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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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쿠, 잊고 있었다. 진중권이 미학자였다는 사실을. 이 시대의 지식인이자 진보논객으로 때론 날카롭게, 때론 씁쓸한 웃음을 자아내게 세상을 씹어댔던 그가 사실은 예술을 사랑하는 감성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언제나 공부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미학자로서 좋은 책을 내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목표라 말해 온 그에게 조금은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어쩌랴, 세상은 미학자 진중권 보다는 논객 진중권을 원하고 있음을. 살짝 정신을 놓아버린 세상에 그의 자칫 거북스러울 수도 있는 비판과 날선 글들은 그를 더욱 치열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우린 호불호를 떠나 그에게 많은 것을 얻었고, 또 기대하고 있다.

 

때문에 이번 책은 조금은 긴장을 풀고 읽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 재미에 빠져버렸다. 12점의 그림을 자기만의 시각으로 해석하며 진중권은 자신의 내면을 함께 풀어냈다. 획일적으로 규정지어버린 정의를 전복시키는 시각은 역시나 그가 진중권임을 확인시켜주지만, 반대로 그동안 모든 예술을 타인의 시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를 강요했던 시스템에 대한 새삼스러운 촌스러움도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작품의 수용은 그저 작품이 던지는 물음에 답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그의 지적에 동감한다. 진정한 의미의 감상은 작품을 통해 누구도 던지지 않았던 새로운 물음들을 생성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에도 공감한다. 사실 너무나 당연한 소리 아닌가. 내가 보기엔 정말 말도 안 되게 형편없다고 느낀 미술 작품이 실은 수억 원대를 호가하는 예술작품이었음을 알았을 때의 그 유쾌한 당혹감. 쏠쏠한 재미다. 그 작품은 적어도 내겐 쓰레기 아닌가. 결국 중요한 것은 그의 말처럼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보다 문제를 ‘제기’하는 능력, 의제를 처음으로 ‘설정’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미술을 떠나 음악이든 소설이든, 거의 모든 예술 분야에 있어 권위자, 혹은 해석의 선점자가 내놓은 규정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져왔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의 초중고, 나아가 대학 시절을 떠올려 보라. 아니 대입시험을 기억해보라. 어떤 작품에 대한 절대적 해석. 그 해석만을 믿고 암기해야 했던, 결과적으로 예술에 대한 이유 없는 거부감을 일으키게 만들었던 시간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우린 정해진 해석만을 강요당해왔다. 그리고 물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진중권의 ‘푼크툼’이 새로울 것이 전혀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동안 모든 것을 ‘스투디움’의 틀에 따라 해석해오지 않았나. 생각해보니 비단 예술 분야만은 아니었다. 사회가 규정해놓은 수많은 스투디움이 우리를 규정하고 또한 도망칠 수 없게 묶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미술 작품에 창피할 정도로 무지한 입장에서 진중권이 풀어놓는 그림들의 향연은 눈부시다. 그리고 그의 해석이 때론 신선하게 때론 당연한 듯 받아들여진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푼크툼에 매몰될 수는 없다. 나 역시 나만의 푼크툼으로 그림을 바라볼 뿐이다.

 

유쾌한 책읽기의 과정에서 그리 유쾌하지 못한 사회를 바라보게 된다. 규정된 틀 안에서 깨어나기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그 고통을 타인에게 전가한 채 그 이후의 과실만을 공유하려 하는 기생적 인간이 얼마나 많은가. 기실 우리는 기생으로 살아온 것은 아닐까. 스스로 물어보게 된다.

 

종교와 신화와 자본과 욕망. 주술과 과학이 교접해 만들어진 수많은 예술작품 앞에서 인간의 고뇌와 욕망이 함께 날 것으로 드러난다. 그 과정은 인간이 이성을 만들어가는 시간이자 어두움과 고별하는 의식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또 다른 스투디움이 아닌지 갸웃거려진다. 인간의 진보는 절대적 사실인가. 인류의 역사가 과연 진보를 향한 더딘 발걸음 이었을까.

 

수많은 예술가들이 명멸하며 만들어낸 작품들은 모두가 작가의 고뇌와 열정이 담겨있을 것이고, 또한 시대가 녹아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내지 못한 시간들을 작품을 통해 느끼고 공유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해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또 다른 푼크툼과 스투디움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작품과의 고독하고 내밀한 만남. 아직 미술을 통해 느껴보지는 못했지만, 어설프게나마 문학과 음악을 통해 경험한 바 있다. 이 책을 통해 이젠 감히 미술에도 주제 넘는 호기심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아니 애초부터 중요한 것이란 결국 없는지도 모른다. 시공을 초월한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실은 순전히 사기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만 이 시간에 살고 있을 뿐이고, 지금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진중권이 이끌어준 다양한 해석의 향연. 충분히 유쾌했고 의미 있었다. 이젠 중요한 그것이 무엇일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삶에서 예술에서 지금 나에게 다가오는 심연은 무엇인지, 한 줄기 희미한 불빛은 무엇인지. 현미경까지는 안 되더라도 슬며시 돋보기를 집어들어야겠다.

 

어설픈 푼크툼이면 어쩌랴. 적어도 판에 박힌 식상함보다야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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