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가 아니면 다 실패한 삶일까 - 철학자와 심리학자의 인생질문 20 Art of Lving_인생의 기술 4
줄리언 바지니.안토니아 마카로 지음, 박근재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나는 선생님이 없다.

서른을 훌쩍 넘겨, 이제는 한 아이의 아비가 되었는데도 말이다.

나는 정말 선생님이 없다.

“선생님, 정말 힘드네요. 후... 선생님은 어떻게 사셨어요? 이럴 때 어떻게 하셨어요?”

라고 죽을 만큼 힘든 그때, 술 한 잔 기울이며. 아니, 술 한 잔 아니더라도 전화로라도. 아니, 카톡(참, 카톡은 안되지. 텔레그램?)으로라도. 아니면 밤 늦게 집 앞에 찾아가서라도.

 

나는 그런 선생님이 없다.

대학 3학년, 휴학 1년을 결정하고 졸업 후 학사장교로의 진로를 변경할 때 상의할 선생님이 없었다. 전역 후 이틀만을 쉬고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의논할 선생님이 없었다. 돈을 잘 버는 직장을 그만두고 싶었을 때, 진지하게 고민을 쏟아낼 선생님이 없었다.

친구 놈이 스승의 날을 맞아 선생님을 찾아뵈었다는 얘기를 들을 때 배가 아프다. 나는 왜 저런 선생님이 없을까. 짜증이 난다.

모르겠다. 나는 좋은 학생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던 것 같은데, 선생님들에게는 더 잘해주고 싶은 학생? 관심이 가는 학생? 평생의 제자로 삼고 싶은 학생은 아니었나 보다. 당연하게 생각되는 이치와 상식을, 당연하게 할 수 있는 의견을 제시했을 뿐인데, 그 선생은 영화에서처럼 시계 줄을 풀더니 폭력을 가했다. 맞으면서도 내가 왜 맞는지 몰랐다. 어린 나이였지만 ‘이건 분명 훈육이 아닌 폭력이다.’라고 생각되었다. 그 선생으로 인해 내 학창시절을 거친 모든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후로 ‘선생님, 교사’라고 하는 이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혐오와 비하, 냉소와 조롱이 체(體)화되었다.

사회생활을 하고 ‘그렇지 않은 선생님, 교사’ 분들은 여럿 만났지만 내 편견은 쉽게 걷히지 않았고, 당연히 ‘내 선생님’은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다.

슬픈 일이다.

 

 

 

이 책 「최고가 아니면 다 실패한 삶일까」는 내게 선생님은 될 수 없지만, 곁에 두고 반복해서 꺼내 보고 생각하고 또 고민하고 성찰할 만한 문장과 권유로 가득한 책이다.

 

이 책은 자기계발서가 아니다.

두 명의 저자는 책의 앞뒤에서 분명히 얘기한다.

자기계발·자기계발서라는 것이 극동아시아,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에서만 지난한 열풍을 이어가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프랑스와 유럽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한 번 휘익~ 하고 불었다는 사실을 가지고 ‘유럽도 별 수 없구만~’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프랑스에서도? 아니 그럼 자기계발서가 맞는 건가? 다시 사서 봐야 하나?’라고 생각해야 할지.

웃픈 일이라고 밖에.

 

 

 

“정말 인내심만 기르면 행복해질까?” (p.11)

 

 

철학자와 심리학자가 펼쳐내는 인생 이야기는 단지 자신들의 전공만 늘어놓거나 허접스러운 위로 따위를 늘어놓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계발과 자기계발서를 펴낸 유명한 사람을 그토록 비판하면서도 고작 대중들에게 하는 것이 간단한 윽박지름 정도에 불과한 가학적 상담을 내놓는 강 모 철학자와도 다르다. 쉽게 정의내리지 않고 간단하게 판단하지 않는다. 그래서 국내 자기계발서에 적응된 사람들에게는 피동적인 고객의 니즈 정도를 파악하는 백화점 영업파트 정도의 얄팍한 꼼수로 보일 수도 있고, 국내 자기계발서를 그토록 경멸하며 비판하는 강 모 철학자와 같은 이들에게 적응된 사람들에게는 차갑지고 뜨겁지도 않은 뜨뜻미지근한 무책임함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앞서도 말했듯이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팔만 뻗치면 닿는 그곳에 위치해 있는. 어디까지 읽었는지 책갈피를 찾지 않아도 되는,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도 재미있고 유의미하며 공감이 가는 문장들과 고민들로 새겨진 ‘하루계명’을 얻어 밤새 뒤척이던 시나이 산에서 내려갈 수 있는. 그런 책이다.

 

 

 

“‘나’를 긍정적으로 정의 내리기 위해서는 다른 이가 아닌 스스로를 정의 내려야 한다. 계발되지 않은 잠재 능력이란 꿈의 영역에 속하는 가정된 능력에 불과한 것이지, 우리의 실제 삶의 영역에서 유령과 같이 존재하는 어떤 것이 결코 아니다.” (p.31)

 

 

더군다나 유령이 필요하지도, 그런 유령으로 불리고 싶지 않을 대다수의 현대인들에게 ‘헛된 망상’과 ‘잡히지 않을 뜬구름’ 따위를 쏟아내는 진통제도 부정한다.

 

 

 

“우리는 자기비판의 적정선을 지키지 못한 채 살아간다. 대표적인 예가 지신이 평균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다. 이것은 자신에게만 유리한 편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인데, 그 결과 남들에게는 지나치게 엄격한 반면, 자신에게는 관대해지기 쉽다.” (p.86)

 

 

명쾌하다.

뒤통수가 근질근질 할 정도로 명징하다.

나도 충분히 그런, 일정 정도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살고 있는 현대인이니까.

‘에이~ 저 정도는 누가 못해?’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젠 채 하기는!’

이런 생각, 안 해본 사람이 있나?

하지만 어려운 일이다. 누가 남들에게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한, 이 달콤하고도 만병통치약 같은 최면에서 벗어나고 싶겠나. 남들에게 지나치게 관대하고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을 이제껏 단 한명이라도 만나봤다면 모르겠는데, 나는 만나본 적이 없어서 이런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많은 철학자들이 찬양해 마지않는 니체형의 ‘초인’ 정도 돼야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도 너무 명쾌하고 명징하게 나를 그려내는 통에, 이 페이지에서 한참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인생이 반드시 경주일 필요는 없다.” (p.102)

“훌륭한 목표는 ‘해냄’이 아닌 ‘하고 있음’에 초점을 둔 것” (p.54)

“선택이 항상 완벽할 필요는 없다. 그저 충분히 좋은 정도면 된다. 그리고 만약 충분히 좋은 것도 아님이 드러난다 하더라도 나중에 가서 방향을 바꾸기만 하면 될 것이다.” (p.147)

 

 

나는 이런 얘기를 듣고 싶었다.

이렇게 ‘살고 있음’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결코 안정적인 일상과 몇 천만 원 정도의 연봉에 비해 결코, 부족하지 않는 삶임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고 믿고 따르는 선생님에게 들을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런 사람이 당장 없으니 이 책으로 만족할 수밖에. 모두가 한쪽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는 이 미친 경쟁의 시대에서 다소 뒤쳐진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렇게 하루하루 밀어내는 삶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음을, 맞다. 그것을 격려 받고 싶었다.

 

 

 

“철학사에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논증들’을 살펴보라. 그 논증들이 진행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연역적 추리보다는 귀납적 관찰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p.275)

 

 

귀납적 관찰보다는 연역적 추리에 기초한 선택을 추구했다. 경험과 기억과 습관은 때로는 적확하지만 무모하리만치 무책임할 수도 있으니까. 굳이 거시 철학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내가 밀어내 온 삶의 궤적을 가만히 돌이켜 보면, 그렇다. 아니, 그랬다. 한심하고 늦춰지는 것처럼 보였던 오랜 시간의 고민과 그것으로 인한 고통스러운 선택의 순간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것이다. 하나하나 찾아내 들춰내어 톺아보지 않더라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 그거다.

지금이라도 ‘나만의 선생님’을 만나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찾아지지 않는 것에 힘을 쏟아 살기에는, 당장 내가 힘을 쏟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우리가 남길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걸작은 하루하루를 제대로 사는 것이다. 그 외의 다른 모든 일들은 보조물이고 부가물일 뿐이다.” (p.133)

 

 

500년 전 몽테뉴 선생께서 이렇게 멋진 말을 하셨단 말이지?

나는 오늘도, 오늘의 걸작을 온 몸으로 써 내려 가고 있다.

그래, 그것으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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