 주는 피드백과 내가 받는 피드백에 대한 반응은 정확해야 한다. 주고받는 피드백이 상대와 일치하면 금상첨화다. 저자는 대화를 하는 동안 이것을 주기적으로 확인할 것을 주문한다. ‘나는 지금 너에게 조언을 하는 거야, 네 귀에 조언처럼 들리니?’ 확인하라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대화의 기술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성장환경이나 기질의 특성 상 상대와의 원활한 대화가 어려운 사람도 분명히 있다. 반대로 너무 쉽게 대화를 풀어내는 껍데기뿐인 대화를 남발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하루에도 수많은 횟수로 주고받는 직장이나 가정에서의 피드백은 중요한 만큼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뒷담화의 주인공이 되기 싫어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듯이, 부정적인 피드백도 피하고 싶은 것이 일반적일 테니까 말이다.

 

 

 

“누가 당신을 볼 수 있을까? 모두가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당신이다.” (p.123)

“당신에게 주어지는 당신에 관한 정보도 피드백에 포함된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피드백은 우리의 경험과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알아가는 방식, 즉 인생을 배워나가는 방식을 뜻한다.” (p.12)

 

 

당연한 진리를 모른 채 살아간다.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당연히 ‘나’라고 생각하니까. 나를 볼 수 있는 사람은 딱 두 부류다. 엄마.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

이것도 정말 쉽지 않다.

세상 어느 누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할까? 삽십이 넘고 사십이 넘어도 여전히 어머니의 똑같은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을 누가 좋아할까? 발가벗은 채 시내 번화가 한 가운데 서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을 누가 곧이곧대로,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지만 이거 정말 중요하다.

꼭 내 모습이나 내 행동의 특정 부분을 개선하기 위해서, 바꾸기 위해서 성인군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혹독했다던 공산주의 치하, 총살형만큼 치욕적이고 무서웠다는 ‘자아비판’정도를 요하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 동아리나 선교단체, 교회 청년부 같은 곳에서는 내 얘기, 네 얘기를 많이 주고받는 편이다. 그래서 내 얘기를 듣고 남 얘기를 하는 것에 대해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 보다는 익숙한 편이다. 첫 직장에서 신입사원인 나를 많이 도와주고 챙겨주던 선배가 있었다. 이런 선배만 있으면 직장생활 참 좋다. 정도까지 생각될 만큼 나에게 잘해주던 선배다. 어느 날 그 선배와 둘이 속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내게 익숙한 방법으로 내 얘기를 쏟아냈다. 내 얘기를 듣기 전에 그 선배도 직장생활의 어려움, 당시 결혼을 앞두고 있던 터라 결혼준비에 대한 고민 등을 토로했다. 선배가 5분 정도 얘기를 했다면, 나는 20분 정도는 넘게 내 얘기를 쏟아냈다. 그리고 난 후 자리를 파할 때쯤 이런 말을 했다. “그런데, 그런 얘기 나 같은 다른 사람한테 하는 거 어렵지 않냐?” 현실의 어려움, 고민들에 대해서는 많은 대화를 나눠 봤지만 정말 자신만의 고민이나 어려움, 과거의 상처 같은 것들을 들어본 적이 처음이라는 것이었다. 그 선배는 그런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 충격이었고, 나는 내게 익숙한 방식으로만 생각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책에서도 줄곧 강조하는 바, 피드백을 주고받는 모든 경우와 상황에 있어서 상대를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그냥 내게 익숙한 방법, 내게 편한 방법으로 피드백을 주고 또 받는 것이 아니라. 피드백이 오고 가는 중에도 계속해서 그(그녀)를 이해하기 위해서, 좀 더 정확하게 전달되고 전달 받을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피드백과 당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라.”

“저는 애매한 건 딱 질색입니다. 정말로 솔직하게 구는 게 좋습니다. 제가 마음을 다칠까 봐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상처받지 않습니다.” (p.395)

 

 

나 같은 사람에게 필요한 피드백 방법이다. 나는 에둘러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 당연히 우유부단하고 뜨뜻미지근한 대화도 싫어하고. 물론, 내가 직설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듣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 차이의 정도가 크지는 않지만 솔직한 고백이다. 하지만 내가 불편하다고 해서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편치 않지만 정확하게 얘기해주고 평가해주는 것을 좋아한다. 이제까지의 짧은 인생의 경험을 되돌아볼 때, 관계에서의 짧은 따뜻함과 원만함을 위해 두루뭉술 덮어두고 지나가는 일은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직설이 주는 당장의 차가움과 어려움은 결국 도움이 된다. 어려움도 있다. 종종 나로 인해, 내가 해 준 말과 피드백으로 인해 상처를 받거나 마음의 아픔을 겪었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나는 진심으로 사과한다. 사과를 하고 난 후 그럴 의도가 없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난 후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는 경우도 있고, 나의 사과가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결국 나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과 관계를 돈독하게 유지해 나가고 모두를 껴안고 살 것이 아니라면 정확한 직선으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당신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해줄 것을 부탁해보자. 그들이 무엇을 제안하건 무조건 시도해보기 바란다. 당신이 조직 내에서 하는 일이 무엇이든 당신은 당신에게 교훈을 줄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p.446)

 

 

 

부탁하는 거 쉽지 않다. 부탁하는 것도 쉽지 않고, 그런 부탁을 받은 사람도 힘들다. 해본 적이 없으니까. 일단,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먼저다. 어떻게 말 잘하고 피드백 잘 해드려서 인사고가에 잘 반영될까? 어떻게 말 잘하고 피드백 잘 해줘서 나를 믿고 따르는 부하직원 한 명 더 늘려볼까? 어떻게 말 잘하고 피드백 잘 해줘서 나를 더 좋아해 줄 친구를 만들까? 하는 생각으로는 서로를 갉아먹는 피드백에 불과하다. 너를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를 이해하기 위해 나를 나보다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부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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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아토포스
진은영 지음 / 그린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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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에 대해서 관심도 없을뿐더러, 당연히 잘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유일하게 좋아하는 시는 윤동주의 <십자가>이다. 이마저도 전체를 암송하지 못하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정도만 명확하게 기억할 따름이다. 현대시인 중에서 유일하게 좋아하는 시인은 송경동이다. 그의 시를 보고 좋아하게 된 것은 물론 아니다. 그의 에세이 「꿈꾸는 자 잡혀간다」를 읽고 그가 시인인 줄 알았다. 아직도 그의 시 한편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나는 나와 시는 늘 멀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일단 시에 등장하는 ‘시어’가 가진 함축과 은유를 이해하기 힘들다. ‘시’라는 것이 이해하는 것도,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굳이 그렇게 시를 받아들인다. 고등학교 때 시험문제를 풀기 위해서 “자~ 이 시는 자유시이고 직유법이다! 외워~!”라고 침을 튀기며 말하던 교사의 교육방식이 아직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일까. 아무튼 나는 ‘시’를 ‘시’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다. ‘이번에는 시를 한 번 제대로 보자~!’라며 구입한 시집은 책장 한 구석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다.

이 책 「문학의 아토포스」의 저자도 시인이다. 시인이라 하면 뭔가 더 사색적이고 감상적이고 추상적이며 형이상학적이고 말이 없을 것 같고 뜬구름 잡을 것 같고... 뭐 그런 것들이 먼저 생각난다.

이 책을 읽으며 내 편견이 그다지 틀린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반대로 분명히 틀린 것이었음도 확인하게 되었다.

일단, 책은 너무 어렵다. 프랑스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풀어놓는 철학전공 출신 시인의 이야기는 정말 딴 세상이었다. 지금도 미분과 적분이라는 단어가 분명 외계 언어라고 생각하는 내게, 이 책에 등장하는 랑시에르, 리오타르, 아감벤, 들뢰즈 같은 사람 이름은 미분과 적분보다 수십 억 광년 더 떨어진 외계 언어다. 그나마 책을 읽은 적이 있는 부르디외의 언급에서는 반갑기는 했지만 시인이 보는 부르디외는 내가 본 부르디외와는 또 달랐던지,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어렵게 인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저자, 진영은은 동료 문인들과 함께 「눈먼 자들의 국가」라는 다분히 사회참여적이고 정치적인 책을 낸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 진영은의 고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보인다.

    

 

“사회참여와 참여시 사이에서의 분열, 이것은 창작 과정에서 늘 나를 괴롭히던 문제이다.” (p.16)

 

예술가가 아닌 사람의 눈에 그들의 현실참여는 때론 ‘뜬구름 잡는 공상’으로 보일 때가 많다. ‘저런 게 무슨 도움이 돼?’, ‘더 세게 행동할 수는 없나?’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천여 명의 영화인이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다. 이제는 단골이 되어 버린 배우 송강호씨와 김혜수씨의 이름이 며칠간 미디어를 달구었다. 그런 이름이 있고 유명하며 팬층이 두터운 예술가의 경우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는다. ‘영화인들도 저런 성명을 내는구나~’ 물론 반대편에 있는 치들은 ‘저런 빨갱이들이 모인 영화판!’이라고 할 수도 있고.

저자 진영은을 포함해서 송강호, 김혜수씨와 같은 예술가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과 감각에 대해 민감하고 더 예민할 수밖에 없다. 시인의 경우는 더 심각한 수준일 거라 생각한다.

    

 

“정치적 문제들은 윤리적 호소로 해결될 수 없다는 점에서 윤리와 분리된 것임을 강조한다.” (p.103)

“시와 정치, 또는 미학과 정치의 문제를 되묻는다면 우리가 주목할 것은 어떻게 양자 사이의 간극을 ‘인식’하느냐 대신 어떻게 문학이 미학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것이 되도록 하느냐의 문제이다.” (p.51)

 

사람들은 각자 즐거운 일이 있다. 끼니때가 지난 줄도 모르고 집중해서 빠져드는 일. 밤을 새워도 잠이 오지 않는 일들 말이다. 그런 일이 직업이라면 제일 좋을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두 가지 모두를 충족하며 사는 사람은 흔치 않다. 굉장히 어렵다. 그래서 좋아하는 일을 하지만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일을 병행하는 경우가 많다. 고되지만 즐겁게 산다. 언젠가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정치적 문제는 결코 윤리적 호소로 해결될 수 없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아무리 청와대와 국회와 광화문에서 노숙을 하고 단식을 하고 울부짖어도 저들에게 가 닿지 않는다. ‘사람이라면 그럴 수는 없다.’라는 윤리적·도덕적 호소는 감정적인 충족은 가능하지만 본질적인 정치적 해결은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체(體)화했다.

자기가 하는 시창작이 어떻게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 채 미학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것이 되느냐는 어쩌면 모든 창작을 하는 사람들의 고민이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음악이든, 미술이든, 소설이든, 시든 비슷할 것이다. 단순히 미학적이면서 정치적이지 않은 도저히 합치될 것 같지 않은 ‘간극’을 가지고 죽도록 고민하고 괴로워해봐야 미학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못한 어정쩡한 꼴이 되는 경우도 많다.

    

 

“정체가 모호한 공간, 문학적이라고 한 번도 규정되지 않은 공간에 흘러들어 그곳을 문학적 공간으로 바꿔 버리는 일, 그럼으로써 문학의 공간을 바꾸고 또 문학에 의해 점유된 한 공간의 사회적-감각적 공간성을 또 다른 사회적-감각적 삶의 공간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문학의 아토포스 이다.” (p.180)

 

책이 제목 「문학의 아토포스」가 가장 명확하게 정의된 부분이다. 나는 대구에 살고 있는데 ‘북성로’라는 옛 길이 있다. 예전 대구성(城)안에 있는 큰 길이었는데, 근대를 지나며 차츰 더 남쪽으로 번화가가 형성되면서 쇠퇴했다. 제조업이 한창이던 시기 ‘공구골목’으로 자리 잡았지만 지금은 그 모습이 많이 사라진 상태다. 몇 년 전부터 이곳에 방치된 건물에 젊은 예술가들이 자신들만의 특별한 자리를 마련해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가고 있다고 한다. 지역 방송에서 취재한 프로그램을 보기도 했는데, 젊은 예술가들은 번화가보다 땅값이나 집값이 저렴한 것이 좋은 점이라는 것이다. 홍대에 가난하고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던 예전의 모습과 비슷한 현상이다. 대구 사람들에게 ‘옛날 동네’, ‘공구골목’, ‘차타고 들어가기 비좁은 불편한 도로’, ‘근처에 유명한 사창가가 있는 곳’ 정도로 인식되던 곳에서 <문학의 아토포스>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과 더불어 지금은 유명해진 대봉동의 ‘김광석 거리’의 시작도 비슷했다. 쇠퇴한 재래시장 주변 강둑길에 벽화가 그려지고 김광석이 태어난 동네라는 이미지가 합쳐지면서 <문학의 아토포스가>가 일어난 것이다.

    

 

“다른 사회적 싸움의 장소인 홍대 앞 클럽 ‘빵’에서는 매달 마지막 수요일마다 콜트콜텍 노동자를 위한 문화제가 열렸는데 이곳에서 작품을 낭송할 때도 작가들은 투쟁 공간의 수호천사들이 부를 만한 선전선동 시보다는 작가 자신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소재의 시를 선택해서 읽었다.” (p.174)

 

저자의 <아포토스>는 대구의 ‘북성로’와 ‘김광석 거리’와 비슷하지만 사실 맥락은 다르다. 내가 이해하기에는 ‘즐겁고, 재미있게’ 미학과 정치를 접목시키는 시도라고 본다. 노동자들이 시위하고 집회하는 공간에서 시가 낭송되고 문학이 읽히는 것이 꺼려지지 않고 이상하지 않은 전복을 꿈꾸는 것이다. 왜 노동자들의 시위 장소와 집회 장소에는 확성기와 볼륨이 최대로 올려진 스피커만 있어야 하나. 왜 붉은 머리띠를 동여매고 똑같은 민중가요만 불러야 하나. 함께 자리 깔고 앉고 싶어도 그 공간이 주는 이질감을 감당할 용기가 없어서 망설여 질 때가 많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들 시위를 하기 위한 노동자가 아니어도 좋은 것 아닌가. 시를 쓰는 노동자, 소설을 쓰는 노동자, 노래를 부르는 노동자, 아이들을 가르치는 노동자들이 한 데 모여서 즐겁고 유쾌하게, 지루하지 않고 자신 있게 자기만의 미학을 발현하는 일이 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손끝이 찌릿찌릿 하다. 재미있을 것 같다.

    

 

“먹는 입들에 대해 말하기, 식탁에 초대받지 않은 자들에 대해 말하기, 식탁을 차렸지만 정작 식탁에 앉지 못하는 자들의 식사에 대해 다시 말하기,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보편주의적 소통이며 정치이다.” (p.303)

 

단순히 자신들의 미학적 발현에만 빠져있지 않고 보편적 소통과 이해를 동반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금상첨화다. 나와 내 가족들의 먹고 사는 일에서부터 조금 더 눈을 넓혀 한 공간에 있는 저 사람의 먹고 사는 일, 오랜 시간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먹고 사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내 입을 통해 말하는 것. 함께 하지 못하지만 동일한 고민과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먹고 사는 일에까지 말하는 것. 혼자라면 차마 낼 수 없었을 용기를 미학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 말이다.

    

 

“당신이 거쳐 온 그 오랜 세월, 당신이 다양한 장소에서 실험해 본 특별하고 자유로운 예술적 건넴의 방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p.7)

 

저자는 단순히 예술가들에게 국한하지 않는다. 책을 읽는 독자들, 시를 쓴 적도 소설을 쓴 적도 없는 사람들을 향한 배려도 잊지 않는다. 미학이다 예술이다 하는 것들이 실은 특정한 집단이 점유하거나 한계를 설정할 수 없는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것임을 이야기한다. 각자가 만들어 온 일상에서 기억에 남는 특별하고 자유로운 예술적 경험을 떠올리는 것 또한 예술의 한 방법, 내지는 현실참여의 중요한 동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일기쓰기’를 왜 그렇게 일찍 그만두었는지 후회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내 삶의 궤적 중간 중간을 기록한 나의 글이 있다면 좋았을 것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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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4-10-20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구에 사신다 하셔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기조심하시고 행복한 오후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