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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의 원근법 - 새로운 공공공간을 찾아서 ㅣ 이산의 책 28
강상중.요시미 슌야 지음, 김경원.임성모 옮김 / 이산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그동안 일본이 우리의 롤 모델, 혹은 벤치마킹 대상이 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대다수 국민적 정서에 편승해 가끔씩 일본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기는 하지만, 사실 우리는 일본을 따라가야 할 극복의 대상, 경쟁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때문에 서울에서 오래 산 이들이 도쿄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그다지 다양하지 못하다. 조금 더 세련되어 보이는 서울, 조금 더 깨끗해 보이는 서울에 다름 아니다. 사실 그것마저 근거가 불명확한 변형된 옥시덴탈리즘이긴 하다. 사실 도쿄도 그리 깨끗한 도시는 아니다.
전쟁 직후 우리는 잿더미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고, 오랫동안 우리를 지배했던 일본 문화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주로 문화적, 정서적 차원의 쇼였을 뿐, 사실 우리는 일본과 같아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우리의 근대화, 현대화의 역사는 미국화, 일본화의 그것에 다름 아니었다. 아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교과서에는 온통 미국에 대한 것만 있었을 뿐 아프리카나 남미는 단 몇 줄에 지나지 않았다.
학문 체계 역시 일본과 독일 및 영국 나아가 미국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인문학과 철학은 일본의 시각으로 들여온 서구 세계의 그것이었다. 그동안 적지 않은 이들의 노력으로 우리의 눈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해왔지만, 여전히 주류의 뿌리 깊은 습성은 벗어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때문에 가끔씩 오버하는 일본 학자들을 보게 된다. 자신들의 경험에 비추어 한국의 미래를 예측하거나 아예 규정시켜버리는 이들이다. 그리고 더 우스운 것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우리 학계의 풍토다. 물론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일본 학자 몇몇의 시시껄렁한 잡설을 이외로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코미디다.
이는 그동안 우리가 일본에 대해 가져왔던 복잡한 감정에 대한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는 일본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평가해 온 경향이 있다. ‘일본 보다 몇 년 뒤진 셈’‘일본의 속도에 비해 몇 배 빠르다’ 등등 일본의 성장속도, 혹은 후퇴 속도를 기준으로 우리를 평가해왔다. 양 국가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배경과 시스템의 차이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순 무식하게 일본과 비교해 스스로를 평가해 온 측면이 있다.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일본의 세계화, 그리고 우리
책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강상중 교수와 일본 신진학자 요시미 순야의 공동 연구서이다. 연구서라 하기엔 조금 다른 측면이 있지만, 현재 일본에 대한 진지한 모색을 함께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냉전 이후 전지구적 차원으로 이뤄졌던 세계화와 그로인해 파생된 갖가지 문제점, 그리고 새로이 나타난 의미 있는 변화에 대해 두 학자는 과거 이론들을 재확인하고 또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일본이라는 절대 단순화할 수 없는 국가를 중심으로 세계화와 새로운 공공공간 탄생의 가능성을 살펴보고 있다.
국가의 전통적 기능이 부정되는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몰아치고 있는 새로운 국가주의. 풀뿌리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함께 세계화를 바라보는 문화적·소비적 시각. 새로운 시민운동의 배경과 그 확대 가능성. 네트워크형 미디어의 세계적 보급으로 인해 나타나는 포퓰리즘 정치. 국가와 영토에서 민족과 종교로 전이되는 ‘탈정치’의 정치화. 책은 21세기 새로운 세계화의 움직임 속에 가능한 공공공간의 장을 여러 시각에서 살펴보고 있다. 읽어 내려가기 쉬운 것들은 아니지만, 또 다른 시각과 기존의 시각이 만나는 지점을 발견하는 즐거움은 적지 않다.
“역설적으로 요령부득인 유권자의 유동성이야말로 전후의 보수지배가 거둔 성과인 동시에 보수지배의 재편을 재촉하는 결정적인 요인이기도 했다.”
“국가로서의 일본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그대로 수도의 국제적 중심성과 당연히 대응해 갈 거라는 상정이 깔려 있었다.”
“예컨대 도시 간 경쟁이 세계 규모로 전개되고 있다는 인식 아래, 도쿄에 고도 정보통신기지를 탄생시키고 역외시장이나 컨벤션 시설을 정비하고 국제적 비즈니스 센터를 건설하자는 논의가 그랬고, 도쿄는 지방에 대해 국제화의 선행 모델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논의도 그랬다.”
현재 우리 정치의 모습, 그리고 현재 서울의 모습과 비교하며 읽은 구절들이다. 앞서 우리가 여러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모든 것을 비교하는 습성이 있다고 말했는데, 또한 일본을 모방하려는 지금까지의 노력을 언급했는데, 위 문장들은 일본의 노력과 그 뒤 우리의 행태를 비교하게 만들어준다.
‘탈정치화’된 정치, 그 이후는?
책은 20세기 공간에서의 아메리카주의를 설명하며 시작한다. 그리고 세계화에 대한 여러 정의들을 살펴보고, 새롭게 생성되고 소멸되는 공공공간의 다양한 차원의 모습을 돌아본다. 그 후 일본이라는 국가를 대상으로 국가의 퇴장 뒤에 나타난 새로운 ‘국가 과잉’을 분석한다.
경제적 자신감을 바탕으로 시도한 일본의 ‘일본형 복지사회’구상의 좌절. 그 안에서 새로 나타난 내셔널리즘의 강화, 이시하라 신타로를 통해 바라본 ‘세계도시 도쿄’의 모순, 도쿄라는 도시 안에서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민족적 네트워크, 자본과 정보의 월경적 네트워크. 이런 모습은 자연스럽게 지금의 서울, 나아가 한국을 바라보게 만든다. 세계 디자인 도시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소모적인 사업을 펼쳐온 서울, 그 안에서 재개발이란 이름으로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나가도 상관없다는 식의 발상. 디자인이라는 무형의 복지를 위해 소외계층에 대한 지원이라는 유형의 복지를 축소시키는 모습. 이는 결국 보여주기 위한 서울을 위해 정작 서울에 살고 있는 이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모습이다.
이어 책은 국민적 미디어의 내러티브, 즉 텔레비전이 일본 국민들에게 끼친 영향력을 분석하고, 가전제품의 등장(3종의 신기)이 일본 내셔널리즘 형성에 어떤 작용을 하였는지 설명한다. 천황가의 일본열도 지배자 자격을 정통화하는 상징이었던 3종의 신기가 가정에 비치된 고가의 가전제품들로 대치된 과정은 국가적 상징이 국민의 사적인 영역으로 분열되어 가는 모습을 상징한다. 이는 일본의 미국적 생활방식 도입, 그리고 민주화에도 직결된다.
이는 1980년대 들어 미디어의 탈장소화에 따라 급격히 흔들리게 된다. 전 세계적인 미디어의 변동 속에 일본의 변화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본이라는 사회적 동시성을 약화시켰다는 점에서는 주의가 필요하다. 이는 우리에게도 적용 가능하다. 온 가족의 대화를 차단시켰던 텔레비전은 이제 아예 개인 휴대폰과 각종 휴대기기로 인해 더욱 파편화되어 가고 있다. 전자기기의 발달이 가져온 사회적 동시성의 약화는 가족이나 지역사회가 키워온 공동체적인 시간을 해체시켰을 뿐 아니라, 근대국가가 만들어 놓은 국민적 시각도 그 내실을 분해시키는 작용을 했다. 더군다나 이젠 그야말로 미디어 작용에 대해 각 개인의 신체가 무방비로 노출되어버린 시대에 접어들었다. 가족, 공공성이라는 완충지대가 사라진 것이다.
일본 주류 미디어의 역사 왜곡, 시장화 나아가 내셔널리즘과의 협력 문제도 책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정신대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주류 언론이 보여준 이해하기 힘든 방관, 혹은 축소 모습. 그들의 침묵이 의미하는 것은 미디어의 외형적 성장에 따라가지 못하는 그들의 인식 체계를 보여준다. 또한 일본 내부에서 커지고 있는 내셔널리즘에 대한 언론의 동조 혹은 협조관계 구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사실 고이즈미, 아베 등 보수 정치인들이 언론을 이용하여 정치적 자산을 쌓아온 사례를 샐 수 없을 정도다.
일본 언론의 보수화는 전지구적인 시장화나 미디어의 다극화·세분화가 반드시 가치의 다원화나 혼성화와 결부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훨씬 자주 내셔널리즘적인 이데올로기의 돌출을 초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미 오랜 전부터 보수일색의 언론이 주류 언론을 장악해왔던 한국의 경우에서 세계화와 언론의 만남은 일본 못지않은 내셔널리즘을 생산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각종 국제 스포츠 경기 때마다 나타나는 천박한 내셔널리즘의 표출은 국민적 정서를 교묘히 이용하는 상업적, 이데올로기적 비즈니스에 다름 아니다. 물론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거기에 특정 종교에 대한 찬미까지 덧붙여져 더 다양한 화려함을 나타내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책은 기존의 국민적 미디어가 동요하는 가운데 국민적 내러티브는 다시 강화되면서도 그 밑바탕에서는 무수한 분열이 잉태되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공공성의 동요, 지금까지 한편으로는 국가나 행정 시스템으로, 또 한편으로는 국민적 미디어인 공공방송이나 전국지로 대표되었던 공공성이 분열하고 유동화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탈장소화하고 비동시화하며 자기편집성을 확대시키는 1980년대 이후의 각종 미디어는 이런 상황의 원인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미디어의 작용을 그들 자신의 일상적인 실천능력 쪽으로 탈환할 경우에는 새로운 공공성의 장을 형성해 가기 위한 조건이 되기도 한다.”
우리 역시 이러한 경험을 촛불정국을 통해 절실히 느낀 바 있다. 누가 기자고 누가 시민이랄 것도 없이, 무수히 많은 ‘시각’이 현장을 실시간으로 중계함으로서 보다 많은 동력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힘은 국가적 미디어의 분열 이후 새롭게 나타난 공공의 장이었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비쳐진 것이 사실이다.
다원적인 공공성의 가능성 ‘디아스포라’
일본형 경제시스템이 붕괴된 이후 이를 뒷받침했던 중간적 공동체가 몰락하는 가운데, 일본의 신우익 내셔널리즘의 부상은 공공공간의 규율을 관철시킬 국가의 재생이 마지막 버팀목이 되고 있는 상황과 관련이 있다. 책은 문화의 핵분열을 촉진하는 세계화에는 특정한 장소와 결합된 문화의 동일성을 허물고 집합적인 기억의 망각을 추진해 나가는 힘이 작동한다며, 따라서 국민적 정체성의 재생을 위해서는 국민의 집합적 기억으로서 역사를 새롭게 발견하거나 날조해내는 일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한다. 이른 바 ‘기억의 내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역사만들기에 한창인 현 이명박 정부의 행태를 봐도 알 수 있다. 느닷없이 건국절을 들고 나오는 그들의 의도는 결국 과거와의 단절과 기억의 날조에 다름 아니다.
일본의 세계화를 논함에 있어 재일동포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이들 코리안 디아스포라 문제는 그동안 일본이 애써 외면해온 문제이기에, 또한 우리의 무관심과 외면 속에 만들어진 문제도 함께 있기에 더욱 중요하다. 책은 디아스포라적인 공간이 전지구적으로 이산하면서도 어떤 혼성적인 공동성을 계속 지향하는 이중성을 띠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이중성 속에 디아스포라적인 공간의 포착 곤란성과 가능성이 공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코 단순히 본질주의적인 민족공동체로 회귀하지도 않을 것이고, 전지구적인 무경계화로 해소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경계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새로운 항쟁적 자장을 이중삼중으로 만들어 갈 것이며 ‘민족’이나 ‘국민’은 그런 자장에서 증식해 가는 이산적인 네트워크에 내파되어 갈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경계, 정체성의 매개적이고 항쟁적인 장 속에서 국민국가적 공공공간으로 회수되지 않는, 보다 혼성적인 공공공간의 부상을 읽어내고자 한다.”
책은 마지막으로 일본 속의 미국 ‘오키나와’에 주목한다. 오키나와에 미군기지 이전을 두고 벌어진 갈등을 통해 나타난 다양한 공공공간의 발생 가능성을 살펴본 것이다. 미일 동맹과 경제적 이익 등을 계산한 중앙정부의 이전 추진과 생명공동체, 문화적 다양성 과정을 통해 형성된 오키나와 특유의 역동성으로 대표되는 시민차원의 움직임. 이는 정체성의 복합적인 뉘앙스로 나타나고 공공공간의 현재와, 당위적인 미래를 역으로 보여준다.
오키나와는 우리의 용산과 겹쳐진다. 물론 역사적 맥락이나 상징성에 있어 오키나와와 용산은 같을 수 없다. 하지만 수도의 한 복판에서 100년이 넘도록 주둔해왔던 용산의 미군이나, 본토의 번영을 위해 ‘말뚝’역할을 해 온 오키나와가 전혀 틀리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아울러 미군 기지의 철수 이후 개발주의에 포위되었다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오키나와는 이태원, 동두천과 같은 문화적 정체성 문제도 포함한다. 오키나와다운 음악이 주목을 받던 시기에도 이미 오키나와 음악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었고, 그 이전 미군 문화에서 파생된 다양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본토로 귀환된 오키나와는 ‘오키나와’적인 음악이 아닌 그냥 ‘공통적인 매력’을 가진 도쿄 중심 음악에 편입되어 버린 모습이다. 하지만 책이 주목하는 것은 오키나와가 ‘야마토 세상’과 ‘미국 세상’의 틈바구니에서 그저 농락당해 오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만만치 않은 저항을 거듭하는 동시에 ‘기지 문화’와 월경적으로 확대되는 이동의 네트워크, 미디어의 유통 시스템 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찬푸루 문화’(두부와 야채를 지져 만든 오키나와의 대표적 전통요리)라고 하는 혼성적인 ‘색다른 풍속의 문화’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이는 오키나와라는 장소의 역학이 정체성의 복합성과 결합되어, 새로운 전지구적/지방적 공공공간을 부상시켜 왔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바람직한 공공공간은 무엇인가
말이 많았다.
책은 세계화를 이야기할 때 정치·경제적 측면과 문화·사회적 측면을 단절시킨 채 이뤄질 수 없다는 전제 하에 ‘세계화 속의 권력재편’을 정치의 공간, 도시의 공간, 미디어의 공간, 민족적인 네트워크의 공간으로 나누고 이러한 여러 공간들이 뒤엉켜 싸우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탈정치의 ‘정치화’가 이뤄진 지금 새로운 공공공간의 바람직한 상태는 무엇인가 모색한다. 일본의 세계화 과정, 혹은 경계의 혼용과정을 통해 보편적 세계화가 가능한지, 혹은 세계화 자체의 규정이 가능한지 고민했다. 이 책을 현대일본사회론으로 볼 수도 있는 이유다. 짧은 식견으로 이 책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를 하기엔 부족하다. 다만 세계화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혀 주었다는 점과 일본 사회에 무지한 나에게 조금이나마 일본을 이해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고마운 책이라 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 새로운 공공공간은 타자의 시선을 아우를 수 있는, 또한 계층과 인종, 젠더와 역사를 뛰어넘는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게 결국 나의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