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의 원근법 - 새로운 공공공간을 찾아서 이산의 책 28
강상중.요시미 슌야 지음, 김경원.임성모 옮김 / 이산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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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동안 일본이 우리의 롤 모델, 혹은 벤치마킹 대상이 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대다수 국민적 정서에 편승해 가끔씩 일본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기는 하지만, 사실 우리는 일본을 따라가야 할 극복의 대상, 경쟁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때문에 서울에서 오래 산 이들이 도쿄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그다지 다양하지 못하다. 조금 더 세련되어 보이는 서울, 조금 더 깨끗해 보이는 서울에 다름 아니다. 사실 그것마저 근거가 불명확한 변형된 옥시덴탈리즘이긴 하다. 사실 도쿄도 그리 깨끗한 도시는 아니다.

 

전쟁 직후 우리는 잿더미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고, 오랫동안 우리를 지배했던 일본 문화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주로 문화적, 정서적 차원의 쇼였을 뿐, 사실 우리는 일본과 같아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우리의 근대화, 현대화의 역사는 미국화, 일본화의 그것에 다름 아니었다. 아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교과서에는 온통 미국에 대한 것만 있었을 뿐 아프리카나 남미는 단 몇 줄에 지나지 않았다.

 

학문 체계 역시 일본과 독일 및 영국 나아가 미국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인문학과 철학은 일본의 시각으로 들여온 서구 세계의 그것이었다. 그동안 적지 않은 이들의 노력으로 우리의 눈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해왔지만, 여전히 주류의 뿌리 깊은 습성은 벗어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때문에 가끔씩 오버하는 일본 학자들을 보게 된다. 자신들의 경험에 비추어 한국의 미래를 예측하거나 아예 규정시켜버리는 이들이다. 그리고 더 우스운 것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우리 학계의 풍토다. 물론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일본 학자 몇몇의 시시껄렁한 잡설을 이외로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코미디다.

 

이는 그동안 우리가 일본에 대해 가져왔던 복잡한 감정에 대한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는 일본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평가해 온 경향이 있다. ‘일본 보다 몇 년 뒤진 셈’‘일본의 속도에 비해 몇 배 빠르다’ 등등 일본의 성장속도, 혹은 후퇴 속도를 기준으로 우리를 평가해왔다. 양 국가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배경과 시스템의 차이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순 무식하게 일본과 비교해 스스로를 평가해 온 측면이 있다.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일본의 세계화, 그리고 우리

 

책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강상중 교수와 일본 신진학자 요시미 순야의 공동 연구서이다. 연구서라 하기엔 조금 다른 측면이 있지만, 현재 일본에 대한 진지한 모색을 함께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냉전 이후 전지구적 차원으로 이뤄졌던 세계화와 그로인해 파생된 갖가지 문제점, 그리고 새로이 나타난 의미 있는 변화에 대해 두 학자는 과거 이론들을 재확인하고 또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일본이라는 절대 단순화할 수 없는 국가를 중심으로 세계화와 새로운 공공공간 탄생의 가능성을 살펴보고 있다.

 

국가의 전통적 기능이 부정되는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몰아치고 있는 새로운 국가주의. 풀뿌리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함께 세계화를 바라보는 문화적·소비적 시각. 새로운 시민운동의 배경과 그 확대 가능성. 네트워크형 미디어의 세계적 보급으로 인해 나타나는 포퓰리즘 정치. 국가와 영토에서 민족과 종교로 전이되는 ‘탈정치’의 정치화. 책은 21세기 새로운 세계화의 움직임 속에 가능한 공공공간의 장을 여러 시각에서 살펴보고 있다. 읽어 내려가기 쉬운 것들은 아니지만, 또 다른 시각과 기존의 시각이 만나는 지점을 발견하는 즐거움은 적지 않다.

 

“역설적으로 요령부득인 유권자의 유동성이야말로 전후의 보수지배가 거둔 성과인 동시에 보수지배의 재편을 재촉하는 결정적인 요인이기도 했다.”

 

“국가로서의 일본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그대로 수도의 국제적 중심성과 당연히 대응해 갈 거라는 상정이 깔려 있었다.”

 

“예컨대 도시 간 경쟁이 세계 규모로 전개되고 있다는 인식 아래, 도쿄에 고도 정보통신기지를 탄생시키고 역외시장이나 컨벤션 시설을 정비하고 국제적 비즈니스 센터를 건설하자는 논의가 그랬고, 도쿄는 지방에 대해 국제화의 선행 모델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논의도 그랬다.”

 

현재 우리 정치의 모습, 그리고 현재 서울의 모습과 비교하며 읽은 구절들이다. 앞서 우리가 여러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모든 것을 비교하는 습성이 있다고 말했는데, 또한 일본을 모방하려는 지금까지의 노력을 언급했는데, 위 문장들은 일본의 노력과 그 뒤 우리의 행태를 비교하게 만들어준다.

 

‘탈정치화’된 정치, 그 이후는?

 

책은 20세기 공간에서의 아메리카주의를 설명하며 시작한다. 그리고 세계화에 대한 여러 정의들을 살펴보고, 새롭게 생성되고 소멸되는 공공공간의 다양한 차원의 모습을 돌아본다. 그 후 일본이라는 국가를 대상으로 국가의 퇴장 뒤에 나타난 새로운 ‘국가 과잉’을 분석한다.

 

경제적 자신감을 바탕으로 시도한 일본의 ‘일본형 복지사회’구상의 좌절. 그 안에서 새로 나타난 내셔널리즘의 강화, 이시하라 신타로를 통해 바라본 ‘세계도시 도쿄’의 모순, 도쿄라는 도시 안에서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민족적 네트워크, 자본과 정보의 월경적 네트워크. 이런 모습은 자연스럽게 지금의 서울, 나아가 한국을 바라보게 만든다. 세계 디자인 도시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소모적인 사업을 펼쳐온 서울, 그 안에서 재개발이란 이름으로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나가도 상관없다는 식의 발상. 디자인이라는 무형의 복지를 위해 소외계층에 대한 지원이라는 유형의 복지를 축소시키는 모습. 이는 결국 보여주기 위한 서울을 위해 정작 서울에 살고 있는 이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모습이다.

 

이어 책은 국민적 미디어의 내러티브, 즉 텔레비전이 일본 국민들에게 끼친 영향력을 분석하고, 가전제품의 등장(3종의 신기)이 일본 내셔널리즘 형성에 어떤 작용을 하였는지 설명한다. 천황가의 일본열도 지배자 자격을 정통화하는 상징이었던 3종의 신기가 가정에 비치된 고가의 가전제품들로 대치된 과정은 국가적 상징이 국민의 사적인 영역으로 분열되어 가는 모습을 상징한다. 이는 일본의 미국적 생활방식 도입, 그리고 민주화에도 직결된다.

 

이는 1980년대 들어 미디어의 탈장소화에 따라 급격히 흔들리게 된다. 전 세계적인 미디어의 변동 속에 일본의 변화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본이라는 사회적 동시성을 약화시켰다는 점에서는 주의가 필요하다. 이는 우리에게도 적용 가능하다. 온 가족의 대화를 차단시켰던 텔레비전은 이제 아예 개인 휴대폰과 각종 휴대기기로 인해 더욱 파편화되어 가고 있다. 전자기기의 발달이 가져온 사회적 동시성의 약화는 가족이나 지역사회가 키워온 공동체적인 시간을 해체시켰을 뿐 아니라, 근대국가가 만들어 놓은 국민적 시각도 그 내실을 분해시키는 작용을 했다. 더군다나 이젠 그야말로 미디어 작용에 대해 각 개인의 신체가 무방비로 노출되어버린 시대에 접어들었다. 가족, 공공성이라는 완충지대가 사라진 것이다.

 

일본 주류 미디어의 역사 왜곡, 시장화 나아가 내셔널리즘과의 협력 문제도 책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정신대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주류 언론이 보여준 이해하기 힘든 방관, 혹은 축소 모습. 그들의 침묵이 의미하는 것은 미디어의 외형적 성장에 따라가지 못하는 그들의 인식 체계를 보여준다. 또한 일본 내부에서 커지고 있는 내셔널리즘에 대한 언론의 동조 혹은 협조관계 구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사실 고이즈미, 아베 등 보수 정치인들이 언론을 이용하여 정치적 자산을 쌓아온 사례를 샐 수 없을 정도다.

 

일본 언론의 보수화는 전지구적인 시장화나 미디어의 다극화·세분화가 반드시 가치의 다원화나 혼성화와 결부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훨씬 자주 내셔널리즘적인 이데올로기의 돌출을 초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미 오랜 전부터 보수일색의 언론이 주류 언론을 장악해왔던 한국의 경우에서 세계화와 언론의 만남은 일본 못지않은 내셔널리즘을 생산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각종 국제 스포츠 경기 때마다 나타나는 천박한 내셔널리즘의 표출은 국민적 정서를 교묘히 이용하는 상업적, 이데올로기적 비즈니스에 다름 아니다. 물론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거기에 특정 종교에 대한 찬미까지 덧붙여져 더 다양한 화려함을 나타내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책은 기존의 국민적 미디어가 동요하는 가운데 국민적 내러티브는 다시 강화되면서도 그 밑바탕에서는 무수한 분열이 잉태되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공공성의 동요, 지금까지 한편으로는 국가나 행정 시스템으로, 또 한편으로는 국민적 미디어인 공공방송이나 전국지로 대표되었던 공공성이 분열하고 유동화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탈장소화하고 비동시화하며 자기편집성을 확대시키는 1980년대 이후의 각종 미디어는 이런 상황의 원인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미디어의 작용을 그들 자신의 일상적인 실천능력 쪽으로 탈환할 경우에는 새로운 공공성의 장을 형성해 가기 위한 조건이 되기도 한다.”

 

우리 역시 이러한 경험을 촛불정국을 통해 절실히 느낀 바 있다. 누가 기자고 누가 시민이랄 것도 없이, 무수히 많은 ‘시각’이 현장을 실시간으로 중계함으로서 보다 많은 동력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힘은 국가적 미디어의 분열 이후 새롭게 나타난 공공의 장이었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비쳐진 것이 사실이다.

 

다원적인 공공성의 가능성 ‘디아스포라’

 

일본형 경제시스템이 붕괴된 이후 이를 뒷받침했던 중간적 공동체가 몰락하는 가운데, 일본의 신우익 내셔널리즘의 부상은 공공공간의 규율을 관철시킬 국가의 재생이 마지막 버팀목이 되고 있는 상황과 관련이 있다. 책은 문화의 핵분열을 촉진하는 세계화에는 특정한 장소와 결합된 문화의 동일성을 허물고 집합적인 기억의 망각을 추진해 나가는 힘이 작동한다며, 따라서 국민적 정체성의 재생을 위해서는 국민의 집합적 기억으로서 역사를 새롭게 발견하거나 날조해내는 일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한다. 이른 바 ‘기억의 내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역사만들기에 한창인 현 이명박 정부의 행태를 봐도 알 수 있다. 느닷없이 건국절을 들고 나오는 그들의 의도는 결국 과거와의 단절과 기억의 날조에 다름 아니다.

 

일본의 세계화를 논함에 있어 재일동포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이들 코리안 디아스포라 문제는 그동안 일본이 애써 외면해온 문제이기에, 또한 우리의 무관심과 외면 속에 만들어진 문제도 함께 있기에 더욱 중요하다. 책은 디아스포라적인 공간이 전지구적으로 이산하면서도 어떤 혼성적인 공동성을 계속 지향하는 이중성을 띠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이중성 속에 디아스포라적인 공간의 포착 곤란성과 가능성이 공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코 단순히 본질주의적인 민족공동체로 회귀하지도 않을 것이고, 전지구적인 무경계화로 해소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경계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새로운 항쟁적 자장을 이중삼중으로 만들어 갈 것이며 ‘민족’이나 ‘국민’은 그런 자장에서 증식해 가는 이산적인 네트워크에 내파되어 갈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경계, 정체성의 매개적이고 항쟁적인 장 속에서 국민국가적 공공공간으로 회수되지 않는, 보다 혼성적인 공공공간의 부상을 읽어내고자 한다.”

 

책은 마지막으로 일본 속의 미국 ‘오키나와’에 주목한다. 오키나와에 미군기지 이전을 두고 벌어진 갈등을 통해 나타난 다양한 공공공간의 발생 가능성을 살펴본 것이다. 미일 동맹과 경제적 이익 등을 계산한 중앙정부의 이전 추진과 생명공동체, 문화적 다양성 과정을 통해 형성된 오키나와 특유의 역동성으로 대표되는 시민차원의 움직임. 이는 정체성의 복합적인 뉘앙스로 나타나고 공공공간의 현재와, 당위적인 미래를 역으로 보여준다.

 

오키나와는 우리의 용산과 겹쳐진다. 물론 역사적 맥락이나 상징성에 있어 오키나와와 용산은 같을 수 없다. 하지만 수도의 한 복판에서 100년이 넘도록 주둔해왔던 용산의 미군이나, 본토의 번영을 위해 ‘말뚝’역할을 해 온 오키나와가 전혀 틀리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아울러 미군 기지의 철수 이후 개발주의에 포위되었다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오키나와는 이태원, 동두천과 같은 문화적 정체성 문제도 포함한다. 오키나와다운 음악이 주목을 받던 시기에도 이미 오키나와 음악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었고, 그 이전 미군 문화에서 파생된 다양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본토로 귀환된 오키나와는 ‘오키나와’적인 음악이 아닌 그냥 ‘공통적인 매력’을 가진 도쿄 중심 음악에 편입되어 버린 모습이다. 하지만 책이 주목하는 것은 오키나와가 ‘야마토 세상’과 ‘미국 세상’의 틈바구니에서 그저 농락당해 오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만만치 않은 저항을 거듭하는 동시에 ‘기지 문화’와 월경적으로 확대되는 이동의 네트워크, 미디어의 유통 시스템 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찬푸루 문화’(두부와 야채를 지져 만든 오키나와의 대표적 전통요리)라고 하는 혼성적인 ‘색다른 풍속의 문화’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이는 오키나와라는 장소의 역학이 정체성의 복합성과 결합되어, 새로운 전지구적/지방적 공공공간을 부상시켜 왔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바람직한 공공공간은 무엇인가

 

말이 많았다.

책은 세계화를 이야기할 때 정치·경제적 측면과 문화·사회적 측면을 단절시킨 채 이뤄질 수 없다는 전제 하에 ‘세계화 속의 권력재편’을 정치의 공간, 도시의 공간, 미디어의 공간, 민족적인 네트워크의 공간으로 나누고 이러한 여러 공간들이 뒤엉켜 싸우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탈정치의 ‘정치화’가 이뤄진 지금 새로운 공공공간의 바람직한 상태는 무엇인가 모색한다. 일본의 세계화 과정, 혹은 경계의 혼용과정을 통해 보편적 세계화가 가능한지, 혹은 세계화 자체의 규정이 가능한지 고민했다. 이 책을 현대일본사회론으로 볼 수도 있는 이유다. 짧은 식견으로 이 책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를 하기엔 부족하다. 다만 세계화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혀 주었다는 점과 일본 사회에 무지한 나에게 조금이나마 일본을 이해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고마운 책이라 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 새로운 공공공간은 타자의 시선을 아우를 수 있는, 또한 계층과 인종, 젠더와 역사를 뛰어넘는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게 결국 나의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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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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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쿠, 잊고 있었다. 진중권이 미학자였다는 사실을. 이 시대의 지식인이자 진보논객으로 때론 날카롭게, 때론 씁쓸한 웃음을 자아내게 세상을 씹어댔던 그가 사실은 예술을 사랑하는 감성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언제나 공부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미학자로서 좋은 책을 내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목표라 말해 온 그에게 조금은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어쩌랴, 세상은 미학자 진중권 보다는 논객 진중권을 원하고 있음을. 살짝 정신을 놓아버린 세상에 그의 자칫 거북스러울 수도 있는 비판과 날선 글들은 그를 더욱 치열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우린 호불호를 떠나 그에게 많은 것을 얻었고, 또 기대하고 있다.

 

때문에 이번 책은 조금은 긴장을 풀고 읽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 재미에 빠져버렸다. 12점의 그림을 자기만의 시각으로 해석하며 진중권은 자신의 내면을 함께 풀어냈다. 획일적으로 규정지어버린 정의를 전복시키는 시각은 역시나 그가 진중권임을 확인시켜주지만, 반대로 그동안 모든 예술을 타인의 시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를 강요했던 시스템에 대한 새삼스러운 촌스러움도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작품의 수용은 그저 작품이 던지는 물음에 답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그의 지적에 동감한다. 진정한 의미의 감상은 작품을 통해 누구도 던지지 않았던 새로운 물음들을 생성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에도 공감한다. 사실 너무나 당연한 소리 아닌가. 내가 보기엔 정말 말도 안 되게 형편없다고 느낀 미술 작품이 실은 수억 원대를 호가하는 예술작품이었음을 알았을 때의 그 유쾌한 당혹감. 쏠쏠한 재미다. 그 작품은 적어도 내겐 쓰레기 아닌가. 결국 중요한 것은 그의 말처럼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보다 문제를 ‘제기’하는 능력, 의제를 처음으로 ‘설정’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미술을 떠나 음악이든 소설이든, 거의 모든 예술 분야에 있어 권위자, 혹은 해석의 선점자가 내놓은 규정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져왔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의 초중고, 나아가 대학 시절을 떠올려 보라. 아니 대입시험을 기억해보라. 어떤 작품에 대한 절대적 해석. 그 해석만을 믿고 암기해야 했던, 결과적으로 예술에 대한 이유 없는 거부감을 일으키게 만들었던 시간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우린 정해진 해석만을 강요당해왔다. 그리고 물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진중권의 ‘푼크툼’이 새로울 것이 전혀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동안 모든 것을 ‘스투디움’의 틀에 따라 해석해오지 않았나. 생각해보니 비단 예술 분야만은 아니었다. 사회가 규정해놓은 수많은 스투디움이 우리를 규정하고 또한 도망칠 수 없게 묶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미술 작품에 창피할 정도로 무지한 입장에서 진중권이 풀어놓는 그림들의 향연은 눈부시다. 그리고 그의 해석이 때론 신선하게 때론 당연한 듯 받아들여진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푼크툼에 매몰될 수는 없다. 나 역시 나만의 푼크툼으로 그림을 바라볼 뿐이다.

 

유쾌한 책읽기의 과정에서 그리 유쾌하지 못한 사회를 바라보게 된다. 규정된 틀 안에서 깨어나기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그 고통을 타인에게 전가한 채 그 이후의 과실만을 공유하려 하는 기생적 인간이 얼마나 많은가. 기실 우리는 기생으로 살아온 것은 아닐까. 스스로 물어보게 된다.

 

종교와 신화와 자본과 욕망. 주술과 과학이 교접해 만들어진 수많은 예술작품 앞에서 인간의 고뇌와 욕망이 함께 날 것으로 드러난다. 그 과정은 인간이 이성을 만들어가는 시간이자 어두움과 고별하는 의식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또 다른 스투디움이 아닌지 갸웃거려진다. 인간의 진보는 절대적 사실인가. 인류의 역사가 과연 진보를 향한 더딘 발걸음 이었을까.

 

수많은 예술가들이 명멸하며 만들어낸 작품들은 모두가 작가의 고뇌와 열정이 담겨있을 것이고, 또한 시대가 녹아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내지 못한 시간들을 작품을 통해 느끼고 공유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해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또 다른 푼크툼과 스투디움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작품과의 고독하고 내밀한 만남. 아직 미술을 통해 느껴보지는 못했지만, 어설프게나마 문학과 음악을 통해 경험한 바 있다. 이 책을 통해 이젠 감히 미술에도 주제 넘는 호기심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아니 애초부터 중요한 것이란 결국 없는지도 모른다. 시공을 초월한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실은 순전히 사기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만 이 시간에 살고 있을 뿐이고, 지금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진중권이 이끌어준 다양한 해석의 향연. 충분히 유쾌했고 의미 있었다. 이젠 중요한 그것이 무엇일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삶에서 예술에서 지금 나에게 다가오는 심연은 무엇인지, 한 줄기 희미한 불빛은 무엇인지. 현미경까지는 안 되더라도 슬며시 돋보기를 집어들어야겠다.

 

어설픈 푼크툼이면 어쩌랴. 적어도 판에 박힌 식상함보다야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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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오세훈의 조용한 혁명은 심히 읽기 싫지만, 그래도 보내준 출판사의 성의를 봐서 한 번을 읽을 생각. 그러나 서평이 그리 아름답지는 않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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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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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광경은 아빠도 텔레비전에서 여러 차례 본 적이 있어. 그때마다 ‘기아는 부드러운 죽음이다. 점차 쇠약해지다가 마지막에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고통 없이 죽는 것이다.’이런 식으로 아빠 자신을 세뇌시키고 있었어. 그런데 그게 아니었단다! 누더기 속에서 일그러진 작은 얼굴들은 그들이 가공할 고통을 겪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어. 작은 몸들이 흐느끼며 오그라들고 있었지. 엄마나 누이들이 때로 숨진 아이의 얼굴에 가만히 수건을 덮었어.”

 

‘이러다 정말 죽는 건가’느낄 정도로 굶어본 경험이 있는가. 감사하게도 난 아직 그런 경험이 없다. 몇 번 기아체험이나 자선행사에서 24시간 금식해 본 적은 있지만, 죽음을 느낄 정도의 굶주림을 겪어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런, 어찌 보면 배부른 퍼포먼스(물론 행사를 기획한 분들의 높은 뜻을 무시하는 건 절대 아니다)가 아닌 삶 자체가 죽음과 몇 번이나 조우해야 하는 이들이 전 세계적으로 수십억이 된다면? 5초 마다 한 명의 어린이가 단지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간다면? 하루에 10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가 굶주림으로 죽어간다면? 당신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가.

 

슬프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지금도 전 세계 6억 명의 어린이들이 1300원이 안 되는 돈으로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온갖 추악한 명분으로 가득 찬 전쟁과 내전으로 굶주리고, 국가를 능가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로 굶주리고, 양극화와 불평등을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는 금융과두지배체제로 인해 굶주린다. 또한 과거 제국주의 열강들이 만들어놓은 식민지 정책으로 충분히 스스로 식량을 생산해 자족할 수 있음에도, 많은 가난한 나라들이 비싼 돈을 지불하고 식량을 수입해 먹는 현실이 어린이들을 굶주리게 한다.

 

책은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으로 활동한 저자가 직접 눈으로 보고 느낀 세계 기근의 현실을 아들에게 설명해주는 형식이다. 왜 현 인류의 2배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식량을 생산하면서도 인구의 절반이 만성적인 기근으로 고통 받아야 하는지를 쉽고도 가슴 아프게 소개한다.

 

우리는 보통 의식주라 말한다. 일단 몸을 가려야 하고 그 다음 먹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소리일 게다. 반면 북은 식의주다. 먹는 문제가 보다 절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단 북 뿐만 아니다. 생명체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을 위한 영양분의 공급이다. 먹는 문제, 이것이 실상 가장 중요한 것이다.

 

매년 700만 명이 기근으로 시력을 잃어가는 세상. 먹을 것이 없어 자식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어머니들. 국제기구의 지원 식량을 탈취해 그것으로 다시 폭리를 취하는 군부와 독재정권. 기업의 이윤을 위해 한 나라의 기근을 조장하고 방치하는 다국적 기업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느낄 것이다. 여전히 세상은 온전히 돌아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기근의 원인은 다양하다. 전쟁과 정치적 무질서, 도시화와 식민지 정책의 결과, 금융과두지배의 악몽, 거대 기업들의 횡포. 환경파괴의 영향까지. 다양한 이유로 인해 세계의 아이들은 오늘도,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고 있다.

 

다국적기업 네슬레의 횡포로 굶어죽어야 했던 칠레의 어린이들, 젊은 개혁가 상카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시 처참한 기근의 늪으로 빠져들고 만 부르키나파소, 미국이 주도한 전쟁과 경제제재로 인해 무수히 많은 어린이들을 묻어야 했던 이라크까지. 저자가 말하는 세계 기근의 현실은 처참하기만 하다. 더욱 무참하고 치가 떨리는 것은 이러한 기근이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인위적이라는 사실이다. 거대기업,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고의적 행동으로 초래된 기근. 이는 기근이 자연재해가 아니라 고의적 방치 혹은 집단 학살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책은 북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소수의 권력자들이 무모한 핵개발을 추진하기 위해 많은 인민들을 굶주림에 죽어가도록 방치했다는 비판이다. 부족하나마 북을 공부한 사람으로 반은 타당하고 반은 재론의 여지가 있다고 보이지만, 인민들의 삶이 매우 힘든 상황이라는 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다. 실재 북의 인민들은 지금도 먹는 문제로 힘겨워하고 있다. 권력자들이 핵을 만들게 된 근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봐야 하지만, 그렇다고 인민들의 굶주림이 정당화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아이티 대지진으로 많은 국가들이 구호활동에 나섰다. 우리도 구호물자와 인원을 보냈다. 당연한 조치고 매우 잘 한 일이다. 하지만 강대국들의 본심은 이내 드러나고 있다. 대규모 군대를 파병해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아이티 재건을 위해, 즉 ‘새로운 투자’를 위해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아니 이미 어느 정도 파이는 분배된 상태다. 이제 아이티는 또 다시 천문학적인 부채를 짊어지게 될 것이고, 비참한 가난의 늪에 빠져들 것이다.

 

해마다 선진국의 자국 농업보호정책으로 생산되는 식량의 양은 엄청나다. 그 양이면 아프리카를 비롯해 세계 전 지역의 어린이들을 살릴 수 있다. 하루에 1300원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가야 하는 6억 명의 어린이들에게 따뜻한 밥을, 빵을 전해줄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외면한다. 오로지 이윤의 극대화라는 그들의 확고한 철학 때문이다.

 

전 세계적인 기근을 막는 방법, 이는 결국 타인의 고통에 눈감지 않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저자의 확신에 찬 말이다. 언뜻 공허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용기는 결코 미약하지 않다. 당신의 입으로 들어가는 그 무엇이 실은 다른 어린이에게 돌아갈 몫이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용기는 희망을 만들 수 있다.

 

그 용기를 키워나갈 수 있는 첫 걸음을 책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권유하고 있다. 쉽게 거절할 수 없는 권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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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행복하니? - 지구촌 친구들의 인권 이야기
세이브더칠드런 지음, 설배환 옮김 / 검둥소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이름 그대로 전 세계의 아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세이브더칠드런이 세계 각국에서 펼치고 있는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그 안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주택, 안전, 건강, 교육, 목소리 등 아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다섯 가지 주제를 통해 어린이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을 보여준다.


사실 이런 책을 읽는 것이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변태도 아니고, 고통을 즐기는 습성도 없다. 사실 난 자타가 공인하는 쾌락주의자 아닌가.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부러 책을 잡는다. 염치없는 놈이 되기 싫어 책을 잡는다. 그 이유가 전부다.


2000년부터 2005년까지만 해도 2000만 명의 어린들이 어른들의 전쟁 때문에 집을 잃었다.

1300만 명의 어린이들이 ‘집 없는 떠돌이’로 살고 있다. 올 해까지 에이즈로 부모 중 한쪽 혹은 양쪽을 다 잃게 될 15세 미만의 어린이가 4400만 명에 이른다. 전 세계적으로 자연재해와 전쟁으로 피해를 입는 사람들 중 절반이 어린이다. 전 세계 어린이 노동 인구 중 약 3억5000만 명 가운데 절반이 매우 위험한 일에 종사한다. 전 세계 6억 명의 어린이가 하루 1300원도 안 되는 돈으로 살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200만 명의 어린이들이 전쟁으로 죽고, 약 450만 명이 다쳤다. 전 세계에서 깨끗한 물이 없어서 8초마다 한 명꼴로 어린이가 죽는다. 아프리카에서는 매일 3000명의 어린이들이 말라리아로 죽는다. 매일 8500명의 어린이들이 HIV에 감염된다. 700만 명의 어린이들이 난민 신분으로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다. 1분에 한 명꼴로 어린이들이 에이즈로 죽는다. 1분에 여섯 명꼴로 어린이들이 HIV에 감염된다. 이미 15세 미만의 어린이 1300만 명이 에이즈로 한쪽 혹은 양쪽 부모를 잃었다. 1억 1000만 명의 어린이들이 기본적인 학교 교육도 받지 못하고 있다. 그 중 절반 이상이 여자 어린이들이다.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고 불평할 일이 아니다. 불공평한 것이 아니다. 불의한 것이다. ·아이들을 지독한 가난과 질병의 늪에 빠뜨려놓고 다만 불행이라고 말할 순 없다. 어린이는 가족들과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보금자리에서 건강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어린이는 부상이나 학대, 폭력, 방치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어린이는 자신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도록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어린이는 자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으며, 친구를 만나고 단체를 만들거나 가입할 권리가 있다.


과분한 주장인가? 전 세계적으로 어린이는 동등하게 대접받고 보호되어야 한다. 미국의 어린이나 에티오피아의 어린이나 모두 행복할 권리가 있다. 아이티의 어린이도 일본의 어린이도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줘야 하고, 추우면 따뜻하게 안아줘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탐욕과 이기심. 그리고 돈 때문이다.


하루 종일 일해야 고작 몇 백 원을 벌 수 있는 아이들은 그 몇 십 배, 백배로 팔려나가는 축구공을 만들고, 다이아몬드를 가공하는 데 동원되는 아이들은 곧 눈을 잃게 된다. 마약을 강제로 투여 받은 채 전쟁터에 끌려간 아이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살육의 기억에서 영영 헤어 나오지 못한다. 이 모든 죄악을 어른들이 저지르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아이들이 더 이상 부모 형제가 총에 맞아 죽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인도의, 파키스탄의 아이들이 더 이상 살인적인 노동으로 몸과 마음이 무너지지 않아도 되는 세상. 아프리카 대륙의 모든 아이들이 더 이상 굶주림과 말라리아와 에이즈에 죽어나가지 않아도 되는 세상. 그런 세상은 의외로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다.


우리가 사람임을, 자각하는 순간 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 하찮은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아이들의 귀중한 생명을 먼저 챙길 수 있는 자각. 아이들을 저렴한 노동력이 아닌 생명으로 바라볼 수 있는 상식. 이러한 것들이 모이면 분명 우리는 수많은 아이들을 구할 수 있다.


어떤 분들은 말한다. 우리나라에도 굶고 못사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국제 원조를 하냐고. 북을 돕냐고. 옳은 말씀이다. 때문에 제안한다. 국내에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어린이들을 돕는 프로그램이 많으니 먼저 가입하시라고. 아울러 그 다음에 여력이 되신다면 월드비전이나 세이브더칠드런, 유니세프 등을 통해 북을 비롯한 전 세계 아이들을 보듬어 보시라고. 술 한 번 안마시고, 골프 한 번 쉬어주고, 백화점이나 스킨케어숍 한 번 안 가시면 몇 명의 아이들을 구할 수 있는지, 일단 아신다면….


당신은 놀라운 기적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먼저 경험한 이로써 보장한다.


책은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어른들도 당연히 읽어볼 만하다. 어쩌면 먼저 읽어야 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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