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마일리스 드 케랑갈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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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익숙한, 널리 알려져 있는 작가의 책을 주로 읽는 편이다. 그래서 고전문학과 베스트셀러에 끌린다. 하지만 이번에 나에게는 아주 낯선 프랑스 작가, 마일리스 드 케랑갈의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라는 책을 읽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 그리고 어찌해도 부족한 인간의 선택을 다룬 작품이라는 것과 빌 게이츠의 추천에 이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여전히 누군가의 이름, 유명세로 나는 책을 선택했다.

하지만,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인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불완전한 선택을 담은 '좋은 책'을 읽었다는 생각에 뿌듯하다.

우선, 이 낯선 프랑스 작가 마일리스 드 케랑갈은 1967년 프랑스 툴롱에서 태어났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어쩌면 지금의 나와 많이 비슷한 어떤 정서를 느꼈는데, 그것이 아마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서 그랬나 보다.( 이것은 책을 다 읽고 난 뒤 작가 소개를 뒤늦게  찾아보면서 알게 되었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감각적인 글로 작가가 상당히 젊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이 작가의 글은 툭툭 던지는 말투처럼 단문으로 이어진다. 마치 메모처럼 이어지는 생각의 단상이 그 상황에 놓인 주인공의 심경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시몽 랭브르라는 183cm, 70kg의 건강한 19세 청년이 추운 새벽 친구들과 서핑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났다. 이 장면 다음에 바로 긴박한 병원 장면이 이어진다. 마치 영화에서 카메라가 시공간을 이동해 다른 장면을 보여주는 것처럼. 피에르 레볼이라는 의사는 삶과 죽음의 한가운데 걸쳐있는 육신들을 다루는 공간이 소생 의학과에서 일하며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사색한다. 그 긴박한 병원에서 그들은 짧은 명사와 코드, 약어를 이용해 대화를 한다.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은 그곳에서는 시간 낭비이며 화려한 언변과 말들은 찾을 수 없다. 마치 이 책처럼. 레볼이 보기에 젊은 시몽의 얼굴과 죽음은 아무래도 연결되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의학계에서는 1959년 이후 심정지를 더 이상 죽음의 징표로 받아들이지 않고, 두뇌 기능의 정지로 죽음을 입증한다. 그는 이것을 "심장의 폐위와 두뇌의 대관식"이라고 부른다. 

이 책으로 죽음을 바라보는 의학계의 두 가지 관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장 정지설과 뇌사설.
심장정지설은 심장의 활동이 정지된 시점을 죽음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뇌사설은 뇌의 중추부를 포함한 전뇌의 불가역적 기능 상실(이른바 뇌사)을 죽음이라고 한다. 이 경우에는 통설적인 죽음의 징후인 '호흡의 불가역적 정지' '심장의 불가역적 정지' 그리고 '동공 확산(대광반사의 소실)'의 3가지 징후를 인정하지 않는다. 특히 장기이식 등에 수반해서 강하게 주장되고 있는 유력한 설이다.

특히 작가와 나처럼 1960년대 후반에 태어난 세대는 언제까지가 살게 될지 알 수 없을 정도의 평균 수명의 연장을 목격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 죽음을 실제로 겪을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예전처럼 온 가족이 모여 몸이 아픈 가족을 간호하고 보살피는 일도 돌아가시기 전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목격하는 일도 없다. 그런 일은 병원이나 요양 시설에서 일어나는 일이 되어버렸다.

작가는 예전의 장례 풍습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땅에 묻힐 사람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줬다. 혹시라도 땅밑에 묻힌 사람이 깨어난다면 지표면에 놓인 종을 울릴 수 있게 끈과 묶어 놓은 반지였다' 그런데 장기 적출이 가능하도록 고안된 죽음의 기준에 대한 <맞춤형>정의가 그 시원적 공포와 뒤섞인 것이다. -p.185

죽음에 대한 이러한 사회적, 철학적, 혹은 의학적 언급은 그것대로 또 그 죽음의 당사자들의 감정은 또 감정대로 아프게 읽힌다.
시몽의 엄마인 마리안의 파트에서는 나도 엄마의 마음으로 같이 울었다. 그녀의 심경은 작가 특유의 문체로 서술된다. 그 단문이 더욱 마음에 아프게 내려앉았다.

'두 눈 감지 않기. 노래 듣기. 카운터 위쪽에 진열되어 있는 병들 세기. 컵 모양 관찰하기. 포스터 읽기. <너의 메아리가 아직도 남아있는 그곳.> 속임수를 써서 폭력 따돌리기. 빠르게 생겨난 시몽의 이미지들이 노략질하듯 잇달아 그녀를 공격해 오면 그 파상 공격을 막아 낼 제방을 쌓고 가능하다면 그 이미지들을 각목을 휘둘러 멀리 쫓아 보내기. 하니만 그 이미지들은 벌써 추억으로 구축된다. 기억의 시퀀스들로 이뤄진 19년. 하나의 덩어리. 그 모든 것을 멀찌감치 떼놓기.

뇌사 판정을 내리고 죽은 이의 보호자로부터 장기 기증의 약속을 얻어내려는 의사들과 심장, 폐, 간의 이식을 기다리는 환자들의 에피소드가 서로 엇갈리며 24시간의 짧은 기간이지만 마치 삶과 죽음의 전 일생을 꿰뚫는 묵직함이 느껴진다.
죽어가는 시몽의 목소리보다는 살아 남아있는 이들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알아듣기 힘든 통화. 왜냐하면 시몽의 아버지는 언어를 벗어난 곳에서 헤매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더는 그 어떤 문장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헐떡거림, 그랬다, 토막 난 음절들과 더듬거리는 음소들, 짓눌린 소리들만 뱉어 냈다. 그래서 쥘리에트는 들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말이 존재하지 않음을, 그녀가 들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사실임을 이해하고 그에게 대답했다. 단숨에. 제가 갈게요. p.294

제목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처럼 시몽의 장기들은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한다.
책을 덮은 후에도 리뷰를 쓰기가 힘들었다. 내 생각은 정리되지 않은 채 흘러 다녔고, 죽음에 대한 내 생각은 이랬다저랬다를 반복했다. 어떻게 심장이 정지되지 않았는데, 아직 손발이 따뜻한데 죽었다고 할 수 있을까 와 아무런 의식도 반응도 없고 자가 호흡도 하지 못하는 기계에 의존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를 잠깐 사이에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다.

지금도 나는 모르겠다. 정말 만약 나와 가까운 이에게 이런 경우가 생긴다면 어떤 선택을 내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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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상식사전 - 역사와 문화, 이야기로 즐기는
이기태 지음 / 길벗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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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즐겨 마시는 편이다. 간단한 치맥부터 소주와 막걸리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심지어 시간과 장소도 불문하고 마실 때도 있다. (그렇다고 과하게 마시지는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않느냐고 주장하고 싶다) 이른 아침 비행기 안에서도, 기차 안에서도, 둘이거나 혼자이거나 가리지 않고 맥주나 와인을 즐기는 편이다. 그래서 술에 대해 이래 저래 관심을 많이 갖는 편이지만, 요즘 특히 와인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요즘 다양하고 저렴한 와인을 마트에서 아주 쉽게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고, 단 두 잔 정도면 발끝까지 따스함이 전해져서 좋고, 혼자 마셔도 구질구질해보이지 않아서 좋다. 그러다보니 여행을 가서도 매일 와인 한 잔 하고 자는 일이 자주 있다.

<와인 상식사전>을 읽으면서 마시는 와인 한 잔, 그리고 잘 어울리는 소시지와 스트링치즈

그런데 와인은 다른 술과는 달리 '아는 만큼 즐길 수 있는' 술이다. 처음에는 와인이 뭔가 좀 있는 사람들이나 마시는 술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우선 이름부터 익숙해지기 힘들었고, 단 몇 종류인 소주와 맥주와는 달리 왜 그렇게 종류도 많은지 어려운 술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쉽지도 않고 친근하지도 않은 술이 매일 이렇게 내 곁에 있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저렴해진 가격과 어디에서도 살 수 있게 된 데 있다. 그리고 이렇게 와인에 대해 쉽게 설명해주는 책이 있어서 가능하다.

맛있게 마시기 위해서 읽었다. <와인상식사전>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비단 미학에서만 통하는 것이 아니다. 와인에서도 이 말은 너무 적절한 말이다. 와인은 정말 아는 만큼 잘 즐길 수 있는 술이다.

이 책에서도 말하듯이 '알고 마시면 두세 배 더 맛있는 와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간단히 몇 가지 와인에 대한 정보를 알기만 하면 된다. 우선 기본적인 매너(와인잔 어디를 잡아야 하지? 건배를 할 때는 어느 정도의 세기로 해야 할까? 원샷을 해도 되나? 두 손으로 따라야 하나? 등)와 와인의 종류(색과 맛과 원산지를 통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레이블 읽는 법, 그리고 또 하나 어울리는 음식(마리아주:뭐 이렇게 고급진 단어를 굳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알면 뭔가 있어보이기는 하다) 그리고 와인에 얽힌 사회적, 역사적 에피소드는 와인을 더 맛있게 그리고 술자리를 더욱 재미있게 만들 수 있다.

와인은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술이다.

이 자리에 어울리는 와인이야기를 안다면 더욱 즐겁지 않을까?

작년에 프랑스와 스페인 여행을 했다. 배낭을 메고 발고 걷는 여행이라 저녁이 되면 몸은 힘든데 잠을 쉽게 오지 않는 고단한 일정이었다. 시끄럽고 낯선 방에서 자는 잠은 한 잔의 술을 필요로 했다. 그 시작은 바로 파리로 가는 에어프랑스 안에서였다. 승무원이 전해주는 작은 병의 화이트와인은 긴 비행시간을 절반으로 줄여주었다. 비행의 절반을 꿀잠으로 보낼 수 있었다.

에어프랑스에서 먹었던 화이트와인

그리고 이어진 여행에서 매일 마셨던 서로 다른 종류의 와인들은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마트를 찾아 매일 마실 수 있는 와인을 사들이게 했다. 마시다 보니 알게 되고 알게 되니 더 많이 알고 싶어졌다.

<와인 상식사전>은 일상의 와인을 고르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와인잔은 어디를 잡아도 괜찮다. 단 차가운 와인(화이트와인, 스파클링 와인)의 경우 손의 온도가 와인에 전해지면 맛이 떨어지니 다리 부분(스템stem이라고 부른다)을 잡는 게 좋다. 와인은 소주가 아니니 원샷은 안된다. 누군가 와인을 남겨두었다면, 그만 마시고 싶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와인잔으로 건배를 할 때는 가볍게 터치한다는 느낌으로 건배를 해야 한다.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를!' 을 염두에 두고 건배를 한다면 멋지지 않을까?

와인을 고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레이블'을 읽는 것이다. 프랑스 와인의 경우 맨위에는 와인의 이름이 그 밑에는 생산지역이 있다. 그 밑에 원산지와 등급이 있는데 이것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Appellation Medoc Controlee'라고 되어 있다면, '원산지 통제명칭' 중 최상위 등급으로 믿을만 한 와인이다. 그 아래 등급이 V.d.P(일반소비와인등급)이다.
우리나라에서 많이 마시는 칠레 와인의 경우에는 주로 와인이름과 빈티지 포도 품종을 알 수 있다. 특히 보르도에서는 더 이상 재배되지 않는 카르메네르라는 품종은 칠레에서만 자라고 있다. 빈티지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무엇보다 저렴한 가격에 비해 품질이 뛰어나 큰 만족감을 주는 와인이다.

백년전쟁의 내막에 보르도 지역이 있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있다. 보르도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영국의 왕과 귀족들이 즐겨마시는 진상품이었다. 물론 와인 이것때문에 전쟁이 벌어지기야 했겠냐만, '샤토 탈보'라는 와인은 영국군을 지휘하던 탈보 장군이 보르도에서 끝까지 항전하다 전사했는데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영지를 탈보라고 명했고, 그 영지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Chateau Talbot'라고 했다고 한다. 특히 이 와인은 히딩크감독이 좋아해서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팔렸다고 한다.

맛있게 와인을 즐기는 방법은 와인에 대해 조금은 알고 마시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맛을 알고(스위트한 것이 좋은지, 드라이한 쪽을 좋아하는지) 예산에 맞게 골라 마시면 좋겠다. 와인의 퀄리티와 가격의 문제는 다음의 말이 그 기준을 말해준다.

'10유로짜리 와인과 100유로짜리 와인을 비교한다면, 물론 100유로짜리 와인이 맛있다. 그라나 100유로짜리 와인이 10유로짜리보다 10배 더 맛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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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 살인 사건 - 카뮈의 <이방인>,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
카멜 다우드 지음, 조현실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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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재주가 있는 한 남자가, 그날 하루 이름조차 갖고 있지 않던-마치 무대로 들어오면서 못에다가 이름을 걸어두고 온 것처럼-아랍인 한 명을 죽이고 나서는 그걸 있지도 않은 신의 탓으로 둘러대는 거야. 또 태양 아래에서 자기가 뭔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바다의 소금기 때문에 눈을 감지 않을 수 없었다,라는 식으로 변명을 하지. 그 바람에 살인은 전혀 벌받을 필요도 없는 행위가 되어버린다네. 어느새 죄도 아니게 된 거야.

한 남자가 이런 말을 한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카뮈의 <이방인>의 줄거리다. 단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뫼르소의 이야기가 아니라, 뫼르소가 총으로 쏘아 죽인 아랍인의 동생의 말이라는 것이다.

'오늘, 엄마는 아직 살아있네.'로 시작되는 이 소설에서 화자는 '이 살인의 이야기는 그 유명한 문장, "오늘, 엄마는 죽었다."로 시작할 게 아니라, 아무도 들어본 적 없는 문장, 형이 그날 집을 나서기 전에 엄마한테 했던 말인 '오늘은 좀 일찍 돌아올게.'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간혹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쉽게 흥미를 끄는 주제 중 하나가 이미 유명한 책에 대한 다시 쓰기다. 아멜리 노통브의 샤를 페로의 <푸른 수염>을 다시 쓴 <푸른 수염> 그리고 앤절라 카터의 동화의 잔혹한 변주곡인 <피로 물든 방> 등이 그것이다. 일단 독자는 익히 익숙한 이야기에 대해 다시 듣는 것을 좋아한다. 전혀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피곤함이 적은 탓일 게다. 게다가 새롭게 변주되는 음악에 대한 관심처럼 새롭게 쓰인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은 쉽게 책으로 독자를 끌어들일 수 있다.

이번에 읽은 <뫼르소, 살인사건>은 그래서 여러모로 흥미롭게 읽은 책이며, <이방인>의 변주곡이 아닌 전혀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된 책이었다. 처음에는 우리의 관심에서 벗어난 익명의 존재에 대한 넋두리 정도라고 생각하게 하다가, 점차 그 이야기의 배경에 우리가 알지 못한 거대한 의미가 존재함을 깨닫게 된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의 한 바닷가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그것은 단순한 살인사건 그 이상이었던 것이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바로 살인자의 단어로 이 이야기를 다시 쓴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는 번역본이라 그 느낌을 알 수 없어 아쉬웠다. 프랑스인이 남긴 것들이 단어와 빈 집뿐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야기가 흘러가면서 프랑스인이 떠나고 알제가 독립운동을 하면서 겪게 되는 혼란과 그것에 따른 부조리는 카뮈가 <이방인>에서 다루었던 부조리 그 이상이었다.

'이제 나도, 이 나라가 독립한 이후로 흔히 볼 수 있었던 짓을 한번 저질러 볼까 하네. 내 동포들이 프랑스인이 살던 옛집의 돌들을 하나하나 가져다 자기만의 집을 새로 지었듯이, 나도 살인자가 썼던 단어들과 표현들을 가져다 내 언어를 만들어보려는 거지. 그의 언어는 내게는 주인 없는 재산인 셈이거든. 안 그래도 이 나라는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은 단어들로 뒤덮여 있다네.

이 얘기는 시체가 쓴 것이지 작가가 쓴 게 아니야. 햇빛과 눈부신 색채를 못 견뎌하는 데서, 또 오래전부터 있어온 태양과 바다와 돌들 외에는 그 어떤 것에 관해서도 아무런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는 일이지.

살인은 일사병 때문에 혹은 권태와 일사병 때문에 벌어진 일일까?라고 화자는 묻는다.  그렇지 않기에 이 이야기는 다시 쓰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같은 언어로 쓰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살아있는 몸에서 시작해서 그를 죽음으로 몬 골목길을 거쳐 아랍인의 이름도 거명하면서 총알과 만나는 순간까지 이르러야 제대로 사건을 다루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이름도 없이 언급된 형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려주고 싶은 것이다.
오랑의 한 카페에서 아마도 <이방인>을 연구하고 있는 한 젊은 학생에게 매일 이야기를 하는 70대의 노인은 형이 태양의 친구이며 이름은 무싸이고  동생인 자신은 하룬이라고 고백한다. 책에서 언급된 행실 나쁜 누이는 없었으며 형제는 단둘 뿐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바로 '호명'이었다.
우리는 소설에서 이름이 있는 주인공들을 주로 만난다. 하지만, 그저 '아랍인'이라고만 호명된 인물을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총으로 쏘았다. 왜 이름이 없었을까? 화자는 그 이유를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기 싫어서였다고 말한다.

아랍인이라. 나는 내가 아랍인이라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어. 흑인이라는 속성이 백인의 시각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이치지. 동네에서, 우리 세계에서, 우리는 무슬림이었고 저마다 이름과 얼굴과 습관을 갖고 있었어. 그게 다였어. 그리고 그자들은 '이방인들', 즉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느라 신이 보낸 루미들이었지. 
......내 형이 아랍인이 되고 그런 이유로 죽게 된 데에는 뫼르소의 시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거라네.

이 소설의 작가인 카멜 다우드는 1970년 알제리에서 태어난 저널리스트다. 이슬람 문화권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으로 큰 반향과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고 하는데, 역시 이 책의 마지막에서 뫼르소가 재판에 대해, 신에 대해 하는 절절한 외침처럼 신에 대해 울부짖는다.

나는 기도하지 않는다, 목욕하지 않는다, 굶지 않는다, 순례를 가지 않는다. 나는 술을 마실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술을 더 맛있게 만들어주는 공기까지도. 또 나는 자유롭고, 신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며, 태어날 때나 죽을 때처럼 혼자서 신을 만나고 싶다고.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뫼르소와 반대로 해방된 자의 열정으로 재판을 견딜 것이라고 말한다.
해방된 알제리의 한 작가가 알제리를 배경으로 한 너무나도 유명한 소설에 대해 그만큼이나 유명해질 소설 한 편을 쓴 듯하다. 아마 카뮈의 <이방인>과 더불어 함께 이야기될 것이다.

뫼르소, 살인사건

저자 카멜 다우드

출판 문예출판사

발매 2017.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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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포기한 여자들이 사는 집
카린 랑베르 지음, 류재화 옮김 / 레드스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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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여전히 제목과 표지에 끌려 책을 고른다. 참 여자답다. 연한 분홍빛의 표지에 분명히 고양이일 것 같은 분홍 동물이 제목 사이를 돌아다니고 분홍색의 집이 그려진 이쁜 표지의 이 책은 제목 또한 근사하다. <남자를 포기한 여자들이 사는 집>

우선 이십 년 이상의 결혼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나로서는 이 재미있는 제목에서 '해방감'을 느꼈다. '여자들을 귀찮게 하고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이기적인 남자들을 포기하고 여자들끼리 재미있게 사는 그런 이야기겠지'라고 미리 짐작을 하고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은 스스로 남자를 버리고, 아니 남자에게서 독립하여 '여자들만의 집'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오히려 남자들에게서 버림을 받고, 강하게 남자를 원하지만 남자들과 원만하게 사랑에 빠지지 못하는 그런 문제(?)를 가진 여성들이었다.

그녀들은 '여왕이 사는 집'에 함께 거주한다. 그들의  75세'여왕'은 바흐를 사랑하는, 로열 오페라 <코펠리아>의 스텔라 역을 했던 발레리나다.  이 여자들이 사는 집은 열렬한 사랑에 빠진 이탈리아 남자가 그녀에게 선물한 집이다. 이 '여자들만의 집'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서로 다른 여자들이 살지만, 그들은 단 하나 '남자는 안돼!'로 뭉쳐진다. 이 집에 있는 오직 유일한 남성은 장 피에르라는 고양이.

그들의 이야기는 작가의 통통 튀는 문장으로 유쾌하게 그려진다. 상처를 안고 있지만, 결코 우울하거나 칙칙하지 않다. 시트콤을 보는 것처럼 재미있게 읽히는 이 책의 주인공들 역시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랑스럽다.

그런데 왜 이들이 남자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거지?
이들의 성에 들어온 줄리엣은 만남 사이트를 통해 열심히 남성을 찾는다. 그동안 금기처럼 여겨졌던 '남자 이야기'를 한다. 과연 이들은 이 여성의 집을 지켜낼 수 있을까? 그들은 앞으로도 쭉 남자 없이 살게 될까? 사랑은, 이들이 찾는 사랑은 무엇일까?

때로는 사랑이 가져다주는 상처가 너무 아프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을 찾는 외로운 존재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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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의 기도
오노 마사쓰구 지음, 양억관 옮김 / 무소의뿔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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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견뎌낼 수 없을 것만 같이 힘든 삶이라도 작은 위로만으로 어찌어찌 살아갈 힘을 얻는다. 특히 서로 살아온 환경도, 직업도, 모든 것이 다 다르지만, 서로 비슷한 아주 작은 부분만 발견하더라도 금세 마음이 열린다. 그렇게 겹쳐진 부분들이 나머지 나의 힘든 삶을 버텨내는 힘이 되기도 한다.

오노 마사쓰구의 <9년 전의 기도>는 그렇게 겹쳐진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버텨나가는 이야기다. 제목이기도 한 <9년 전의 기도>는 고향을 떠나 외국인을 만나 살다가 그가 달랑 이국적으로 예쁘게 생긴 아들만 남겨 놓고 떠나버린 후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사나에의 이야기다. 그녀는 다른 아이들과는 생김새뿐만 아니라 나머지도 다른 아이 때문에 힘들지만, 부모에게서도 위로받지 못한다. 하지만, 9년 전 우연히 떠난 여행에서 만난 밋짱에게 위로를 얻는다. 남들보다 부족하고 많이 모자란 자식과 환경을 안고 살아가야 하지만, 누구보다도 따뜻하고 여유로워 보였던 밋짱 언니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고 갑자기 괴물처럼 변해 소리 지르는 아들을 키우는 시나에에게 이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힘이다.

그 마을을 찾아온 젊은이들, 이들 중에는 이 마을에 사는 마코토의 아들이 있다. 어려서 멀리 떨어져 서로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찾아온 아들은 아버지를 만나지는 못하지만, 아버지의 생활을 도와주고 있던 이를 만나 위독한 어머니에게 갈 수 있도록 도움을 받는다. 보이지 않는 고리로 연결된 것처럼, 그렇게 서로 작은 겹침으로 인해 커다란 이불보처럼 서로를 따뜻하게 덮어 주는 관계로 이어진다.

서로 다른 이야기인 듯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서로 조금씩 겹쳐져 커다랗고 포근한 손바느질로 연결된 퀼트 이불처럼 아름답고 따스하다. 구불구불 이어진 바닷가 마을 길을 돌아 만나는 이마다 서로 다른 사연을 품고 산다. 아프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하지만 그 이야기 속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서로 의지하고 헤아리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는 가슴을 작게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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