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만들어지면 참 좋을 것 같은 작품이다. 드라마로는 다 그려낼 수 없는 스펙터클이
녹아 있다. 어쩌면 소재와 내용은 진부할 수 있다. 중학교 시절 봇물 터지듯 쏟아진 느와르 소설과 영화의 그것과 유사하다. 나와 비슷한 나이쯤
어디에 걸쳐진 남성들에게는 현실의 쳇바퀴와 그것이 주는 거부할 수 없는 무게에서 잠시나마 탈출해, 멋진 여주인공과 그녀와의 사랑을 위해 제 목숨
하나쯤 간지나게 던져버리는 주인공으로 감정이입하기에 딱 좋은 작품이다. 사회생활을 하고,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하루하루 반복되는 밥벌이의
지겨움을 헌신짝처럼 벗어 던져 버리고 싶어도 결코 그럴 수 없는 나와 당신들에게 아주 잠깐 이지만 느와르를 경험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 작품의 의미는 충분하다.
“다시 말하면 옴팡지게
잘못 걸렸다. 마약도 마약이지만 이해 관계자가 이런 식으로 얽혀 있는 사건은 곤란하다. 어떤 식으로 일을 해결하든 누군가에게 원한을 사게 되기
때문이다.” (p.161)
전직 경찰, 일도는 청부업자다. 청부업자 앞에 ‘살인’이라는 단어가 붙지 않는다고 해서
일도의 일탈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누구보다 깔끔하게 일처리를 한다고 그 바닥에서는 소문난 일도에게 이번 일은
옴팡지게 잘못
걸려든 재수 없는 사건이다. 명동
사채시장의 큰 손, 방회장이 얽힌 일이고 그 일이라는 것도 마약과 관련된 일이다. 이제껏 아무리 깔끔하게 일들을 처리해 온 일도에게도 이번 일은
정말 옴팡지게 재수 없는 사건인 것이다.
“30분 전, 그는 7년
사귄 여자 친구에게 차였다.” (p.13)
“성욱은 편의점에 들러
우산을 샀다. 중국제 3단 우산이 만 2천원이었다. 여자 친구에게 차인 날, 비까지 맞으며 처량해지고 싶지 않았다.”
(p.20)
“하지만 계속 웃는
얼굴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성욱은 그녀를 따라 건물 로비로 들어가 우산을 털고 주위를 살폈다.”
(p.20)
7년 동안이나 사귄 여자 친구 인영과 헤어진 그날 저녁, 성욱은 이 옴팡지게 재수 없는
사건의 주인공이 된다. 방금 여자 친구와 헤어졌지만 편의점에 들러 싸구려 중국제 3단
우산을 사야 하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가진 것 없는 성욱에게 수정이
나타난 것이다. 7년 동안이나 자신을 기다려 준 인영에게 방금 이별을 통보 받은 성욱이지만 예쁜 여자에게 눈이 간다. 남자라는 동물은 어쩔 수
없다. 자신을 위해 주위의 만류와 비난과 멸시에도 꾹꾹 참으며 기다려 준 인영은 이미 아웃 오브 안중. 계속 웃는 얼굴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맞다. 게다가 계속 웃는 얼굴이 너무 예쁜 얼굴이면 이미 게임 오버.
그게 화근이었다. 그날 저녁 이별을 통보 받은 인영에게 제대로 따지지도, 욕을 하지도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며 쓰린 속에 쓰린 소주나 들이 부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중국제 싸구려 우산을 사고 나온 거리에서 방금
여자친구에게 차인 놈이 다른 여자에게 바로 눈길이 가냐~ 이런 미친놈! 하면서 그냥 지나쳤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성욱도 일도도 마음이 가는 대로 해버렸다.
뒷일은 전적으로 본인들의 책임이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왔지만 앞으로는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한 걸음 잘못 내디디면 언니처럼 죽는다.” (p.120)
수정은 친언니처럼 믿고 따랐던 언니의 죽음을 겪은 후 방회장과 방태수, 이석구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 방태수가 차림 뷰티샵에 취직해 그와 가까워지고 그의 신임을 얻는다. 언니의 복수를 위해 기꺼이 언니가 된다. 명동의 큰손이지만
아들 방태수는 작은 손가락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이석구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 했다. 이석구는 주도면밀하고 꼼꼼하게 방태수를 조종하면서 뒤로
자신의 이권과 돈을 챙겼다. 그런 와중에 단순히 뒷돈을 빼내고 돈을 세탁해 자신의 주머니에 챙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약에 손을 댔다. 작은
손가락의 때조차도 안 되는 방태수를 뒤에서 조종하면서 두둑하게 챙기고도 남을 텐데, 사람 욕심은 정말 끝이 없다. 방태수가 조금만 사업수완이
있고 똑똑했더라면 이석구의 욕심이 그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을 텐데, 사람 욕심이란 끝이 없다.
수정은 그런 이석구마저 감쪽같이 속인다.
“그가 그만두지 않는 건
추억 때문이었다. 나이 스무 살 때 시험을 보고 들어와 10년 가까이 경찰로 일했다. 사건 해결에 실패하고 파트너였던 남익 선배가 죽기
전까지는.” (p.189)
일도 또한 수정과 비슷하다. 잘나가는 경찰을 그만 두고 이상한 사설 청부업자가 되어 이상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과거의 일 때문이다. 파트너였던 선배가 죽고 난 후, 그 아픔과 상실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도는 정상적인 것을
포기해 버린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사실은 정상적이지 않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전혀 어울리지 않게 출판사 편집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성욱이나
친언니보다 더 가까웠던 언니를 위해 자신의 인생 자체를 내어 놓는 수정이나, 파트너였던 선배의 죽음 이후 이상한 사설 청부업자가 된 일도나,
방태수와 이석구 또한 비정상이다.
그런데 세상 돌아가는 것이 결국 비정상이다. 이 정도 쯤이면, 이때쯤이면 이렇게 되겠지,
저렇게 되겠지 하는 추측이나 기대는 하릴없다.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버린다. 무너져버리면 그만이다. 다시 쌓아 올릴 수 없다. 그렇게 무너진
위로 비정상이 자리 잡는다. 그리고 그것이 정상인 것처럼 행세한다. 그러면 그것이 정상이 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사건들은 지극히 극적이다. ‘에이~ 이건 과한 설정이잖아~’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남 얘기하고 남
얘기 듣기를 좋아하는 것이 사람이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별의 별 이야기가 다 나오게 마련이다. “어머~ 그랬대? 정말? 어머 어머”
남 얘기 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과장하고 왜곡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과장과 왜곡을 걷어내더라도 사실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에도 그런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들었다. 좋은 곳에 취직해 잘 살고 있다고 소문이 났었던 후배 한 녀석이 사실은... 뭐 그런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와 소문들을 듣다 보면 차라리 이 책의 내용과 설정이 어딘가 부족한 것은 아닌
가 싶기도 하다.
“경찰 친구를 만났기
때문일까?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알량한 정의감이 고개를 들었다. 다 쓸모없는 일인데, 감상적인 인간은 일찍 죽을 뿐인데.”
(p.221)
“너 은근히 독한
새끼다. 여자 땜에 이러는 거라니 바보 새끼고.”
“딱 오늘까지만 그래
보려고요.”
“미친 새끼, 허튼수작
할 거면 그전에 나한테 말해라.” (p.305)
이
책에서 좀 과하다 싶었던 부분이다. 지극히 비정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비정상의 사회에서 살다보니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쯤은 아무것도 아니나,
일도가 갑자기 정의의 사도로 돌변해 버리는 것에는 손가락과 발가락이 다소 오그라들었다. 자기 자신의 일도 아니고, 수정과 성욱의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방회장에 맞선 그 둘을 보고 한심해 하고 욕해야 할 일도가 그들을 돕는다.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알량한 정의감이 고개를
정말 든 것일까? 나는 이 부분은 완전히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알량한 정의감이 고개를 들 수조차 없는 현실인데, 무슨 알량한 정의감은~! 차라리 일도가 방회장에게 그간 이석구의 행태를 일러바치고,
성욱과 수정을 산 채로 잡아왔다면 그것이 현실적이다.
“남에게 고통을 줄
때는, 자기에게 올 고통도 생각하세요.” (p.309)
또
하나, 성욱이 방회장을 공격하면서 내뱉은 말이다. 다소 오그라들려던 손가락과 발가락이 일제히 강력하게 오그라들었다. 욕이라도 하고 더 강하게
공격을 해서라도 본때를 보여주는 게 현실적이지 않나? 남에게 고통을 줄 때는, 자기에게 올 고통도
생각하세요. 이 무슨 정말 재미없는 출판 편집인 같은 대사 처리인지.
두
부분 정도를 제외하고는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다. 비정상적이지만 성욱의 무모함에 소리 없는 응원을 보내기도 했고, 책의 마지막이 해피엔딩이기를
바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