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차남들의 세계사 - 2014년 제47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ㅣ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민음사 / 2014년 7월
평점 :
나는 장남이다. 동생은 한 명밖에 없지만 어쨌든 장남이다.
나는 차남이 아니다. 누구보다 동생과 사이가 좋고 우애가 깊지만 나는 차남이 아니다.
당연히 나는 차남들의 세계를 알 수 없다.
동생이 대학에 들어가고 얼마 뒤,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형! 형한테 맞은 애들이 진짜 많아~”
나는 동생을 때리고 괴롭히는 장남이었다. 맞고 괴롭힘 당해 어쩔 수 없이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차남이었던 적이 없다.
“들어 보아라.
이것은 이 땅의 황당한 독재자 중 한 명인 전두환 장군의 통치시절 이야기다.” (p.11)
전두환은 6남 4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단다. 4남이 차남일 수는 없는데?
나복만씨...
나는 전두환 시절을 살지 않았다. 아니다. 살았다 살았어. 전땅크께서 재임하실 때 나는 어린아이였다. 내 아버지가 민주화 운동이나 독재타도 투쟁을 하지 않으셨기에 전땅크께서 하사하신 국가폭력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내 생일날, 내가 좋아하던 여자아이를 초대해 놓은 생일 상 너머로 88올림픽 개막식을 지켜 본 기억밖에 없다. 그 때 모자를 쓰고 뭔가 둥근 바퀴 같은 것을 굴리는 아이가 온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장면밖에 기억에 없다. 그 굴렁쇠 소년보다 나는 내 앞자리에 앉은 그 소녀에게 더 관심이 갈 뿐이었다.
나복만씨는 전땅크, 전두환 장군이 가장 강력하게 힘을 과시하시던 때의 사람이다. 지금까지 생존했다면 내 아버지 나이 정도 될까? 그에겐 나 같은 장남이 있을까? 내 동생 같은 차남도 있을까?
“그러니까 그날, 나복만이 원주경찰서 교통과가 아닌 정보과로 간 것 역시 다른 어떤 숨겨진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글을 잘 못 읽어서, 사무실 문 앞에 달린 입간판을 제대로 읽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일 뿐이었다.” (p.39)
어렵게 취득한 면허는 그의 생명줄이었다. 자기만을 바라보고 사는 순희를 더 행복하게 하고 함께 오순도순 살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택시기사다. 당시만 해도 택시는 드물고 비싼 운송수단이었으리라. 노력만 한다면 먹고 살 수 있고, 좀 더 노력만 한다면 개인택시를 몰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단지 하나, 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이 나복만씨의 아킬레스건이 될 줄이야.
자신이 저지른 사고를 자수하기 위해 찾아간 경찰서 정보과는 전땅크 시절 최고의 권력기관이었다. 안기부, 군대, 경찰 모두 반공이념을 뿌리까지 내리기 위해 좌경, 용공세력, 빨갱이를 때려잡는 데 혈안이 되어 있던 시기였다. 나복만씨가 동료에게, 하다못해 순희씨에게 교통과라는 단어의 모양이라도 물어봤더라면...
~라면, 만약~. 이런 것은 지나간 뒤 후회할 때나 쓸모 있지. 아무런 소용이 없는 체념이다.
얼마 전,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최종 무죄 선고가 나오고 관련자들에 대한 국가배상 판결이 났다. 남은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 잠시 위로와 돌아가신 분에 대한 명예는 회복할 수 있겠지만 그간 받아 온 고통과 아픔에 대한 치유는 불가능하다. 국가를 위해서 사람을 위해서 운동한 것이 전부인데, 잡아 가둬놓고 때리고 짓밟고 망가뜨려 놓은 후 덮어씌웠다.
“그리고... 우리의 친절한 정 과장 역시 일주일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하며 그에 버금가는 작품 하나를 준비하고 있었으니... 그 작품의 이름은 ‘형제회’였다.” (p.197)
국가기관에서 일하는 정 과장이 차남일까? 정 과장은 국가를 위해 일했다. 그것이 애국인 줄 알았다. 지독한 고문기계 이근안이 세상이 바뀌자 다시 한 번 반성을 뒤집어엎고 자신의 고문이 애국행위였다는 개소리를 했다. 정 과장이 결국 중상에서 회복 해 살아났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그도 이근안처럼 그렇게 자신의 과거 행위를 정당화할까? 이근안은 지독한 악마일까?
나복만씨는 정 과장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이 새끼야, 그 사람들이 누구냐고!”
“그러니까 그게... 그러니까 그게... 지학순 주교님이라고...”
“누, 누구? 지, 지학순 주교?”
“그게 저도 나중에 알았는데... 그분이 저를 무지하게 좋게 생각하셔서... 택시도 항상 제 택시만 이용하시고...” (p.146)
곽용필 경정도 최형사도 나복만의 죄를 만들어 냈다. 결국 나복만의 입에서 그 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나복만의 동료, 과대망상에 빠진 박병철에 의해 곽용필 경정의 아내와 곽용필 경정의 아이의 담임 김상훈과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탄탄한 출셋길을 달리려면 아내의 외도쯤은 나복만을 간첩으로 만들어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야만과 광기의 시대.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해 주는 건데, 사실 나... 반미주의자야.” (p.50)
과대망상에 빠진 박병철은 반미주의자다. 자신은 반미주의자지만 눈치보고 김상훈과 곽용필 경정 아내와의 불륜을 밝혀내기 위해 탐정 역할을 자처한다. 그가 내세우는 반미와 불륜이 뭔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나복만의 경찰서 출두도 부러워한다. 대단한 양 취급한다.
전땅크 시절, 그 이전 박정희 시절, 이후 노태우 시절까지 목숨을 걸고 운동하고 투쟁한 사람들이 지금 기득권이 되었다. 그들이 이전에 화염병을 던지고 반미를 외치고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쳤던 사람들이다. 머뭇거리며 대오에 동참하지 못한 사람들보다 앞장 서 청춘을 던졌다. 그런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현실 정치에 들어갔다. 분명히 바뀌어야 하는데, 아직도 바뀌지 않고 있다. “사실 나... 반미주의자야.”, “사실 나... 운동권 출신이야!!” 근성만 남아 과거에 살고 있다.
“넌, 개새끼야... 명, 명찰을 달고 있어야지만 그,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니?”
“명찰을 달고 있어야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냐고, 이 개새끼야!” (p.290)
차라리 글자를 읽지 못하는 나복만씨가 낫다. 정 과장에게 카운터블로를 날린다. 맞다. 명찰이 없다고 사람을 알아볼 수 없지는 않다. 그 사람의 목소리, 몸짓, 말투. 아니, 외모만 봐도 알 수 있다. 순희씨와 행복하고 소박하게 잘 살기 위해 수시로 다녔던 원주 시내다. 저리로 가면 지학순 주교님을 만날지도 모르고, 저리로 가면 자신을 기다리는 순희씨를 만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복만씨는 전봇대로 돌진한다.
“때때로 평온하게만 보이던 우리의 일상이 부욱, 소리를 내며 찢어진 후, 그 틈에서 낯선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p.232)
“아무것도 읽지 못하고, 아무것도 읽을 수도 없는 세계, 눈앞에 있는 것도 외면하고 다른 것을 말해 버리는 세계, 그것을 조장하는 세계, 그것이 어쩌면 ‘차남들의 세계’라고 말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p.179)
차남들의 세계사가 어떤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태생적인 한계다.
문득 작가가 말한 차남이 둘째 아들이 아니라면...
어허~ 책 헛 읽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