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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수업 - 나를 넘어 나를 만나다
박찬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인생이 마음대로 된다면 지금과 같은 불안하고 불안정하며 분노와 아픔과 상처로 가득한 세상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 다 행복하고 안전하고 안정된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지극히 상대적인 기준으로 평가되는 세상이다 보니 모두 다 행복하지 않고 안전하지 않으며 안정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이것은 공통된 희망사항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신이거나 죽은 사람이거나. 사람은 행복하고 싶다. 정말로 그렇다. 그런데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늘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의 인생이 그들 마음대로, 그들 뜻하는 대로 흘러가 마무리 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자신의 생을 마감하면서 ‘아! 나는 정말 행복한 인생을 살았어. 만족하는 생의 마지막이야.’라고 하는 사람이 인류 역사를 통틀어 몇이나 있을까? 그렇다. 생은, 인생은 괴로운 것이다. ‘나’라는 인생, 단 하나밖에 살아보지 못해 성급하게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무슨 수를 써도 ‘나 외의 인생’을 살 수 없는 것이 진리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그래서 역사 이래로 수많은 성현이나 선생들의 삶에 대한 가르침과 권면이 있어왔고, 넘쳐나는 책들도 조금이나마 이정표 노릇을 하려한 것일 테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다. 아무리 책을 읽거나 성현들의 글귀를 마음에 새겨 살아도 도무지 내 일상은 나아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내게 있지 않은 것’이다.
웰빙 열풍이 지나간 자리에 ‘힐링’ 열풍이 도래했다. 수년 째 지속되고 있는 힐링, 힐링, 힐링은 꽤 매력적이지만 지극히 패배주의적이고 사회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부족으로 한정시켜 모든 문제의 근원을 ‘개인으로 유폐’시키는 사디즘적 폭력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힐링’이 특정 사회에서 일정 정도 희구되고 있다는 것은 그 사회가 그만큼 병들어 있다는 방증이다. 병들어 있지 않은 사회와 개인들에게 ‘힐링’은 무의미하고 무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힐링, 힐링, 힐링의 대상이 되는 주요 세대는 젊은 세대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20-30대 젊은 세대는 정말 열심히 산다. “더 노력하세요! 자신을 더 갈고 닦으세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세요!” 라고 말하는데, 벌써 그렇게 살고 있다. 미친 듯이 열심히 산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한국의 특수성이 주된 이유이지만, 충분히 열심히 치열하게 산다. 그런데 그런 이들에게 또 다시 ‘더 열심히 살아라.’ 라고 하는데,
‘그런가 보다. 내 노력이 부족한 가 보다. 남 탓하기 전에 나를 돌아보자. 나를 발견하자.’ 이러고 있다.
문제가 ‘내게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힐링’은 없다. 그런 자기계발서도 없다.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p.248)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니체가 한 말이라고 하는데, 나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한국에서 고유명사 정도로 자리 잡은 ‘힐링’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이 왜 나를 강하게 만드나? 나는 그 전제부터 동의할 수 없다.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이지만 나를 더 괴롭힐 수도 있고,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책 전반에서 저자가 말하는 주제는 ‘고통을 참고 오히려 즐기라.’라는 것이다. 철학자이자 교수인 저자는 니체를 전공한 사람인 것 같다. 그래서 주로 니체의 책을 통해 주제를 피력한다. 니체 또한 육체적으로도 엄청난 고통을 겪었고 시대적으로도 가혹한 시기를 지났지만 그의 책에서는, 그 고통을 오히려 즐기고 이겨낼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조금만 힘들어도 불평을 쏟아내고 아주 작고 불편한 자극에도 호들갑을 떱니다. 이렇게 자극에 민감하면서 안락만을 탐하는 인간을 두고 니체는 ‘말세인’이라 일컫고, 이런 유형의 인간에 대해 ‘초인’을 내세웁니다. 이러한 초인을 니체는 ‘고귀한 인간’ 혹은 ‘기품 있는 인간’이라고도 부릅니다.” (p.41)
니체가 말한 ‘초인’ 개념이 책에서 자주 등장한다. 나는 니체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그의 책 한 권을 읽으려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서 포기했던 전과가 있는 터라, 저자의 니체 소개를 전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그렇다 하더라도 ‘초인’개념은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이 책을 읽다보면 니체가 그리스 철학에 심취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런 니체가 왜 인간의 희로애락과 고통과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말세인’이라 하고, 그것을 이겨내는 ‘초인’을 주장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초인’이 과연 고귀한 인간인지, 기품 있는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사회와 기득권이 정해놓은 규칙과 명령에 순종하거나 순종하지 않더라도 아무런 저항이나 목소리조차 내지 않고 사는 것이 ‘초인’으로 해석된다.
“니체는 문제는 우리 자신의 정신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정신력이 약하다 보니 세계가 그렇게 무의미하고 황량한 곳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정신력을 강화할 때 세계는 다시 아름답게 보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p.68)
전형적으로 한국에서 유행하는 자기계발서적의 패턴이다. 나는 그렇게 읽힌다. 왜 문제가 우리 자신의 정신에 있는가? 니체가 역사를 통틀어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 철학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니체의 말이 맞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사, 세상이 무의미하고 황량해 보이는 이유가 왜 우리의 정신력의 세기에 달려있나? 말도 되지 않는다.
‘아직 정신 못 차렸구만! 더 노력해야지! 젊은 놈이 패기가 없어!!!’ 라는 사디즘에 다름없다.
“모든 사람이 고난과 고통을 겪을 때 인격신에 의존하기보다는 강한 정신력과 생명력을 지닌 초인이 되어 어떠한 고난과 고통도 혼연히 받아들이면서 현실을 긍정하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기를 바랐습니다. 이러한 초인을 니체는 ‘예수 그리스도와 카이사르를 종합한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p.139)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허탈한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카이사르를 종합한 인간’이라는 것 자체가 모순으로 여겨졌다. 예수와 카이사르가 어떻게 종합될 수 있나? 니체는 카이사르는 물론 나폴레옹을 존경하고 사랑했다고 하는데, 저자의 간략한 소개로는 이해되지 않았다.
모르겠다. 니체의 책의 일부분을 발췌해 옮겨 적용하는 과정에서 저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 첨부되었겠지만 정말 니체가 내린 초인의 모델과 정의가 저렇다면 나는 앞으로 계속 니체의 책은 읽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내게는 너무 유치하고 황당한 논리로 여겨질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니체가 영원회귀 사상을 깨달으며 겪었던 황홀경의 체험과 유사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p.60)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도 저자의 소개로 처음 알게 되었다. 요양 차 머물던 곳 가까이에 있는 호숫가에 높이 솟아 있는 바위를 지나던 길에 갑자기 벼락에 맞은 것처럼 영원회귀 사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건 뭐 니체가 그렇게 비판해 마지않던 기독교의 경전에서 자주 나오던 기적과 비슷해 보인다. 나만 그런가? 철저하게 이성과 합리를 추구하며 실존철학의 선구자가 된 니체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니체는 사람들에게 ‘그대의 운명이 평탄하기를 바라지 말고 가혹한 것을 바라라’라고 외치며, 그런 운명과 투쟁하면서 장렬하게 죽을지언정 패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p.16)
‘가혹한 것을 바라라.’
정말 너무 가혹하다. 여기서 더 이상 어떻게 더 가혹한 것을 바라라는 것인지. 지금은 장렬하게 죽을 수 없는 시대다. 죽고 싶어도 그렇게 죽을 수 없다. 패배하면 바로 탈락이다.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에서 패배는 바로 O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