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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마일리스 드 케랑갈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6월
평점 :
나는 익숙한, 널리 알려져 있는 작가의 책을 주로 읽는 편이다. 그래서 고전문학과 베스트셀러에 끌린다. 하지만 이번에 나에게는 아주 낯선 프랑스 작가, 마일리스 드 케랑갈의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라는 책을 읽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 그리고 어찌해도 부족한 인간의 선택을 다룬 작품이라는 것과 빌 게이츠의 추천에 이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여전히 누군가의 이름, 유명세로 나는 책을 선택했다.
하지만,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인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불완전한 선택을 담은 '좋은 책'을 읽었다는 생각에 뿌듯하다.
우선, 이 낯선 프랑스 작가 마일리스 드 케랑갈은 1967년 프랑스 툴롱에서 태어났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어쩌면 지금의 나와 많이 비슷한 어떤 정서를 느꼈는데, 그것이 아마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서 그랬나 보다.( 이것은 책을 다 읽고 난 뒤 작가 소개를 뒤늦게 찾아보면서 알게 되었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감각적인 글로 작가가 상당히 젊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이 작가의 글은 툭툭 던지는 말투처럼 단문으로 이어진다. 마치 메모처럼 이어지는 생각의 단상이 그 상황에 놓인 주인공의 심경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시몽 랭브르라는 183cm, 70kg의 건강한 19세 청년이 추운 새벽 친구들과 서핑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났다. 이 장면 다음에 바로 긴박한 병원 장면이 이어진다. 마치 영화에서 카메라가 시공간을 이동해 다른 장면을 보여주는 것처럼. 피에르 레볼이라는 의사는 삶과 죽음의 한가운데 걸쳐있는 육신들을 다루는 공간이 소생 의학과에서 일하며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사색한다. 그 긴박한 병원에서 그들은 짧은 명사와 코드, 약어를 이용해 대화를 한다.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은 그곳에서는 시간 낭비이며 화려한 언변과 말들은 찾을 수 없다. 마치 이 책처럼. 레볼이 보기에 젊은 시몽의 얼굴과 죽음은 아무래도 연결되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의학계에서는 1959년 이후 심정지를 더 이상 죽음의 징표로 받아들이지 않고, 두뇌 기능의 정지로 죽음을 입증한다. 그는 이것을 "심장의 폐위와 두뇌의 대관식"이라고 부른다.
이 책으로 죽음을 바라보는 의학계의 두 가지 관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장 정지설과 뇌사설.
심장정지설은 심장의 활동이 정지된 시점을 죽음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뇌사설은 뇌의 중추부를 포함한 전뇌의 불가역적 기능 상실(이른바 뇌사)을 죽음이라고 한다. 이 경우에는 통설적인 죽음의 징후인 '호흡의 불가역적 정지' '심장의 불가역적 정지' 그리고 '동공 확산(대광반사의 소실)'의 3가지 징후를 인정하지 않는다. 특히 장기이식 등에 수반해서 강하게 주장되고 있는 유력한 설이다.
특히 작가와 나처럼 1960년대 후반에 태어난 세대는 언제까지가 살게 될지 알 수 없을 정도의 평균 수명의 연장을 목격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 죽음을 실제로 겪을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예전처럼 온 가족이 모여 몸이 아픈 가족을 간호하고 보살피는 일도 돌아가시기 전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목격하는 일도 없다. 그런 일은 병원이나 요양 시설에서 일어나는 일이 되어버렸다.
작가는 예전의 장례 풍습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땅에 묻힐 사람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줬다. 혹시라도 땅밑에 묻힌 사람이 깨어난다면 지표면에 놓인 종을 울릴 수 있게 끈과 묶어 놓은 반지였다' 그런데 장기 적출이 가능하도록 고안된 죽음의 기준에 대한 <맞춤형>정의가 그 시원적 공포와 뒤섞인 것이다. -p.185
죽음에 대한 이러한 사회적, 철학적, 혹은 의학적 언급은 그것대로 또 그 죽음의 당사자들의 감정은 또 감정대로 아프게 읽힌다.
시몽의 엄마인 마리안의 파트에서는 나도 엄마의 마음으로 같이 울었다. 그녀의 심경은 작가 특유의 문체로 서술된다. 그 단문이 더욱 마음에 아프게 내려앉았다.
'두 눈 감지 않기. 노래 듣기. 카운터 위쪽에 진열되어 있는 병들 세기. 컵 모양 관찰하기. 포스터 읽기. <너의 메아리가 아직도 남아있는 그곳.> 속임수를 써서 폭력 따돌리기. 빠르게 생겨난 시몽의 이미지들이 노략질하듯 잇달아 그녀를 공격해 오면 그 파상 공격을 막아 낼 제방을 쌓고 가능하다면 그 이미지들을 각목을 휘둘러 멀리 쫓아 보내기. 하니만 그 이미지들은 벌써 추억으로 구축된다. 기억의 시퀀스들로 이뤄진 19년. 하나의 덩어리. 그 모든 것을 멀찌감치 떼놓기.
뇌사 판정을 내리고 죽은 이의 보호자로부터 장기 기증의 약속을 얻어내려는 의사들과 심장, 폐, 간의 이식을 기다리는 환자들의 에피소드가 서로 엇갈리며 24시간의 짧은 기간이지만 마치 삶과 죽음의 전 일생을 꿰뚫는 묵직함이 느껴진다.
죽어가는 시몽의 목소리보다는 살아 남아있는 이들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알아듣기 힘든 통화. 왜냐하면 시몽의 아버지는 언어를 벗어난 곳에서 헤매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더는 그 어떤 문장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헐떡거림, 그랬다, 토막 난 음절들과 더듬거리는 음소들, 짓눌린 소리들만 뱉어 냈다. 그래서 쥘리에트는 들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말이 존재하지 않음을, 그녀가 들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사실임을 이해하고 그에게 대답했다. 단숨에. 제가 갈게요. p.294
제목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처럼 시몽의 장기들은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한다.
책을 덮은 후에도 리뷰를 쓰기가 힘들었다. 내 생각은 정리되지 않은 채 흘러 다녔고, 죽음에 대한 내 생각은 이랬다저랬다를 반복했다. 어떻게 심장이 정지되지 않았는데, 아직 손발이 따뜻한데 죽었다고 할 수 있을까 와 아무런 의식도 반응도 없고 자가 호흡도 하지 못하는 기계에 의존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를 잠깐 사이에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다.
지금도 나는 모르겠다. 정말 만약 나와 가까운 이에게 이런 경우가 생긴다면 어떤 선택을 내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