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 연애 블루스
한상운 지음 / 네오픽션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로 만들어지면 참 좋을 것 같은 작품이다. 드라마로는 다 그려낼 수 없는 스펙터클이 녹아 있다. 어쩌면 소재와 내용은 진부할 수 있다. 중학교 시절 봇물 터지듯 쏟아진 느와르 소설과 영화의 그것과 유사하다. 나와 비슷한 나이쯤 어디에 걸쳐진 남성들에게는 현실의 쳇바퀴와 그것이 주는 거부할 수 없는 무게에서 잠시나마 탈출해, 멋진 여주인공과 그녀와의 사랑을 위해 제 목숨 하나쯤 간지나게 던져버리는 주인공으로 감정이입하기에 딱 좋은 작품이다. 사회생활을 하고,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하루하루 반복되는 밥벌이의 지겨움을 헌신짝처럼 벗어 던져 버리고 싶어도 결코 그럴 수 없는 나와 당신들에게 아주 잠깐 이지만 느와르를 경험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 작품의 의미는 충분하다.

 

 

“다시 말하면 옴팡지게 잘못 걸렸다. 마약도 마약이지만 이해 관계자가 이런 식으로 얽혀 있는 사건은 곤란하다. 어떤 식으로 일을 해결하든 누군가에게 원한을 사게 되기 때문이다.” (p.161)

 

 

전직 경찰, 일도는 청부업자다. 청부업자 앞에 ‘살인’이라는 단어가 붙지 않는다고 해서 일도의 일탈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누구보다 깔끔하게 일처리를 한다고 그 바닥에서는 소문난 일도에게 이번 일은 옴팡지게 잘못 걸려든 재수 없 사건이다. 명동 사채시장의 큰 손, 방회장이 얽힌 일이고 그 일이라는 것도 마약과 관련된 일이다. 이제껏 아무리 깔끔하게 일들을 처리해 온 일도에게도 이번 일은 정말 옴팡지게 재수 없는 사건인 것이다.

 

 

“30분 전, 그는 7년 사귄 여자 친구에게 차였다.” (p.13)

“성욱은 편의점에 들러 우산을 샀다. 중국제 3단 우산이 만 2천원이었다. 여자 친구에게 차인 날, 비까지 맞으며 처량해지고 싶지 않았다.” (p.20)

“하지만 계속 웃는 얼굴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성욱은 그녀를 따라 건물 로비로 들어가 우산을 털고 주위를 살폈다.” (p.20)

 

 

7년 동안이나 사귄 여자 친구 인영과 헤어진 그날 저녁, 성욱은 이 옴팡지게 재수 없는 사건의 주인공이 된다. 방금 여자 친구와 헤어졌지만 편의점에 들러 싸구려 중국제 3단 우산을 사야 하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가진 것 없는 성욱에게 수정이 나타난 것이다. 7년 동안이나 자신을 기다려 준 인영에게 방금 이별을 통보 받은 성욱이지만 예쁜 여자에게 눈이 간다. 남자라는 동물은 어쩔 수 없다. 자신을 위해 주위의 만류와 비난과 멸시에도 꾹꾹 참으며 기다려 준 인영은 이미 아웃 오브 안중. 계속 웃는 얼굴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맞다. 게다가 계속 웃는 얼굴이 너무 예쁜 얼굴이면 이미 게임 오버.

그게 화근이었다. 그날 저녁 이별을 통보 받은 인영에게 제대로 따지지도, 욕을 하지도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며 쓰린 속에 쓰린 소주나 들이 부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중국제 싸구려 우산을 사고 나온 거리에서 방금 여자친구에게 차인 놈이 다른 여자에게 바로 눈길이 가냐~ 이런 미친놈! 하면서 그냥 지나쳤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성욱도 일도도 마음이 가는 대로 해버렸다.

뒷일은 전적으로 본인들의 책임이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왔지만 앞으로는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한 걸음 잘못 내디디면 언니처럼 죽는다.” (p.120)

 

 

수정은 친언니처럼 믿고 따랐던 언니의 죽음을 겪은 후 방회장과 방태수, 이석구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 방태수가 차림 뷰티샵에 취직해 그와 가까워지고 그의 신임을 얻는다. 언니의 복수를 위해 기꺼이 언니가 된다. 명동의 큰손이지만 아들 방태수는 작은 손가락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이석구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 했다. 이석구는 주도면밀하고 꼼꼼하게 방태수를 조종하면서 뒤로 자신의 이권과 돈을 챙겼다. 그런 와중에 단순히 뒷돈을 빼내고 돈을 세탁해 자신의 주머니에 챙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약에 손을 댔다. 작은 손가락의 때조차도 안 되는 방태수를 뒤에서 조종하면서 두둑하게 챙기고도 남을 텐데, 사람 욕심은 정말 끝이 없다. 방태수가 조금만 사업수완이 있고 똑똑했더라면 이석구의 욕심이 그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을 텐데, 사람 욕심이란 끝이 없다.

수정은 그런 이석구마저 감쪽같이 속인다.

 

 

“그가 그만두지 않는 건 추억 때문이었다. 나이 스무 살 때 시험을 보고 들어와 10년 가까이 경찰로 일했다. 사건 해결에 실패하고 파트너였던 남익 선배가 죽기 전까지는.” (p.189)

 

 

일도 또한 수정과 비슷하다. 잘나가는 경찰을 그만 두고 이상한 사설 청부업자가 되어 이상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과거의 일 때문이다. 파트너였던 선배가 죽고 난 후, 그 아픔과 상실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도는 정상적인 것을 포기해 버린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사실은 정상적이지 않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전혀 어울리지 않게 출판사 편집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성욱이나 친언니보다 더 가까웠던 언니를 위해 자신의 인생 자체를 내어 놓는 수정이나, 파트너였던 선배의 죽음 이후 이상한 사설 청부업자가 된 일도나, 방태수와 이석구 또한 비정상이다.

그런데 세상 돌아가는 것이 결국 비정상이다. 이 정도 쯤이면, 이때쯤이면 이렇게 되겠지, 저렇게 되겠지 하는 추측이나 기대는 하릴없다.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버린다. 무너져버리면 그만이다. 다시 쌓아 올릴 수 없다. 그렇게 무너진 위로 비정상이 자리 잡는다. 그리고 그것이 정상인 것처럼 행세한다. 그러면 그것이 정상이 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사건들은 지극히 극적이다. ‘에이~ 이건 과한 설정이잖아~’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남 얘기하고 남 얘기 듣기를 좋아하는 것이 사람이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별의 별 이야기가 다 나오게 마련이다. “어머~ 그랬대? 정말? 어머 어머” 남 얘기 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과장하고 왜곡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과장과 왜곡을 걷어내더라도 사실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에도 그런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들었다. 좋은 곳에 취직해 잘 살고 있다고 소문이 났었던 후배 한 녀석이 사실은... 뭐 그런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와 소문들을 듣다 보면 차라리 이 책의 내용과 설정이 어딘가 부족한 것은 아닌 가 싶기도 하다.

 

 

“경찰 친구를 만났기 때문일까?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알량한 정의감이 고개를 들었다. 다 쓸모없는 일인데, 감상적인 인간은 일찍 죽을 뿐인데.” (p.221)

“너 은근히 독한 새끼다. 여자 땜에 이러는 거라니 바보 새끼고.”

“딱 오늘까지만 그래 보려고요.”

“미친 새끼, 허튼수작 할 거면 그전에 나한테 말해라.” (p.305)

 

이 책에서 좀 과하다 싶었던 부분이다. 지극히 비정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비정상의 사회에서 살다보니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쯤은 아무것도 아니나, 일도가 갑자기 정의의 사도로 돌변해 버리는 것에는 손가락과 발가락이 다소 오그라들었다. 자기 자신의 일도 아니고, 수정과 성욱의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방회장에 맞선 그 둘을 보고 한심해 하고 욕해야 할 일도가 그들을 돕는다.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알량한 정의감이 고개를 정말 든 것일까? 나는 이 부분은 완전히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알량한 정의감이 고개를 들 수조차 없는 현실인데, 무슨 알량한 정의감은~! 차라리 일도가 방회장에게 그간 이석구의 행태를 일러바치고, 성욱과 수정을 산 채로 잡아왔다면 그것이 현실적이다.

 

 

“남에게 고통을 줄 때는, 자기에게 올 고통도 생각하세요.” (p.309)

 

또 하나, 성욱이 방회장을 공격하면서 내뱉은 말이다. 다소 오그라들려던 손가락과 발가락이 일제히 강력하게 오그라들었다. 욕이라도 하고 더 강하게 공격을 해서라도 본때를 보여주는 게 현실적이지 않나? 남에게 고통을 줄 때는, 자기에게 올 고통도 생각하세요. 이 무슨 정말 재미없는 출판 편집인 같은 대사 처리인지.

두 부분 정도를 제외하고는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다. 비정상적이지만 성욱의 무모함에 소리 없는 응원을 보내기도 했고, 책의 마지막이 해피엔딩이기를 바라기도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싸가지 없는 진보 - 진보의 최후 집권 전략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산국제영화제의 상영작 <다이빙벨>을 놓고 말이 많았다. 어디까지나 예술의 영역인 영화를 가지고 정치적 편향이니, 무슨 숨은 의도가 있느니 하면서 정부와 부산시, 유관단체에서는 상영을 불허할 것을 요청했다. 조중동을 비롯한 언론들은 무슨 그리 대단한 내용이 담긴 것처럼 연일 기사와 사설에서 <다이빙벨>을 비판했다. 하지만 영화제 측은 이들의 요구와 협박, 공격에 굴하지 않고 상영을 강행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관람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일보는 <다이빙벨>을 관람하지 않고도 영화를 비판하는 독심술을 발휘해 온갖 비판을 가했다.

이런 일은 흔하다. 이 책 「싸가지 없는 진보」에 대한 반응도 그랬다. 단지 제목의 자극성 때문인지, 강준만이라는 학자가 갖는 대중적 취향의 양극성 때문인지 이 책을 두고 말이 많았다. 제대로 진보의 문제를 짚었다 에서부터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문제에 접근했다는 비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책의 출간 전후 즈음하여 의견들이 쏟아졌다. 그 많은 의견들 중 몇 가지만 찾아봤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퍼뜩 들었던 생각은 ‘이 사람들 이 책을 읽기나 했나?’하는 의문이었다. 뭐 책이야 읽는 사람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이기 마련이고 그것이 독자가 갖는 유일한 ‘갑’질 임을 감안하더라도 전혀 이 책의 중심 방향과는 다른 꼬투리를 물고 늘어지는 의견들이 많았다. 더군다나 그런 의견들을 내뱉는 인사들 중 대다수는 진보-개혁 진영의 지식인들이었다. 이름만 대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사람들 말이다.

나는 이 책에서 주장하는 강준만 교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강준만 교수만큼, 이 책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을 쏟아놓은 지식인들만큼 전문적 식견이 있거나 진보-개혁 진영의 한 귀퉁이조차 자리하지 못한 일개 독자이지만, 이 책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동의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동의하면 동의하면 그만이고. 그런데, 뭐 그렇게 말이 많은지 모르겠다.

 

나는 진보의 가장 큰 문제는 ‘말만 많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코 보수-수구 진영보다 싸가지가 없거나 독선적이고 오만해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 또한 나 개인의 생각이고 주장이기에 생각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진보-개혁 진영, 특히 그 쪽에서 한 자리하고 있거나 운동권 출신이거나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은 ‘까대기’바쁘다. 여전히 지난 대선 패배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나꼼수 현상’이고 그것이 대중을 미혹케 하고 단순히 팬덤현상으로 폄하하고 있다. 이 책에서도 그런 꼰대질이 여실히 드러난다.

 

 

“새누리당과 보수를 숭배하거나 존경한 필요한 없지만,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 그런 마음과 자세의 터전 위에 서야만 민심을 제대로 읽는 눈이 트여 집권이 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집권 후에도 성공할 수 있다.” (p.245)

 

강준만 교수는 책의 말미에 이런 주장을 한다.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주장의 전반부는 일부 동의한다. 새누리당과 보수, 기득권을 숭배하거나 존경할 필요는 당연히 없다. 하지만 그들을 왜 존중해야 하나? 이 분이 그 어떤 성역에도 가감 없이 비판을 가하고 그 비판이 진영논리에 함몰되지 않는 것이었기에 그의 책이 많이 읽히고 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책을 통해 세상을 진단하는 안목을 길렀던 것인데, 왜 갑자기 뭉뚱그리려 하는지 모르겠다. 왜 그들을 존중해야 하나? 그들을 존중해야 민심을 읽는 눈이 제대로 트이고 집권을 해서 성공할 수 있다는 논리는 황당무계하다. ‘다 잘 될 거야~’라는 무책임한 자기계발서와 다를 바 없다. 미국의 보수나 유럽의 보수 정당과 기득권을 대하는 태도를 아무런 기준도 없이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책임의 극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보수-수구, 기득권 세력을 제대로 존중하지 않아서 진보-개혁 세력과 야당이 이 모양 이 꼴이라는 논리인가? 무슨 말 같잖은 소리인지 어이가 없다.

 

 

“강남좌파가 입으로는 보통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주변 환경이 그들에게 미치는 영향, 즉 ‘가용성 편향’이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p.80)

“싸가지가 없기 때문에 민심을 읽지 못하고 관성의 포로가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p.6)

 

지금의 제1야당 새민련인지 민주당인지 이름을 거론하기도 짜증이 나는 정당에는 수많은 운동권 인사와 개혁-진보 인사들이 포진해 있다. ‘저 사람이 들어가면 분명 바뀔 거야!’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멍청해지고 이기적으로 변하고 정당 논리에 함몰되는 꼴을 지켜봤다. 강준만은 ‘가용성 편향’으로 이것을 해석한다. 이 부분은 동의한다. 진영논리에 흡수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면 강성이다, 우리끼리 뭐 하는 거냐 식의 비아냥거림과 비난이 따라 온다. 그냥 저냥 세비 받고 가는 곳마다 의원님, 의원님 소리 들으려면 적당히 비판하고 적당히 줄 서고 적당히 지역구에 얼굴 비치면 그만이다. 선거 직전에 잘만 하면 재선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어려운 길을 가겠나?

싸가지가 없어서 민심을 읽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민심을 읽을 생각이 처음부터 없는 것이다.

 

 

“진보적 지식 엘리트는 자기들에게 선거 결과가 안 좋게 나오면 ‘유권자가 욕망에 투항했다.’는 식으로 싸가지 없는 진단을 내놓는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말하는 이들의 재산을 까보면 욕망에 투항했다는 유권자들의 평균보다 훨씬 많다.” (p.83)

“‘이중개념주의자(biconceptualist)’가 따로 있는 건 아니다. 진보적인 사람일지라도 강한 보수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람보 영화에 공감하고 박수칠 수 있으며” (p.105)

 

또 하나 이 책에서 실망한 부분은 주장의 이중적 태도다.

‘이중개념주의자’라는 사회학적 용어를 분명히 언급한다. 진보-개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물론 거의 모든 사회인이 갖는 일상적 태도라고 생각한다. 국가와 국민의례의 습관화를 지독하게 싫어하면서도 야구장에서 습관적으로 국기를 향해 일어서서 손을 가슴에 얹는다거나, 아무도 관심 없을 거라 얘기하면서도 아시안게임을 찾아보는 태도는 분명 ‘이중개념주의자’라는 현상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느닷없이 강남좌파를 비판하고 그들이 갖는 이중개념, 이중태도에 대해서는 싸가지 없는 진보의 논리를 들이대는 지 이해할 수 없다.

 

 

“이 지구가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도는 것도 아닌데, 왜 모든 걸 보수언론 중심으로 이해하려 드는지 안타깝다.” (p.69)

“이윤석, 「야당 망치는 ‘막말 투사들’」, 중앙일보, 2014년 8월 2일.”

“강태화, 「강경파는 기득권... 여당과 협상하면 2중대라고 공격」, 중앙일보, 2014년 8월 2일.” (p.151, 각주)

 

또 하나

강준만은 누구보다 조중동, 특히 조선일보에 비판적인 사람이다. 보수언론에 대해 유달리 겁을 먹는 싸가지 없고 대책 없는 진보-개혁 진영을 비판하면서도 그는 여러 번 보수언론을 인용한다. 대부분 중앙일보다. 조선일보도 있지만 중앙일보 보다 횟수는 현저히 적다. 조선일보만 아니면 되나? 맞다. 이 책 출간 후 손석희의 뉴스룸에 출연했었지. 싸가지 없는 진보-개혁 진영과 야당을 비판하는 논거나 중앙일보가 된다는 것 자체가 황당했다.

 

 

“‘민주 대 반민주’라는 구호는 자기만족을 위한 마스터베이션인지라 사라지긴 쉽지 않다.” (p.200)

“야당은 2012년 총선 이후 정권 심판론만 앵무새처럼 외치고 있다. 자신들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유권자들은 도통 알 수가 없다.” (p.135)

 

이 주장에는 동의한다.

적어도 진보-개혁적 가치관을 추구하고 그 방향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민주화 운동과 반독재 투쟁에 청춘을 바친 사람들에 대한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다. 나 또한 그랬다. 그런데 어느새 부턴가 이것이 결코 뗄 수 없는 훈장이 되어 버린 듯하다. 강준만의 표현대로 자기만족을 위한 마스터베이션은 쉽게 떨쳐낼 수 없는 중독이다. 이것이 단순히 자기만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상대를 구분 짓는 잣대로 사용한다는 것이 문제다. 어느새 자신도 청춘의 뜨거움과 그때의 추억에서 벗어나 진영논리에 파묻힌 그렇고 그런 정치인이 되었다는 것을 자신만 모른다. 그러니 사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똑같은 정치인인데, 과거의 추억 속에서만 살고 있는 것이다. 대중은 분명하게 안다. 어떤 정치인이 여전히 운동의 순수함을 유지한 채 정치를 하고 있는 지 말이다. 그들만 모르고 있다. 국회와 정당 바깥에서는 굽실굽실 거리는 흉내를 내지만 그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똑같아 지는 것이다. 대중은 다 알고 있다.

세월호 특별법 협상을 놓고 야당에서 보인 무능과 무책임은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이명박 정권 말기에서부터 지금 박근혜 정권 중반기까지 수많은 호재가 있었다. 전세를 뒤엎고 정국을 주도해나갈 동력 말이다. 보수-수구, 기득권의 헛발질에 국민은 분노로 힘을 실었다. 유일하게 야당만 이것을 받아 안지 못했다. 어차피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기에 어쩔 수 없이 미우나 고우나 야당에 힘을 실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뻥~! 차버렸다. 입으로만 국민 국민 떠들지만 그들에게 국민은 없었던 것이다. 매번 지고, 매번 헛발질 하고, 매번 야합이나 하고 앉아 있으니 그들이 떠드는 정권 심판은 공염불이다. 국민들은 더 이상 그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래도 더 밉고, 더 비판을 해야 할 대상은 정권과 새누리당인데 국민들은 야당을 더 싫어한다.

 

 

“이런 야당을 상대하는 여당은 국회 안에선 괴로워도 선거는 쉽다. 야당으로부터 소외된 국민에게 손만 내밀면 표가 오기 때문이다.” (p.146)

 

차라리 요즘은 새누리당과 보수-수구 진영이 더 감각적으로 움직인다.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는 척 하고 파격쇼를 하기도 한다. 선거가 늘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대 가장 비겁한 여당과 역대 가장 무능한 야당을 가진 지금이 역대 가장 불행한 국민을 만들고 있다는 말들이 떠돌아다니는 것이다. 차라리 저들처럼 납작 엎드리는 시늉이라도 하던가. 문희상 비대위원장의 일성이 “살려주십시오.”였다는 것은 이미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긴 패배한 부대의 수장이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라고 하는 비겁함에 지나지 않는다.

 

 

“지역위원회를 봉사, 서비스, 교육 등 공적 기능을 하는 조직으로 바꿔야 한다. 당이 현장의 국민들을 도와줄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p.227)

 

싸가지의 있고 없음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야당이 혁신하는 길은 국민들, 대중들 속으로 들어가는 일밖에는 없다고 본다. 언제까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불리한 싸움 타령만 할 수는 없다. 130석에 달하는 의석을 갖고 있음에도 이토록 무능하고 무책임한 것은 그들의 머릿속에 국민이나 대중이 없기 때문이다. 이대로 영원히~ 면 그만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권교체가 아니라 본인의 재선’이라는 어이없는 날 선 비판이 사실이 아니라고 강변하려면 바뀌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무슨 일을 하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전국의 지역위원회를 통해 풀뿌리 대중정치를 시도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보다 국민과 대중, 유권자의 마음으로 다가가겠다는 정당정치의 문턱이 지금처럼 이렇게 높아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강준만 교수의 다음책의 제목이 어떨지 궁금해진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책이 화제의 중심이 되는 것은 좋은 것일 테다. 그것이 고스란히 구매로 이어지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과 같은 자극적인 제목은 아니었음 싶다. 불필요한 말들이 너무 많이 쏟아져 나와 같은 일개 독자들이 책을 읽기가 버겁다.

나는 지금 진보-개혁 진영의 가장 큰 문제는 싸가지 없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예 별 생각 없음이 가장 큰 문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수는 왜 다문화를 선택했는가 - 다문화 정책을 통해서 본 보수의 대한민국 기획
강미옥 지음 / 상상너머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이자스민씨가 아시안게임 개막식 태극기 기수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이자스민씨가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았다는 것이 연일 보도되던 때, ‘어? 저 사람 어디서 봤지?’ 했다. 영화 「완득이」에서 완득이의 엄마로 나오는 사람이었다. 찾아보니 필리핀 이주여성이었다. 새누리당에서 공천을 받은 만큼 당연히 당선이 되었고, 의정활동을 활발히 하고 계실 것으로(?) 생각은 하고 있다. 여러 보좌관들과 의사소통은 원활하신가? 갑자기 궁금하네~

 

영화 「완득이」는 무척 재미있었다.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만 본 나는 혹시나 영화의 재미와 감동이 반감될까 소설은 손대지 않았다. 원래 반대가 되는 게 일반적인데^^;;

영화에서도 다문화가정인 완득이네가 겪는 여러 가지 삶의 고달픔이 표현된다. ‘다문화가정’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10-20년 전 초기 이주여성들의 모습과 기억에 머물러 있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40-50대의 노총각들이 동남아나 구 러시아연방으로 날아가 현지의 젊은 여성들과 결혼하는 풍경. 남편 하나 보고 날아온 땅에서 겪는 어려움과 아픔. 남편의 폭력. 뭐 이런 것들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여당의 국회의원이 되기도 하는 현실이다. 단순하게 놓고 보면 이제는 어엿한 대한민국 국민이 될 수 있고 국회의원이 될 수도 있는 다문화국가가 된 듯 하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는 다문화가정의 삶은 행복하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단지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것으로 국가와 기득권이 다문화가정과 다문화정책에 주요한 관심을 쏟고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학교 안에서도 그 아이들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그 아이들을 ‘구별 지어’온 지 오래되었다. 의도는 좋았으나 그 과정이 섬세하지 못해서 결과를 망쳐버린 경우.” (p.191)

 

학교 안에서는 여전히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차별 받고 있다고 한다. 피부색이 다르고 자신을 제외한 다른 아이들과 외모가 다른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은 이름조차도 불리지 않는다고 한다. “야! 다문화!”가 그들의 이름으로 불린다고 한다. 학교와 교사가 분명히 주의를 주고 배려하고 도울 것을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단순히 배려하고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불러일으킨 결과다. 저자의 지적대로 좀 더 섬세하고 그들 입장에서 입안되고 마련되어야 할 정책과 담론이 수혜자의 입장에서 논의되다 보니 어쩔 수 없다.

 

 

“이명박 정부에서 박근혜 정부로 이어지면서 대한민국 다문화 정책은 이제 정착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데, 아직까지 진보-좌파 진영에서는 보수-우파들이 다문화주의를 주류 담론으로 선택한 이유조차 구체적으로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p.9)

 

이명박 정부에서 박근혜 정부로 이어지면서 다문화 정책이 이미 정착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국회의원도 공천했다. 야당과 진보-좌파 진영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이야기다. 야당과 진보-좌파는 다문화 정책에서도 주도권을 내주었다. 도대체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자들이다. 이자스민씨가 공천되고 당선되는 것도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저 무슨 시혜적 발상인가? 이자스민이 국회의원이 돼? 의정 활동을 제대로나 할 수 있겠어?’ 정도일 것이다. 야당은 그 공천 한 석을 가지고 각종 계파와 잘난 사람들이 들러붙어 개싸움을 할 것이니까. 하지만 대중들은 이자스민씨를 공천하고 당선시킨 여당을 기억할 뿐이다. 앞서간다는 느낌이다. 당선된 후 아무런 주목할 만한 의정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시안게임 기수단으로 참여한 그녀를 보며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맞아~ 새누리당에는 이자스민이라는 국회의원이 있지~!” 새누리당과 보수-우파들에게는 단순히 국회의원 1명이 아니라 다문화정책을 우선하고 중요시한다는 보이지 않는 지지가 쌓인다. 언제일지 까마득한 다음 총선에서 야당이 다문화 인사를 공천한다면 새누리당 따라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짐승 몰듯 이주민 노동자는 사정없이 쫓아내면서, 이주노동자 방송에 보내주던 지원금은 끊으면서, 왜 한편으로는 계속 다문화 시대를 노래했을까?” (p.24)

 

보수-우파와 새누리당이 이제껏 보인 다문화 정책은 다분히 차별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이자스민씨를 공천하면서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그들을 탄압하고 구별해 냈다. 하지만 대중의 뇌리에 남는 것은 이자스민씨다.

진짜 그들이 노리는 것은 더 무서운 것이다.

 

 

“일제 강점이라는 정치성이 상당히 희석된 공간 만주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언어와 문화의 향연, 대한민국 우파들이 꿈꾸던 근원적인 세상의 모습이자 미래의 모습.” (p.149)

 

보수-우파라면 민족 중심주의, 애국주의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미국과 유럽의 보수-우파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우파는 그것과는 다르다. 이명박 정권 시절 광복 몇 주년 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사라지고 건국 몇 주년 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탄생했다. 임시정부를 이어받은 헌법적 역사성을 배제하고 이승만의 건국을 추앙하는 각종 시도가 발현했다.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역사관이 새롭게 뒤틀리고, 아이들이 역사를 배우는 교과서조차 손을 댔다. 지금 뉴라이트는 유야무야 되었지만 그들이 심어 놓은 왜곡된 역사편향은 당연히 잘못된 것이 아니라 ‘논란거리’가 되었다는 점이 더 심각한 문제다. 이상한 사람들이 떠드는 이상한 소리가 아니라 같이 머리를 맞대고 토론을 할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진짜 꿈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저자는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 펼쳐진 20세기 초반 만주를 소개한다. 중국과 러시아 조선과 일본에서 몰려 든 많은 사람들이 민족과 국가, 이념과 가치를 초월해 만주드림을 꿈꾸는 분위기. 이념과 가치가 모호하니 뒤얽혀 있는 상태.

 

 

“다문화주의는 자신들을 숭미주의자, 친일주의자로 몰아붙이고 수구꼴통이라면서 손가락질하는 진보 진영의 입을 막을 수도 있는 꽤 괜찮은 도구일 수 있다는 판단.” (p.84)

 

한국의 보수-우파, 여당은 지울 수 없는 뿌리가 있다. 일재 잔재. 일본의 침탈과 미군정, 냉전을 거치며 그들이 보인 태도는 지극히 자신들의 입신뿐이었다. 제국주의와 공산주의에서 구해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민주정부 10년 동안 밝혀낸 친일행위자의 후손들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대해 그토록 목을 매 반대하고 비판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 선조의 매국 행위와 친일 행위가 밝혀지면 안 되니까. 그들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재산이 몰수당할 수도 있으니까. 물론, 과거사가 제대로 진상규명되고 친일행위자가 밝혀졌어도 재산 몰수는 꿈도 꿀 수 없는 사회지만 말이다. 어차피 이 사회의 거의 모든 주도권을 쥐고 있는 쪽은 그쪽이니까. 단순히 대통령만 다른 사람이었을 뿐.

그런 그들에게 다문화주의는 그들의 과거를 희석할 수 있는 호재였다.

 

 

“이것 봐라. 우리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생활하는 다문화가정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 이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우리는 국회의원도 있다.”

 

“이들 탈북자들에게 진보적인 선택지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남한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경험이 없어 초기 정착 과정에서 하나원이라는 통제된 교육기관을 거치고, 정부의 정착금을 받고, 교회에 나가는 과정에서 그들이 ‘마치 수령님 교시처럼 목사님 말씀을 따르는’극우적 성향을 띠게 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다는 얘기다.” (p.105)

 

탈북자들에 대한 정책은 더욱 심각하다. 국정원의 간첩조작 사건만 봐도 저들의 속내는 분명하다. 북한에서 살기가 싫고 어려워서 목숨을 걸고 넘어 온 사람들은 관리해 온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보호의 명목 하에 관리하고 간첩으로 조작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북한으로 대량의 삐라를 끊임없이 뿌려 대는 탈북단체를 그냥 놔둔다. 그래서 남북 간에 물리적 충돌도 벌어졌다.

정부와 국정원의 관리에서 나오게 되면 먼저 그들을 맞는 것은 교회다. 교회에 정착해 새로운 남쪽의 이웃과 친구들을 사귀고 만난다. 저자의 아픈 지적처럼 좌파-진보 진영에서 이 사람들을 향해 먼저 팔을 내뻗은 적은 없다.

 

 

“‘다문화’란 다양한 민족이 품고 들어온 이국적이고 독특한 사물이나 도구, 행사에 대해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각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관점, 즉 인식의 방법에 대한 반성적 이해를 전제한다.” (p.46)

“다문화적 실천은, 그런 소소한 코드들에 대한 다양한 해석, 관점 등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p.47)

 

앞으로 더 많은 다문화가정이 생길 것이고 더 많은 탈북자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언제까지 손 놓고 있으려는지 모르겠다. 이자스민씨 같은 국회의원 하나쯤 뭐가 문제가 돼. 삐라 뿌리는 거 그거 뭐 북한 주민들이 보기나 하겠어. 하다가 큰 코 다친다. 지금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진보-좌파, 야당 아닌가? 도대체 하는 일이 뭔가. 국민들 속 뒤집는 일?

 

 

“보수-우파들의 전략들이 성공을 거두는 이유는, 대부분 그들의 전략이 사람들의 가장 약한 고리를 제대로 건드리기 때문이다.” (p.161)

“네가 내 것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이 어차피 빼앗길 수밖에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현실적 인식과 공감적 이해가 필요하다.” (p.242)

 

생각보다 보수-우파는 영리하다. 자신들의 이익과 안녕을 위해서 파격을 단행하기도 한다. 요즘 각종 민생 정책을 파기하고 세금을 늘리고 하는 것은 선거가 멀기 때문이다. 아무리 삽질을 해도 더 무능하고 무책임한 야당과 진보진영이 있으니 룰루랄라 할 수 있다. 선거가 다가오면 납작 엎드리는 쑈 몇 번 하면 된다.

 

 

“몇몇 대학을 중심으로 사범대학에 다문화교육학과가 생겨나고 대학에서부터 다문화 교육 관련 프로그램이 신설되기 시작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p.269)

 

다문화교육학과가 생기고 다문화 관련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먼저 그들과 현상을 반성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시집오거나 돈 벌기 위해 들어와 있는 외국인들이 아니라 함께 어깨를 걸고 이곳에서 함께 살아가야할 사람들이다. 단순히 국회의원 한 명 뽑아주고 돈 몇 푼 지원해 준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초등학교 교실에는 점점 더 피부색과 외모가 다른 아이들이 많아질 것이다. 그 아이들을 “야! 다문화!”라고 구별하는 문화가 지속된다면 그 아이들이 함께 할 군대, 직장, 사회에서조차 “야! 다문화!”는 이어질 것이다. 구별해 내 특별하게 도와주거나 배려해주는 것은 진정한 도움이 될 수 없다. 아예 교과 과정에 <다문화 이해가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초·중·고등학교에서 계속해서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래서 저 아이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함께 손잡고 일하고 어깨 걸고 기대는 것에는 피부색과 외모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 체화되어야 한다.

진보-좌파, 야당에서는 할 일이 참 많은데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거, 이제 좀 그만 할 때도 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차남들의 세계사 - 2014년 제47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민음사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장남이다. 동생은 한 명밖에 없지만 어쨌든 장남이다.

나는 차남이 아니다. 누구보다 동생과 사이가 좋고 우애가 깊지만 나는 차남이 아니다.

당연히 나는 차남들의 세계를 알 수 없다.

동생이 대학에 들어가고 얼마 뒤,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형! 형한테 맞은 애들이 진짜 많아~”

나는 동생을 때리고 괴롭히는 장남이었다. 맞고 괴롭힘 당해 어쩔 수 없이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차남이었던 적이 없다.

 

 

“들어 보아라.

이것은 이 땅의 황당한 독재자 중 한 명인 전두환 장군의 통치시절 이야기다.” (p.11)

 

전두환은 6남 4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단다. 4남이 차남일 수는 없는데?

나복만씨...

나는 전두환 시절을 살지 않았다. 아니다. 살았다 살았어. 전땅크께서 재임하실 때 나는 어린아이였다. 내 아버지가 민주화 운동이나 독재타도 투쟁을 하지 않으셨기에 전땅크께서 하사하신 국가폭력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내 생일날, 내가 좋아하던 여자아이를 초대해 놓은 생일 상 너머로 88올림픽 개막식을 지켜 본 기억밖에 없다. 그 때 모자를 쓰고 뭔가 둥근 바퀴 같은 것을 굴리는 아이가 온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장면밖에 기억에 없다. 그 굴렁쇠 소년보다 나는 내 앞자리에 앉은 그 소녀에게 더 관심이 갈 뿐이었다.

나복만씨는 전땅크, 전두환 장군이 가장 강력하게 힘을 과시하시던 때의 사람이다. 지금까지 생존했다면 내 아버지 나이 정도 될까? 그에겐 나 같은 장남이 있을까? 내 동생 같은 차남도 있을까?

 

 

“그러니까 그날, 나복만이 원주경찰서 교통과가 아닌 정보과로 간 것 역시 다른 어떤 숨겨진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글을 잘 못 읽어서, 사무실 문 앞에 달린 입간판을 제대로 읽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일 뿐이었다.” (p.39)

 

어렵게 취득한 면허는 그의 생명줄이었다. 자기만을 바라보고 사는 순희를 더 행복하게 하고 함께 오순도순 살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택시기사다. 당시만 해도 택시는 드물고 비싼 운송수단이었으리라. 노력만 한다면 먹고 살 수 있고, 좀 더 노력만 한다면 개인택시를 몰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단지 하나, 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이 나복만씨의 아킬레스건이 될 줄이야.

자신이 저지른 사고를 자수하기 위해 찾아간 경찰서 정보과는 전땅크 시절 최고의 권력기관이었다. 안기부, 군대, 경찰 모두 반공이념을 뿌리까지 내리기 위해 좌경, 용공세력, 빨갱이를 때려잡는 데 혈안이 되어 있던 시기였다. 나복만씨가 동료에게, 하다못해 순희씨에게 교통과라는 단어의 모양이라도 물어봤더라면...

~라면, 만약~. 이런 것은 지나간 뒤 후회할 때나 쓸모 있지. 아무런 소용이 없는 체념이다.

얼마 전,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최종 무죄 선고가 나오고 관련자들에 대한 국가배상 판결이 났다. 남은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 잠시 위로와 돌아가신 분에 대한 명예는 회복할 수 있겠지만 그간 받아 온 고통과 아픔에 대한 치유는 불가능하다. 국가를 위해서 사람을 위해서 운동한 것이 전부인데, 잡아 가둬놓고 때리고 짓밟고 망가뜨려 놓은 후 덮어씌웠다.

 

 

“그리고... 우리의 친절한 정 과장 역시 일주일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하며 그에 버금가는 작품 하나를 준비하고 있었으니... 그 작품의 이름은 ‘형제회’였다.” (p.197)

 

국가기관에서 일하는 정 과장이 차남일까? 정 과장은 국가를 위해 일했다. 그것이 애국인 줄 알았다. 지독한 고문기계 이근안이 세상이 바뀌자 다시 한 번 반성을 뒤집어엎고 자신의 고문이 애국행위였다는 개소리를 했다. 정 과장이 결국 중상에서 회복 해 살아났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그도 이근안처럼 그렇게 자신의 과거 행위를 정당화할까? 이근안은 지독한 악마일까?

나복만씨는 정 과장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이 새끼야, 그 사람들이 누구냐고!”

“그러니까 그게... 그러니까 그게... 지학순 주교님이라고...”

“누, 누구? 지, 지학순 주교?”

“그게 저도 나중에 알았는데... 그분이 저를 무지하게 좋게 생각하셔서... 택시도 항상 제 택시만 이용하시고...” (p.146)

 

곽용필 경정도 최형사도 나복만의 죄를 만들어 냈다. 결국 나복만의 입에서 그 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나복만의 동료, 과대망상에 빠진 박병철에 의해 곽용필 경정의 아내와 곽용필 경정의 아이의 담임 김상훈과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탄탄한 출셋길을 달리려면 아내의 외도쯤은 나복만을 간첩으로 만들어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야만과 광기의 시대.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해 주는 건데, 사실 나... 반미주의자야.” (p.50)

과대망상에 빠진 박병철은 반미주의자다. 자신은 반미주의자지만 눈치보고 김상훈과 곽용필 경정 아내와의 불륜을 밝혀내기 위해 탐정 역할을 자처한다. 그가 내세우는 반미와 불륜이 뭔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나복만의 경찰서 출두도 부러워한다. 대단한 양 취급한다.

전땅크 시절, 그 이전 박정희 시절, 이후 노태우 시절까지 목숨을 걸고 운동하고 투쟁한 사람들이 지금 기득권이 되었다. 그들이 이전에 화염병을 던지고 반미를 외치고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쳤던 사람들이다. 머뭇거리며 대오에 동참하지 못한 사람들보다 앞장 서 청춘을 던졌다. 그런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현실 정치에 들어갔다. 분명히 바뀌어야 하는데, 아직도 바뀌지 않고 있다. “사실 나... 반미주의자야.”, “사실 나... 운동권 출신이야!!” 근성만 남아 과거에 살고 있다.

 

 

“넌, 개새끼야... 명, 명찰을 달고 있어야지만 그,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니?”

“명찰을 달고 있어야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냐고, 이 개새끼야!” (p.290)

 

차라리 글자를 읽지 못하는 나복만씨가 낫다. 정 과장에게 카운터블로를 날린다. 맞다. 명찰이 없다고 사람을 알아볼 수 없지는 않다. 그 사람의 목소리, 몸짓, 말투. 아니, 외모만 봐도 알 수 있다. 순희씨와 행복하고 소박하게 잘 살기 위해 수시로 다녔던 원주 시내다. 저리로 가면 지학순 주교님을 만날지도 모르고, 저리로 가면 자신을 기다리는 순희씨를 만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복만씨는 전봇대로 돌진한다.

 

 

“때때로 평온하게만 보이던 우리의 일상이 부욱, 소리를 내며 찢어진 후, 그 틈에서 낯선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p.232)

 

“아무것도 읽지 못하고, 아무것도 읽을 수도 없는 세계, 눈앞에 있는 것도 외면하고 다른 것을 말해 버리는 세계, 그것을 조장하는 세계, 그것이 어쩌면 ‘차남들의 세계’라고 말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p.179)

차남들의 세계사가 어떤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태생적인 한계다.

문득 작가가 말한 차남이 둘째 아들이 아니라면...

어허~ 책 헛 읽었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인수업 - 나를 넘어 나를 만나다
박찬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인생이 마음대로 된다면 지금과 같은 불안하고 불안정하며 분노와 아픔과 상처로 가득한 세상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 다 행복하고 안전하고 안정된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지극히 상대적인 기준으로 평가되는 세상이다 보니 모두 다 행복하지 않고 안전하지 않으며 안정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이것은 공통된 희망사항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신이거나 죽은 사람이거나. 사람은 행복하고 싶다. 정말로 그렇다. 그런데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늘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의 인생이 그들 마음대로, 그들 뜻하는 대로 흘러가 마무리 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자신의 생을 마감하면서 ‘아! 나는 정말 행복한 인생을 살았어. 만족하는 생의 마지막이야.’라고 하는 사람이 인류 역사를 통틀어 몇이나 있을까? 그렇다. 생은, 인생은 괴로운 것이다. ‘나’라는 인생, 단 하나밖에 살아보지 못해 성급하게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무슨 수를 써도 ‘나 외의 인생’을 살 수 없는 것이 진리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그래서 역사 이래로 수많은 성현이나 선생들의 삶에 대한 가르침과 권면이 있어왔고, 넘쳐나는 책들도 조금이나마 이정표 노릇을 하려한 것일 테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다. 아무리 책을 읽거나 성현들의 글귀를 마음에 새겨 살아도 도무지 내 일상은 나아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내게 있지 않은 것’이다.

 

웰빙 열풍이 지나간 자리에 ‘힐링’ 열풍이 도래했다. 수년 째 지속되고 있는 힐링, 힐링, 힐링은 꽤 매력적이지만 지극히 패배주의적이고 사회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부족으로 한정시켜 모든 문제의 근원을 ‘개인으로 유폐’시키는 사디즘적 폭력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힐링’이 특정 사회에서 일정 정도 희구되고 있다는 것은 그 사회가 그만큼 병들어 있다는 방증이다. 병들어 있지 않은 사회와 개인들에게 ‘힐링’은 무의미하고 무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힐링, 힐링, 힐링의 대상이 되는 주요 세대는 젊은 세대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20-30대 젊은 세대는 정말 열심히 산다. “더 노력하세요! 자신을 더 갈고 닦으세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세요!” 라고 말하는데, 벌써 그렇게 살고 있다. 미친 듯이 열심히 산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한국의 특수성이 주된 이유이지만, 충분히 열심히 치열하게 산다. 그런데 그런 이들에게 또 다시 ‘더 열심히 살아라.’ 라고 하는데,

‘그런가 보다. 내 노력이 부족한 가 보다. 남 탓하기 전에 나를 돌아보자. 나를 발견하자.’ 이러고 있다.

문제가 ‘내게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힐링’은 없다. 그런 자기계발서도 없다.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p.248)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니체가 한 말이라고 하는데, 나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한국에서 고유명사 정도로 자리 잡은 ‘힐링’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이 왜 나를 강하게 만드나? 나는 그 전제부터 동의할 수 없다.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이지만 나를 더 괴롭힐 수도 있고,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책 전반에서 저자가 말하는 주제는 ‘고통을 참고 오히려 즐기라.’라는 것이다. 철학자이자 교수인 저자는 니체를 전공한 사람인 것 같다. 그래서 주로 니체의 책을 통해 주제를 피력한다. 니체 또한 육체적으로도 엄청난 고통을 겪었고 시대적으로도 가혹한 시기를 지났지만 그의 책에서는, 그 고통을 오히려 즐기고 이겨낼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조금만 힘들어도 불평을 쏟아내고 아주 작고 불편한 자극에도 호들갑을 떱니다. 이렇게 자극에 민감하면서 안락만을 탐하는 인간을 두고 니체는 ‘말세인’이라 일컫고, 이런 유형의 인간에 대해 ‘초인’을 내세웁니다. 이러한 초인을 니체는 ‘고귀한 인간’ 혹은 ‘기품 있는 인간’이라고도 부릅니다.” (p.41)

 

니체가 말한 ‘초인’ 개념이 책에서 자주 등장한다. 나는 니체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그의 책 한 권을 읽으려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서 포기했던 전과가 있는 터라, 저자의 니체 소개를 전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그렇다 하더라도 ‘초인’개념은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이 책을 읽다보면 니체가 그리스 철학에 심취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런 니체가 왜 인간의 희로애락과 고통과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말세인’이라 하고, 그것을 이겨내는 ‘초인’을 주장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초인’이 과연 고귀한 인간인지, 기품 있는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사회와 기득권이 정해놓은 규칙과 명령에 순종하거나 순종하지 않더라도 아무런 저항이나 목소리조차 내지 않고 사는 것이 ‘초인’으로 해석된다.

 

 

“니체는 문제는 우리 자신의 정신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정신력이 약하다 보니 세계가 그렇게 무의미하고 황량한 곳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정신력을 강화할 때 세계는 다시 아름답게 보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p.68)

 

전형적으로 한국에서 유행하는 자기계발서적의 패턴이다. 나는 그렇게 읽힌다. 왜 문제가 우리 자신의 정신에 있는가? 니체가 역사를 통틀어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 철학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니체의 말이 맞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사, 세상이 무의미하고 황량해 보이는 이유가 왜 우리의 정신력의 세기에 달려있나? 말도 되지 않는다.

‘아직 정신 못 차렸구만! 더 노력해야지! 젊은 놈이 패기가 없어!!!’ 라는 사디즘에 다름없다.

 

 

 

“모든 사람이 고난과 고통을 겪을 때 인격신에 의존하기보다는 강한 정신력과 생명력을 지닌 초인이 되어 어떠한 고난과 고통도 혼연히 받아들이면서 현실을 긍정하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기를 바랐습니다. 이러한 초인을 니체는 ‘예수 그리스도와 카이사르를 종합한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p.139)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허탈한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카이사르를 종합한 인간’이라는 것 자체가 모순으로 여겨졌다. 예수와 카이사르가 어떻게 종합될 수 있나? 니체는 카이사르는 물론 나폴레옹을 존경하고 사랑했다고 하는데, 저자의 간략한 소개로는 이해되지 않았다.

모르겠다. 니체의 책의 일부분을 발췌해 옮겨 적용하는 과정에서 저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 첨부되었겠지만 정말 니체가 내린 초인의 모델과 정의가 저렇다면 나는 앞으로 계속 니체의 책은 읽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내게는 너무 유치하고 황당한 논리로 여겨질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니체가 영원회귀 사상을 깨달으며 겪었던 황홀경의 체험과 유사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p.60)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도 저자의 소개로 처음 알게 되었다. 요양 차 머물던 곳 가까이에 있는 호숫가에 높이 솟아 있는 바위를 지나던 길에 갑자기 벼락에 맞은 것처럼 영원회귀 사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건 뭐 니체가 그렇게 비판해 마지않던 기독교의 경전에서 자주 나오던 기적과 비슷해 보인다. 나만 그런가? 철저하게 이성과 합리를 추구하며 실존철학의 선구자가 된 니체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니체는 사람들에게 ‘그대의 운명이 평탄하기를 바라지 말고 가혹한 것을 바라라’라고 외치며, 그런 운명과 투쟁하면서 장렬하게 죽을지언정 패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p.16)

 

‘가혹한 것을 바라라.’

정말 너무 가혹하다. 여기서 더 이상 어떻게 더 가혹한 것을 바라라는 것인지. 지금은 장렬하게 죽을 수 없는 시대다. 죽고 싶어도 그렇게 죽을 수 없다. 패배하면 바로 탈락이다.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에서 패배는 바로 Out!!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