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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아토포스
진은영 지음 / 그린비 / 2014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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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에 대해서 관심도 없을뿐더러, 당연히 잘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유일하게 좋아하는 시는 윤동주의 <십자가>이다. 이마저도 전체를 암송하지 못하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정도만 명확하게 기억할 따름이다. 현대시인 중에서 유일하게 좋아하는 시인은 송경동이다. 그의 시를 보고 좋아하게 된 것은 물론 아니다. 그의 에세이 「꿈꾸는 자 잡혀간다」를 읽고 그가 시인인 줄 알았다. 아직도 그의 시 한편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나는 나와 시는 늘 멀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일단 시에 등장하는 ‘시어’가 가진 함축과 은유를 이해하기 힘들다. ‘시’라는 것이 이해하는 것도,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굳이 그렇게 시를 받아들인다. 고등학교 때 시험문제를 풀기 위해서 “자~ 이 시는 자유시이고 직유법이다! 외워~!”라고 침을 튀기며 말하던 교사의 교육방식이 아직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일까. 아무튼 나는 ‘시’를 ‘시’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다. ‘이번에는 시를 한 번 제대로 보자~!’라며 구입한 시집은 책장 한 구석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다.

이 책 「문학의 아토포스」의 저자도 시인이다. 시인이라 하면 뭔가 더 사색적이고 감상적이고 추상적이며 형이상학적이고 말이 없을 것 같고 뜬구름 잡을 것 같고... 뭐 그런 것들이 먼저 생각난다.

이 책을 읽으며 내 편견이 그다지 틀린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반대로 분명히 틀린 것이었음도 확인하게 되었다.

일단, 책은 너무 어렵다. 프랑스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풀어놓는 철학전공 출신 시인의 이야기는 정말 딴 세상이었다. 지금도 미분과 적분이라는 단어가 분명 외계 언어라고 생각하는 내게, 이 책에 등장하는 랑시에르, 리오타르, 아감벤, 들뢰즈 같은 사람 이름은 미분과 적분보다 수십 억 광년 더 떨어진 외계 언어다. 그나마 책을 읽은 적이 있는 부르디외의 언급에서는 반갑기는 했지만 시인이 보는 부르디외는 내가 본 부르디외와는 또 달랐던지,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어렵게 인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저자, 진영은은 동료 문인들과 함께 「눈먼 자들의 국가」라는 다분히 사회참여적이고 정치적인 책을 낸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 진영은의 고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보인다.

    

 

“사회참여와 참여시 사이에서의 분열, 이것은 창작 과정에서 늘 나를 괴롭히던 문제이다.” (p.16)

 

예술가가 아닌 사람의 눈에 그들의 현실참여는 때론 ‘뜬구름 잡는 공상’으로 보일 때가 많다. ‘저런 게 무슨 도움이 돼?’, ‘더 세게 행동할 수는 없나?’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천여 명의 영화인이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다. 이제는 단골이 되어 버린 배우 송강호씨와 김혜수씨의 이름이 며칠간 미디어를 달구었다. 그런 이름이 있고 유명하며 팬층이 두터운 예술가의 경우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는다. ‘영화인들도 저런 성명을 내는구나~’ 물론 반대편에 있는 치들은 ‘저런 빨갱이들이 모인 영화판!’이라고 할 수도 있고.

저자 진영은을 포함해서 송강호, 김혜수씨와 같은 예술가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과 감각에 대해 민감하고 더 예민할 수밖에 없다. 시인의 경우는 더 심각한 수준일 거라 생각한다.

    

 

“정치적 문제들은 윤리적 호소로 해결될 수 없다는 점에서 윤리와 분리된 것임을 강조한다.” (p.103)

“시와 정치, 또는 미학과 정치의 문제를 되묻는다면 우리가 주목할 것은 어떻게 양자 사이의 간극을 ‘인식’하느냐 대신 어떻게 문학이 미학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것이 되도록 하느냐의 문제이다.” (p.51)

 

사람들은 각자 즐거운 일이 있다. 끼니때가 지난 줄도 모르고 집중해서 빠져드는 일. 밤을 새워도 잠이 오지 않는 일들 말이다. 그런 일이 직업이라면 제일 좋을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두 가지 모두를 충족하며 사는 사람은 흔치 않다. 굉장히 어렵다. 그래서 좋아하는 일을 하지만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일을 병행하는 경우가 많다. 고되지만 즐겁게 산다. 언젠가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정치적 문제는 결코 윤리적 호소로 해결될 수 없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아무리 청와대와 국회와 광화문에서 노숙을 하고 단식을 하고 울부짖어도 저들에게 가 닿지 않는다. ‘사람이라면 그럴 수는 없다.’라는 윤리적·도덕적 호소는 감정적인 충족은 가능하지만 본질적인 정치적 해결은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체(體)화했다.

자기가 하는 시창작이 어떻게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 채 미학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것이 되느냐는 어쩌면 모든 창작을 하는 사람들의 고민이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음악이든, 미술이든, 소설이든, 시든 비슷할 것이다. 단순히 미학적이면서 정치적이지 않은 도저히 합치될 것 같지 않은 ‘간극’을 가지고 죽도록 고민하고 괴로워해봐야 미학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못한 어정쩡한 꼴이 되는 경우도 많다.

    

 

“정체가 모호한 공간, 문학적이라고 한 번도 규정되지 않은 공간에 흘러들어 그곳을 문학적 공간으로 바꿔 버리는 일, 그럼으로써 문학의 공간을 바꾸고 또 문학에 의해 점유된 한 공간의 사회적-감각적 공간성을 또 다른 사회적-감각적 삶의 공간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문학의 아토포스 이다.” (p.180)

 

책이 제목 「문학의 아토포스」가 가장 명확하게 정의된 부분이다. 나는 대구에 살고 있는데 ‘북성로’라는 옛 길이 있다. 예전 대구성(城)안에 있는 큰 길이었는데, 근대를 지나며 차츰 더 남쪽으로 번화가가 형성되면서 쇠퇴했다. 제조업이 한창이던 시기 ‘공구골목’으로 자리 잡았지만 지금은 그 모습이 많이 사라진 상태다. 몇 년 전부터 이곳에 방치된 건물에 젊은 예술가들이 자신들만의 특별한 자리를 마련해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가고 있다고 한다. 지역 방송에서 취재한 프로그램을 보기도 했는데, 젊은 예술가들은 번화가보다 땅값이나 집값이 저렴한 것이 좋은 점이라는 것이다. 홍대에 가난하고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던 예전의 모습과 비슷한 현상이다. 대구 사람들에게 ‘옛날 동네’, ‘공구골목’, ‘차타고 들어가기 비좁은 불편한 도로’, ‘근처에 유명한 사창가가 있는 곳’ 정도로 인식되던 곳에서 <문학의 아토포스>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과 더불어 지금은 유명해진 대봉동의 ‘김광석 거리’의 시작도 비슷했다. 쇠퇴한 재래시장 주변 강둑길에 벽화가 그려지고 김광석이 태어난 동네라는 이미지가 합쳐지면서 <문학의 아토포스가>가 일어난 것이다.

    

 

“다른 사회적 싸움의 장소인 홍대 앞 클럽 ‘빵’에서는 매달 마지막 수요일마다 콜트콜텍 노동자를 위한 문화제가 열렸는데 이곳에서 작품을 낭송할 때도 작가들은 투쟁 공간의 수호천사들이 부를 만한 선전선동 시보다는 작가 자신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소재의 시를 선택해서 읽었다.” (p.174)

 

저자의 <아포토스>는 대구의 ‘북성로’와 ‘김광석 거리’와 비슷하지만 사실 맥락은 다르다. 내가 이해하기에는 ‘즐겁고, 재미있게’ 미학과 정치를 접목시키는 시도라고 본다. 노동자들이 시위하고 집회하는 공간에서 시가 낭송되고 문학이 읽히는 것이 꺼려지지 않고 이상하지 않은 전복을 꿈꾸는 것이다. 왜 노동자들의 시위 장소와 집회 장소에는 확성기와 볼륨이 최대로 올려진 스피커만 있어야 하나. 왜 붉은 머리띠를 동여매고 똑같은 민중가요만 불러야 하나. 함께 자리 깔고 앉고 싶어도 그 공간이 주는 이질감을 감당할 용기가 없어서 망설여 질 때가 많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들 시위를 하기 위한 노동자가 아니어도 좋은 것 아닌가. 시를 쓰는 노동자, 소설을 쓰는 노동자, 노래를 부르는 노동자, 아이들을 가르치는 노동자들이 한 데 모여서 즐겁고 유쾌하게, 지루하지 않고 자신 있게 자기만의 미학을 발현하는 일이 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손끝이 찌릿찌릿 하다. 재미있을 것 같다.

    

 

“먹는 입들에 대해 말하기, 식탁에 초대받지 않은 자들에 대해 말하기, 식탁을 차렸지만 정작 식탁에 앉지 못하는 자들의 식사에 대해 다시 말하기,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보편주의적 소통이며 정치이다.” (p.303)

 

단순히 자신들의 미학적 발현에만 빠져있지 않고 보편적 소통과 이해를 동반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금상첨화다. 나와 내 가족들의 먹고 사는 일에서부터 조금 더 눈을 넓혀 한 공간에 있는 저 사람의 먹고 사는 일, 오랜 시간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먹고 사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내 입을 통해 말하는 것. 함께 하지 못하지만 동일한 고민과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먹고 사는 일에까지 말하는 것. 혼자라면 차마 낼 수 없었을 용기를 미학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 말이다.

    

 

“당신이 거쳐 온 그 오랜 세월, 당신이 다양한 장소에서 실험해 본 특별하고 자유로운 예술적 건넴의 방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p.7)

 

저자는 단순히 예술가들에게 국한하지 않는다. 책을 읽는 독자들, 시를 쓴 적도 소설을 쓴 적도 없는 사람들을 향한 배려도 잊지 않는다. 미학이다 예술이다 하는 것들이 실은 특정한 집단이 점유하거나 한계를 설정할 수 없는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것임을 이야기한다. 각자가 만들어 온 일상에서 기억에 남는 특별하고 자유로운 예술적 경험을 떠올리는 것 또한 예술의 한 방법, 내지는 현실참여의 중요한 동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일기쓰기’를 왜 그렇게 일찍 그만두었는지 후회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내 삶의 궤적 중간 중간을 기록한 나의 글이 있다면 좋았을 것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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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4-10-20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구에 사신다 하셔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기조심하시고 행복한 오후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